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안에 거하기를 원하면서도 정작 이를 위해 요구되는 하나님의 요구사항, 즉 인간의 몫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오직 믿음(또는 은혜)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명제 아래 은혜만을 강조하고, 행함의 문제는 소홀히 하는 현대 기독교의 독특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토라를 '율법'(Gesetz)의 개념으로 받아들임으로서 '복음'(Evangelium)과 대립되는 말로 사용해 왔다. 혹자는 복음은 선물로 구원을 주지만 율법은 단지 심판과 정죄만 할 뿐,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율법을 무시하거나 부정적 측면만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율법은 부정적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물론 이것은 포로기 이후의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법제화되고 형식화된 제사법, 정결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긍정적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도 은혜와 율법 중 어느 한쪽도 무시하지 않고 조화있게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은혜의 중요성도 강조하고(마 8:1-4, 막 1:14-15, 눅 15:1-32, 요 1:12),율법의 중요성도 강조하였으며(마 5:17-20, 막 10:17-19, 눅 16:17), ...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안에 거하기를 원하면서도 정작 이를 위해 요구되는 하나님의 요구사항, 즉 인간의 몫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오직 믿음(또는 은혜)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명제 아래 은혜만을 강조하고, 행함의 문제는 소홀히 하는 현대 기독교의 독특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토라를 '율법'(Gesetz)의 개념으로 받아들임으로서 '복음'(Evangelium)과 대립되는 말로 사용해 왔다. 혹자는 복음은 선물로 구원을 주지만 율법은 단지 심판과 정죄만 할 뿐,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율법을 무시하거나 부정적 측면만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율법은 부정적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물론 이것은 포로기 이후의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법제화되고 형식화된 제사법, 정결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긍정적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도 은혜와 율법 중 어느 한쪽도 무시하지 않고 조화있게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은혜의 중요성도 강조하고(마 8:1-4, 막 1:14-15, 눅 15:1-32, 요 1:12),율법의 중요성도 강조하였으며(마 5:17-20, 막 10:17-19, 눅 16:17), 바울도 율법을 무시하지 않았다(롬 12-15장, 갈 5-6장). 물론 인간의 구원과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출발한다. 그렇지만 일단 은혜가 주어지면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위한 율법이 주어지게 되고, 이 율법을 지킴으로서 이미 얻은 은혜 속에 계속적으로 거하게 된다. 물론 은혜가 주어지지 않으면 율법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 순서가 뒤바뀌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의 성장과 하나님의 은혜, 축복을 지속적으로 누리기 위해서는 은혜와 율법의 조화가 필연적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치게 되면 신앙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실패한 이스라엘의 많은 모습들은 은혜와 율법의 부조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신명기사가는 자신의 저술들을 통해 이 점에 대해 명확히 지적함은 물론, 그 해결방안도 잘 제시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신명기사가의 신학적 관점에서 그의 역사이해와 고대 신앙전승의 흐름과 두 전승(시내산 전승과 다윗전승)의 결합, 그리고 신명기와 신명기사가의 토라 이해를 중심으로 율법이 주어진 목적과 그 기능은 물론, 율법을 대하는 신앙인의 자세에 대해 고찰하였다. 앞에서 고찰한 바에 의하면 첫째로, 신명기사가는 역사를 예언의 말씀을 통해 선포된 야훼 말씀의 성취로 이해하며,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를 계약에 대한 의무 불이행으로 보고 있다.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서의 야훼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계약당사자(선택된 백성)로서 또다른 약속(계명들)을 지켜야 했다. 그런데 이 계약에 대한 성실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약은 파기되었으며, 그 결과 재앙이 임했고, 야훼 하나님의 심판은 정당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 주도권이 야훼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야훼의 사랑과 다�m과의 영원한 약속에 근거한다. 그래서 그에게 이스라엘의 미래는 열려 있고, 그의 메시지는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 계약안으로 들어와 그 약속(계명들)을 철저히 이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명기사가가 선포한 '전향'의 주제는 바로 야훼 백성으로서 실패하여 어쩌면 구원을 상실 할지도 모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이요. 현대의 신앙인에게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계속적으로 은혜 안에 거하는 방법인 것이다. 둘째로, 이렇게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한 신명기사가는 매 세대의 이스라엘이 역사적 위기의 전환점에서 전승을 새롭게 해석하고, 그 신앙전승 전체 안에서 위협의 단계를 극복했듯이 전승들을 자신의 고유한 신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했다. 그것은 서로 별개로 존재해 왔던 두 전승(시내산 전승과 다윗전승)의 결합으로 나타났다. 이로서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다윗계약은 조건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볼프는 이를 "모세의 심판과 다윗의 희망은 긴장을 일으켜 새로운 약속의 역사를 선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신명기사가는 자신의 새로운 해석인 두 전승의 결합을 통해서 영원한 약속(은혜)을 소유자할 자로서의 이상적인 신앙인의 자세를 자신이 그런 요시야 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셋째로, 신명기와 신명 기사가는 토라를 야훼의 전적인 선택(사랑)에 기초하여 계약 안에서 이해하며, '야훼의 뜻(계시)전체'에 대한 '완전한 가르침'이 되고자 시도했다. 왜냐하면 야훼의 법의지(토라)는 선택의 담보로서 구원의 선물로 여겨졌고, 또한 야훼는 토라를 통해 자기 백성에게 하나의 길과 하나의 질서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명기의 계명들은 거룩한 삶을 위한 생활률로 제시되며, 야훼의 사랑에 대한 답례로서 요구되는 순종의 문제 앞에 세운다. 그리고 신명기는 모든 계명들을 "야훼를 사랑하라"는 한 기본 계명에 소급시키고 계명들의 내적, 정신적 의미를 위해 노력하며, 한편으로 발단되는 토라의 율법화에 저항한다. 즉 이전의 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정신이 들어 있는데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요구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율법이해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신명기는 철저한 율법준수를 요구하지만 이것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을 율법 아래에 두려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공로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 것으로 율법준수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미 선택받았고, 계명 준수는 야훼의 사랑에 대한 의무로서의 순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앞에서 고찰한 내용을 토대로 서론에서 제기한 문제, 즉 율법에 대한 이해와 복음과의 관계성, 행함의 문제에 관해 다음의 결론을 제시한다. 율법을 복음으로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율법은 고정화된 법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재해석되어 온,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이 때로는 심판선언, 회개요구, 경고가 될 수 있고, 복음의 선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재해석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과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에서의 선택이 요구되어질 때 토라를 따르는 길은 야훼를 섬기는 길이었고, 또 토라를 지키는 길은 생명과 축복을 얻는 길이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에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순종의 의무가 따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길은 하나님이 주신 법도를 따르는 것이다. 그것이 신명기에서는 생활률로 주어졌고, 신약에서는 사랑의 계명으로 나타났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말씀하시면서 율법의 문자만이 아니라 그 정신까지 지킬 것, 즉 외적 순종만이 아니라 내적 순종을 요구하셨다.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은 얻었지만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도중에 있다. 그러므로 마치 신명기가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중간 상태에서 그의 백성을 호렙 산에 세우고 결단을 요구했던 것처럼 우리도 날마다 호렙 산에 서서 하나님과 일대 일로 생명적 언약을 체결하고, (신명기적 권고로 거듭 말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결단하고 순종해야 한다.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회복과 철저한 율법준수, 이것은 위기에 처해있던 바로 동시대의 자기백성을 향해 신명기사가의 선포한 희망의 메시지일 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요구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명기의 율법은 억누르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생명으로 인도하고 축복해 주기 위해서, 그리고 거룩한 삶과 그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주신 것으로 복음으로서의 율법이다. 즉 토라의 개념 안에는 율법과 복음, 격려와 요구라는 두 측면이 포괄적으로 서로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신명기와 신명기사가의 토라 이해와 그 정신은 (오경은 물론 예언서에 이르기까지) 구약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있고, 또한 필자의 생각으로는 신약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특히 신 6:5, 미 6:8은 은혜와 행함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되고 있다. 따라서 구약의 율법은 신약의 복음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보충적 차원에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율법은 반드시 필요하며, 또 이를 지켜 행함으로서 신앙이 바르게 성장하고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음을 감안할 때, 복음과 율법, 믿음과 행함에 관한 논쟁은 불식되어져야만 한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안에 거하기를 원하면서도 정작 이를 위해 요구되는 하나님의 요구사항, 즉 인간의 몫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오직 믿음(또는 은혜)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명제 아래 은혜만을 강조하고, 행함의 문제는 소홀히 하는 현대 기독교의 독특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토라를 '율법'(Gesetz)의 개념으로 받아들임으로서 '복음'(Evangelium)과 대립되는 말로 사용해 왔다. 혹자는 복음은 선물로 구원을 주지만 율법은 단지 심판과 정죄만 할 뿐,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율법을 무시하거나 부정적 측면만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율법은 부정적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물론 이것은 포로기 이후의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법제화되고 형식화된 제사법, 정결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긍정적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도 은혜와 율법 중 어느 한쪽도 무시하지 않고 조화있게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은혜의 중요성도 강조하고(마 8:1-4, 막 1:14-15, 눅 15:1-32, 요 1:12),율법의 중요성도 강조하였으며(마 5:17-20, 막 10:17-19, 눅 16:17), 바울도 율법을 무시하지 않았다(롬 12-15장, 갈 5-6장). 물론 인간의 구원과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출발한다. 그렇지만 일단 은혜가 주어지면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위한 율법이 주어지게 되고, 이 율법을 지킴으로서 이미 얻은 은혜 속에 계속적으로 거하게 된다. 물론 은혜가 주어지지 않으면 율법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 순서가 뒤바뀌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의 성장과 하나님의 은혜, 축복을 지속적으로 누리기 위해서는 은혜와 율법의 조화가 필연적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치게 되면 신앙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실패한 이스라엘의 많은 모습들은 은혜와 율법의 부조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신명기사가는 자신의 저술들을 통해 이 점에 대해 명확히 지적함은 물론, 그 해결방안도 잘 제시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신명기사가의 신학적 관점에서 그의 역사이해와 고대 신앙전승의 흐름과 두 전승(시내산 전승과 다윗전승)의 결합, 그리고 신명기와 신명기사가의 토라 이해를 중심으로 율법이 주어진 목적과 그 기능은 물론, 율법을 대하는 신앙인의 자세에 대해 고찰하였다. 앞에서 고찰한 바에 의하면 첫째로, 신명기사가는 역사를 예언의 말씀을 통해 선포된 야훼 말씀의 성취로 이해하며,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를 계약에 대한 의무 불이행으로 보고 있다.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서의 야훼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계약당사자(선택된 백성)로서 또다른 약속(계명들)을 지켜야 했다. 그런데 이 계약에 대한 성실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약은 파기되었으며, 그 결과 재앙이 임했고, 야훼 하나님의 심판은 정당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 주도권이 야훼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야훼의 사랑과 다�m과의 영원한 약속에 근거한다. 그래서 그에게 이스라엘의 미래는 열려 있고, 그의 메시지는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 계약안으로 들어와 그 약속(계명들)을 철저히 이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명기사가가 선포한 '전향'의 주제는 바로 야훼 백성으로서 실패하여 어쩌면 구원을 상실 할지도 모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이요. 현대의 신앙인에게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계속적으로 은혜 안에 거하는 방법인 것이다. 둘째로, 이렇게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한 신명기사가는 매 세대의 이스라엘이 역사적 위기의 전환점에서 전승을 새롭게 해석하고, 그 신앙전승 전체 안에서 위협의 단계를 극복했듯이 전승들을 자신의 고유한 신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했다. 그것은 서로 별개로 존재해 왔던 두 전승(시내산 전승과 다윗전승)의 결합으로 나타났다. 이로서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다윗계약은 조건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볼프는 이를 "모세의 심판과 다윗의 희망은 긴장을 일으켜 새로운 약속의 역사를 선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신명기사가는 자신의 새로운 해석인 두 전승의 결합을 통해서 영원한 약속(은혜)을 소유자할 자로서의 이상적인 신앙인의 자세를 자신이 그런 요시야 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셋째로, 신명기와 신명 기사가는 토라를 야훼의 전적인 선택(사랑)에 기초하여 계약 안에서 이해하며, '야훼의 뜻(계시)전체'에 대한 '완전한 가르침'이 되고자 시도했다. 왜냐하면 야훼의 법의지(토라)는 선택의 담보로서 구원의 선물로 여겨졌고, 또한 야훼는 토라를 통해 자기 백성에게 하나의 길과 하나의 질서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명기의 계명들은 거룩한 삶을 위한 생활률로 제시되며, 야훼의 사랑에 대한 답례로서 요구되는 순종의 문제 앞에 세운다. 그리고 신명기는 모든 계명들을 "야훼를 사랑하라"는 한 기본 계명에 소급시키고 계명들의 내적, 정신적 의미를 위해 노력하며, 한편으로 발단되는 토라의 율법화에 저항한다. 즉 이전의 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정신이 들어 있는데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요구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율법이해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신명기는 철저한 율법준수를 요구하지만 이것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을 율법 아래에 두려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공로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 것으로 율법준수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미 선택받았고, 계명 준수는 야훼의 사랑에 대한 의무로서의 순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앞에서 고찰한 내용을 토대로 서론에서 제기한 문제, 즉 율법에 대한 이해와 복음과의 관계성, 행함의 문제에 관해 다음의 결론을 제시한다. 율법을 복음으로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율법은 고정화된 법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재해석되어 온,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이 때로는 심판선언, 회개요구, 경고가 될 수 있고, 복음의 선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재해석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과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에서의 선택이 요구되어질 때 토라를 따르는 길은 야훼를 섬기는 길이었고, 또 토라를 지키는 길은 생명과 축복을 얻는 길이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에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순종의 의무가 따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길은 하나님이 주신 법도를 따르는 것이다. 그것이 신명기에서는 생활률로 주어졌고, 신약에서는 사랑의 계명으로 나타났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말씀하시면서 율법의 문자만이 아니라 그 정신까지 지킬 것, 즉 외적 순종만이 아니라 내적 순종을 요구하셨다.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은 얻었지만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도중에 있다. 그러므로 마치 신명기가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중간 상태에서 그의 백성을 호렙 산에 세우고 결단을 요구했던 것처럼 우리도 날마다 호렙 산에 서서 하나님과 일대 일로 생명적 언약을 체결하고, (신명기적 권고로 거듭 말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결단하고 순종해야 한다.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회복과 철저한 율법준수, 이것은 위기에 처해있던 바로 동시대의 자기백성을 향해 신명기사가의 선포한 희망의 메시지일 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요구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명기의 율법은 억누르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생명으로 인도하고 축복해 주기 위해서, 그리고 거룩한 삶과 그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주신 것으로 복음으로서의 율법이다. 즉 토라의 개념 안에는 율법과 복음, 격려와 요구라는 두 측면이 포괄적으로 서로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신명기와 신명기사가의 토라 이해와 그 정신은 (오경은 물론 예언서에 이르기까지) 구약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있고, 또한 필자의 생각으로는 신약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특히 신 6:5, 미 6:8은 은혜와 행함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되고 있다. 따라서 구약의 율법은 신약의 복음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보충적 차원에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율법은 반드시 필요하며, 또 이를 지켜 행함으로서 신앙이 바르게 성장하고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음을 감안할 때, 복음과 율법, 믿음과 행함에 관한 논쟁은 불식되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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