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2월 22일 당시 23세의 애국청년 이재명에 의해 이루어진 이완용 암살 기도 사건은 비록 그 결과는 실패로 끝났지만 지금까지도 민족정기를 크게 고취시켰던 사건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이 사건에 연관되어 이재명의 재판을 위해 당시 작성된 이완용의 상해감정서에는 여러 부분에서 의미있는 흉부외과적 기술이 포함되어 있다. 즉 늑골하연 자상, 늑간동맥 출혈, 폐손상, 좌흉부타박상, 외상성 늑막염 등의 전문적인 흉부외과 병명이 언급되고 있으며 그리고 기흉과 혈흉을 의미하는 기술(폐를 손상하여 창공으로부터 출혈 및 호흡에 수반된 공기 출입이 있었다)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흉부천자술에 의한 혈성 삼출액 배출이라는 외과적 시술에 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여러 정황 분석 상 한국사 최초의 흉부외과 관련 의학기록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본 연구논문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한 사건을 통하여 한국사 최초의 흉부외과 관련 기록을 발굴, 분석하였다는데 그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다.
1909년 12월 22일 당시 23세의 애국청년 이재명에 의해 이루어진 이완용 암살 기도 사건은 비록 그 결과는 실패로 끝났지만 지금까지도 민족정기를 크게 고취시켰던 사건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이 사건에 연관되어 이재명의 재판을 위해 당시 작성된 이완용의 상해감정서에는 여러 부분에서 의미있는 흉부외과적 기술이 포함되어 있다. 즉 늑골하연 자상, 늑간동맥 출혈, 폐손상, 좌흉부타박상, 외상성 늑막염 등의 전문적인 흉부외과 병명이 언급되고 있으며 그리고 기흉과 혈흉을 의미하는 기술(폐를 손상하여 창공으로부터 출혈 및 호흡에 수반된 공기 출입이 있었다)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흉부천자술에 의한 혈성 삼출액 배출이라는 외과적 시술에 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여러 정황 분석 상 한국사 최초의 흉부외과 관련 의학기록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본 연구논문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한 사건을 통하여 한국사 최초의 흉부외과 관련 기록을 발굴, 분석하였다는데 그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다.
On Dec 22, 1909, a young patriot called Lee Jae-Myung (1986~1910) attempted to assassinate Lee Wan-Yong, the prime minister of the last Yi Choseon cabinet and he later signed the annexation treaty with imperial Japan. Despite that Lee Jae-Myung failed in this assassination attempt, his heroic deed m...
On Dec 22, 1909, a young patriot called Lee Jae-Myung (1986~1910) attempted to assassinate Lee Wan-Yong, the prime minister of the last Yi Choseon cabinet and he later signed the annexation treaty with imperial Japan. Despite that Lee Jae-Myung failed in this assassination attempt, his heroic deed motivated national pride thereafter. After this attempted assassination, a medical record was prepared about stab wound that was inflicted upon Lee Wan-Yong during the trial of Lee Jae-Myung, and this record included many significant specific descriptions that were concerned with thoracic surgery. They included an intercostal stab wound and intercostal arterial hemorrhage, lung injury, chest contusion, traumatic pleuritis and supposedly pneumo-and hemothorax. Thoracentesis for drainage of the serosanguinous pleural effusion was also mentioned. This medical record is judged to be the first written medical record on thoracic surgery in Korean history. The aim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content of the record as it is related with a well known episode in modern Korean history.
On Dec 22, 1909, a young patriot called Lee Jae-Myung (1986~1910) attempted to assassinate Lee Wan-Yong, the prime minister of the last Yi Choseon cabinet and he later signed the annexation treaty with imperial Japan. Despite that Lee Jae-Myung failed in this assassination attempt, his heroic deed motivated national pride thereafter. After this attempted assassination, a medical record was prepared about stab wound that was inflicted upon Lee Wan-Yong during the trial of Lee Jae-Myung, and this record included many significant specific descriptions that were concerned with thoracic surgery. They included an intercostal stab wound and intercostal arterial hemorrhage, lung injury, chest contusion, traumatic pleuritis and supposedly pneumo-and hemothorax. Thoracentesis for drainage of the serosanguinous pleural effusion was also mentioned. This medical record is judged to be the first written medical record on thoracic surgery in Korean history. The aim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content of the record as it is related with a well known episode in modern Kore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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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결론적으로 이 논문은 한국사 최초의로 생각되는 기록의 발굴과 함께 이에 연관된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함으로서 흉부외과와 관련된 초기 흔적의 일단을 파악하는데 그 연구 목적이 있다.
본 연구는 이런 측면에서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닌 한 사건을 통하여 흉부 외과학이라는 학문의 초기 모습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분석하였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제안 방법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역사적 실체의 파악이 주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관해서는 가장 사실관계 파악에 애를 쓴 것으로 판단되는의 집필후기에 주로 근거하고 그 외 약간의 추가 자료를 참고하여 기술하였다.
1907년 7 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이준 열사의 순국 소식을 접한 후 매국노 숙청을 결심하고 그해 가을 귀국하였다. 이후 동지를 규합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창상 내의 삼출물 및 응혈을 치료하여 기능을 회복하고자 12월 23일 양창을 상하좌우로 절개하여 내용물을 제거하였다. 외과학의 제칙에 따라 치료를 시행함으로서 점차 소망한 결과를 거두고 6주 만에 창면(創面)을 완전히 치료할 수 있었다.
대상 데이터
경성지방재판소에서의 몇 차례 공판 결과 이재명은 1910년 5월 18일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어 7월 20일 열린 2심에서도 사형이 선고되었고 8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본 연구에서 거론된사건은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에 발생한 것으로 당시 국내의 전반적인 의료 환경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열악한 상태였다.
50분 정도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고 이완용은 대한의원 홍화당 제5호실(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시계탑 건물)에 입원하였다.
역사적 사건의 핵심 내용이다. 이른바 을사오적의 대표 자격인 이완용을 칼로 찌른 자객은 당시 21세의 청년이재명(1986~ 1910)이었다(Fig. 1A). 그리고 그때 이완용은 며칠 전 사망한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모를 위해 오전 11시 부터 종현 천주교회당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Fig.
이재명은직후 체포된 뒤 인근 구리개(지금의 을지로) 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과 심문 과정을 거친 뒤 이듬해인 1910년 1월 29일 재판에 공식 기소되었다.
이론/모형
그리고 이 진단소견에 연관된 역사적 사실의 파악은 대부분 박상우의 역사소설<칼>과 김삼우의 논문<의사 이재명의 삶과 죽음>을 참조하였다[3, 4]. 사건이 발생한 구한말의 의료현황에 관한 사실은 관련 단행본을 참조하였다[5]. 그 외 각종 신문기사, 인터넷 자료, 기타 관계자 증언 등이 참고되었다.
성능/효과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완용은 입원 53일 후인 1910년 2월 14일에 자상에서 완전히 회복된 상태에서 퇴원할 수 있었다.
창상 내의 삼출물 및 응혈을 치료하여 기능을 회복하고자 12월 23일 양창을 상하좌우로 절개하여 내용물을 제거하였다. 외과학의 제칙에 따라 치료를 시행함으로서 점차 소망한 결과를 거두고 6주 만에 창면(創面)을 완전히 치료할 수 있었다. 부상 당시 엎어져서 좌흉부를 강하게 타박 당했음으로 왼쪽 가슴의 후액와연(後腋窩緣)에 제 4 늑간에서 제 7 늑간에 걸쳐 손바닥 크기의 피멍이 생겼는데 수일 만에 암자색으로 변하였다.
이상과 같이 본 감정서에는 명백하게 늑골하연 자상, 늑간동맥 출혈, 폐손상, 좌흉부타박상, 외상성 늑막염 등의 흉부외과 전문 병명이 언급되고 있으며 또한 기흉과 혈흉을 의미하는 기술(폐를 손상하여 창공으로부터 출혈 및 호흡에 수반된 공기 출입이 있었다)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Fig. 5). 그리고 흉부천자술에 의한 혈성삼출액 배출이라는 외과적 시술에 관해서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이완용은 순조롭게 회복되면서 입원한지 33일 만에 혼자 보행이 가능하였으며 53일이 지난 1910년 2월 14 일에는 퇴원할 수 있게 되었다.
제 2, 제 3 늑간을 자통하면서 제 2 늑골의 하연을 잘라 늑간 동맥을 절단하여 과다 출혈을 일으키고 또한 폐를 손상하여 창공으로부터 출혈 및 호흡에 수반된 공기 출입이 있었다.
후속연구
있다. 즉 염증성 삼출물의 흡수가 전혀 흔적이 없을 정도로 이루어지면 후유증이 없을 수도 있으나, 이는 좀 더 시일이 경과하여야만 만성질환으로 남을지 건강 상태로 회복될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당장은 예후의 좋고 나쁨(良否)을 단언하기 어렵다.
참고문헌 (6)
이성행. 흉부외과소사. 1989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흉부외과학교실사. 2000
박상우. 칼. 창해. 2005
김삼웅. 의사 이재명의 삶과 죽음. 문학과 경계 겨울호(통권 11호) 2003;411-36
병원역사문화센터. 동아시아 서양의학을 만나다. 태학사. 2008
김동산. 이완용 암살의거 수기. 신태양 1958년 9월 - 월간중앙 2004년 8월에 서지연구가 김종욱에 의해 역사발굴의 형식으로 재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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