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선문 중 가지산문 장흥 보림사는 문화 생태경관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데도 조경분야의 연구가 부족하다. 본 연구로 17세기 이후 장흥 보림사 경관요소의 변화를 고찰하여 그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조경사적 위치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전남 장흥 보림사 일원의 경관요소에 대해 현장답사와 사적기(事蹟記), 중창기, 1928년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의 보림사 실측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등의 관련 고문헌과 보림사정밀지표조사보고서, 국가기록원 및 전남 장흥의 과거 사진자료를 통해 경내 건축물과 지당, 사찰림 등의 경관요소의 변화를 고찰해보고자 하였으며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보림사의 입지는 보조선사탑비의 내용을 통해 풍수적으로 길지에 위치함을 알 수 있으며 십육나한상과 천불로 비보하려했음을 알 수 있었다. 중국의 남화선사와 비교했을 때, 주변의 환경구성은 비슷하지만 단을 쌓아 건물을 배치한 것은 차이점으로 보였다. 둘째, 보림사의 건축경관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고 현재까지 경관의 변화가 이어지고 있는 상태이므로 과거 경관자료 아카이브 구축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되었다. 셋째, 보림사의 지당은 보림사사적기의 내용으로 보아 가장자리에 돌을 쌓아 만든 부정형이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중창기의 내용을 통해 지당의 이름을 용천(湧泉)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또한 현재의 경관은 과거의 사진과 비교해보았을 때 경내 지반사업으로 인한 지표의 상승으로 변형을 가져온 것으로 보였다. 넷째, 보조선사탑비와 보림사사적기에 언급되고 있는 장생표주(長生標柱)는 한국전쟁 이전 사진자료에서 나타난 대웅보전 앞의 마른 향나무로 추측하고 있으나 도갑사의 국장생과 황장생을 참고하였을 때 석비형으로 추정되었다. 또한 보림사 중창기에 나타난 홍살문은 병자호란이후 승군의 충성에 대한 사액으로 세워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섯째, 보림사 중창기에서 보림사의 연못 조성 등 사찰경관요소 조성 시 풍수지리를 고려하였음을 알 수 있었으며 또한 소나무, 보리수, 감나무의 식재기록이 나타나고 있었다. 여섯째, 차나무림은 정약용의 구증구포법 전수와 초의선사의 보림백모차, 이유원의 가오고략 등 관련 문헌을 통해 통일신라부터 시작된 선차일여의 다맥을 이어오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일곱째, 비자나무림은 관련 고문헌을 통해 비자가 국가의 제사와 의료약품으로 쓰였고 항공사진 및 보호림 지정구역의 위치를 통해 비자림이 내화수림대의 역할도 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 장흥 보림사는 문화 생태경관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데도 조경분야의 연구가 부족하다. 본 연구로 17세기 이후 장흥 보림사 경관요소의 변화를 고찰하여 그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조경사적 위치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전남 장흥 보림사 일원의 경관요소에 대해 현장답사와 사적기(事蹟記), 중창기, 1928년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의 보림사 실측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등의 관련 고문헌과 보림사정밀지표조사보고서, 국가기록원 및 전남 장흥의 과거 사진자료를 통해 경내 건축물과 지당, 사찰림 등의 경관요소의 변화를 고찰해보고자 하였으며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보림사의 입지는 보조선사탑비의 내용을 통해 풍수적으로 길지에 위치함을 알 수 있으며 십육나한상과 천불로 비보하려했음을 알 수 있었다. 중국의 남화선사와 비교했을 때, 주변의 환경구성은 비슷하지만 단을 쌓아 건물을 배치한 것은 차이점으로 보였다. 둘째, 보림사의 건축경관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고 현재까지 경관의 변화가 이어지고 있는 상태이므로 과거 경관자료 아카이브 구축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되었다. 셋째, 보림사의 지당은 보림사사적기의 내용으로 보아 가장자리에 돌을 쌓아 만든 부정형이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중창기의 내용을 통해 지당의 이름을 용천(湧泉)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또한 현재의 경관은 과거의 사진과 비교해보았을 때 경내 지반사업으로 인한 지표의 상승으로 변형을 가져온 것으로 보였다. 넷째, 보조선사탑비와 보림사사적기에 언급되고 있는 장생표주(長生標柱)는 한국전쟁 이전 사진자료에서 나타난 대웅보전 앞의 마른 향나무로 추측하고 있으나 도갑사의 국장생과 황장생을 참고하였을 때 석비형으로 추정되었다. 또한 보림사 중창기에 나타난 홍살문은 병자호란이후 승군의 충성에 대한 사액으로 세워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섯째, 보림사 중창기에서 보림사의 연못 조성 등 사찰경관요소 조성 시 풍수지리를 고려하였음을 알 수 있었으며 또한 소나무, 보리수, 감나무의 식재기록이 나타나고 있었다. 여섯째, 차나무림은 정약용의 구증구포법 전수와 초의선사의 보림백모차, 이유원의 가오고략 등 관련 문헌을 통해 통일신라부터 시작된 선차일여의 다맥을 이어오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일곱째, 비자나무림은 관련 고문헌을 통해 비자가 국가의 제사와 의료약품으로 쓰였고 항공사진 및 보호림 지정구역의 위치를 통해 비자림이 내화수림대의 역할도 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Borimsa Temple in Jangheung, one of the Goosanseonmoon of Shilla Dynasty, calls for a study in the field of landscape architecture because it has very significant elements in cultural and ecological landscaping aspects. This study examined the changes in landscaping elements of Borimsa Temple since ...
Borimsa Temple in Jangheung, one of the Goosanseonmoon of Shilla Dynasty, calls for a study in the field of landscape architecture because it has very significant elements in cultural and ecological landscaping aspects. This study examined the changes in landscaping elements of Borimsa Temple since the 17th century in order to newly recognize cultural landscaping value of space composition elements for traditional temple and to verify landscape architectural position. For research method, literatures such as Sajeonggi (事蹟記), Joongchanggi, a surveyed map by Fujishima Gaijiro in 1928 and Joseon Gojeogdobo (朝鮮古蹟圖譜) and modern documents including Borimsa Temple Precision Ground Survey Report and photographic records of National Archives of Korea and provincial governments were examined together with a field survey in order to trace changes in landscape elements such as buildings within the temple site, pond and temple forest. The results are as the following: First, for geographical locations of Borimsa Temple, it is located in an auspicious location and Shipyuknahansang and Cheonbul were placed in a supplementary purpose according to the contents of Bojoseonsatapbi. Compared to Namhwaseonsa Temple in China, it has a similar environmental composition but the fact that buildings were placed on platforms is a distinctive difference. Second, architectural landscape of Borimsa Temple went through the Japanese colonial era and Korean War and still going through changes today. Thus, there shall be some appropriate measures such as to establish an archive of past landscape data. Third, the contents of Borimsa Temple Sajeonggi suggests that the pond of Borimsa Temple had been in a indeterminate form with stones on the outer edge. Its name could have been Yongcheon (湧泉) according to the contents of Joongchanggi. Also, the current landscape, in comparison with past photographs, is a result of changes from surface raise occurred by ground reinforcement within the temple site. Fourth, Jangsaengpyoju (長生標柱) mentioned in Bojoseonsatapbi and Borimsa Temple Sajeonggi was thought to be the dried juniper tree in front of Daewoongbojeon, which can be found in past photographic documents but, it is now assumed to be Seokbihyeong (石碑形) considering the Gukjangsaeng and Hwangjangsaeng of Dogapsa Temple of the similar time period. Moreover, Hongsalmoon mentioned in Joongchanggi was established by King's order after the Manchu war of 1636 in praising of Buddhist monks those who had volunteered to fight for the country. Fifth, it is apparent in Borimsa Temple Joongchanggi that geomancy was a consideration in landscaping process of Borimsa Temple, and the record indicates that pine trees, bo trees and persimmon trees were planted. Sixth, tea tree forest was verified of its historical root that is Seongchailyeo from Unified Shilla through passing down of Jeong Yak-yong's Goojeunggoopo method and relevant documents of Seon Master Choui and Yi Yu-won. Seventh, nutmeg tree forest suggests that nutmegs were used in national ceremonies and for medical uses. The nutmeg tree forest was also verified of its role as Naehwasoorimdae (a forest built to prevent fire from spreading) through aerial photographs and placement of a forest reserve.
Borimsa Temple in Jangheung, one of the Goosanseonmoon of Shilla Dynasty, calls for a study in the field of landscape architecture because it has very significant elements in cultural and ecological landscaping aspects. This study examined the changes in landscaping elements of Borimsa Temple since the 17th century in order to newly recognize cultural landscaping value of space composition elements for traditional temple and to verify landscape architectural position. For research method, literatures such as Sajeonggi (事蹟記), Joongchanggi, a surveyed map by Fujishima Gaijiro in 1928 and Joseon Gojeogdobo (朝鮮古蹟圖譜) and modern documents including Borimsa Temple Precision Ground Survey Report and photographic records of National Archives of Korea and provincial governments were examined together with a field survey in order to trace changes in landscape elements such as buildings within the temple site, pond and temple forest. The results are as the following: First, for geographical locations of Borimsa Temple, it is located in an auspicious location and Shipyuknahansang and Cheonbul were placed in a supplementary purpose according to the contents of Bojoseonsatapbi. Compared to Namhwaseonsa Temple in China, it has a similar environmental composition but the fact that buildings were placed on platforms is a distinctive difference. Second, architectural landscape of Borimsa Temple went through the Japanese colonial era and Korean War and still going through changes today. Thus, there shall be some appropriate measures such as to establish an archive of past landscape data. Third, the contents of Borimsa Temple Sajeonggi suggests that the pond of Borimsa Temple had been in a indeterminate form with stones on the outer edge. Its name could have been Yongcheon (湧泉) according to the contents of Joongchanggi. Also, the current landscape, in comparison with past photographs, is a result of changes from surface raise occurred by ground reinforcement within the temple site. Fourth, Jangsaengpyoju (長生標柱) mentioned in Bojoseonsatapbi and Borimsa Temple Sajeonggi was thought to be the dried juniper tree in front of Daewoongbojeon, which can be found in past photographic documents but, it is now assumed to be Seokbihyeong (石碑形) considering the Gukjangsaeng and Hwangjangsaeng of Dogapsa Temple of the similar time period. Moreover, Hongsalmoon mentioned in Joongchanggi was established by King's order after the Manchu war of 1636 in praising of Buddhist monks those who had volunteered to fight for the country. Fifth, it is apparent in Borimsa Temple Joongchanggi that geomancy was a consideration in landscaping process of Borimsa Temple, and the record indicates that pine trees, bo trees and persimmon trees were planted. Sixth, tea tree forest was verified of its historical root that is Seongchailyeo from Unified Shilla through passing down of Jeong Yak-yong's Goojeunggoopo method and relevant documents of Seon Master Choui and Yi Yu-won. Seventh, nutmeg tree forest suggests that nutmegs were used in national ceremonies and for medical uses. The nutmeg tree forest was also verified of its role as Naehwasoorimdae (a forest built to prevent fire from spreading) through aerial photographs and placement of a forest reser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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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보림사 정밀지표조사보고서」, 장흥문화원에서 2001년 출간한 「역주 보림사 중창기」 등 관련 문헌과 국가기록원 및 장흥관련의 사진자료를 통해 먼저 보림사의 입지와 배치, 사찰림의 구성과 역사를 살펴보고 보림사 대적광전, 매화당, 조사당의 일제강점기 이후 경관 변화와 지당, 장생표주의 경관요소를 고찰해보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전남 장흥 보림사 일원의 경관요소를 현장답사와 문헌조사를 통해 고찰해보고자 수행하였으며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제안 방법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장흥도호부 부분이 필사된 장흥여지승람, 사찰운영과 승려활동 갈등내용이 기록된 취변록(就變錄), 중창기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창기는 백암성총(栢庵性聰, 1631~1700)의 후계인 충면(忠勉)이 기록을 시작하여 1658년~1954년까지 연대순으로 기록되어있다[1]. 또한 일제강점기의 자료로서 1930년「조선건축사론(朝鮮建築史論)」에 실린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郎, 1899~2002)의 1928년 보림사 실측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를 고찰하였다. 1995년에 실시한 순천대학교박물관의「가지산
본 연구의 장소적 범위는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에 위치한 보림사 경내 경관요소와 주변 사찰림이며 시간적 범위는 보림사 관련 최초의 자료 발간시기인 17세기 이후로 한정한다. 연구방법은 현장답사와 함께 관련 문헌자료와 사진자료를 조사하였다. 관련 문헌자료 중 「신라국무주가지산보림사사적기(新羅國武州迦智山寶林寺事蹟記)」는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에 소장(1954.
대상 데이터
「장흥부가지산보림사법당각전각요사중창번화연월여공사화주별좌등방함기록(長興府迦智山寶林寺法堂各殿閣僚舍重刱燔瓦年月與工師化主別座等芳啣記錄)」은 해남 대흥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강희 35년 병자5월(1696년)에 (康熙三十五年丙子五月 日書) 쓰여졌다.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장흥도호부 부분이 필사된 장흥여지승람, 사찰운영과 승려활동 갈등내용이 기록된 취변록(就變錄), 중창기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창기는 백암성총(栢庵性聰, 1631~1700)의 후계인 충면(忠勉)이 기록을 시작하여 1658년~1954년까지 연대순으로 기록되어있다[1].
하지만 1960년의 기념촬영사진과 1975년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사진, 1993년 경내 지반정리사업 기록을 통해 조선 후기의 경관을 추측해보면 대상물 주변의 지반은 현재와는 달리 비슷한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 1995년 순천대학교에서 실시한 정밀지표조사보고서에도 현 지표보다 1m이상 아래에 놓여있는 점으로 보아 조성시기는 상당히 빠를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Figure 7-a 참조). 또한 현장 확인 결과 대상물은 석재를 파서 만든 것이 아니고 가공된 장방형의 석재로 둘레를 두르고 2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면 아래는모래와 자갈이 있어 그 사이로 물이 솟아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조경사 관련 서적[19][20]에서 해당 지당을 명칭하고 있는 석조(石槽), 석지(石池)의 표현은 적절하다고 할 수 없다.
본 연구의 장소적 범위는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에 위치한 보림사 경내 경관요소와 주변 사찰림이며 시간적 범위는 보림사 관련 최초의 자료 발간시기인 17세기 이후로 한정한다. 연구방법은 현장답사와 함께 관련 문헌자료와 사진자료를 조사하였다.
특히 매화당은 창건설화와 관련된 건물로서 원표대덕 스님이 보림사를 창건하기 위해 가지산으로 왔을 때 아홉용이 잠긴 용궁 연못을 발견하고 사찰 터를 정하려고 할 때 스님을 도와서 용을 내쫓고 창건을 도운 방장산 천왕의 딸, 성모천왕이었던 선아(仙娥)가 모셔져 있었다[6]. 선아는 현재 보림사에서 매화보살(梅花菩薩)로 모셔지고 있고 탱화가 대적광전에 전하고 있고 조사당은 현재 대웅전 북서쪽에 조사전이란 건물명으로 새롭게 위치하고 있다. 이처럼 보림사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현재 활발한 중창불사를 통해 경관의 변형이 심해지고 있는 상태이므로 과거의 경관기록, 문헌조사의 필요성이 더욱 부각된다.
성능/효과
넷째, 보조선사탑비와 보림사사적기에 언급되고 있는 장생표주는 한국전쟁 이전 사진자료에서 대웅보전 앞의 마른 향나무로 추측하고 있으나 통일신라~고려시기의 도갑사 국장생, 황장생을 참고하였을 때, 솟대형이 아닌 석비형으로 추정되었다. 또한 보림사 중창기에 나타난 홍살문은 병자호란이후 승군의 충성에 대한 사액으로 세워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섯째, 보림사 중창기에서 보림사의 연못 조성 등 경관요소 조성시 풍수지리를 고려하였음을 알 수 있었으며 또한 소나무, 보리수, 감나무의 식재기록이 나타나고 있었다.
셋째, 보림사의 지당은 보림사사적기의 내용으로 보아 가장자리에 돌을 쌓아 만든 부정형의 못이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중창기의 내용을 통해 지당의 이름을 용천으로 추측해볼 수 있었다. 또한 현재의 경관은 과거의 사진과 비교해보았을 때 경내 지반사업으로 인한 지표의 상승으로 변형을 가져온 것으로 보였다.
또한 보림사사적기에는 용이 있는 연못을 보고 정미롭고 기이하며 서역, 중국과 같은 곳임을 알아보고 상세히 맥을 살피고 경관을 측정하며 터를 잡았다고 하였다. 사적기에서 언급한 서역과 중국의 보림사를 찾아본 결과 인도의 보림사는 현재 정보를 알 수가 없었고 중국 선종의 육조 혜능이 법문을 열고 그의 등신불이 안치된 광동성(廣东省)의 소관시(韶关市)의 남화선사(南华禅寺)의 과거 명칭이 보림사임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사찰의 배치만을 비교하였을 때 정문에서 주불전이 일직선의 축을 이루고 있는 점과 하천이 S자 형으로 흐르는 곳에 입지하는 것이 유사하였다.
셋째, 보림사의 지당은 보림사사적기의 내용으로 보아 가장자리에 돌을 쌓아 만든 부정형의 못이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중창기의 내용을 통해 지당의 이름을 용천으로 추측해볼 수 있었다. 또한 현재의 경관은 과거의 사진과 비교해보았을 때 경내 지반사업으로 인한 지표의 상승으로 변형을 가져온 것으로 보였다.
여섯째, 보림사의 차나무림은 정약용의 구증구포법 전수와 초의선사의 보림백모차, 이유원의 가오고략 등 관련 문헌을 통해 통일신라부터 시작된 선차일여의 다맥을 이어오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재용편1 각공(各貢)에는 선혜청 57공(宣惠廳五十七貢) 중 봉상시(奉常寺)는 삼남의 비자(榧子), 분봉상시(分奉常寺)는 삼남의 비자(榧子)를 사용한다고 하였고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는 의약의 공급과 임금이 하사하는 의약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던 관서인 전의감(典醫監)에는 호남의 비자를 사용하고 조선시대때 의약과 서민을 구료(救療)하는 임무를 관장하였던 관서인 혜민서(惠民署)에는 영남의 비자(榧子)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로 보아 국가제사용으로 비자가 공납되었던 사실과 의료용으로는 호남지방의 비자가 조금 더 귀중하게 취급을 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다산시문집 제5권의 중이 소나무를 뽑는 노래(僧拔松行)에서 “아침에 관첩 내려 비자를 찾는다니(官帖朝來索榧子)”라는구절이 있는데 이로 보아 19세기에 강진, 장흥 등 호남지방의 비자가 공물로 납부되었고 스님들에게 사찰 주변의 비자채취를 독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곱째, 비자나무림은 관련 고문헌을 통해 비자가 국가의 제사와 의료약품으로 쓰인 것으로 조사되었고 항공사진 및 보호림 지정구역의 위치를 통해 비자림이 내화수림대의 역할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첫째, 보림사의 입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곡류하천이 있는 평지에 위치하고, 보조선사탑비를 통해 풍수적으로 길지에 위치하며 십육나한상과 천불로 비보하려했음을 알 수 있었다. 중국의 남화선사와 비교결과 사찰주변의 자연환경은 비슷하나 단을 쌓아 건물을 배치한 것이 차이점으로 보였다.
후속연구
둘째, 보림사의 건축경관은 화엄사상과 선종의 결합으로 나타나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현재까지 경관의 변화가 이어지고 있는 상태이므로 과거 경관자료 아카이브 구축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Jung(2005)과 Hong(2001)의 문헌에 소개되어있는 것을 제외하고 이에 대한 조경분야의 연구가 미미하다. 본 연구를 통해 현재 한국조경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보림사의 17세기 이후 경관요소를 고찰하여 한국 불교의 구산선문 사찰경관을 좀 더 이해 할 수 있는 자료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질의응답
핵심어
질문
논문에서 추출한 답변
보림사는 어떤 곳인가?
희양산, 봉림산, 성주산, 가지산, 동리산, 실상산, 사자산, 굴산산, 그리고 수미산에 산문을 이룬 선종가람들은 이 시기의 불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장소이다. 보림사는 구법승 원표대덕이 창건하였을 때는 화엄종 사찰이었으나 신라헌안왕 때에 중국 당대 남종선 서당지장(西堂智藏)의 선맥을 이은 도의(道儀)선사와 그의 제자 염거(廉居)화상을 거쳐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이 법통을 이어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한 것이다.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에 위치한 보림사에는 국보 117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 44호 남북삼층석탑 및 석등, 보물 제156호인 서부도, 보물 제157호인 보조선사 창성탑 및 보물 158호 창성탑비가 있다.
선종가람들이 산문을 세운 장소들은 어디가 있는가?
우리나라의 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라 하대 구산 선문(九山禪門)의 개창이다. 희양산, 봉림산, 성주산, 가지산, 동리산, 실상산, 사자산, 굴산산, 그리고 수미산에 산문을 이룬 선종가람들은 이 시기의 불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장소이다. 보림사는 구법승 원표대덕이 창건하였을 때는 화엄종 사찰이었으나 신라헌안왕 때에 중국 당대 남종선 서당지장(西堂智藏)의 선맥을 이은 도의(道儀)선사와 그의 제자 염거(廉居)화상을 거쳐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이 법통을 이어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한 것이다.
보림사가 문화, 생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보림사는 구법승 원표대덕이 창건하였을 때는 화엄종 사찰이었으나 신라헌안왕 때에 중국 당대 남종선 서당지장(西堂智藏)의 선맥을 이은 도의(道儀)선사와 그의 제자 염거(廉居)화상을 거쳐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이 법통을 이어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한 것이다.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에 위치한 보림사에는 국보 117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 44호 남북삼층석탑 및 석등, 보물 제156호인 서부도, 보물 제157호인 보조선사 창성탑 및 보물 158호 창성탑비가 있다. 이 중 보물 156호인 서부도만이 고려시대 유물이고 나머지는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다. 많은 문화재가 국보 및 보물로 지정되어있을 정도로 그 역사와 깊이가 있는 사찰이다. 또한 보림사 뒷산은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비자나무숲은 면적은 3ha 정도로 넓지는 않지만 나이 많은 비자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이처럼 보림사는 문화, 생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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