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어에 있어서 표현형태와 그 의미는 일 대 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이 형태와 의미가 고유하지(proper) 않은 양상을 동의성, 모호성, 중의성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동의성은 두 개 이상의 표현이 한 가지 의미를 갖는, 즉 여럿이 하나로 연결되는(many to one) 관계를, 그리고 중의성은 그 역(逆)으로서 하나의 표현이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갖는, 즉 하나가 여럿으로 연결되는(one to many) 관계를 맺는다. 모호성은 어떤 표현...
자연어에 있어서 표현형태와 그 의미는 일 대 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이 형태와 의미가 고유하지(proper) 않은 양상을 동의성, 모호성, 중의성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동의성은 두 개 이상의 표현이 한 가지 의미를 갖는, 즉 여럿이 하나로 연결되는(many to one) 관계를, 그리고 중의성은 그 역(逆)으로서 하나의 표현이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갖는, 즉 하나가 여럿으로 연결되는(one to many) 관계를 맺는다. 모호성은 어떤 표현이 한 가지 의미로 분명해지도록 의미 국면을 결정해 주지 못하는 상태이다. 반면에 중의성은 뜻이 두 가지 이상의 국면으로 해석이 되지만 의미가 명료한 양상을 말한다. 자연언어의 한 특성인 이 중의성은 여러 가지 요인에서 기인된다. 둘 이상의 의미를 지닌 한 어휘가 문장에 사용되면 그 문장은 흔히 중의성을 띠게 된다. 두 가지 이상의 범주나 결합구조로 분석될 수 있는 통사적 구조에서 중의성이 발생한다. 그리고 한 문장이 전제할(presuppose) 수 있는 둘 이상의 상황이 그 문장에서 중의성을 야기한다. 한 표현이 두 가지 이상의 음운형태로 발화되어 의미의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종래의 음운적 중의성에 대해 우리는 설명의 방식을 달리할 수 있다. 즉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음운적 중의성은 "동일한 문어형태를 가진 한 표현이 그 문어적 중의성을 해소하기 위해 음운적으로 다른 형태를 취한 결과이다"라고 파악되는 것이다. 그래서 음운적 중의성 역시 중의성 해소책의 한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본 논문은 광범위한 자연어의 중의적 현상들을 어휘적 요인, 통사적 요인 그리고 전제에 의한 중의성으로 분류한다. 문장의 중의성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단어를 교체하거나 단어를 추가하는 어휘적 해소방법이 있다. 또 문장 안에서 어순을 바꾸거나 특수구문으로 옮기는 통사적 해소방법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의성 해소책으로, 그 중의적 문장의 전제를 상기(想起)시키거나 그 중의적 문장이 속해 있는 문맥의 상황을 적용시켜주는 방법이 있다. 어휘적인 그리고 통사적인 중의성 해소책은 보통, 그 중의적인 문장이 맥락에 합치(合致)되어 갖고 있는 독특한 언어표현의 느낌을 변색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해소책은, 중의성이 해소된 문장이 원래 문장에 비하여 - 중의성이 해소되었다고 하더라도 - 부자연스럽고, 장황하게 보이도록 한다. 반면에 문맥과 전제에 의해 중의성이 해소된 문장은 자연스러워서 그 맥락에 필연적으로 동참되는 한 부분처럼 인식된다. 문맥은 인간의 언어 수행과정 속에 실재하며 크게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문맥은 우리의 눈에 잘 띄지 않게 숨어 있으면서, 문장들이 그 안에서 결속되어지는 장(場)으로서의 한 역할을 허용한다. 문맥 속에서, 해당 표현 자체가 지닌 전제, 그 해당 표현에 동반하는 언명이 지닌 전제, 선행 표현이 이루는 전제 그리고 후행 표현이 이루는 전제가 필요한 정보를 공급하여 줌으로써 그 해당 표현이 지닌 중의성이 해소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맥은 같은 전제를 공유하는 문장들이 그 공통의 전제를 끈으로 하여 의미적으로 응집되고 통일성을 이룬 화용론적인 한 영향권이다"라고 본다. 그래서 한 문맥 속의 문장들은 공통의 전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유롭다. 생략형의 문장이나 대명사의 사용 등이 가능한 것은 문맥 내부에 이러한 문장들의 결속이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결과적으로 문맥을 벗어난 단일문장은 대개 중의성을 띠게 된다. 반대로 그러한 중의적인 문장은, 문맥의 상황을 적용시켜 주면 쉽고 자연스럽게 그 중의성이 해소된다. 자연언어 표현이 갖는 중의성이 전제에 의해서 해소되는 것은 의미합성의 견지에서 볼 때 시사되는 바가 크다. 한 표현의 의미는 자체 언명이 지닌 의미뿐만 아니라, 그 표현의 전제가 관여하여 이루는 의미까지도 합쳐진 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표현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그 표현 자체가 언명하는 의미와 그 표현이 전제하는 의미 - 즉 문맥의 부분 구성 표현들 간에 공유되는 전제, 동시에 발화되는 동반 표현에 의한 전제, 선후 맥락에 의해 형성된 전제 - 모두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연어에 있어서 표현형태와 그 의미는 일 대 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이 형태와 의미가 고유하지(proper) 않은 양상을 동의성, 모호성, 중의성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동의성은 두 개 이상의 표현이 한 가지 의미를 갖는, 즉 여럿이 하나로 연결되는(many to one) 관계를, 그리고 중의성은 그 역(逆)으로서 하나의 표현이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갖는, 즉 하나가 여럿으로 연결되는(one to many) 관계를 맺는다. 모호성은 어떤 표현이 한 가지 의미로 분명해지도록 의미 국면을 결정해 주지 못하는 상태이다. 반면에 중의성은 뜻이 두 가지 이상의 국면으로 해석이 되지만 의미가 명료한 양상을 말한다. 자연언어의 한 특성인 이 중의성은 여러 가지 요인에서 기인된다. 둘 이상의 의미를 지닌 한 어휘가 문장에 사용되면 그 문장은 흔히 중의성을 띠게 된다. 두 가지 이상의 범주나 결합구조로 분석될 수 있는 통사적 구조에서 중의성이 발생한다. 그리고 한 문장이 전제할(presuppose) 수 있는 둘 이상의 상황이 그 문장에서 중의성을 야기한다. 한 표현이 두 가지 이상의 음운형태로 발화되어 의미의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종래의 음운적 중의성에 대해 우리는 설명의 방식을 달리할 수 있다. 즉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음운적 중의성은 "동일한 문어형태를 가진 한 표현이 그 문어적 중의성을 해소하기 위해 음운적으로 다른 형태를 취한 결과이다"라고 파악되는 것이다. 그래서 음운적 중의성 역시 중의성 해소책의 한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본 논문은 광범위한 자연어의 중의적 현상들을 어휘적 요인, 통사적 요인 그리고 전제에 의한 중의성으로 분류한다. 문장의 중의성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단어를 교체하거나 단어를 추가하는 어휘적 해소방법이 있다. 또 문장 안에서 어순을 바꾸거나 특수구문으로 옮기는 통사적 해소방법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의성 해소책으로, 그 중의적 문장의 전제를 상기(想起)시키거나 그 중의적 문장이 속해 있는 문맥의 상황을 적용시켜주는 방법이 있다. 어휘적인 그리고 통사적인 중의성 해소책은 보통, 그 중의적인 문장이 맥락에 합치(合致)되어 갖고 있는 독특한 언어표현의 느낌을 변색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해소책은, 중의성이 해소된 문장이 원래 문장에 비하여 - 중의성이 해소되었다고 하더라도 - 부자연스럽고, 장황하게 보이도록 한다. 반면에 문맥과 전제에 의해 중의성이 해소된 문장은 자연스러워서 그 맥락에 필연적으로 동참되는 한 부분처럼 인식된다. 문맥은 인간의 언어 수행과정 속에 실재하며 크게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문맥은 우리의 눈에 잘 띄지 않게 숨어 있으면서, 문장들이 그 안에서 결속되어지는 장(場)으로서의 한 역할을 허용한다. 문맥 속에서, 해당 표현 자체가 지닌 전제, 그 해당 표현에 동반하는 언명이 지닌 전제, 선행 표현이 이루는 전제 그리고 후행 표현이 이루는 전제가 필요한 정보를 공급하여 줌으로써 그 해당 표현이 지닌 중의성이 해소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맥은 같은 전제를 공유하는 문장들이 그 공통의 전제를 끈으로 하여 의미적으로 응집되고 통일성을 이룬 화용론적인 한 영향권이다"라고 본다. 그래서 한 문맥 속의 문장들은 공통의 전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유롭다. 생략형의 문장이나 대명사의 사용 등이 가능한 것은 문맥 내부에 이러한 문장들의 결속이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결과적으로 문맥을 벗어난 단일문장은 대개 중의성을 띠게 된다. 반대로 그러한 중의적인 문장은, 문맥의 상황을 적용시켜 주면 쉽고 자연스럽게 그 중의성이 해소된다. 자연언어 표현이 갖는 중의성이 전제에 의해서 해소되는 것은 의미합성의 견지에서 볼 때 시사되는 바가 크다. 한 표현의 의미는 자체 언명이 지닌 의미뿐만 아니라, 그 표현의 전제가 관여하여 이루는 의미까지도 합쳐진 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표현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그 표현 자체가 언명하는 의미와 그 표현이 전제하는 의미 - 즉 문맥의 부분 구성 표현들 간에 공유되는 전제, 동시에 발화되는 동반 표현에 의한 전제, 선후 맥락에 의해 형성된 전제 - 모두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It is generally accepted that there is no one-to-one correspondence between form and meaning in natural languages. Such an aspect that a meaning is not proper to a certain form is recognized in synonymy, vagueness, ambiguity, etc. Synonymy is a many-to-one relation wherein two or more surface struct...
It is generally accepted that there is no one-to-one correspondence between form and meaning in natural languages. Such an aspect that a meaning is not proper to a certain form is recognized in synonymy, vagueness, ambiguity, etc. Synonymy is a many-to-one relation wherein two or more surface structures have one single meaning. In contrast Ambiguity is a one-to-many relation wherein a single surface structure has two or more meanings. Vagueness has to do with lack of specificity, so vague terms are only dubiously applicable to marginal objects. Whereas ambiguity involves two or more distinct meanings for one word, phrase, or sentence, and an ambiguous term may be at once clearly true of various objects and clearly false of them. Being a characteristic feature of natural languages, ambiguity comes from various causes. When a word with two or more meanings is used in a sentence, the sentence is preponderantly ambiguous. Those syntactic structures which are analyzed to have two or more categories or combinations are generally ambiguous. And two or more situations presupposed from a sentence make the sentence itself ambiguous. Phonological ambiguity is traditionally believed to be a linguistic phenomenon that if a presentation is verbalized in two or more phonological patterns, it can make a difference in meaning. But we consider changing the explanation of the phonological ambiguity, because a written form which is ambiguous is mostly to be pronounced in different phonological patterns in order to disambiguate itself. So it seems to be a means for disambiguation rather than a sort of ambiguity. Accordingly, the widely varying ambiguous units are divided into three groups, viz. the ambiguities from lexical and syntactical factors, and the ambiguity from presuppositions. For disambiguation, we can replace ambiguous words with single semantic words or append some words. Or we can also change the order of words in the sentence or modify tile structure of the sentence. The former can be called the lexical method and the latter the syntactical method. And we have another method for disambiguation, in which its presupposition is brought back to the ambiguous sentence or the situation where the ambiguous sentence lies is applied to it. We can't help judging that those disambiguated sentences through the lexical or syntactical method become faded, losing their fresh feeling in the context, or unnatural and tedious. Whereas the other sentences, disambiguated by means of presupposition, appear natural and indispensable to the context. That is because the context, existing in every discourse, functioning as a field where sentences are binding, is a hidden stretch of language. In a context, the ambiguity of a sentence within is believed to be disambiguated by the application of presuppositions, which have a coherent relation with the very sentence, accompanied clauses and leading or following sentences. Here we conclude that a context is a find of pragmatic domain of sentences, among which common presuppositions are shared, and is linguistically coherent as the common presuppositions are making a concatenation of sentences which comprise a unity in it. So the sentences within a context are free of their forms as far as presupposition allows. It is evidence for the existing of the binding inside the set that we are able to use ellipses or pronouns In the context. Consequently, a single sentence out of context mostly becomes ambiguous. Contrarily, if we put such an ambiguous sentence Into the situation provided by the context, we can easily disambiguate it. It is very suggestive from the compositionality principle point of view that the ambiguity found in the presentation of natural languages is disambiguated by using the application of its presupposition. That is because the meaning of a sentence consists of not only the intention of its assertion but also such suggestions produced by the presupposition of the sentence. In other words, that we know the meaning of a sentence means that we know the meaning of the sentence's assertion and the sentence's presupposition, namely, the common presupposition between all the parts of the context, the presuppositions of accompanied clauses and the presuppositions of leading or following sentences.
It is generally accepted that there is no one-to-one correspondence between form and meaning in natural languages. Such an aspect that a meaning is not proper to a certain form is recognized in synonymy, vagueness, ambiguity, etc. Synonymy is a many-to-one relation wherein two or more surface structures have one single meaning. In contrast Ambiguity is a one-to-many relation wherein a single surface structure has two or more meanings. Vagueness has to do with lack of specificity, so vague terms are only dubiously applicable to marginal objects. Whereas ambiguity involves two or more distinct meanings for one word, phrase, or sentence, and an ambiguous term may be at once clearly true of various objects and clearly false of them. Being a characteristic feature of natural languages, ambiguity comes from various causes. When a word with two or more meanings is used in a sentence, the sentence is preponderantly ambiguous. Those syntactic structures which are analyzed to have two or more categories or combinations are generally ambiguous. And two or more situations presupposed from a sentence make the sentence itself ambiguous. Phonological ambiguity is traditionally believed to be a linguistic phenomenon that if a presentation is verbalized in two or more phonological patterns, it can make a difference in meaning. But we consider changing the explanation of the phonological ambiguity, because a written form which is ambiguous is mostly to be pronounced in different phonological patterns in order to disambiguate itself. So it seems to be a means for disambiguation rather than a sort of ambiguity. Accordingly, the widely varying ambiguous units are divided into three groups, viz. the ambiguities from lexical and syntactical factors, and the ambiguity from presuppositions. For disambiguation, we can replace ambiguous words with single semantic words or append some words. Or we can also change the order of words in the sentence or modify tile structure of the sentence. The former can be called the lexical method and the latter the syntactical method. And we have another method for disambiguation, in which its presupposition is brought back to the ambiguous sentence or the situation where the ambiguous sentence lies is applied to it. We can't help judging that those disambiguated sentences through the lexical or syntactical method become faded, losing their fresh feeling in the context, or unnatural and tedious. Whereas the other sentences, disambiguated by means of presupposition, appear natural and indispensable to the context. That is because the context, existing in every discourse, functioning as a field where sentences are binding, is a hidden stretch of language. In a context, the ambiguity of a sentence within is believed to be disambiguated by the application of presuppositions, which have a coherent relation with the very sentence, accompanied clauses and leading or following sentences. Here we conclude that a context is a find of pragmatic domain of sentences, among which common presuppositions are shared, and is linguistically coherent as the common presuppositions are making a concatenation of sentences which comprise a unity in it. So the sentences within a context are free of their forms as far as presupposition allows. It is evidence for the existing of the binding inside the set that we are able to use ellipses or pronouns In the context. Consequently, a single sentence out of context mostly becomes ambiguous. Contrarily, if we put such an ambiguous sentence Into the situation provided by the context, we can easily disambiguate it. It is very suggestive from the compositionality principle point of view that the ambiguity found in the presentation of natural languages is disambiguated by using the application of its presupposition. That is because the meaning of a sentence consists of not only the intention of its assertion but also such suggestions produced by the presupposition of the sentence. In other words, that we know the meaning of a sentence means that we know the meaning of the sentence's assertion and the sentence's presupposition, namely, the common presupposition between all the parts of the context, the presuppositions of accompanied clauses and the presuppositions of leading or following sent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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