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지도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개혁(Cultic Reform)을 시도하였다. 이스라엘 초기 시대에는 모세(신 9:7-29)와 여호수아가 종교를 개혁하였으며(수23:7-24:24), 사사시대는 기드온(삿 6:25-32)이 개혁을 하였다. 통일왕국 시대는 다윗과 솔로몬(삼상 28:3-25)이 제의 중심지를 예루살렘에 정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함으로써 개혁을 꾀했다. 분열왕국 시대에는 대표적으로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을 들 수 있다. 히스기야(715-686)와 요시야(640-609) 시대의 국내외적인 상황들은 그들을 개혁으로 유도했다. 내적으로는 앗수르의 종교가 예루살렘에 유입되어 가나안 종교의 혼합주의와 결합되어 이스라엘 전통 야웨 신앙이 그 정체성을 잃고 있었으며, 외적으로는 앗수르의 위협 속에서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고 있었다. 그들은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개혁을 시도하였는데, 제의 중앙화를 위하여 우상을 제거하고, 지방의 산당들을 철폐하였으며, 유월절을 범국민적 축제로 거행하였다. 본 논문은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이 과연 ‘종교 개혁’으로 부를 수 있는가에 의문을 갖고 출발하였다. 만일 그들의 개혁이 종교 개혁이라면 이는 명백하게 실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본 글의 저자는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을 비교함으로써 그들이 제의 중앙화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종교 개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통합과 왕권 강화였으며, 이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앗수르로부터 독립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음을 증명하였다. 히스기야의 개혁은 당시 국내외 정치와 사회, 종교적 상황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 일어난 개혁이다. 아하스 왕(주전 732-715년)은 앗수르가 요구하는 공물을 조달하기 위하여 왕실의 금고와 성전을 열어 위기를 넘겼다. 히스기야 시대에도 이러한 상황은 계속 되어 사회·경제적 불균형과 사회적 병폐, 그리고 강대국의 군사·경제적 압박은 유다 사회를 더욱 병들게 하였다. 요시야가 다스리던 시대 역시 히스기야 시대의 사회구조, 계급형성, 국제상황, 경제구조 등과 유사하다. 요시야의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성전수리 과정에서 율법 책이 발견 된 이후이다. 요시야는 율법의 내용을 따라 개혁의 시작을 예루살렘 성전부터 시작하여 온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모든 우상과 산당들을 파괴하여 깨끗하게 하였다.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에서 중점으로 시도한 것은 ‘제의 중앙화’였다. 이를 위하여 우상 제거, 산당 철폐, 유월절 시행 등의 공통된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두 개혁이 일어난 동기가 앗수르의 제국정치 상황에서 민족주의와 종교를 혼합한 운동으로 독립과 민족 통일의 근거로 예루살렘으로의 제의 중앙화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개혁은 서민들을 위한 아래로의 개혁이 되지 못했다. 지방 토호 세력들의 권력을 무력화시키고, 그들이 관리하였던 성전 재정과 세금을 중앙의 예루살렘으로 가져옴으로써, 결국 신권 정치권력만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백성들은 신권 정치권력에 등을 돌렸으며, ...
이스라엘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지도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개혁(Cultic Reform)을 시도하였다. 이스라엘 초기 시대에는 모세(신 9:7-29)와 여호수아가 종교를 개혁하였으며(수23:7-24:24), 사사시대는 기드온(삿 6:25-32)이 개혁을 하였다. 통일왕국 시대는 다윗과 솔로몬(삼상 28:3-25)이 제의 중심지를 예루살렘에 정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함으로써 개혁을 꾀했다. 분열왕국 시대에는 대표적으로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을 들 수 있다. 히스기야(715-686)와 요시야(640-609) 시대의 국내외적인 상황들은 그들을 개혁으로 유도했다. 내적으로는 앗수르의 종교가 예루살렘에 유입되어 가나안 종교의 혼합주의와 결합되어 이스라엘 전통 야웨 신앙이 그 정체성을 잃고 있었으며, 외적으로는 앗수르의 위협 속에서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고 있었다. 그들은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개혁을 시도하였는데, 제의 중앙화를 위하여 우상을 제거하고, 지방의 산당들을 철폐하였으며, 유월절을 범국민적 축제로 거행하였다. 본 논문은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이 과연 ‘종교 개혁’으로 부를 수 있는가에 의문을 갖고 출발하였다. 만일 그들의 개혁이 종교 개혁이라면 이는 명백하게 실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본 글의 저자는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을 비교함으로써 그들이 제의 중앙화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종교 개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통합과 왕권 강화였으며, 이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앗수르로부터 독립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음을 증명하였다. 히스기야의 개혁은 당시 국내외 정치와 사회, 종교적 상황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 일어난 개혁이다. 아하스 왕(주전 732-715년)은 앗수르가 요구하는 공물을 조달하기 위하여 왕실의 금고와 성전을 열어 위기를 넘겼다. 히스기야 시대에도 이러한 상황은 계속 되어 사회·경제적 불균형과 사회적 병폐, 그리고 강대국의 군사·경제적 압박은 유다 사회를 더욱 병들게 하였다. 요시야가 다스리던 시대 역시 히스기야 시대의 사회구조, 계급형성, 국제상황, 경제구조 등과 유사하다. 요시야의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성전수리 과정에서 율법 책이 발견 된 이후이다. 요시야는 율법의 내용을 따라 개혁의 시작을 예루살렘 성전부터 시작하여 온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모든 우상과 산당들을 파괴하여 깨끗하게 하였다.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에서 중점으로 시도한 것은 ‘제의 중앙화’였다. 이를 위하여 우상 제거, 산당 철폐, 유월절 시행 등의 공통된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두 개혁이 일어난 동기가 앗수르의 제국정치 상황에서 민족주의와 종교를 혼합한 운동으로 독립과 민족 통일의 근거로 예루살렘으로의 제의 중앙화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개혁은 서민들을 위한 아래로의 개혁이 되지 못했다. 지방 토호 세력들의 권력을 무력화시키고, 그들이 관리하였던 성전 재정과 세금을 중앙의 예루살렘으로 가져옴으로써, 결국 신권 정치권력만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백성들은 신권 정치권력에 등을 돌렸으며, 사회 통합을 이루어 국력을 하나로 모으고자 한 시도 는 실패하였다. 또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앗수르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고자한 시도 역시 무산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들의 개혁은 사회 종교적인 면에서 궁극적으로 모두 실패하였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지도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개혁(Cultic Reform)을 시도하였다. 이스라엘 초기 시대에는 모세(신 9:7-29)와 여호수아가 종교를 개혁하였으며(수23:7-24:24), 사사시대는 기드온(삿 6:25-32)이 개혁을 하였다. 통일왕국 시대는 다윗과 솔로몬(삼상 28:3-25)이 제의 중심지를 예루살렘에 정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함으로써 개혁을 꾀했다. 분열왕국 시대에는 대표적으로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을 들 수 있다. 히스기야(715-686)와 요시야(640-609) 시대의 국내외적인 상황들은 그들을 개혁으로 유도했다. 내적으로는 앗수르의 종교가 예루살렘에 유입되어 가나안 종교의 혼합주의와 결합되어 이스라엘 전통 야웨 신앙이 그 정체성을 잃고 있었으며, 외적으로는 앗수르의 위협 속에서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고 있었다. 그들은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개혁을 시도하였는데, 제의 중앙화를 위하여 우상을 제거하고, 지방의 산당들을 철폐하였으며, 유월절을 범국민적 축제로 거행하였다. 본 논문은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이 과연 ‘종교 개혁’으로 부를 수 있는가에 의문을 갖고 출발하였다. 만일 그들의 개혁이 종교 개혁이라면 이는 명백하게 실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본 글의 저자는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을 비교함으로써 그들이 제의 중앙화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종교 개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통합과 왕권 강화였으며, 이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앗수르로부터 독립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음을 증명하였다. 히스기야의 개혁은 당시 국내외 정치와 사회, 종교적 상황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 일어난 개혁이다. 아하스 왕(주전 732-715년)은 앗수르가 요구하는 공물을 조달하기 위하여 왕실의 금고와 성전을 열어 위기를 넘겼다. 히스기야 시대에도 이러한 상황은 계속 되어 사회·경제적 불균형과 사회적 병폐, 그리고 강대국의 군사·경제적 압박은 유다 사회를 더욱 병들게 하였다. 요시야가 다스리던 시대 역시 히스기야 시대의 사회구조, 계급형성, 국제상황, 경제구조 등과 유사하다. 요시야의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성전수리 과정에서 율법 책이 발견 된 이후이다. 요시야는 율법의 내용을 따라 개혁의 시작을 예루살렘 성전부터 시작하여 온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모든 우상과 산당들을 파괴하여 깨끗하게 하였다.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에서 중점으로 시도한 것은 ‘제의 중앙화’였다. 이를 위하여 우상 제거, 산당 철폐, 유월절 시행 등의 공통된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두 개혁이 일어난 동기가 앗수르의 제국정치 상황에서 민족주의와 종교를 혼합한 운동으로 독립과 민족 통일의 근거로 예루살렘으로의 제의 중앙화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개혁은 서민들을 위한 아래로의 개혁이 되지 못했다. 지방 토호 세력들의 권력을 무력화시키고, 그들이 관리하였던 성전 재정과 세금을 중앙의 예루살렘으로 가져옴으로써, 결국 신권 정치권력만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백성들은 신권 정치권력에 등을 돌렸으며, 사회 통합을 이루어 국력을 하나로 모으고자 한 시도 는 실패하였다. 또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앗수르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고자한 시도 역시 무산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들의 개혁은 사회 종교적인 면에서 궁극적으로 모두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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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 요시야 개혁 제의 중앙화 우상 제거 산당제거 유월절 왕권 강화 사회적 통합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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