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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戰後처리'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 원문보기

한일관계사연구 no.36 2010년, pp.231 - 261  

민덕기 (청주대학교)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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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으로 일본은 조선의 ‘불구대천지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줄곧 通信使 파견을 요청해 오자 조선은 마침내 ‘2件’을 제시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강화 요청 서한을 조선에 먼저 보내라는 것이고(先爲致書), 왜란 중에 조선 왕릉을 파헤친 일본군을 압송하라는 것이었다(犯陵賊縛送).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남겨놓은 대외적 과제를 청산하고 막부의 권위를 높여줄 유일한 나라로서 조선을 선택한 때문인지 대마도를 통하여 ‘선위치서’ 요구마저 이행하고 있다. 이미 明과의 국교 회복 전망은 절망시 되어 있었다.조선은 이에야스의 ‘선위치서’ 이행을 계기로 講和로 전환하였다.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침략행위를 ‘前代非’로서 서한에서 사죄하며 反히데요시 노선을 명확히 하고 있었고, ‘敵禮’(대등) 외교를 지향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명나라에게 무로마치 시대 일본은 10年을 주기로 조공을 행하는 나라였으나, 조공사절이 벌인 영파의 난(1523년)으로 조공무역은 더 한층 제한되고 말았다. 그런 일본으로부터 다시 임진왜란의 쓴 경험을 맛보게 되자 명나라는, 히데요시 책봉에서 보이는 것처럼 책봉은 하되 조공은 불허한다는 비정상적인 책봉을 내리게 된다. 이윽고 히데요시가 정유재란마저 일으키자 명나라의 모든 對日외교 의지는 내던져지기에 이른다.임진왜란기에 이르러 왜구가 종식되고 조선과 독자적으로 교섭했던 ‘巨酋’도 사라졌다. 통합체로서 ‘일본’이 등장한 것이다. 이에 ‘武威’의 일본이 借重과 連帶의 대상으로 부상한다. 이른바 누루하치 세력이 후금에서 淸으로 확대되면서 조선의 목을 더 옥죄어오자 조선은 ‘奴酋’ ‘北虜’에 대한 굴욕에 대항하기 위해 ‘倭奴’ ‘南倭’를 차중하고, 나아가서는 連帶하여 以倭制淸을 꾀한다. 한국사의 전개에 일본이 차중과 연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 시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일본은 임진왜란을 통해 명나라의 군사적 능력의 정도와 自國방어 위주의 제한적 국방 전략을 察知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엔 유구 방면으로 만회하려 하지 않았을까? 1609년 사츠마(薩摩)藩을 통한 유구침략과 복속이 그것이다. 그러나 유구는 明나라가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지원한 것처럼 유사시 유구도 군사적으로 보호해 줄 것으로 믿어마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이 예상한대로 유구 침략과 복속에 명나라의 군사적 간섭은 전혀 행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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