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고려 초조대장경 각판(刻板: 雕造)과 관련한 발원(發願)의 장소(發願地) 및 그 일자(發願日)의 문제를 규명한 연구이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초조대장경 각판 발원의 단서는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서 '초조대장경의 초창지단(初創之端)'의 내용에 입각하였다. 2) 거란군이 침략하고, 현종이 남순(南巡: 몽진)하다가 다시 개경(開京)으로 환궁하기까지의 기간 사이에, 군신(君臣)이 함께 거란군(契丹軍)을 물리치기 위한 대규모 행사의 개최 또는 신명(神明)이 보답하는 제사(報祠)를 올린 기록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검색하였다. 그 결과, '"고려사절요" 제3권, 현종 2년(1011) 2월 정사일(丁巳: 13일)'條의 내용이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의 초조대장경 각판 발원의 내용과 일맥상통함을 파악하였다. 이에 따라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의 내용 또한 역사적 진실(史實)을 담고 있는 기록임을 파악하였다. 3) "고려사절요" 현종 2년(1011) 2월 13일의 기록 즉,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가도록 신명(神明)이 보답할 수 있는 제사를 올렸다'는 사항은 바로 2월 15일에 청주 행궁(行宮)에서 거행된 <연등회(燃燈會)>의 의식 및 제사를 말하는 것이며, 이 연등회의 제례(祭禮)에서 신명께 기고(祈告)한 내용은 곧 '초조대장경 각판의 발원'이었을 것임을 입증하였다. 4) 그리하여 초조대장경 각판의 발원장소는 청주행궁(淸州行宮)이며, 그 발원일자(發願日)는 1101년(현종 2) 음력 2월 15일임을 규명하였다.
이 논문은 고려 초조대장경 각판(刻板: 雕造)과 관련한 발원(發願)의 장소(發願地) 및 그 일자(發願日)의 문제를 규명한 연구이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초조대장경 각판 발원의 단서는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서 '초조대장경의 초창지단(初創之端)'의 내용에 입각하였다. 2) 거란군이 침략하고, 현종이 남순(南巡: 몽진)하다가 다시 개경(開京)으로 환궁하기까지의 기간 사이에, 군신(君臣)이 함께 거란군(契丹軍)을 물리치기 위한 대규모 행사의 개최 또는 신명(神明)이 보답하는 제사(報祠)를 올린 기록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검색하였다. 그 결과, '"고려사절요" 제3권, 현종 2년(1011) 2월 정사일(丁巳: 13일)'條의 내용이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의 초조대장경 각판 발원의 내용과 일맥상통함을 파악하였다. 이에 따라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의 내용 또한 역사적 진실(史實)을 담고 있는 기록임을 파악하였다. 3) "고려사절요" 현종 2년(1011) 2월 13일의 기록 즉,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가도록 신명(神明)이 보답할 수 있는 제사를 올렸다'는 사항은 바로 2월 15일에 청주 행궁(行宮)에서 거행된 <연등회(燃燈會)>의 의식 및 제사를 말하는 것이며, 이 연등회의 제례(祭禮)에서 신명께 기고(祈告)한 내용은 곧 '초조대장경 각판의 발원'이었을 것임을 입증하였다. 4) 그리하여 초조대장경 각판의 발원장소는 청주행궁(淸州行宮)이며, 그 발원일자(發願日)는 1101년(현종 2) 음력 2월 15일임을 규명하였다.
This research investigated the facts about the place and date of praying for the engraving of the first edition of Tripitaka Koreana. Major findings are as follows: 1) The very first idea of engraving the first edition of Tripitaka Koreana was evidenced in the record of 'The beginning of Tripitaka K...
This research investigated the facts about the place and date of praying for the engraving of the first edition of Tripitaka Koreana. Major findings are as follows: 1) The very first idea of engraving the first edition of Tripitaka Koreana was evidenced in the record of 'The beginning of Tripitaka Koreana' from 'Daejanggakpan Gunsin Gigomun' written by YiGyuBo. 2) After comparing the contents of 'Daejanggakpan Gunsin Gigomun' with the record of the third volume of 'Goryeosa Jeolyo' dated February 13, 1011, this researcher confirmed that 'Daejanggakpan Gunsin Gigomun' also recorded this historical fact. 3) In the third volume of 'Goryeosa Jeolyo' dated February 13th, 1011, it is documented that a ritual was held to pray to the gods of heaven and earth for expelling the Kitan from the country. Further, the document states that this particular ritual consisted of a ceremony of lanterns held at the temporary palace in Cheongju on February 15th, to report to the gods on 'the engraving of the first edition of Tripitaka Koreana' 4) Therefore, it is verified that the date of praying for the engraving of the first edition of Tripitaka Koreana was February 15th of the lunar calendar, 1011(the second year of King Hyunjong's reign), and the place was the temporary palace in Cheongju.
This research investigated the facts about the place and date of praying for the engraving of the first edition of Tripitaka Koreana. Major findings are as follows: 1) The very first idea of engraving the first edition of Tripitaka Koreana was evidenced in the record of 'The beginning of Tripitaka Koreana' from 'Daejanggakpan Gunsin Gigomun' written by YiGyuBo. 2) After comparing the contents of 'Daejanggakpan Gunsin Gigomun' with the record of the third volume of 'Goryeosa Jeolyo' dated February 13, 1011, this researcher confirmed that 'Daejanggakpan Gunsin Gigomun' also recorded this historical fact. 3) In the third volume of 'Goryeosa Jeolyo' dated February 13th, 1011, it is documented that a ritual was held to pray to the gods of heaven and earth for expelling the Kitan from the country. Further, the document states that this particular ritual consisted of a ceremony of lanterns held at the temporary palace in Cheongju on February 15th, to report to the gods on 'the engraving of the first edition of Tripitaka Koreana' 4) Therefore, it is verified that the date of praying for the engraving of the first edition of Tripitaka Koreana was February 15th of the lunar calendar, 1011(the second year of King Hyunjong's reign), and the place was the temporary palace in Cheo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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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필자는 2010년에 발표한 “초조대장경 조조의 동기 및 배경에 관한 연구”에서 <대장각판군신기고문>과 『고려사』 제129권의 내용을 결합하여 ‘초조대장경 조조의 동기는 거란군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있었음’을 재확인하면서 이규보의 <기고문> 내용이 역사적 진실임을 입증(김성수 2010, 133-165)한 바 있다. 본 연구에서는 필자의 위 논문을 기반으로 하여, 정사(正史: 一次史料)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초조대장경 관련 기사를 발굴ㆍ재해석함으로써, 초조대장경의 각판과 관련한 그 구체적인 발원지(發源地) 및 그 발원일(發願日)을 규명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초조대장경 각판의 발원’에 관한 사항은 역사적 진실(史實)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이상의 본론에서는 지금까지 학계에서 규명되지 못한 고려 초조대장경 각판 발원의 장소(發願地)와 그 일자(發願日)의 문제를 고구(考究)하여 보았다. 이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에 따라 본 연구에서는 위 이규보의 내용을 단서로 하여, 초조대장경 각판 발원의 장소(發源地) 및 일자(發願日)를 규명하고자 한다.
라 하였다. 이제 위의 인용문에 함축된 의미를 상세하게 풀이하면서 분석해 보기로 하자.
제안 방법
둘째, 거란군의 침략에 의한 고려군과의 전투상황 및 약 한 달 이상에 걸친 현종의 남순(南巡: 몽진) 여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1011년 1월 1일부터 2월 10일까지의 『고려사절요』와 『고려사』의 기록에서 초조대장경 각판의 발원과 관련한 사항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셋째, 그리하여 『고려사절요』와 『고려사』에서, ‘현종 2년 2월 정사일(丁巳: 13일)조, 기미일(己未: 15일)조, 경신일(庚申: 16일)조, 정묘일(丁卯: 23일)조’의 기록, 즉 ‘현종이 청주(淸州)에 머물렀을 때의 안홍점의 진언(進言) 및 연등회(燃燈會)의 개최’ 사항을 주목하였다.
앞 장에서는 거란과의 전쟁 상황 및 약 한 달 이상에 걸친 현종의 남순(南巡: 몽진)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1010년 12월 하순부터 1011년 2월 10일까지의 『고려사절요』와 『고려사』의 기록에서는 현종 일행의 분주한 남순 과정 및 거란과의 전쟁 상황만 전개되고 있을 뿐, 현종과 그 신하들이 일정한 의례를 치루면서 초조대장경 각판의 발원(發願)과 관련이 있음직한 그 어떤 기록의 실마리(端緖)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상과 같은 논술에서 우리는, 이규보의 에 기록된 초조대장경 각판 발원에 관한 내용은 ‘『고려사절요』 제3권 현종 신해(辛亥) 2년(1011), 2월 13일(丁巳)조 및 15일(己未)조’에 기록된 상황과 그 내용이 일맥상통함을 파악하였다.
대상 데이터
채문이 요탄역(饒呑驛)에 이르러서야 왕후들을 만나 모시고 돌아오니, 왕이 기뻐서 왕후를 위하여 광주에서 3일 동안 머물렀다. 무인일(戊寅: 1월 4일)에 왕이 광주를 출발하여 비뇌역(鼻腦驛)에서 머물렀다.22) 신사일(辛巳: 7일)에는 왕이 공주(公州)에 머물렀고, 임오일(壬午: 1월 8일)에 삼례역(參禮驛: 전북 전주군 삼례면)에 이르니 전주절도사 조용겸(趙容謙)이 야복(野服: 잠옷)차림으로 임금의 행차를 맞이하는 불충(不忠)을 저질렀다.
채문이 그들을 데리고 행궁으로 나아가니, 왕이 하공진의 장계를 보고, 거란의 군사가 [개경에서] 물러간 것을 알고 기뻐하였다. 을미일(乙未: 1월 21일)에 현종은 행차(行次)를 [북쪽으로] 돌려서 복룡현(伏龍縣)에서 머물렀다. 왕의 일행은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 중에는, 경자일(更子: 1월 26일)에 전주(全州)에 머물러 7일을 지냈다.
성능/효과
1) 2월 13일(丁巳)에 감찰어사 안홍점이 현종에게 아뢴 것은 [1010년 12월 갑술(甲戌)일에] 거란 군사의 선봉대가 장단(長湍: 경기도 파주시)43)까지 왕의 일행을 추격하였을 때, [그 남동쪽에 있는] 감악(紺岳: 감악산; 경기도 양주시 경계의 산)44)의 신사에 고려 군대의 깃발과 군마(軍馬)가 있는 듯하여, 거란군은 두려워 더 이상 왕의 일행을 추격하지 못한 실제 상황, 즉 이른바 ‘감악 신사의 기이(奇異)’를 제시하고 있다.
2) 위와 같은 ‘감악 신사의 기이’를 제시한 후, 안홍점은 다시 중국의 고사(故事) 중 ‘전진(前秦)의 황제 부견(苻堅)이 진(晉)나라를 치러 갔다가 패하고 오는 길에, 팔공산의 초목(草木)들이 모두 진(晉)나라 군사로 보여, 부견의 군사들이 놀라 무너졌다’는 이른바 ‘전진 부견의 고사’를 구체적인 사례로 부연설명하고 있다.
둘째, 거란의 침략으로 인하여 고려는 국가적인 위기에 처하게 되자, 국가의 수호를 위한 민족적 단결과 결속이 절실하게 요구되었고, 이를 뒷받침해 줄 사상적 기반이 절실하게 필요하였을 것이다.
셋째, 이러한 상황에서 현종은 고려 건국의 시조인 태조 왕건의 유조(遺條)인 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등장시키게 되었으며, 고려의 국가의례에서 태조(太祖) 신앙이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게 하기 위하여 를 개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송(宋) 태종 옹희(雍熙:984-987)년간에 거란군이 송나라에 쳐들어와 국경에는 계엄이 선포되고 성(城)안에 큰 혼란이 일어났는데, 상원절(上元節)을 맞아 연등회를 개설하여 전란의 불안을 진정시킨 사례가 있었다. 이러한 사례를 주목하면, 고려 현종 또한 전란으로 인한 국민(百姓)들의 혼란과 불안을 진정시키고자, 몽진중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적인 집회인 <연등회>를 개최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첫째, 초조대장경 각판 발원의 단서를 이규보의 에서 ‘거란의 군대가 고려를 침략하자,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하였는데, 거란병은 송악성(松岳城: 開京; 고려 국토)에서 물러가지 않으므로, 이에 현종은 신하들과 함께 위없는 대원(無上大願)을 발하여 대장경 판본을 각성할 것을 맹서(誓)한 후에야 비로소 거란군사가 스스로 물러갔다’는 내용을 주목하였다.
후속연구
이 문제를 규명하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일차 사료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이 시기에 해당하는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초조대장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극복 내지는 방지하기 위해서는, 초조대장경에 관한 더욱 철저한 연구가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질의응답
핵심어
질문
논문에서 추출한 답변
초조대장경의 각판 발원 1000주년을 기념하게 하는 단서는?
올해 2011년은 고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의 각판(刻板: 雕造)이 발원(發願)된 지 꼭 1000년이 되는 해이다. 초조대장경의 각판 발원 1000주년을 기념하게 하는 단서는, 이규보(李奎報)가 고종(高宗)을 대신하여 작성한<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서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지게 된 처음의 연유(緣由), 즉 ‘그 初創之端(초창지단)은 현종 2년(1011)의 일’1)이라는 기록에 입각한 것이다.
고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의 각판(刻板: 雕造)이 발원(發願)된 지 꼭 1000년이 되는 해는?
올해 2011년은 고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의 각판(刻板: 雕造)이 발원(發願)된 지 꼭 1000년이 되는 해이다. 초조대장경의 각판 발원 1000주년을 기념하게 하는 단서는, 이규보(李奎報)가 고종(高宗)을 대신하여 작성한<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서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지게 된 처음의 연유(緣由), 즉 ‘그 初創之端(초창지단)은 현종 2년(1011)의 일’1)이라는 기록에 입각한 것이다.
현종이 그의 부모를 위하여 판각한 명복경은 이 4종의 불경(佛經)에 국한되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본 이유는?
그러나 池內宏의 주장은 우리의 분명한 역사적 기록을 왜곡(歪曲)하면서 억지로 날조(捏造)한 것이다. 왜냐하면, <玄化寺碑陰記(현화사비음기)>에 의하면, 실제로 현종이 현화사를 창건하면서 그의 부모를 위한 명복경(冥福經)으로 엄선한 불경은 ‘『대반야경』 600권․ 『화엄경』 [40권․60권․80권 본]3부류․ 『금광명경』․ 『묘법연화경』을 목판으로 판각하여 이 절에 비치하였다’라고 위 비문(碑文)에 굳건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7) 따라서 현종이 그의 부모를 위하여 판각한 명복경은 이 4종의 불경(佛經)에 국한되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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