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창군 마리면 고학리에 소재한 용원정원림(龍源亭園林) 및 마을주변의 지명과 조형물 등 문화경관적 요소들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토대로 용원정원림과 마을 내 배태(胚胎)된 해주오씨의 장소애착 방식과 특질을 확인하는 한편, 종족경관(宗族景觀)의 형성과정을 추찰하고자 한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해주인 구화공 오수(九華公吳守)가 마을에 터 잡은 이래 그의 후손들이 선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다듬어 온 공간으로 1964년 용원정이 건립되었다. 이곳은 구화공의 유허지로 이후 후손들의 생활과 풍류의 거점이자 숭모(崇慕)의 정을 교감하는 원림적 장소로서 지속적으로 관리되어 왔음이 기문과 문헌자료 그리고 주변에 배치된 여러 시설 및 다수의 바위에 새긴 바위글씨를 통해서도 충분히 감지된다. 안의삼동 중 하나인 원학동의 지맥인 학봉(鶴峰)을 상징하는 고학리와 이곳에 각인된 '방학(訪鶴) 정학(停鶴)'의 의미는 해주오씨의 생태적 정착과 서식을 설명하는 경관언어가 분명하다. 장소성이 "어떤 실체로서 존재하기 보다는 담론과 실천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회적 고안물이다"라는 정의를 상기할 때, 주변 지명과 용원정원림 그리고 마을 도처에 산재한 다수의 조영물은 한국적 장소성의 특성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종족집단의 기념비적 장소 전승의 사례이다. 구화공이 고학리에 정착한 이래 해주오씨 종족집단은 서식지 정착단계를 거쳐 장소성 구현을 통한 경관형성단계를 이루었다. 이후 조상숭모와 장소착근 현상이 되풀이되면서 영역성은 확산되고, 장소의 재생산이 이루어졌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도 재실 건립과 유허비 조성 등이 이어졌으며, 해방 이후에도 용원정 건립 등 장소재현의 단계를 거쳐 현재까지도 다양한 형태의 기념비적 종족경관이 펼쳐지고 있으며, 이러한 장소애착(場所愛着)과 장소착근(場所着根)의 결과가 바로 우리가 지각하는 '거창군 마리면 고학리의 종족경관'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종족집단의 장소애착과 장소착근의 현상이 되풀이되어 형성된 영역성 확산의 산물이야말로 종족경관의 실체인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집단 기억 속에 재차 구축 전승되고 있는 고유한 장소에 대한 후손들의 진지한 관심과 사랑 그리고 진정한 장소애착의 정신을 확인하게 된다.
경남 거창군 마리면 고학리에 소재한 용원정원림(龍源亭園林) 및 마을주변의 지명과 조형물 등 문화경관적 요소들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토대로 용원정원림과 마을 내 배태(胚胎)된 해주오씨의 장소애착 방식과 특질을 확인하는 한편, 종족경관(宗族景觀)의 형성과정을 추찰하고자 한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해주인 구화공 오수(九華公吳守)가 마을에 터 잡은 이래 그의 후손들이 선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다듬어 온 공간으로 1964년 용원정이 건립되었다. 이곳은 구화공의 유허지로 이후 후손들의 생활과 풍류의 거점이자 숭모(崇慕)의 정을 교감하는 원림적 장소로서 지속적으로 관리되어 왔음이 기문과 문헌자료 그리고 주변에 배치된 여러 시설 및 다수의 바위에 새긴 바위글씨를 통해서도 충분히 감지된다. 안의삼동 중 하나인 원학동의 지맥인 학봉(鶴峰)을 상징하는 고학리와 이곳에 각인된 '방학(訪鶴) 정학(停鶴)'의 의미는 해주오씨의 생태적 정착과 서식을 설명하는 경관언어가 분명하다. 장소성이 "어떤 실체로서 존재하기 보다는 담론과 실천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회적 고안물이다"라는 정의를 상기할 때, 주변 지명과 용원정원림 그리고 마을 도처에 산재한 다수의 조영물은 한국적 장소성의 특성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종족집단의 기념비적 장소 전승의 사례이다. 구화공이 고학리에 정착한 이래 해주오씨 종족집단은 서식지 정착단계를 거쳐 장소성 구현을 통한 경관형성단계를 이루었다. 이후 조상숭모와 장소착근 현상이 되풀이되면서 영역성은 확산되고, 장소의 재생산이 이루어졌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도 재실 건립과 유허비 조성 등이 이어졌으며, 해방 이후에도 용원정 건립 등 장소재현의 단계를 거쳐 현재까지도 다양한 형태의 기념비적 종족경관이 펼쳐지고 있으며, 이러한 장소애착(場所愛着)과 장소착근(場所着根)의 결과가 바로 우리가 지각하는 '거창군 마리면 고학리의 종족경관'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종족집단의 장소애착과 장소착근의 현상이 되풀이되어 형성된 영역성 확산의 산물이야말로 종족경관의 실체인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집단 기억 속에 재차 구축 전승되고 있는 고유한 장소에 대한 후손들의 진지한 관심과 사랑 그리고 진정한 장소애착의 정신을 확인하게 된다.
This research, which sought to conjecture the formation process of tribal landscape while confirming the method and characteristic of place attachment of the Haeju Oh Family, which is rooted within the village and the Yongwon Pavilion and Garden of Gohak-ri, Mari-myeon, Geochang-gun, Gyeongnam, reac...
This research, which sought to conjecture the formation process of tribal landscape while confirming the method and characteristic of place attachment of the Haeju Oh Family, which is rooted within the village and the Yongwon Pavilion and Garden of Gohak-ri, Mari-myeon, Geochang-gun, Gyeongnam, reached the following conclusion based on the interpretation and analysis of cultural and scenic elements such as the names and sculptures nearby the village and Yongwon Pavilion and Garden. This place is where Goohwagong Oh Sue, a Haeju person, settled down. This is also where his descendants were refined while yearning for their ancestors. The Yongwon Pavilion was established in 1964. It can be sufficiently known that this place was managed and maintained as a garden-like place where the spirit of yearning was shared and which was the basis of the life and entertainment of descendants after being the monumental place for Master Oh Guhwa, through stories, documents, nearby facilities, and writings on many rocks. It is clear that the meaning of 'Bang-Hak(訪鶴) and Jung-Hak (停鶴)' which is carved in many places around this area and Gohak-ri, which symbolizes the Hakbong(crane peak), the vein of Wonjak-dong which is one of the Ahneuisamdong(three outstanding scenic places of Ahneui), is a scenic language explaining the ecological settlement and lives of the Haeju Oh Family. When considering the definition of a sense of place as "a 'social device' made by discussions and practice rather than its existing as a substance," the many structures scattered around the village, Yongwon Pavilion Garden, and nearby designations show the monumental place inheritance of tribal group clearly exhibiting the characteristics of a Korean sense of place. Ever since Guhwagon Oh Sue settled down in Guhak-ri, the tribal group of Haeju Oh Family went through a life settlement phase and landscape formation phase by realizing the sense of place. Afterwards, while yearning for ancestors and repeatedly rooting down in the place, territoriality expanded and the place was reproduced. In particular, timber houses and monuments were constructed during the Japanese Colonization Period, and after independence, the Yongwon Pavilion was constructed through place reproduction, and monumental tribal landscape is currently being expressed in various forms to this day. Thus, allowing to reach the conclusion of 'Tribal Landscape of Gohak-ri, Mari-myeong, Geochang-gun,' which we perceive today. The products of territorial expansion formed by the repeating phenomenon of place rootedness and place attachment by tribal groups are in fact the substance of tribal landscape. Through such, it is possible to confirm the true spirit of place attachment and the earnest interest and affection of descendants towards a unique place that is repeatedly constructed and inherited within the group memory.
This research, which sought to conjecture the formation process of tribal landscape while confirming the method and characteristic of place attachment of the Haeju Oh Family, which is rooted within the village and the Yongwon Pavilion and Garden of Gohak-ri, Mari-myeon, Geochang-gun, Gyeongnam, reached the following conclusion based on the interpretation and analysis of cultural and scenic elements such as the names and sculptures nearby the village and Yongwon Pavilion and Garden. This place is where Goohwagong Oh Sue, a Haeju person, settled down. This is also where his descendants were refined while yearning for their ancestors. The Yongwon Pavilion was established in 1964. It can be sufficiently known that this place was managed and maintained as a garden-like place where the spirit of yearning was shared and which was the basis of the life and entertainment of descendants after being the monumental place for Master Oh Guhwa, through stories, documents, nearby facilities, and writings on many rocks. It is clear that the meaning of 'Bang-Hak(訪鶴) and Jung-Hak (停鶴)' which is carved in many places around this area and Gohak-ri, which symbolizes the Hakbong(crane peak), the vein of Wonjak-dong which is one of the Ahneuisamdong(three outstanding scenic places of Ahneui), is a scenic language explaining the ecological settlement and lives of the Haeju Oh Family. When considering the definition of a sense of place as "a 'social device' made by discussions and practice rather than its existing as a substance," the many structures scattered around the village, Yongwon Pavilion Garden, and nearby designations show the monumental place inheritance of tribal group clearly exhibiting the characteristics of a Korean sense of place. Ever since Guhwagon Oh Sue settled down in Guhak-ri, the tribal group of Haeju Oh Family went through a life settlement phase and landscape formation phase by realizing the sense of place. Afterwards, while yearning for ancestors and repeatedly rooting down in the place, territoriality expanded and the place was reproduced. In particular, timber houses and monuments were constructed during the Japanese Colonization Period, and after independence, the Yongwon Pavilion was constructed through place reproduction, and monumental tribal landscape is currently being expressed in various forms to this day. Thus, allowing to reach the conclusion of 'Tribal Landscape of Gohak-ri, Mari-myeong, Geochang-gun,' which we perceive today. The products of territorial expansion formed by the repeating phenomenon of place rootedness and place attachment by tribal groups are in fact the substance of tribal landscape. Through such, it is possible to confirm the true spirit of place attachment and the earnest interest and affection of descendants towards a unique place that is repeatedly constructed and inherited within the group mem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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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이와 같은 추론을 입증할 장소로 선정한 곳이 바로 거창 고학리 해주오씨의 용원정원림을 포함한 병항마을과 고신마을이다. 본 연구는 용원정원림 및 마을주변의 지명과 조형물 등 이곳에 산재한 문화경관적 요소들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토대로 고학리의 장소 특질을 확인하는 한편, 용원정원림과 마을 내 배태된 장소애착의 방식과 종족경관의 형성과정을 추찰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장소애착과 장소착근의 현상이 ‘종족의 문화경관 혹은 ‘조경적 힘’이라는 문화현상으로 집적·구현된 장소현장을 실증적으로 확인하였다는데 의의를 두며, 조경설계적 측면에서 집단의 기념공간 및 추모공원의 원형적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계기이자, 현대적 장소재현을 위한 교훈이 되길 기대한다.
본 연구에서는 종족경관 형성과정의 중요한 동인(動因)으로, 장소착근 및 장소애착의 현상에 주목하여 이를 논증하기 위한 「개념적 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 번째 단계는 해주오씨 구화공이 1470년 병항마을에 입향하면서 1660년 고신마을로 확장되는 등 종족마을의 형성이 시작되는 이 단계를 ‘서식지 정착단계’로 보고자 한다.
가설 설정
구화재는 정면 4칸·측면 2칸의 규모로 툇간 없이 측면 2칸 전체에 방을 가설하였다.
제안 방법
고신마을의 구화재(九華齋)는 구화공의 강학처로 중시조인공을 추모하여 1922년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이다. 구화재는 재실과 대문간으로 구성되었으며, 평탄한 대지의 배면 쪽으로 재실을 앉히고, 사고석으로 쌓은 담장을 둘러 그 모서리에 대문간을 두었다. 구화재는 정면 4칸·측면 2칸의 규모로 툇간 없이 측면 2칸 전체에 방을 가설하였다.
더불어 유허비·유적비·정려각·영모비 등이 이미 형성된 장소 주변에 재현되거나 추모비 건립이 성행하며, 주변 마을 등으로 장소 및 경관 모방을 통한 영역성 확산이 이루어진 이 단계를 장소재현을 통한 ‘종족경관의 재생산단계’로 규정짓고자 한다(표 4 참조).
본 연구는 문헌연구와 현장조사 그리고 후손과의 인터뷰 등으로 구분된다. 문헌연구는 향토지 및 관련논문 분석을 통하여 정명인 용원(龍原)의 의미와 기본정신 그리고 용원정 건립의 연원 등을 파악함으로써 내재된 시대정신을 고찰하였다. 본 연구대상 공간의 거주 주체인 거창군 마리면 고학리 해주오씨 종족집단의 14세기 이후 행적을 투영하는 중요한 창문이 바로 그들의 족보라고 판단하였다.
본 연구는 문헌연구와 현장조사 그리고 후손과의 인터뷰 등으로 구분된다. 문헌연구는 향토지 및 관련논문 분석을 통하여 정명인 용원(龍原)의 의미와 기본정신 그리고 용원정 건립의 연원 등을 파악함으로써 내재된 시대정신을 고찰하였다.
연구의 내용은 네 가지로 요약되는데, 첫째는 용원정기·유적비·시문·기문 등의 분석과 해석을 통한 해주오씨의 입향조인 구화공과 관련된 장소를 확인하는 것이며, 둘째는 용원정원림 주변의 공간 및 시설물 등 추모의 흔적을 살펴 이를 바탕으로 한 장소성을 구명하는 것이다.
현장조사는 ‘비참여관찰법(non-participant observation)2)’에 의하여 현장연구가 실행되었고, 사진 및 동영상 촬영 그리고 주민과의 인터뷰 등을 병행한 ‘해석적 연구방법3)’을 실시하였다. 특히 용원정과 병항마을 일대의 조영물과 바위글씨의 내용을 기록하고, 족보 및 인터뷰 등을 통하여 조영 및 바위글씨를 새긴 시기를 추론하였다. 인터뷰 대상자는 현재 고학리 병항마을에 거주하는 구화공의 13대손이자 지군사공파 30세손인 오준식(吳俊植, 83세)翁으로, 마을의 내력과 관련 장소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았다.
그 중 핵심 연구대상은 용원정원림 및 그 배후마을인 병항·고신마을에 형성된 재실 등의 문화공간 그리고 기념물 등을 포함한다. 한편, 연구의 진행방식은 구화공과 그 후손들이 마을에 터전을 마련하며 이룬 역사적 기념물과 행적 등 다양한 기념비적 문화행위의 흔적을 편년체식으로 추적하고, 그 장소 유형 및 성격 그리고 의미 등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대상 데이터
그 중 핵심 연구대상은 용원정원림 및 그 배후마을인 병항·고신마을에 형성된 재실 등의 문화공간 그리고 기념물 등을 포함한다.
한편, 연구대상 주변의 지명과 경물에 대한 유래 및 공간특성은 고지도 및 1:25,000 지형도 그리고 향토자료지 등을 기초자료로 활용하였다. 본 연구에서 주로 인용한 문헌자료는 용원정기를 비롯한 용원정상량문 등의 기문과 시문 등을 포함한다(표 1 참조).
경남 함양 안의에서 3번 국도를 따라 마리면 소재지 채 못미쳐 좌측에 있는 거창군 마리면 병항마을 입구에 거문고처럼 누운 돌다리와 함께 용원정이 있다. 본 연구의 대상은 해주오씨지군사공파(海州吳氏知郡事公派) 중 구화공휘수파(九華公諱守派)의 집성촌인 경남 거창군 마리면 고학리의 내력과 용원정일대 약 0.5km 권역권의 주요 경물과 지명에 대한 연원 및 해주오씨 입향조인 구화공 오수를 비롯한 후손들의 활동과 행적 그리고 공간 의미 등이다. 그 중 핵심 연구대상은 용원정원림 및 그 배후마을인 병항·고신마을에 형성된 재실 등의 문화공간 그리고 기념물 등을 포함한다.
해주오씨의 족보1)는 고려시대로부터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유서가 깊다. 본고에서는 海州吳氏知郡事公派譜 卷之上 九華公諱守派 족보(그림 1 참조)와 오기화 편(2001) 해주오씨지군사공파세보를 조사 분석하였다. 현장조사는 ‘비참여관찰법(non-participant observation)2)’에 의하여 현장연구가 실행되었고, 사진 및 동영상 촬영 그리고 주민과의 인터뷰 등을 병행한 ‘해석적 연구방법3)’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추론을 입증할 장소로 선정한 곳이 바로 거창 고학리 해주오씨의 용원정원림을 포함한 병항마을과 고신마을이다. 본 연구는 용원정원림 및 마을주변의 지명과 조형물 등 이곳에 산재한 문화경관적 요소들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토대로 고학리의 장소 특질을 확인하는 한편, 용원정원림과 마을 내 배태된 장소애착의 방식과 종족경관의 형성과정을 추찰하고자 한다.
특히 용원정과 병항마을 일대의 조영물과 바위글씨의 내용을 기록하고, 족보 및 인터뷰 등을 통하여 조영 및 바위글씨를 새긴 시기를 추론하였다. 인터뷰 대상자는 현재 고학리 병항마을에 거주하는 구화공의 13대손이자 지군사공파 30세손인 오준식(吳俊植, 83세)翁으로, 마을의 내력과 관련 장소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았다. 한편, 연구대상 주변의 지명과 경물에 대한 유래 및 공간특성은 고지도 및 1:25,000 지형도 그리고 향토자료지 등을 기초자료로 활용하였다.
인터뷰 대상자는 현재 고학리 병항마을에 거주하는 구화공의 13대손이자 지군사공파 30세손인 오준식(吳俊植, 83세)翁으로, 마을의 내력과 관련 장소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았다. 한편, 연구대상 주변의 지명과 경물에 대한 유래 및 공간특성은 고지도 및 1:25,000 지형도 그리고 향토자료지 등을 기초자료로 활용하였다. 본 연구에서 주로 인용한 문헌자료는 용원정기를 비롯한 용원정상량문 등의 기문과 시문 등을 포함한다(표 1 참조).
이론/모형
현장조사는 ‘비참여관찰법(non-participant observation)2)’에 의하여 현장연구가 실행되었고, 사진 및 동영상 촬영 그리고 주민과의 인터뷰 등을 병행한 ‘해석적 연구방법3)’을 실시하였다.
성능/효과
셋째, 종족집단과 그들이 이룬 경관형성과정에서 발생하는 긍정적 감정의 결속결과가 장소애착이라 정의한다면, 장소착근은 경관의 재현과 정착과정을 통하여 획득된 자연 발생적인 뿌리의식의 결과이다.
첫째, 장소애착은 장소에 대한 종족집단이 지닌 감정의 질을 결정하며, 지리적 배경을 포함한 사회․역사․문화적현상의 수렴으로 표출된다.
질의응답
핵심어
질문
논문에서 추출한 답변
용원정은 무엇인가?
용원정은 해주인 구화공을 기려 그의 후손들이 1964년 세운 누정이다(박기용, 1998). ‘용원’이라는 명칭은 기백산에서 흐르기 시작한 용폭(龍瀑)에서 취한 것으로, 이는 조상의 근원을 찾겠다는 의미로(하종한, 2005) 중의법적인 표현이다. 즉, 용원정은 ‘용폭의 근원을 생각하는 정자’이며, 이는 구화공이 일찍이 마을에 터 잡은 이래 후손들이 선조를 사모하는 마음이 잘 드러난 누정명칭이다. 용원정원림에서 상촌마을의 경사진 길을 1.
용원정의 중방에는 무엇이 묘사되어 있는가?
용원정에서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화려하게 장식된 천장의 단청으로, 천장 중앙으로 청룡과 황룡을 조각한 대들보가 가로 놓였고, 대금․생황․자바라․장구․거문고․나각․비파․소고 등의 악기를 연주하며 하강하는 선녀들과 장난스럽게 웃는 도깨비 등이 그려져 있다. 또한 용원정의 중방에는 상산사호․호랑이․백학․영지․무릉도원․신선세계․은둔지 등을 묘사하였으니, 불교와 유교가 공존하면서도 원래의 토속적인 멋까지 엿볼 수 있다. 건물은 현재 병항마을에 거주하는 구화공의 후손이 관리하고 있으니, 馬利面誌(1995)에 실린 구화공의 12대손 택룡(澤龍)의 시는 용원정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쌀다리 일대에는 쌀다리를 만든 두 형제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무엇이 세워져 있는가?
2m×높이 2m’ 규모의 자연석 널다리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일대에는 이 다리를 만든 두 형제의 공덕을 기린 시혜불망비(施惠不忘碑)와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지금은 길이 막혀 다만 상징적인 기념물로서의 임무만을 다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나들목’이라 칭할 만큼 중요한 길목이었다(http://ww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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