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개요 2010. 11. 23 14:30분경 북한에 의해 인천군 옹진군 연평도가 포격을 맞았다. 170여발을 퍼부어 해병대 장병 2명과 해병대 관사 신축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민간인2명이 참변을 당했다. 마을과 군부대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산불이 발생하는 등 조용했던 섬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주민 대부분은 섬을 탈출해야만했다. 북한은 해가 바뀌었어도 여전히 도발에 대해 사죄하지 않고 오히려 ‘전면전’ 을 들먹이며 우리정부를 협박하고 2011. 8월이후 연평도 인근 서해 북방 한계선(NLL) 해상에 여러차례 기습 포격을 감행해 주민들을 또 다시 불안에 떨게 하였다. 사건정리 2011. 1월 섬에 다시 들어온 주민들은 연평초교 운동장에 임시로 지은 약 5.5평 규모의 비좁은 조립식 주택에서 거주 하였으나, 5월부터 완파된 주택과 상가 등 총 32채를 건축물 대장에 등기된 면적대로 다시 지어 주어 32가구 50여명은 예전 집터에 지 어진 보금자리로 돌아 왔다. 도발 1주년을 맞는 11월 23일 고 서정우하사, 문광욱 일병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이들의 부모와 가족, 해병대 장병등이 참석한 가운데 흉상 제막식 및 추모식이 진행되었다. 국민성금으로 35명이 탈 수 있는 연평도의 첫 마을버스가 마련되어 운행 중이다. 또한 100억여원을 들여 주민 200-500명이 한꺼번에 들어 ...
사건개요 2010. 11. 23 14:30분경 북한에 의해 인천군 옹진군 연평도가 포격을 맞았다. 170여발을 퍼부어 해병대 장병 2명과 해병대 관사 신축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민간인2명이 참변을 당했다. 마을과 군부대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산불이 발생하는 등 조용했던 섬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주민 대부분은 섬을 탈출해야만했다. 북한은 해가 바뀌었어도 여전히 도발에 대해 사죄하지 않고 오히려 ‘전면전’ 을 들먹이며 우리정부를 협박하고 2011. 8월이후 연평도 인근 서해 북방 한계선(NLL) 해상에 여러차례 기습 포격을 감행해 주민들을 또 다시 불안에 떨게 하였다. 사건정리 2011. 1월 섬에 다시 들어온 주민들은 연평초교 운동장에 임시로 지은 약 5.5평 규모의 비좁은 조립식 주택에서 거주 하였으나, 5월부터 완파된 주택과 상가 등 총 32채를 건축물 대장에 등기된 면적대로 다시 지어 주어 32가구 50여명은 예전 집터에 지 어진 보금자리로 돌아 왔다. 도발 1주년을 맞는 11월 23일 고 서정우하사, 문광욱 일병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이들의 부모와 가족, 해병대 장병등이 참석한 가운데 흉상 제막식 및 추모식이 진행되었다. 국민성금으로 35명이 탈 수 있는 연평도의 첫 마을버스가 마련되어 운행 중이다. 또한 100억여원을 들여 주민 200-500명이 한꺼번에 들어 갈 수 있는 현대식 대피 시설7곳에 자체발전, 급수시설과 조리대, 화장실등도 설치해 비상사태가 발생해도 열흘 이상 안전하게 생활 할 수 있는 대피소가 완공됐다. 포격 2주기를 맞아 북한의 만행을 기억하기 위해 완파 주택 자리에 지상 2층 규모의 안보교육관이 준공됐다. 불에 탄 가전제품, 부서진 자전거등이 남아있는 다른 주택 자리는 도발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보존하기로 했다. 연평도 사건의 상흔과 치유 2010년 11월 27일. 진눈깨비가 내리던 어느 초겨울이었다. 성남시 화장터에서는 고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의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늠름했던 청년들이 한 줌의 재로 돌아온 차디찬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던 그 날... 연구자는 꽃다운 청춘들의 희생을 직면했던 바로 그 날, 그 순간을 기점으로 하여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네거티브 방식을 취하였다. 3년간 북한의 포격 이후 주민들의 삶의 변화 과정을 ‘상흔’ ‘귀환’ ‘치유’ 로 나눠 사진으로 담아냈다. 제1부 ‘상흔’ 은 연평도에 북한의 포격이 가해지던 그 날의 충격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연평도에 포격이 있던 그 날, 여전히 세계 유일의 분단국에 살고 있다는 것을 뼈아프게 직시해야만 했다. 포격사건 이후 그 곳은 무섭고 불안한 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곳이 되었다. 제2부 ‘귀환’ 은 그 곳이 삶의 터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와야만 했던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전히 연평도는 예측할 수 없는 포화의 불씨를 안고 있는 곳이지만, 선착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에서 삶의 빛을 잃었던 그 시간 역시 과거가 되고, 그 곳에는 새로운 삶의 움직임이 시작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3부 ‘치유’ 는 연평도 주민들의 상처가 아물어가는 과정, 어쩌면 아물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담아 냈다. 그 곳은 여전히 전면적인 위기와 불안한 섬이지만, 정작 섬안에 들어서면 한없이 고요함이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그 곳은 해군의 사격 훈련에 도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주민들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혼재하는 공간이기도하다. 포격을 당했던 마을은 이제 거의 복구가 되었지만, 그 곳 주민들의 내면에는 불안함, 삶에 대한 기대감, 치유에 대한 염원이 공존하고 있다. 북한의 포격 이후 연평도를 방문하면서, 한반도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상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사건개요 2010. 11. 23 14:30분경 북한에 의해 인천군 옹진군 연평도가 포격을 맞았다. 170여발을 퍼부어 해병대 장병 2명과 해병대 관사 신축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민간인2명이 참변을 당했다. 마을과 군부대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산불이 발생하는 등 조용했던 섬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주민 대부분은 섬을 탈출해야만했다. 북한은 해가 바뀌었어도 여전히 도발에 대해 사죄하지 않고 오히려 ‘전면전’ 을 들먹이며 우리정부를 협박하고 2011. 8월이후 연평도 인근 서해 북방 한계선(NLL) 해상에 여러차례 기습 포격을 감행해 주민들을 또 다시 불안에 떨게 하였다. 사건정리 2011. 1월 섬에 다시 들어온 주민들은 연평초교 운동장에 임시로 지은 약 5.5평 규모의 비좁은 조립식 주택에서 거주 하였으나, 5월부터 완파된 주택과 상가 등 총 32채를 건축물 대장에 등기된 면적대로 다시 지어 주어 32가구 50여명은 예전 집터에 지 어진 보금자리로 돌아 왔다. 도발 1주년을 맞는 11월 23일 고 서정우하사, 문광욱 일병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이들의 부모와 가족, 해병대 장병등이 참석한 가운데 흉상 제막식 및 추모식이 진행되었다. 국민성금으로 35명이 탈 수 있는 연평도의 첫 마을버스가 마련되어 운행 중이다. 또한 100억여원을 들여 주민 200-500명이 한꺼번에 들어 갈 수 있는 현대식 대피 시설7곳에 자체발전, 급수시설과 조리대, 화장실등도 설치해 비상사태가 발생해도 열흘 이상 안전하게 생활 할 수 있는 대피소가 완공됐다. 포격 2주기를 맞아 북한의 만행을 기억하기 위해 완파 주택 자리에 지상 2층 규모의 안보교육관이 준공됐다. 불에 탄 가전제품, 부서진 자전거등이 남아있는 다른 주택 자리는 도발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보존하기로 했다. 연평도 사건의 상흔과 치유 2010년 11월 27일. 진눈깨비가 내리던 어느 초겨울이었다. 성남시 화장터에서는 고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의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늠름했던 청년들이 한 줌의 재로 돌아온 차디찬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던 그 날... 연구자는 꽃다운 청춘들의 희생을 직면했던 바로 그 날, 그 순간을 기점으로 하여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네거티브 방식을 취하였다. 3년간 북한의 포격 이후 주민들의 삶의 변화 과정을 ‘상흔’ ‘귀환’ ‘치유’ 로 나눠 사진으로 담아냈다. 제1부 ‘상흔’ 은 연평도에 북한의 포격이 가해지던 그 날의 충격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연평도에 포격이 있던 그 날, 여전히 세계 유일의 분단국에 살고 있다는 것을 뼈아프게 직시해야만 했다. 포격사건 이후 그 곳은 무섭고 불안한 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곳이 되었다. 제2부 ‘귀환’ 은 그 곳이 삶의 터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와야만 했던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전히 연평도는 예측할 수 없는 포화의 불씨를 안고 있는 곳이지만, 선착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에서 삶의 빛을 잃었던 그 시간 역시 과거가 되고, 그 곳에는 새로운 삶의 움직임이 시작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3부 ‘치유’ 는 연평도 주민들의 상처가 아물어가는 과정, 어쩌면 아물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담아 냈다. 그 곳은 여전히 전면적인 위기와 불안한 섬이지만, 정작 섬안에 들어서면 한없이 고요함이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그 곳은 해군의 사격 훈련에 도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주민들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혼재하는 공간이기도하다. 포격을 당했던 마을은 이제 거의 복구가 되었지만, 그 곳 주민들의 내면에는 불안함, 삶에 대한 기대감, 치유에 대한 염원이 공존하고 있다. 북한의 포격 이후 연평도를 방문하면서, 한반도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상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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