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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IS 바로가기江原人文論叢, v.16, 2006년, pp.241 - 269
박세욱
고대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선진 문물을 주로 중국에서 받아들이면서 일방적으로 수용한 것도 많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만 받아들였거나 우리의 토양 맞게 한국화 한 것도 많다. 이러한 상황을 잘 말해줄 수 있는 것 중에서 포도와 포도주를 들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포도가 들어온 것은 문헌상으로 그 기록을 찾는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그러나 단편적인 기록들과 남아 있는 신라 왕국의 유물들은 포도가 이미 삼국시대에 들어왔다는 정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유입가능성은 통일신라시기에 접어들면서 한·중간 인적 물적 교류가 높아지면서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몇 개의 간접적인 유물뿐 아무런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고려시대에는 “東方文物之國”으로서 서해안 일대에 많은 국제 무역항이 열려있었고, 숭불정책으로 서역의 불교인들이 고려에 많이 도래하였다. 게다가 팔만대장경이 조성되면서 포도뿐만 아니라, 많은 서역의 문물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겨진 문헌은 고려 말 李奎報의 시가 가장 빨리 포도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결국 포도는 13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문헌적 기록으로 남겨지게 된 셈이다. 그러나 13세기 전반에서 13세기 중반까지 몽고와 항전은 포도와 포도주의 국내 등장을 막았고, 그 후로는 가뭄으로 인한 元나라와 고려의 금주령 속에서 포도주는 특수한 계층만이 향유하는 귀족적인 것으로 되었다. 특히 사원에서 소규모로 재배되었던 포도나무는 술이 사원과 승려에게 금지되면서 고려의 포도나무는 관상용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그 후 들어선 이씨 왕조 오백년은 개국부터 꾸준히 금주령을 내렸기 때문에 포도와 같은 과일주의 釀造를 결정적으로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어 조선중기에는 사치풍조에 대한 儉約令까지 내려지는 상황에서 비록 포도의 재배는 사원에서 벗어나 일반 私家에서도 종종 길러졌다고 하지만, 그 공급량은 미미했으며, 집단적인 재배나 釀造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중국이나 서양에서 볼 수 있었던 포도주와 관련된 화려한 알콜로그래피(Alcoolographie)는 특정기간 특정작가에게만 보인다. 결국 조선시대 금주령은 우리나라 과일주의 발전을 방해하였고, 쉽게 많은 양을 양조할 수 있었던 소주나 탁주는 상대적으로 그 생산이 늘어난 반면에 포도는 일반인들이 접하기 힘든 고급의 식물로서 약용이나 관상용으로 길러지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이는 한국과 중국이 같은 외래의 문물을 놓고 그것을 수용한 양상은 무척 상반되게 나타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우리 조선시대 중·후반 문인들은 중국행 사신 길에 올라서야 이미 북경의 명주가 되어버렸던 포도주를 음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뿐이었다.
Korea was considerably different from China in accepting civilization from the West (especially from the Middle East). The grape shows us the difference. The grape appears for the first time in the literary work of Lee Gyubo in the 13th century AD. However, the presence of the grape can be traced 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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