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자연경승지에 주목하고, 그 자연대상지에 의미를 부여하며 가치를 매기는 행위를 통해 명승(名勝)으로 인식해왔다. 자연이 어떻게 명승으로 인식되어 가는가 하는 것은 자연풍토, 사회, 문화, 시대흐름 등에 의해 달라지기 마련이다. 지리산(智異山)은 남한 내륙에서 가장 높고, 가장 넓은 산인만큼 옛 선조들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수려한 풍광을 배경으로 학문을 수양하거나 학식을 나눌 수 있는 유람처(遊覽處)의 성격으로 지리산을 자주 거론하였다. 조선시대에 지리산을 찾은 문인 학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으며, 이 중에 일부는 자신의 여정을 유람록(遊覽錄)으로 남겼다. 이에 본 연구는 지리산 유람을 즐기며 기록되었던 유람록의 내용을 중심으로 지리산 천왕봉 유람경로의 위치를 파악하고, 당시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각에 보여졌던 경관자원의 가치를 알아보자 하였다. 지리산의 경관자원은 산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동기나 욕구의 변화와 관련이 있고, 이러한 변화는 더이상 선인들이 다녔던 길의 답습의 개념이 아닌 새로운 탐방로의 개척과 편리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 사람들이 생각하는 명승의 개념은, 이용하려는 동기와 목적에서 차이를 보이더라도 넓은 의미의 명승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본 연구에서 분석된 유람경로와 경관자원 중 인물사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문인의 경로는 '선현(先賢)들의 발자취 개념'을 응용한 프로그램 개발이 필요하며, 이러한 문화관광콘텐츠 개발을 통해 지역의 활성화 및 경제적 자립도 향상에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자연경승지에 주목하고, 그 자연대상지에 의미를 부여하며 가치를 매기는 행위를 통해 명승(名勝)으로 인식해왔다. 자연이 어떻게 명승으로 인식되어 가는가 하는 것은 자연풍토, 사회, 문화, 시대흐름 등에 의해 달라지기 마련이다. 지리산(智異山)은 남한 내륙에서 가장 높고, 가장 넓은 산인만큼 옛 선조들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수려한 풍광을 배경으로 학문을 수양하거나 학식을 나눌 수 있는 유람처(遊覽處)의 성격으로 지리산을 자주 거론하였다. 조선시대에 지리산을 찾은 문인 학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으며, 이 중에 일부는 자신의 여정을 유람록(遊覽錄)으로 남겼다. 이에 본 연구는 지리산 유람을 즐기며 기록되었던 유람록의 내용을 중심으로 지리산 천왕봉 유람경로의 위치를 파악하고, 당시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각에 보여졌던 경관자원의 가치를 알아보자 하였다. 지리산의 경관자원은 산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동기나 욕구의 변화와 관련이 있고, 이러한 변화는 더이상 선인들이 다녔던 길의 답습의 개념이 아닌 새로운 탐방로의 개척과 편리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 사람들이 생각하는 명승의 개념은, 이용하려는 동기와 목적에서 차이를 보이더라도 넓은 의미의 명승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본 연구에서 분석된 유람경로와 경관자원 중 인물사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문인의 경로는 '선현(先賢)들의 발자취 개념'을 응용한 프로그램 개발이 필요하며, 이러한 문화관광콘텐츠 개발을 통해 지역의 활성화 및 경제적 자립도 향상에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Human has noticed a beautiful natural scenery and appreciated it as a scenic site by giving meaning to it and evaluating it. How the beautiful natural scenery was appreciated as a scenic site depends on natural features, social and cultural environments, and the current of the times. Mt. Jiri is the...
Human has noticed a beautiful natural scenery and appreciated it as a scenic site by giving meaning to it and evaluating it. How the beautiful natural scenery was appreciated as a scenic site depends on natural features, social and cultural environments, and the current of the times. Mt. Jiri is the highest mountain in inland South Korea and keeps ancestors' history and culture intact. Joseon Dynasty literary men frequently mentioned Mt. Jiri as a tourist attraction where they could pursue and share their studies against its beautiful natural scenery. The countless literary men visited Mt. Jiri and some of them left their journeys as travelling records. This research aimed at apprehending travel routes of Chunwang Peak of Mt. Jiri based on the contents of travelling records and investigating the scenic site value of scenic resources as the literary men in Joseon Dynasty recognized. The scenic resources of Mt. Jiri were related to the change of the reason or motivation of person who climbed and it should be noted that there was a change of reason or motivation in climbing Mt. Jiri from a following of master's paths to discovery of a new trails. Thus, even if there was a difference in reason or purpose of natural scenic beauty, the concept of scenic sites of the past and the present day should be included into the extended meaning of scenic sites. This research aimed the routes of well-known literary men need to be developed as programs utilizing "the concept of ancient sages' footprints" and the development of these contents shall be used for vitalization and self-support of a regional economy.
Human has noticed a beautiful natural scenery and appreciated it as a scenic site by giving meaning to it and evaluating it. How the beautiful natural scenery was appreciated as a scenic site depends on natural features, social and cultural environments, and the current of the times. Mt. Jiri is the highest mountain in inland South Korea and keeps ancestors' history and culture intact. Joseon Dynasty literary men frequently mentioned Mt. Jiri as a tourist attraction where they could pursue and share their studies against its beautiful natural scenery. The countless literary men visited Mt. Jiri and some of them left their journeys as travelling records. This research aimed at apprehending travel routes of Chunwang Peak of Mt. Jiri based on the contents of travelling records and investigating the scenic site value of scenic resources as the literary men in Joseon Dynasty recognized. The scenic resources of Mt. Jiri were related to the change of the reason or motivation of person who climbed and it should be noted that there was a change of reason or motivation in climbing Mt. Jiri from a following of master's paths to discovery of a new trails. Thus, even if there was a difference in reason or purpose of natural scenic beauty, the concept of scenic sites of the past and the present day should be included into the extended meaning of scenic sites. This research aimed the routes of well-known literary men need to be developed as programs utilizing "the concept of ancient sages' footprints" and the development of these contents shall be used for vitalization and self-support of a regional econo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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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이에 본 연구는 조선시대 문인들이 지리산을 오르면서, 어느 장소에서 무엇을 보았는가에 대한 유람록 내용에 중점을 두어 경관자원을 분석하고, 경관자원으로 인식되었던 장소의 정체성을 제고하는데 의의를 두고자 한다. 나아가서 도출된 연구의 결과와 자료가 인문분야 및 타 분야의 DB로 활용되고, 저성장 사회에서의 여타 지리산 경관자원들을 이용한 고부가가치 창출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자 한다.
다음으로 여러 경관자원이 위치한 장소들이 조선시대에 나타난 차이의 정도를 살펴봄으로써 해당 대상지 일원의 가치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장소에 대한 가치는 ①장소가 현존하면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 ②장소는 현존하지만 기록에 나타난 모습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는 곳, ③장소가 존재하지 않고 터만 존재하거나, 존재하더라도 그 변형이 심하여 옛 모습을 유추하기 힘든 곳 3가지의 유형으로 구분하여 각각에 대하여 상·중·하의 가치를 부여하였다(표 5-a 참조).
또한, 지리산 관련 ‘유산시(遊山詩)’나 ‘유산기(遊山記)’ 등에서 여정의 추적이 확실한 기록을 참고하여 연구내용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지리산 유람을 즐기며 기록되었던 유람록의 내용을 중심으로 지리산을 유람한 경로를 파악하고, 당시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각에 보여 졌던 경관자원의 가치를 알아보자 하였으며, 본 연구에서 도출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문헌조사 및 예비조사의 자료를 추가·보완하여 2013년 3차례(8월, 9월, 10월)에 걸쳐 본조사와 함께 현장 인터뷰를 실시하였다1). 이 과정에서 도출된 조선시대 문인들의 천왕봉 유람경로를 작성하고, 이 기록에 자주 등장하여 묘사되어진 경관자원을 선정하여 집중분석을 통해 명승으로서의 가치를 도출하고자 하였다. 최종적으로 조선시대 지리산 유람록을 작성한 문인 31명의 이동경로를 시작점과 도착점을 중심으로 나누어서, 도출된 여정을 각각의 도면에 중복하여 경로를 표현하였다.
이에 본 연구는 조선시대 문인들이 지리산을 오르면서, 어느 장소에서 무엇을 보았는가에 대한 유람록 내용에 중점을 두어 경관자원을 분석하고, 경관자원으로 인식되었던 장소의 정체성을 제고하는데 의의를 두고자 한다. 나아가서 도출된 연구의 결과와 자료가 인문분야 및 타 분야의 DB로 활용되고, 저성장 사회에서의 여타 지리산 경관자원들을 이용한 고부가가치 창출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자 한다.
지리산 유람은 개인의 성향에 따라 공간을 이동하기 때문에 연구의 범위를 지리산권 외부까지 확대할 경우 연구대상지가 광범위해져 자료수집 및 분석에 있어 객관성 결여 및 연구 대상의 범위 제한이 어렵다. 이에 지리산 유람의 형태를 지리산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와 지리산 외부에서 지리산을 조망하는 경우 2가지로 크게 구분하고, 그 중 지리산 내부에서 유람한 과정과 내용만을 공간적 범위로 설정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는 지리산국립공원 지정구역인 약 483km2를 공간적 범위로 설정하였다(그림 1 참조).
제안 방법
는 유람 당시의 여러 상황들을 유추하여 경로를 분석하고 도면화 하였다. 경로유추는 수치지형도상의 지리적 여건을 바탕으로 ① 기록된 장소와 거리상 이동가능 여부, ② 실제 소요되는 장소간의 이동시간, ③ 실제 이동에 소요된 체류날짜 등의 항목을 판단하여 예상경로를 추적하였다.
또한 유람경로가 불확실한 인물들의 경로는 기록된 당시의 지명이나 현장답사를 병행하여, 주변 지형상황 판단을 통해 유추하였다. 기록된 유람경로는 추적이 불가능한 경로는 제외하였다.
먼저 기록 여부를 바탕으로 각 대상지에 속해있는 경관자원을 구분하였고, 언급된 장소에 대한 횟수가 장소가 갖는 가치와 고하를 결부시킬 수 있는 기준이 될 수는 없으나, 경관자원에 대한 묘사나 표현이 나타나는 장소는 문인들이 천왕봉을 오르면서 인상 깊었거나 중요하게 여겼던 장소라 볼 수 있기에 기록에서 언급된 횟수를 확인하는 작업을 실시하였다(표 5-b 참조).
문헌조사 및 예비조사의 자료를 추가·보완하여 2013년 3차례(8월, 9월, 10월)에 걸쳐 본조사와 함께 현장 인터뷰를 실시하였다1).
조선시대 문인들이 천왕봉을 목표로 이동하며 감상한 경관자원을 분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5구간에 위치한 경관자원 요소를 다시 14개의 일원으로 구분하여 유람록 내용을 재분석하였다.
천왕봉 위에는 돌무더기 옆으로 3칸 판자건물이 위치하고, 그 안에는 성모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천왕봉에서 보이는 여러 도읍들을 둘러보다가 낙조를 바라보며 감흥을 기록하였다.
이 과정에서 도출된 조선시대 문인들의 천왕봉 유람경로를 작성하고, 이 기록에 자주 등장하여 묘사되어진 경관자원을 선정하여 집중분석을 통해 명승으로서의 가치를 도출하고자 하였다. 최종적으로 조선시대 지리산 유람록을 작성한 문인 31명의 이동경로를 시작점과 도착점을 중심으로 나누어서, 도출된 여정을 각각의 도면에 중복하여 경로를 표현하였다. 또한, 파악된 주경로선상에 나타나는 경관자원의 장소가 표시된 ‘지리산 경관자원도’와 ‘조선시대 유람경로도’를 작성하였다.
대상 데이터
그리고 하산경로는 현재 산청군 금서면 오봉리로 가는 동안의 경로가 없다. 따라서 민재남의 천왕봉 등산경로는 추정이 어려우나, 대원사에서 출발한 C-1노선과 쑥밭재를 지나는 B-1노선이 가장 유사하여 경로추정에 사용하였다.
이에 지리산 유람의 형태를 지리산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와 지리산 외부에서 지리산을 조망하는 경우 2가지로 크게 구분하고, 그 중 지리산 내부에서 유람한 과정과 내용만을 공간적 범위로 설정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는 지리산국립공원 지정구역인 약 483km2를 공간적 범위로 설정하였다(그림 1 참조).
문헌조사에서 도출된 조선시대 유람경로와 경로주변에 나타난 경관자원의 현황파악을 위한 예비조사는 2013년 5월, 6월 두 차례 실시하였다. 문헌조사 및 예비조사의 자료를 추가·보완하여 2013년 3차례(8월, 9월, 10월)에 걸쳐 본조사와 함께 현장 인터뷰를 실시하였다1).
본 연구를 위한 조사는 문헌조사와 현지조사로 이뤄졌으며, 여기에서 문헌조사는 한국고전번역연구원이 진행 중인 한국고전종합DB의「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고전번역총서(古典飜譯叢書)」의 자료를 기초로 활용하였다. 또한, 지리산 관련 ‘유산시(遊山詩)’나 ‘유산기(遊山記)’ 등에서 여정의 추적이 확실한 기록을 참고하여 연구내용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의 시간적 범위는 1392∼1910년 사이의 총 31명의 기록을 연구하였다(표 1 참조).
조선시대 지리산 유람록에서는 천왕봉 주변에서 가까운 장소인 일월대와 천왕샘의 기록이 대부분의 문인들의 기록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소에 대한 기록이 10회 이하로 언급된 인물은 총 31명 중 무려 25명이였다. 이는 지리산 유람에 있어서 전체적인 여정의 기록보다는 일부 인상 깊은 장소를 대상으로 기록을 남긴 것을 뜻하며, 그 외 지리산 유람과정에서 경관자원에 세부적으로 기록한 문인은 김종직(金宗直, 1431∼1492)·남효온(南孝溫, 1454∼1492)·김일손(金馹孫, 1464∼1498)·유몽인(柳夢寅, 1559∼1623)·송광연(宋光淵, 1638∼1695)·박내오(朴來吾, 1713∼1785) 총 6명으로 나타났다.
조선시대 지리산 천왕봉을 다녀와서 유람록을 남긴 문인은, 1472년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유람에서부터 1902년 회산(晦山) 이택환(李宅煥)의 유람까지 총 31편을 중심으로 경관자원을 분석하였다.
조선시대에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것을 목적으로 유람하였던 총 31명 인물의 경로를 분석하였다.
허목은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을 거쳐 천왕봉을 등정하고 돌아오는 여정을 하였다. 허목의 유람록에는 이동 간에 바라보거나 쉬어갔던 장소들에 대한 내용은 대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성능/효과
그러나 지리산 천왕봉을 유람한 조선시대 문인 31명의 기문을 전문적 종합분석 작업을 실시하여 경관자원에 대한 충실한 묘사와 유람경로에 대해 정확히 기록한 김종직(金宗直, 1431∼1492)·남효온(南孝溫, 1454∼1492)·김일손(金馹孫, 1464∼1498)·유몽인(柳夢寅, 1559∼1623)·송광연(宋光淵, 1638∼1695)·박내오(朴來吾, 1713∼1785) 등 6명의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각각에 대한 유람록 내용의 표현 묘사를 바탕으로 현재 활용되고 있는 경관분석 및 지리적 정보를 접목하여 조경학적 차원에서 사료적 가치의 우수함을 밝혔고, 분석결과 유람록에 작성된 내용을 인상 깊은 기억에 대한 표현방법의 하나로 볼 때, 그 표현이 천왕봉, 일월대, 천왕당(터), 통천문 등과 같은 특정 장소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쑥밭재·법계사·신선너덜·삼신동·하동바위 일원의 경관요소들은 기록에 의해서만 일부 옛 경관이 유지되어 명소로서의 판단에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 외 백무당터 등 4개소의 일원의 경관요소들은 현재에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주변경관의 변형이 심하였으며, 대상지의 가치를 제고할 기록도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넷째, 조선시대의 유람록에 나타난 경관자원은 지리산 천왕봉을 중심으로 동부지역의 높은 봉우리와 일부 계곡부에 집중분포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현재는 천왕봉·반야봉·노고단의 3대 주봉과 여러 계곡으로 경관자원의 개소수가 조선시대에 비해 증가하였다.
둘째, 조선시대 문인들이 다녔던 지리산 천왕봉 유람경로는 총 5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지리산 유람 시 안내책자와 같은 지침서는 김종직의 「유두류록」로 그 중요성은 문인들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지리산 유람 시 안내책자와 같은 지침서는 김종직의 「유두류록」로 그 중요성은 문인들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의 이와 같은 행위는 지리산 유람의 목적에 인물사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명인의 발자취를 답습하며 명인들의 생각까지 배우고자 하는 순례개념의 유람이 가장 특징적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 문인들이 지리산 천왕봉을 등정의 목적지로 유람 할 경우의 등반코스를 추출하여 각각에 대한 코스를 현재의 수치지형도에 표현하여, 모든 경로를 중첩 할 경우 ①백무동∼천왕봉, ②동강마을∼천왕봉, ③대원사∼천왕봉, ④중산리∼천왕봉, ⑤삼신동[신흥마을]∼천왕봉으로 나타났다.
또한 조선시대 문인들이 지리산 천왕봉을 등정의 목적지로 유람 할 경우의 등반코스를 추출하여 각각에 대한 코스를 현재의 수치지형도에 표현하여, 모든 경로를 중첩 할 경우 ①백무동∼천왕봉, ②동강마을∼천왕봉, ③대원사∼천왕봉, ④중산리∼천왕봉, ⑤삼신동[신흥마을]∼천왕봉으로 나타났다.
셋째, 조선시대 천왕봉 유람자료에는 명승개념의 가치가 있는 14개의 대상지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위의 표와 같이 천왕봉을 오르는 최단경로인 백무동을 경유하는 A-2노선을 이용한 사람은 양대박·박여량·허목·박장원·송광연·조귀명·홍씨·이동항·남주헌 등 9명이었고, 중산리를 경유한 D-1노선은 김일손·정식·박내오·이갑룡·허유·강병주·송병순·김회석·이택환 등 9명으로 A-2노선과 D-1노선의 이용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리산 유람록에 나타나는 경관자원은 천왕봉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두 개의 주능선과 협곡을 따라 형성된 다섯 개의 계곡부에 주로 분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첫째, 지리산을 오르며 기록되었던 유람록은 특정 장소에서의 행위와 감흥에 대한 묘사에만 집중되었고, 주변 경관자원 장소의 표현이 생략된 작품들은 조경학적 차원에서 경관분석이나 지리적 정보의 유추 작업을 실시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리산 천왕봉을 유람한 조선시대 문인 31명의 기문을 전문적 종합분석 작업을 실시하여 경관자원에 대한 충실한 묘사와 유람경로에 대해 정확히 기록한 김종직(金宗直, 1431∼1492)·남효온(南孝溫, 1454∼1492)·김일손(金馹孫, 1464∼1498)·유몽인(柳夢寅, 1559∼1623)·송광연(宋光淵, 1638∼1695)·박내오(朴來吾, 1713∼1785) 등 6명의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후속연구
본 연구는 분석자료 선정에 있어서 ‘유람록’이라는 문헌에 의존한 ‘지리산 천왕봉 유람구간’이라는 일부를 설정하여 부분적으로 연구가 진행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는 지리산 유람에 있어서 전체적인 여정의 기록보다는 일부 인상 깊은 장소를 대상으로 기록을 남긴 것을 뜻하며, 그 외 지리산 유람과정에서 경관자원에 세부적으로 기록한 문인은 김종직(金宗直, 1431∼1492)·남효온(南孝溫, 1454∼1492)·김일손(金馹孫, 1464∼1498)·유몽인(柳夢寅, 1559∼1623)·송광연(宋光淵, 1638∼1695)·박내오(朴來吾, 1713∼1785) 총 6명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유람록은 추후 지리산 경관자원 분석 및 경로파악 등 추후 지리산 경관자원 연구에 도움이 될 사료로서의 가능성을 보였다.
본 연구는 분석자료 선정에 있어서 ‘유람록’이라는 문헌에 의존한 ‘지리산 천왕봉 유람구간’이라는 일부를 설정하여 부분적으로 연구가 진행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에 폭넓고 정밀한 경관자원분석 차원에서 범위설정과 추가적인 평가방법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사료되며, 이에 대한 보다 정밀한 연구는 추후 과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질의응답
핵심어
질문
논문에서 추출한 답변
조선시대의 유람록에 나타난 경관자원이 집중 분포한 곳은 어디인가?
넷째, 조선시대의 유람록에 나타난 경관자원은 지리산 천왕봉을 중심으로 동부지역의 높은 봉우리와 일부 계곡부에 집중분포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현재는 천왕봉·반야봉·노고단의 3대 주봉과 여러 계곡으로 경관자원의 개소수가 조선시대에 비해 증가하였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을 조선시대 지리산 유람 시 안내책자와 같은 지침서로 중요하게 여기며 답습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시대 지리산 유람 시 안내책자와 같은 지침서는 김종직의 「유두류록」로 그 중요성은 문인들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의 이와 같은 행위는 지리산 유람의 목적에 인물사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명인의 발자취를 답습하며 명인들의 생각까지 배우고자 하는 순례개념의 유람이 가장 특징적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 문인들이 지리산 천왕봉을 등정의 목적지로 유람 할 경우의 등반코스를 추출하여 각각에 대한 코스를 현재의 수치지형도에 표현하여, 모든 경로를 중첩 할 경우 ①백무동∼천왕봉, ②동강마을∼천왕봉, ③대원사∼천왕봉, ④중산리∼천왕봉, ⑤삼신동[신흥마을]∼천왕봉으로 나타났다.
현재 경관자원의 개소수가 조선시대에 비해 증가한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러나, 현재는 천왕봉·반야봉·노고단의 3대 주봉과 여러 계곡으로 경관자원의 개소수가 조선시대에 비해 증가하였다. 이는 지리산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동기나 욕구의 변화와 관련이 있고, 이러한 변화는 더이상 선인들이 다녔던 길의 답습의 개념이 아닌 새로운 탐방로의 개척과 편리성에 주목하여 산을 등반할 수 있는 경로를 개척한 것이다. 이와 함께 새롭게 생성된 등산 경로를 따라 발굴되는 우수한 경관자원은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장소로 가치가 변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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