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명승 제1호 "명주 청학동 소금강"의 지명 유래와 변천과정 등에 대한 오류 검토의 일환으로, 관련 고지도, 지리지, 유산기 등의 고문헌 그리고 바위글씨의 분석과 해석을 통해 확인된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지리지 분석 결과 '소금강'이란 지명은 17세기 중반의 "여지도서"에서 처음 등장한 이래, 20세기 초반 발간된 "증수임영지"에서 재현되고 있으나 고지도에서는 청학동 청학산 청학사 등의 지명 이외에 소금강이란 지명은 발견되지 않는다. '청학산'이란 지명이 최초로 발견되는 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지만, 지명으로서의 최초 기록은 율곡의 "유청학산기"로 이 기록에는 소금강'이란 지명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청학산'이란 지명만 확인될 뿐이다. '이후 이순인의 "고담일고", 허균의 송별기, 허목의 "청학동구룡연기", 윤순거의 "파동일기" 그리고 이원조의 서간(書簡) 등을 볼 때 약 3세기 이상 이곳은 '청학산' 또는 '청학동'이란 지명으로 불려온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소금강'이란 지명이 확인되는 최초 기록은 18세기 중반 작(作)인 강재항의 시이다. 또한 금강사 앞 이능암(二能巖)에 새겨진 '소금강(小金剛)'이란 바위글씨의 주체는 크기, 서법, 전체적인 배치구도와 마모 정도 그리고 지리지의 기록 등을 고려할 때 1870년 또는 1930년에서야 동일한 주체인 이능계원(二能契員)에 의해 새겨진 것으로 보임에 따라 이곳 지명 유래의 탄탄한 근거였던 '소금강(小金剛)' 바위글씨를 율곡의 글씨로 단정할 만한 근거는 없다. 이상의 결과를 종합할 때, 율곡의 "유청학산기" 이후 이곳은 줄곧 '청학산 청학동'으로 불려왔으며 '소금강'이란 지명은 18세기 중반 이후 "입재선생유고" 중 "오언고시조"와 "여지도서"를 시작으로 "동유일기" 등 유람기 등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소금강이란 이칭(異稱)이 일반화되면서 혼용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요컨대 기존 명승 제1호 지명에 큰 오류가 있다고 보기는 곤란하지만 율곡의 유람과 관련된 명소로서의 장소성을 부각시키는 측면에서는 '청학동 소금강'보다는 '청학산 청학동'이란 지명이 보다 합당한 지명인 것으로 판단한다. 아울러 본 연구과정에서 확인된 1664년 윤선거 일행이 현 식당암에 각자한 '청학산(靑鶴山)', '경담(鏡潭)'의 지명 바위글씨는 고전적 유람 텍스트로서의 "유청학산기"의 영향력을 살필 수 있는 증표이자 기호학파 선비들의 율곡에 대한 숭모와 추념의식이 고스란히 담긴 표식으로 보존이 요망된다.
국내 명승 제1호 "명주 청학동 소금강"의 지명 유래와 변천과정 등에 대한 오류 검토의 일환으로, 관련 고지도, 지리지, 유산기 등의 고문헌 그리고 바위글씨의 분석과 해석을 통해 확인된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지리지 분석 결과 '소금강'이란 지명은 17세기 중반의 "여지도서"에서 처음 등장한 이래, 20세기 초반 발간된 "증수임영지"에서 재현되고 있으나 고지도에서는 청학동 청학산 청학사 등의 지명 이외에 소금강이란 지명은 발견되지 않는다. '청학산'이란 지명이 최초로 발견되는 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지만, 지명으로서의 최초 기록은 율곡의 "유청학산기"로 이 기록에는 소금강'이란 지명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청학산'이란 지명만 확인될 뿐이다. '이후 이순인의 "고담일고", 허균의 송별기, 허목의 "청학동구룡연기", 윤순거의 "파동일기" 그리고 이원조의 서간(書簡) 등을 볼 때 약 3세기 이상 이곳은 '청학산' 또는 '청학동'이란 지명으로 불려온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소금강'이란 지명이 확인되는 최초 기록은 18세기 중반 작(作)인 강재항의 시이다. 또한 금강사 앞 이능암(二能巖)에 새겨진 '소금강(小金剛)'이란 바위글씨의 주체는 크기, 서법, 전체적인 배치구도와 마모 정도 그리고 지리지의 기록 등을 고려할 때 1870년 또는 1930년에서야 동일한 주체인 이능계원(二能契員)에 의해 새겨진 것으로 보임에 따라 이곳 지명 유래의 탄탄한 근거였던 '소금강(小金剛)' 바위글씨를 율곡의 글씨로 단정할 만한 근거는 없다. 이상의 결과를 종합할 때, 율곡의 "유청학산기" 이후 이곳은 줄곧 '청학산 청학동'으로 불려왔으며 '소금강'이란 지명은 18세기 중반 이후 "입재선생유고" 중 "오언고시조"와 "여지도서"를 시작으로 "동유일기" 등 유람기 등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소금강이란 이칭(異稱)이 일반화되면서 혼용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요컨대 기존 명승 제1호 지명에 큰 오류가 있다고 보기는 곤란하지만 율곡의 유람과 관련된 명소로서의 장소성을 부각시키는 측면에서는 '청학동 소금강'보다는 '청학산 청학동'이란 지명이 보다 합당한 지명인 것으로 판단한다. 아울러 본 연구과정에서 확인된 1664년 윤선거 일행이 현 식당암에 각자한 '청학산(靑鶴山)', '경담(鏡潭)'의 지명 바위글씨는 고전적 유람 텍스트로서의 "유청학산기"의 영향력을 살필 수 있는 증표이자 기호학파 선비들의 율곡에 대한 숭모와 추념의식이 고스란히 담긴 표식으로 보존이 요망된다.
As part of reconsideration on naming of the scenic site No.1 "Myeongju Cheonghak-dong Sogumgang," this study attempts to identify whether there is any mistake with reference to place naming of Korea's No.1 scenic site and if so, to correct the problem by examining the origin of the name and its tran...
As part of reconsideration on naming of the scenic site No.1 "Myeongju Cheonghak-dong Sogumgang," this study attempts to identify whether there is any mistake with reference to place naming of Korea's No.1 scenic site and if so, to correct the problem by examining the origin of the name and its transition progress through analysis and interpretation of old maps, ancient documents such as traditional geographic books, Yusangi(遊山記) and Letters Carved on the Rocks. The finding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In traditional geographic books, a term of 'Mt. Cheonghak(靑鶴山)' was first found from "SinjungDonggookyeojisungram(新增東國輿地勝覽)" and after a place name, 'Sogumgang(小金剛)' first appeared in "Yeojidoseo(輿地圖書)" in the middle of the 17th century, it was reproduced in "Jungsuimyeongji(增修臨瀛誌)", which was published in the early 20th century. However, as a result of analyzing old maps, the place name, Sogumgang cannot be found in any local or national map except place names such as Cheonghak-dong, Mt. Cheonghak and Temple Cheonghak. Even though 'Biseonam,' 'Cheonyudong,' 'Gyeongdam' and 'Mt. Cheonghak' appear in Yulgok's "Yucheonghaksangi(遊靑鶴山記)", any part in which 'Sogumgang' was referred is not found. Later, Cheonghak-dong Sogumgang seemed to had been called 'Mt. Cheonghak' or 'Cheonghak-dong(靑鶴洞)' for more than three centuries as seen in Lee Sun-il's "Godamilgo(孤潭逸稿)", Heo Geun's farewell records, Heo Mok's "Cheonghak-dong Guryongyeongi(靑鶴洞九龍淵記)", Yoon Sun-geo(尹宣擧)'s "Padongilgi(巴東日記)" and Lee Won-jo's letters and a poem composed by Gang Jae-hang in the middle of the 18th century is the only record in which the place name, 'Sogumgang' is shown. Meanwhile, 'Sogumgang' carved on Inung Rock(二能巖) in front of Temple Gumgang is presumed to be carved by Inunggyeoone(二能契員) in the 1870s or in 1930s, considering the size of each character, calligraphy, overall layout, wear extent and records in Jiriji. Therefore, no evidence can be found to say that each character of 'Sogumgang' was written by Yulgok because 'Sogumgang' has strong evidences of the origin of its place name. To sum up the findings stated above, since Yulgok's "Yucheonghaksangi", this place seems to have been referred as 'Mt. Cheonghak Cheonghak-dong' and as it is confirmed that the place name, 'Sogumgang' first appeared in "Ohyeongosijo(五言古時調)" of "Ibjaeseonsangyugo(立齋先生遺稿)" and "Yeojidoseo" in the middle of the 18th century, it can be inferred that the place name, Sogumgang had been partly mingled as an another name of Mt. Cheonghak. Therefore, even though it is difficult to say the existing place name has a significant problem, it is thought that it will be better to name 'Mt. Cheonghak Cheonghak-dong' rather than 'Cheonghak-dong Sogumgang' in order to stress on this place's traditional identity as a scenic site related to Yulgok. In addition, as confirmed in this study process, it is said that each character of place names, 'Mt. Cheonghak' and 'Gyeongdam(鏡潭)' and name 'Yoon Sun-geo' carved in Rock Sikdang stated in Yoon Sun-geo's "Padongilgi" in 1964 is a pledge showing the influence of "Yucheonghaksangi" as an ancient travel literature as well as a mark of the Giho school scholars' respect and spirit to honor Yulgok.
As part of reconsideration on naming of the scenic site No.1 "Myeongju Cheonghak-dong Sogumgang," this study attempts to identify whether there is any mistake with reference to place naming of Korea's No.1 scenic site and if so, to correct the problem by examining the origin of the name and its transition progress through analysis and interpretation of old maps, ancient documents such as traditional geographic books, Yusangi(遊山記) and Letters Carved on the Rocks. The finding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In traditional geographic books, a term of 'Mt. Cheonghak(靑鶴山)' was first found from "SinjungDonggookyeojisungram(新增東國輿地勝覽)" and after a place name, 'Sogumgang(小金剛)' first appeared in "Yeojidoseo(輿地圖書)" in the middle of the 17th century, it was reproduced in "Jungsuimyeongji(增修臨瀛誌)", which was published in the early 20th century. However, as a result of analyzing old maps, the place name, Sogumgang cannot be found in any local or national map except place names such as Cheonghak-dong, Mt. Cheonghak and Temple Cheonghak. Even though 'Biseonam,' 'Cheonyudong,' 'Gyeongdam' and 'Mt. Cheonghak' appear in Yulgok's "Yucheonghaksangi(遊靑鶴山記)", any part in which 'Sogumgang' was referred is not found. Later, Cheonghak-dong Sogumgang seemed to had been called 'Mt. Cheonghak' or 'Cheonghak-dong(靑鶴洞)' for more than three centuries as seen in Lee Sun-il's "Godamilgo(孤潭逸稿)", Heo Geun's farewell records, Heo Mok's "Cheonghak-dong Guryongyeongi(靑鶴洞九龍淵記)", Yoon Sun-geo(尹宣擧)'s "Padongilgi(巴東日記)" and Lee Won-jo's letters and a poem composed by Gang Jae-hang in the middle of the 18th century is the only record in which the place name, 'Sogumgang' is shown. Meanwhile, 'Sogumgang' carved on Inung Rock(二能巖) in front of Temple Gumgang is presumed to be carved by Inunggyeoone(二能契員) in the 1870s or in 1930s, considering the size of each character, calligraphy, overall layout, wear extent and records in Jiriji. Therefore, no evidence can be found to say that each character of 'Sogumgang' was written by Yulgok because 'Sogumgang' has strong evidences of the origin of its place name. To sum up the findings stated above, since Yulgok's "Yucheonghaksangi", this place seems to have been referred as 'Mt. Cheonghak Cheonghak-dong' and as it is confirmed that the place name, 'Sogumgang' first appeared in "Ohyeongosijo(五言古時調)" of "Ibjaeseonsangyugo(立齋先生遺稿)" and "Yeojidoseo" in the middle of the 18th century, it can be inferred that the place name, Sogumgang had been partly mingled as an another name of Mt. Cheonghak. Therefore, even though it is difficult to say the existing place name has a significant problem, it is thought that it will be better to name 'Mt. Cheonghak Cheonghak-dong' rather than 'Cheonghak-dong Sogumgang' in order to stress on this place's traditional identity as a scenic site related to Yulgok. In addition, as confirmed in this study process, it is said that each character of place names, 'Mt. Cheonghak' and 'Gyeongdam(鏡潭)' and name 'Yoon Sun-geo' carved in Rock Sikdang stated in Yoon Sun-geo's "Padongilgi" in 1964 is a pledge showing the influence of "Yucheonghaksangi" as an ancient travel literature as well as a mark of the Giho school scholars' respect and spirit to honor Yulg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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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여지도서(輿地圖書)』와 『대동지지(大東地志)』 「강릉조」등의 지리지를 통해 연구범위내 관련 지명을 고찰하였다. 또한 명승 지정 당시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1970년 명승 지정 당시 문화재위원회 제3분과 회의록을 열람 검토하였다. 이와 함께 서울대학교규장각 한국학연구원(http://e-kyujanggak.
명승 제1호 “명주 청학동 소금강” 지명에 대한 이해와 타당성 재고의 일환으로 지리지, 유산기 등의 고문헌와 고지도 그리고 주변 바위글씨 등의 분석과 해석을 통해 이곳 명승 1호의 명칭과 관련 지명의 유래와 변천 과정 및 그 오류 등을 살펴볼 목적으로 시도된 본 연구의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에 본 연구는 ‘청학동 소금강’ 관련 유산기 등의 고문헌과 고지도 그리고 주변 바위글씨(石刻)의 분석과 해석을 통해 이곳 지명의 유래와 변천과정을 살핌으로써 지명의 유래와 관련 오류 등을 고찰하는 한편 옛 선인들과 현재의 지명 및 공간인식 특성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안 방법
이밖에 허균(許筠, 1569~1618)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2 부록의 「송양비로입청학산(送楊毗盧入靑鶴山)」과 입재(立齋) 강재항(姜再恒, 1689~1756)의 『입재선생유고(立齋先生遺稿)』 권일「오언고시조」, 조선 중기 학자 이순인(李純仁, 1543∼?)의 『고담일고(孤潭逸稿)』 권지이(卷之二) 칠언율시(七言律詩) 「청학동(靑鶴洞)」을 분석하였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여지도서(輿地圖書)』와 『대동지지(大東地志)』 「강릉조」등의 지리지를 통해 연구범위내 관련 지명을 고찰하였다. 또한 명승 지정 당시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1970년 명승 지정 당시 문화재위원회 제3분과 회의록을 열람 검토하였다.
본 연구는 문헌조사와 현지조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주요문헌으로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국역 율곡전서(Ⅲ)』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1814년 간행된 『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 권지십삼(卷之十三) 「유청학산기(遊靑鶴山記)」를 검토하였으며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DB(http://db.
이밖에 허균(許筠, 1569~1618)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2 부록의 「송양비로입청학산(送楊毗盧入靑鶴山)」과 입재(立齋) 강재항(姜再恒, 1689~1756)의 『입재선생유고(立齋先生遺稿)』 권일「오언고시조」, 조선 중기 학자 이순인(李純仁, 1543∼?)의 『고담일고(孤潭逸稿)』 권지이(卷之二) 칠언율시(七言律詩) 「청학동(靑鶴洞)」을 분석하였다.
또한 명승 지정 당시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1970년 명승 지정 당시 문화재위원회 제3분과 회의록을 열람 검토하였다. 이와 함께 서울대학교규장각 한국학연구원(http://e-kyujanggak.snu.ac.kr) 소장 해동지도, 지승, 광여도, 1872년 지방도와 전국도 성격인 동여도, 청구도, 1861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등 고지도에 표기된 지명을 고찰하였다. 지명유래 변천과정의 고찰 편의상 시대구분은 1세기를 3등분으로 나누어 전기·중기 후기로 구분하였다.
지명유래 변천과정의 고찰 편의상 시대구분은 1세기를 3등분으로 나누어 전기·중기 후기로 구분하였다. 현장조사는 2013년 10월과 2014년 6월 두 차례 실시하였으며 지명 관련 암각서를 조사하고 촬영하는 한편 바위글씨 주체와 시기를 유추하였다.
대상 데이터
본 연구는 문헌조사와 현지조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주요문헌으로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국역 율곡전서(Ⅲ)』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1814년 간행된 『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 권지십삼(卷之十三) 「유청학산기(遊靑鶴山記)」를 검토하였으며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DB(http://db.itkc.or.kr) 및 율곡학회(1997) 저 「청학산을 유람하면서 지은 기문」을 참조하였다. 또한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미수기언(眉叟記言)』 권지이십팔(卷之二十八) 하편(下篇) 산천 하(山川 下) 「청학동구룡연기(靑鶴洞九龍淵記)」 그리고 『노서선생유고(魯西先生遺稿)』 속권지삼(續卷之三) 잡저(雜著) 「파동기행(巴東紀行)」을 중심으로 관련 지명을 살폈다.
성능/효과
관광안내서와 백과사전 그리고 인터넷사이트에서는 “강릉시 연곡면 소재 ‘소금강’이란 명칭 유래가 율곡의 「청학산기」에서 출전(出典)된 것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이는 「청학산기」가 아닌 「유청학산기」의 오류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넷째, 시문 기록의 검토 결과, 「유청학산기」저술(16세기 초반) 이후, 이순인(16세기 후반)의 『고담일고』, 허균의 「송별기록(16세기 후반)」, 허목의 「청학동구룡연기(17세기 중반)」 윤순거의 「파동일기(17세기 중반)」 그리고 이원조의 서간(19세기 중반) 등에서와 같이 약 3세기 이상 청학동 소금강은 청학산 또는 청학동으로 불려온 것으로 보이며 소금강이란 지명이 확인되는 기록은 18세기 중반에 지은 강재항의 시가 처음이다.
다섯째, 금강사 앞 이능암에 새겨진 ‘小金剛’이란 바위글씨의 크기, 서법, 전체적인 배치구도와 마모 정도 그리고 지리지의 기록 등을 고려할 때 1870년대나 또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동일한 주체인 이능계원(二能契員)에 의해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고지도 분석 결과, 청학동 청학산 청학사 등의 지명 이외 지방도나 전국도 공히 소금강이란 지명은 찾아볼 수 없다.
셋째, 율곡의 1568년작 「유청학산기」에서는 식당암을 ‘비선암’, 동부의 이름을 ‘천유동’, 그 아래 못을 ‘경담’ 그리고 소금강 계곡을 품은 산 이름을 ‘청학산’이라 지칭했다고 명기되어 있으나 ‘소금강’이라 지칭한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일곱째, 지리지와 고지도 그리고 유람기 등의 시문에 나타난 결과를 종합할 때, 율곡의 「유청학산기」 이후 이곳은 줄곧 ‘청학산 청학동’으로 불려온 것으로 보인다.
첫째, 지리지상의 ‘청학산’이란 용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최초로 발견되며 ‘소금강’ 지명은 17세기 중반의 『여지도서』에서 처음 등장한 이래, 20세기 초반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증수임영지』에서 재현되고 있다.
후속연구
따라서 기존 명승 명칭인 ‘명주 청학동 소금강’이란 지명에 큰 오류가 있다고 보기는 곤란하지만, 율곡과 그의 저서 「유청학산기」관련된 명소로서의 장소적 전통성을 부각시키는 의미에서 ‘명주 청학산 청학동’으로 하는 것이 보다 합당할 것으로 제언한다.
질의응답
핵심어
질문
논문에서 추출한 답변
금강산은 무엇으로 부르는가?
17세기 중반 제작된 『여지도서』 「강릉조」에서는 “청학동 오대산 북쪽 기슭에서 힘차게 뻗어나와 바닷가에 따로 한 지역을 이룬다. 세상에서는 작은 금강산이란 뜻으로 소금강이라 부른다. 골짜기 안에는 구룡연, 학소암, 백마봉, 식당암이 있고 골짜기 어귀에 청학암이 있다(Kim, translation and annotation, 2009: 48).
율곡이 금강산의 아름다움과 비견하여 이곳을 소금강이라 했다는 말은 진실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 이유는?
율곡은 도가(道家)에 관용적이었고 일찍이 19세에 도교와 불교사상에 심취한 바 있으며, 또한 금강산에 들어가 1년간 공부한 적도 있다(Kim, 1997: 27). 따라서 율곡이 금강산의 아름다움과 비견하여 이곳을 소금강이라 했다는 말은 진실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다.
지리지는 무엇으로 불리는가?
지지(地志) 또는 지지(地誌)로 불리는 지리지(地理志)는 일정 지역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기록으로. 특정 시대 지역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Wonju city and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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