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교과서의 서술을 검토하고 개선의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한 국가의 학문, 교육,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자기성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교과서에서 기술되는 ‘선교사의 활동과 문화의 교류’, ‘중화사상’, ‘아편전쟁’ 등은 사실학습 위주의 서술, 망라적 기술, 딱딱한 문체, 형식적인 학습자료, 재미없는 삽화 등으로 채워져 권위적인 전통적 교과서의 모습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 뿐만 아니라, 특정 지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 자료의 편중, 현지 문화나 역사에 대한 전문성 부족, 서구 중심의 서술 등으로 인해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느낌이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들은 유럽 문화를 중국에 일부 소개함과 동시에 중국 문화를 유럽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교과서에서는 이를 과대평가하여 청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으나 강희제․옹정제의 크리스트교 포교금지가 근대화에 중대한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방식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 즉 서양학술에 대한 중국인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어서 최소한의 실용 면에 한정되었고, 호기심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왕조의 지배체제 유지에 필요한 범위 안에서의 수용이었기에 근대화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중화사상의 경우도 사실․개념 위주의 서술로 채워져 있어 잘못하면 역사 사실의 암기만을 목적으로 한 주입식 교수법이 재연될 개연성이 있다. 따라서 중화사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위해 중화사상의 배경과 천(天)․천자(天子)․천명(天命)․천하(天下)․중국(中國)․화하(華夏)․이(夷)등의 각 개념의 총합을 부연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이 대부분 배타의 본능과 상대의 부정을 통한 근거 없는 우월감이나 비이성적인 감성에 호소한 중국인 위주의 실체 없는 허망한 사상이었음을 교과서에 적시해 주어야 한다. 청나라는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대외정책에 있어 관례[定例]를 중시하고 체제를 유지하려는 기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를 위해 중화사상, 조공제도, 책봉제도, 기미정책 등의 대외 인식수단을 원용하였는데, 이들은 어떤 이론이나 명확한 체계를 갖춘 것이 아니고 소위 그들이 말하는 중화적 질서의식의 틀을 형성하기 위해 시대에 따라 임의적으로 고안․이용된 가공의 허구논리였다. 특히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힘의 관계는 이 질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반비례적으로 그들의 힘이 약화될 때에는 당연히 수용할 수 있는 대상이 없기에 파탄을 노정할 수밖에 없는 실체 없는, 허상의 그림자인 셈이다. 당시의 지배층도 이들이 허구논리란 것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었으나, 기득권 상실에 대한 불안과 우려 때문에 체제유지를 위해 표면적으로 내세운 비합리적 생존양태이며 근거 없는 우월의식인 것이다. 관례를 중시한 그들의 대외인식은 국체고수라는 그들 나름의 철저한 원칙 속에서 전개되었다. 무엇보다도 청의 체제는 왕조권력 그 자체였다. 따라서 체제의 변화는 전쟁에서의 패배만큼이나 청조에게는 치명적인 것으로서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따라서 교과서의 ‘선교사의 활동과 문화의 교류’나 ‘아편전쟁’ 중 시도되는 일련의 조약 역시 체제유지의 수단으로서 이들이 허구적으로 원용되었음을 서술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교과서를 서술해야지만 아편전쟁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을 검토하고 개선의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한 국가의 학문, 교육,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자기성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교과서에서 기술되는 ‘선교사의 활동과 문화의 교류’, ‘중화사상’, ‘아편전쟁’ 등은 사실학습 위주의 서술, 망라적 기술, 딱딱한 문체, 형식적인 학습자료, 재미없는 삽화 등으로 채워져 권위적인 전통적 교과서의 모습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 뿐만 아니라, 특정 지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 자료의 편중, 현지 문화나 역사에 대한 전문성 부족, 서구 중심의 서술 등으로 인해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느낌이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들은 유럽 문화를 중국에 일부 소개함과 동시에 중국 문화를 유럽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교과서에서는 이를 과대평가하여 청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으나 강희제․옹정제의 크리스트교 포교금지가 근대화에 중대한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방식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 즉 서양학술에 대한 중국인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어서 최소한의 실용 면에 한정되었고, 호기심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왕조의 지배체제 유지에 필요한 범위 안에서의 수용이었기에 근대화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중화사상의 경우도 사실․개념 위주의 서술로 채워져 있어 잘못하면 역사 사실의 암기만을 목적으로 한 주입식 교수법이 재연될 개연성이 있다. 따라서 중화사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위해 중화사상의 배경과 천(天)․천자(天子)․천명(天命)․천하(天下)․중국(中國)․화하(華夏)․이(夷)등의 각 개념의 총합을 부연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이 대부분 배타의 본능과 상대의 부정을 통한 근거 없는 우월감이나 비이성적인 감성에 호소한 중국인 위주의 실체 없는 허망한 사상이었음을 교과서에 적시해 주어야 한다. 청나라는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대외정책에 있어 관례[定例]를 중시하고 체제를 유지하려는 기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를 위해 중화사상, 조공제도, 책봉제도, 기미정책 등의 대외 인식수단을 원용하였는데, 이들은 어떤 이론이나 명확한 체계를 갖춘 것이 아니고 소위 그들이 말하는 중화적 질서의식의 틀을 형성하기 위해 시대에 따라 임의적으로 고안․이용된 가공의 허구논리였다. 특히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힘의 관계는 이 질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반비례적으로 그들의 힘이 약화될 때에는 당연히 수용할 수 있는 대상이 없기에 파탄을 노정할 수밖에 없는 실체 없는, 허상의 그림자인 셈이다. 당시의 지배층도 이들이 허구논리란 것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었으나, 기득권 상실에 대한 불안과 우려 때문에 체제유지를 위해 표면적으로 내세운 비합리적 생존양태이며 근거 없는 우월의식인 것이다. 관례를 중시한 그들의 대외인식은 국체고수라는 그들 나름의 철저한 원칙 속에서 전개되었다. 무엇보다도 청의 체제는 왕조권력 그 자체였다. 따라서 체제의 변화는 전쟁에서의 패배만큼이나 청조에게는 치명적인 것으로서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따라서 교과서의 ‘선교사의 활동과 문화의 교류’나 ‘아편전쟁’ 중 시도되는 일련의 조약 역시 체제유지의 수단으로서 이들이 허구적으로 원용되었음을 서술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교과서를 서술해야지만 아편전쟁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중국사의 근본문제 즉 근대화의 굴절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을 검토하고 개선의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한 국가의 학문, 교육,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자기성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교과서에서 기술되는 ‘선교사의 활동과 문화의 교류’, ‘중화사상’, ‘아편전쟁’ 등은 사실학습 위주의 서술, 망라적 기술, 딱딱한 문체, 형식적인 학습자료, 재미없는 삽화 등으로 채워져 권위적인 전통적 교과서의 모습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 뿐만 아니라, 특정 지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 자료의 편중, 현지 문화나 역사에 대한 전문성 부족, 서구 중심의 서술 등으로 인해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느낌이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들은 유럽 문화를 중국에 일부 소개함과 동시에 중국 문화를 유럽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교과서에서는 이를 과대평가하여 청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으나 강희제․옹정제의 크리스트교 포교금지가 근대화에 중대한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방식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 즉 서양학술에 대한 중국인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어서 최소한의 실용 면에 한정되었고, 호기심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왕조의 지배체제 유지에 필요한 범위 안에서의 수용이었기에 근대화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중화사상의 경우도 사실․개념 위주의 서술로 채워져 있어 잘못하면 역사 사실의 암기만을 목적으로 한 주입식 교수법이 재연될 개연성이 있다. 따라서 중화사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위해 중화사상의 배경과 천(天)․천자(天子)․천명(天命)․천하(天下)․중국(中國)․화하(華夏)․이(夷)등의 각 개념의 총합을 부연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이 대부분 배타의 본능과 상대의 부정을 통한 근거 없는 우월감이나 비이성적인 감성에 호소한 중국인 위주의 실체 없는 허망한 사상이었음을 교과서에 적시해 주어야 한다. 청나라는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대외정책에 있어 관례[定例]를 중시하고 체제를 유지하려는 기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를 위해 중화사상, 조공제도, 책봉제도, 기미정책 등의 대외 인식수단을 원용하였는데, 이들은 어떤 이론이나 명확한 체계를 갖춘 것이 아니고 소위 그들이 말하는 중화적 질서의식의 틀을 형성하기 위해 시대에 따라 임의적으로 고안․이용된 가공의 허구논리였다. 특히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힘의 관계는 이 질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반비례적으로 그들의 힘이 약화될 때에는 당연히 수용할 수 있는 대상이 없기에 파탄을 노정할 수밖에 없는 실체 없는, 허상의 그림자인 셈이다. 당시의 지배층도 이들이 허구논리란 것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었으나, 기득권 상실에 대한 불안과 우려 때문에 체제유지를 위해 표면적으로 내세운 비합리적 생존양태이며 근거 없는 우월의식인 것이다. 관례를 중시한 그들의 대외인식은 국체고수라는 그들 나름의 철저한 원칙 속에서 전개되었다. 무엇보다도 청의 체제는 왕조권력 그 자체였다. 따라서 체제의 변화는 전쟁에서의 패배만큼이나 청조에게는 치명적인 것으로서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따라서 교과서의 ‘선교사의 활동과 문화의 교류’나 ‘아편전쟁’ 중 시도되는 일련의 조약 역시 체제유지의 수단으로서 이들이 허구적으로 원용되었음을 서술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교과서를 서술해야지만 아편전쟁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중국사의 근본문제 즉 근대화의 굴절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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