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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IS 바로가기中國古中世史硏究 = Historical studies of ancient and medieval China, no.18, 2007년, pp.427 - 447
Hu Bao-Hua
일찍부터 학술계에서는 당대에 사족은 세력이 몰락해버린 계층의 상징이고 당조의 사족은 위진의 사족제도가 남긴 잔재로 존재하였을 뿐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혹자는 당말에 사족이 다시 중앙정부의 주요 지위를 차지한 것은 죽기 직전에 나타나는 일종의 회광반조 현상일 뿐이라고 인식한다. 본문은 이와는 다른 입장에서 작성되었다.
우선 유종원의 『先君石表陰先友記』의 사료 내용을 통해 그 안에 기재된 유종원의 부친 유진생이 생전에 교유하던 사인 67명의 문화 배경과 사회 지위를 분석ㆍ고찰하여, 이들이 사족과 서족이 합류한 문인단체였고 그들 중 주도적인 인물들의 지위는 육조시대 사인의 후예임을 지적했다.
다음으로 본문에서 사족과 서족이 합류하는 문화적 배경을 논증하고, 사족과 서족의 합류에서 과거제가 중요한 작용을 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과거제는 일종의 계기였을 뿐이고 사족과 서족이 합류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반드시 양자간 문화 교류와 가치관이 서로 접근했을 때에만 최종적으로 실현될 수 있었다. 그중 가치관이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이 문화 교류의 가장 중요한 전제였다.
마지막으로 당초 이래 몇차례에 걸쳐 譜牒의 기록이 수정되었는데, 그 목적은 옛 사족의 사회적 영향을 약화시키는 데 있었지만 이러한 수단은 최종적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밝혔다. 보첩의 수정이 적지 않은 새로운 顯貴들을 만들어냈지만 당대 역사 전체를 보면 시종일관 사회적으로 승인받은 것은 전통적 문화의 가치를 견지한 사족의 후예였다. 당대의 사족은 혈연적으로 위진의 사족과 일맥상통하지만 역사가 발전함에 따라 가문의 등급에 따라 “저절로 公卿이 될 수 있던” 과거와는 달라졌다. 또한 역사가 발전함에 따라 그들은 사족 문화의 정수를 계승 발전시킬 수 있었다. 당 후기에 사족이 정치무대에서 활약한 것은 정치 사회 면에서 사족 문화가 성공하였다는 일종의 증명이다. 당 후기의 역사 발전을 보면 사족문화는 응집력이 강하고 정통적 가치관을 대표하는 선진 문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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