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정계입비 후 "왜 160여 년이 지난 후에 국경분쟁이 발생하게 되었을까?" 라는 하는 의문점에서 출발하여 국경분쟁의 쟁점이 되었던 '토문강'의 인식 변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백두산 정계비(1712년)를 둘러싼 조 · 청간의 국경분쟁의 핵심은 정계비 비문상의 "동위토문"에 대한 해석에 귀결되어진다. 즉 비문상의 "토문"은 어느 강이며, 또 토문강과 두만강은 별개의 강인가, 아니면 동일한 강인가 하는 문제이다. 정계에 임하였을 때 조선은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 이남지역을 우리의 강역으로 확보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조선은 영고탑 회귀설로 인한 대청위기의식 속에서 정계에 소극적으로 임하였으며, 압록강과 두만강의 수원을 확인하는 일은 청이 주도적으로 처리하였다. 청의 차사원 목극등은 조선측 책임자의 동행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백두산 정상 부근을 답사한 후 두만강이 아닌 토문강의 수원에 정계비를 세웠다. 정계 당시에는 조선이나 청 모두 토문강과 두만강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였다. 정계비에 양국의 국경은 "동위토문" 이라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토문'이 '두만강'이라 하더라도 당시 조선은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본 것이다. 정계 시 조선이나 청에서도 백두산 일대에 대한 지리정보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문강과 두만강을 같은 강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계 이후 함경도 북변 지역의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백두산과 두만강 상류지역에 대한 정확한 지리정보가 축적되었다. 이것은 백두산 및 고구려 · 발해의 구강역에 대해 사상적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며, 백두산을 조선 산들의 종산으로 인정하고 정부에서 치제하도록 하였다. 확대된 북방영토 의식은 정계비에 새겨진 토문강과 두만강은 엄연히 다른 것이므로 두만강은 국경이 될 수 없고, 그 이북지역까지 조선의 영토라는 인식을 널리 확산시켰다. 이러한 토문강 인식의 변화는 19세기 후반 집중적으로 진행된 조선인들의 월강경작과 이주, 간도 영유권을 둘러싼 조 · 청간 갈등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였는가의 문제와 토문과 두만이 별개의 것이라는 문제는 서로 관련이 없다. '두만'과 구별되는 '토문'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은 인식의 문제가 아니고 사실의 문제이며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
본 논문은 정계입비 후 "왜 160여 년이 지난 후에 국경분쟁이 발생하게 되었을까?" 라는 하는 의문점에서 출발하여 국경분쟁의 쟁점이 되었던 '토문강'의 인식 변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백두산 정계비(1712년)를 둘러싼 조 · 청간의 국경분쟁의 핵심은 정계비 비문상의 "동위토문"에 대한 해석에 귀결되어진다. 즉 비문상의 "토문"은 어느 강이며, 또 토문강과 두만강은 별개의 강인가, 아니면 동일한 강인가 하는 문제이다. 정계에 임하였을 때 조선은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 이남지역을 우리의 강역으로 확보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조선은 영고탑 회귀설로 인한 대청위기의식 속에서 정계에 소극적으로 임하였으며, 압록강과 두만강의 수원을 확인하는 일은 청이 주도적으로 처리하였다. 청의 차사원 목극등은 조선측 책임자의 동행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백두산 정상 부근을 답사한 후 두만강이 아닌 토문강의 수원에 정계비를 세웠다. 정계 당시에는 조선이나 청 모두 토문강과 두만강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였다. 정계비에 양국의 국경은 "동위토문" 이라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토문'이 '두만강'이라 하더라도 당시 조선은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본 것이다. 정계 시 조선이나 청에서도 백두산 일대에 대한 지리정보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문강과 두만강을 같은 강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계 이후 함경도 북변 지역의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백두산과 두만강 상류지역에 대한 정확한 지리정보가 축적되었다. 이것은 백두산 및 고구려 · 발해의 구강역에 대해 사상적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며, 백두산을 조선 산들의 종산으로 인정하고 정부에서 치제하도록 하였다. 확대된 북방영토 의식은 정계비에 새겨진 토문강과 두만강은 엄연히 다른 것이므로 두만강은 국경이 될 수 없고, 그 이북지역까지 조선의 영토라는 인식을 널리 확산시켰다. 이러한 토문강 인식의 변화는 19세기 후반 집중적으로 진행된 조선인들의 월강경작과 이주, 간도 영유권을 둘러싼 조 · 청간 갈등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였는가의 문제와 토문과 두만이 별개의 것이라는 문제는 서로 관련이 없다. '두만'과 구별되는 '토문'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은 인식의 문제가 아니고 사실의 문제이며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해도 그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정계입비 후 "왜 160여 년이 지난 후에 국경분쟁이 발생하게 되었을까?" 라는 하는 의문점에서 출발하여 국경분쟁의 쟁점이 되었던 '토문강'의 인식 변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백두산 정계비(1712년)를 둘러싼 조 · 청간의 국경분쟁의 핵심은 정계비 비문상의 "동위토문"에 대한 해석에 귀결되어진다. 즉 비문상의 "토문"은 어느 강이며, 또 토문강과 두만강은 별개의 강인가, 아니면 동일한 강인가 하는 문제이다. 정계에 임하였을 때 조선은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 이남지역을 우리의 강역으로 확보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조선은 영고탑 회귀설로 인한 대청위기의식 속에서 정계에 소극적으로 임하였으며, 압록강과 두만강의 수원을 확인하는 일은 청이 주도적으로 처리하였다. 청의 차사원 목극등은 조선측 책임자의 동행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백두산 정상 부근을 답사한 후 두만강이 아닌 토문강의 수원에 정계비를 세웠다. 정계 당시에는 조선이나 청 모두 토문강과 두만강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였다. 정계비에 양국의 국경은 "동위토문" 이라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토문'이 '두만강'이라 하더라도 당시 조선은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본 것이다. 정계 시 조선이나 청에서도 백두산 일대에 대한 지리정보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문강과 두만강을 같은 강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계 이후 함경도 북변 지역의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백두산과 두만강 상류지역에 대한 정확한 지리정보가 축적되었다. 이것은 백두산 및 고구려 · 발해의 구강역에 대해 사상적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며, 백두산을 조선 산들의 종산으로 인정하고 정부에서 치제하도록 하였다. 확대된 북방영토 의식은 정계비에 새겨진 토문강과 두만강은 엄연히 다른 것이므로 두만강은 국경이 될 수 없고, 그 이북지역까지 조선의 영토라는 인식을 널리 확산시켰다. 이러한 토문강 인식의 변화는 19세기 후반 집중적으로 진행된 조선인들의 월강경작과 이주, 간도 영유권을 둘러싼 조 · 청간 갈등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였는가의 문제와 토문과 두만이 별개의 것이라는 문제는 서로 관련이 없다. '두만'과 구별되는 '토문'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은 인식의 문제가 아니고 사실의 문제이며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해도 그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From a question "what is the reason why a border dispute happened 160 years after the erection of the demarcation stone?", the paper was intended to study on how recognition on 'Tomoon River' which became the issue of the border dispute has been changed. The core of the border dispute between Chosun...
From a question "what is the reason why a border dispute happened 160 years after the erection of the demarcation stone?", the paper was intended to study on how recognition on 'Tomoon River' which became the issue of the border dispute has been changed. The core of the border dispute between Chosun and China is concluded to "Dongwi-To moon" in the epitaph on the Demarcation Stone(in 1712). That is, it is the problem of "which river is the 'To-moon' in the epitaph?" and "Are Tomoon River and Tumen River different? or identical?' When coming to fix the boundary, Chosun concentrated on securing the south region of Pack Doo San, Yalu River, and Tumen River as our river zone. Out of crisis consciousness over China due to 'Young-go Tower Recurrence', Chosun was inactive in demarcating, but China took the initiative in confirming the headspring of Yulu River and Tumen River. Cha Sawon and Mok-geuk from China refused to go together with the responsible person from Chosun, investigated the region around the summit of Paek Doo Mountain, and erected a demarcation stone at the headspring of Tomoon River, not of Tumen River. At the time of demarcation, neither Chosun nor China could tell clearly Tomoon River and Tumen River. On the Demarcation Stone, it is inscribed that the border is "DongwiTomoon". Here, even though 'Tomoon' equals to 'Tumen', Chosun at that time considered they had made a satisfactory accomplishment. It is thought that, at the time of demarcation, Chosun and China didn't have enough information on the area around Paek Doo Mountain, thus they recognized the two rivers identical. After demarcation, the north area of Hamkyeung Province began to be developed, and exact geographical information on the upper stream area of Paek Doo Mountain and Tumen River was filed up. This became the moment to have an ideological interest in the old river zone from Paek Doo Mountain, Kokuryeu, and PalHae. Paek Doo Mountain got to be recognized as the head mountain of all the mountains in Chosun, and a rite was performed by the government. Expanded recognition on the north realm spreaded the idea that Tomoon River and Tumen River inscribed onto the Demarcation Stone are absolutely different and therefore Tumen River can't be the border, and that, so Chosun's domain should be expanded to the north region beyond it. This change of recognition on Tomoon River served as an important reason in the conflict between Chosun and China on the issue of agriculture crossing the river, emigration, and Kando dominium. But, it is not relevant what the recognition on Tomoon River in the late Chosun dynasty was and Tomoon River and Tumen River is separate. What 'Tomoon' which is clearly cut and dry from Tumen absolutely exists is not the problem of recognition but the fact. Even though this could not be understood right, the fact is not changed.
From a question "what is the reason why a border dispute happened 160 years after the erection of the demarcation stone?", the paper was intended to study on how recognition on 'Tomoon River' which became the issue of the border dispute has been changed. The core of the border dispute between Chosun and China is concluded to "Dongwi-To moon" in the epitaph on the Demarcation Stone(in 1712). That is, it is the problem of "which river is the 'To-moon' in the epitaph?" and "Are Tomoon River and Tumen River different? or identical?' When coming to fix the boundary, Chosun concentrated on securing the south region of Pack Doo San, Yalu River, and Tumen River as our river zone. Out of crisis consciousness over China due to 'Young-go Tower Recurrence', Chosun was inactive in demarcating, but China took the initiative in confirming the headspring of Yulu River and Tumen River. Cha Sawon and Mok-geuk from China refused to go together with the responsible person from Chosun, investigated the region around the summit of Paek Doo Mountain, and erected a demarcation stone at the headspring of Tomoon River, not of Tumen River. At the time of demarcation, neither Chosun nor China could tell clearly Tomoon River and Tumen River. On the Demarcation Stone, it is inscribed that the border is "DongwiTomoon". Here, even though 'Tomoon' equals to 'Tumen', Chosun at that time considered they had made a satisfactory accomplishment. It is thought that, at the time of demarcation, Chosun and China didn't have enough information on the area around Paek Doo Mountain, thus they recognized the two rivers identical. After demarcation, the north area of Hamkyeung Province began to be developed, and exact geographical information on the upper stream area of Paek Doo Mountain and Tumen River was filed up. This became the moment to have an ideological interest in the old river zone from Paek Doo Mountain, Kokuryeu, and PalHae. Paek Doo Mountain got to be recognized as the head mountain of all the mountains in Chosun, and a rite was performed by the government. Expanded recognition on the north realm spreaded the idea that Tomoon River and Tumen River inscribed onto the Demarcation Stone are absolutely different and therefore Tumen River can't be the border, and that, so Chosun's domain should be expanded to the north region beyond it. This change of recognition on Tomoon River served as an important reason in the conflict between Chosun and China on the issue of agriculture crossing the river, emigration, and Kando dominium. But, it is not relevant what the recognition on Tomoon River in the late Chosun dynasty was and Tomoon River and Tumen River is separate. What 'Tomoon' which is clearly cut and dry from Tumen absolutely exists is not the problem of recognition but the fact. Even though this could not be understood right, the fact is no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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