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전 학사는 文學史에서 조선 전기 문학의 한 구성 요소로서 항상 거론되고, 그들의 문학적 역량 또한 일찍부터 지적되어 왔다. 본고는 이러한 선학들의 지적과 연구 성과를 자양분으로 하여, 집현전 학사의 문학을 고찰하되 특히 한 시대 문학 담당층으로서 그들의 문학이 가진 공통적 특성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집현전 학사들은 생원·진사시를 단계적으로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에 들어 갔고, 好文君主 세종의 인도와 지원 하에 조선의 문화적 토대를 구축해 가는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세종 말년을 기점으로 言官의 역할에 좀더 비중을 두었으며, 문종대 이후로는 대부분 臺諫으로 진출하여 강력한 언론 활동을 벌였다. 특히 활발한 闢佛 언론 활동을 벌였는데 강력한 불교 비판과 벽이단론은 군신 간의 갈등을 일으키고 신하의 발언권과 견해를 존중해야 한다는 臣權에 대한 요구로 확장되고 있었다. 또 집현전 활동에서 학사들은 백성중심적 사고와, 실용적이며 공리적인 학문관을 보여 주었다. 학문적으로는 경학과 시학의 균형적인 발전을 추구했는데, 전문성을 담보한 경학 연구로 정치의 大體를 깨닫고, 또 詩賦와 국가 공용 문서를 능숙하게 짓는 인재를 양성하여 국가적 필요를 충족해야 한다는 실용성과 공리성이 강조하였다.
집현전 학사들이 가졌던 공동 문화 경험 중 주목되는 부분은 집단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그림을 감상하고 제화시를 창작했다는 점이다. 창업기의 이념을 계승하여 국가의 體貌를 갖추어 가는 과정에서 회화의 쓰임이 많아졌고, 이에 따라 회화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회화의 기능과 긍정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어 갔고, 더 나아가서는 예술로서 그 심미적 가치를 향유하는 일 또한 가능해졌다. 이러한 문화적 경험은 학사들이 집현전에서, 또 중앙의 관료로서 일생을 보내었던 관력과 상호 작용하면서 집현전 학사의 특성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즉 그들은 관인으로서의 생활을 유지하면서 정원과 그림을 통해 산수에 대한 애호를 충족하는 방식을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간접적인 산수 경험을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만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낙관적 세계 인식과 출처관에서 원천을 확인할 수 있다.
집현전 학사의 문학은 守成의 시대를 사는 관인이 그 시대를 향유하고 즐기고, 뿐만 아니라 정치의 핵심적인 주체가 되는 군주와 관인을 警戒하고 정치의 비전을 제시하여 세계의 긍정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는 이념의 실천이었다. 그리하여 학사들은 君臣相遇의 치세를 향유하고 변방에서도 중심부로부터 확장되어 온 군주의 교화에 주목하였으며, 또 한편으로 군주에게 수성기의 治術과 백성의 안정을 절대적으로 중시해야 한다는 점을 경계하였다. 또 명나라 사신과의 시문 수창에서 조선의 문물 제도에 대한 자부심과 문화적 개별성을 과감하게 표현하고, 수창이 거듭될수록 중국 문사와 문학적인 역량을 대결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학사들이 공적 담론에서도 강조하였듯 文章華國의 이념을 구현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집현전 학사들은 관인으로서의 공적 임무를 수행하면서 한정된 도성 공간과 집 안에서 그림을 통해서 산수경을 추체험하였다. 몸은 현실 공간에 있지만 그림과 함께 옮겨져 온 산수경을 통해 앉은 자리에서 아름다운 자연경을 감상하고 맑고 그윽한 경지를 체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추체험의 방식은 심미적 가치의 내용에도 영향을 주었다. 즉 추체험되는 자연 경물은 자연 혹은 산수로서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이미지로 향유되면서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完美함을 표방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회화에 대한 의론과 다른 畵目에 부쳐지는 제화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
집현전 학사는 文學史에서 조선 전기 문학의 한 구성 요소로서 항상 거론되고, 그들의 문학적 역량 또한 일찍부터 지적되어 왔다. 본고는 이러한 선학들의 지적과 연구 성과를 자양분으로 하여, 집현전 학사의 문학을 고찰하되 특히 한 시대 문학 담당층으로서 그들의 문학이 가진 공통적 특성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집현전 학사들은 생원·진사시를 단계적으로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에 들어 갔고, 好文君主 세종의 인도와 지원 하에 조선의 문화적 토대를 구축해 가는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세종 말년을 기점으로 言官의 역할에 좀더 비중을 두었으며, 문종대 이후로는 대부분 臺諫으로 진출하여 강력한 언론 활동을 벌였다. 특히 활발한 闢佛 언론 활동을 벌였는데 강력한 불교 비판과 벽이단론은 군신 간의 갈등을 일으키고 신하의 발언권과 견해를 존중해야 한다는 臣權에 대한 요구로 확장되고 있었다. 또 집현전 활동에서 학사들은 백성중심적 사고와, 실용적이며 공리적인 학문관을 보여 주었다. 학문적으로는 경학과 시학의 균형적인 발전을 추구했는데, 전문성을 담보한 경학 연구로 정치의 大體를 깨닫고, 또 詩賦와 국가 공용 문서를 능숙하게 짓는 인재를 양성하여 국가적 필요를 충족해야 한다는 실용성과 공리성이 강조하였다.
집현전 학사들이 가졌던 공동 문화 경험 중 주목되는 부분은 집단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그림을 감상하고 제화시를 창작했다는 점이다. 창업기의 이념을 계승하여 국가의 體貌를 갖추어 가는 과정에서 회화의 쓰임이 많아졌고, 이에 따라 회화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회화의 기능과 긍정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어 갔고, 더 나아가서는 예술로서 그 심미적 가치를 향유하는 일 또한 가능해졌다. 이러한 문화적 경험은 학사들이 집현전에서, 또 중앙의 관료로서 일생을 보내었던 관력과 상호 작용하면서 집현전 학사의 특성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즉 그들은 관인으로서의 생활을 유지하면서 정원과 그림을 통해 산수에 대한 애호를 충족하는 방식을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간접적인 산수 경험을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만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낙관적 세계 인식과 출처관에서 원천을 확인할 수 있다.
집현전 학사의 문학은 守成의 시대를 사는 관인이 그 시대를 향유하고 즐기고, 뿐만 아니라 정치의 핵심적인 주체가 되는 군주와 관인을 警戒하고 정치의 비전을 제시하여 세계의 긍정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는 이념의 실천이었다. 그리하여 학사들은 君臣相遇의 치세를 향유하고 변방에서도 중심부로부터 확장되어 온 군주의 교화에 주목하였으며, 또 한편으로 군주에게 수성기의 治術과 백성의 안정을 절대적으로 중시해야 한다는 점을 경계하였다. 또 명나라 사신과의 시문 수창에서 조선의 문물 제도에 대한 자부심과 문화적 개별성을 과감하게 표현하고, 수창이 거듭될수록 중국 문사와 문학적인 역량을 대결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학사들이 공적 담론에서도 강조하였듯 文章華國의 이념을 구현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집현전 학사들은 관인으로서의 공적 임무를 수행하면서 한정된 도성 공간과 집 안에서 그림을 통해서 산수경을 추체험하였다. 몸은 현실 공간에 있지만 그림과 함께 옮겨져 온 산수경을 통해 앉은 자리에서 아름다운 자연경을 감상하고 맑고 그윽한 경지를 체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추체험의 방식은 심미적 가치의 내용에도 영향을 주었다. 즉 추체험되는 자연 경물은 자연 혹은 산수로서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이미지로 향유되면서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完美함을 표방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회화에 대한 의론과 다른 畵目에 부쳐지는 제화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단종과 세조대를 거치면서 집현전 학사들의 정치적 행보가 달라졌고, 집현전 출신 문인 중 일부는 정치력과 경제력을 갖고 또 훈구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와 분기가 곧 집현전 학사로서 형성했던 사유와 문학의 특성을 완전히 단절시키지는 않았다. 세조대에도 집현전 출신 문인들은 세종대부터 다져 온 이념적 지향과 사유 방식의 견인 하에 세조 정권의 정치적 이념과 문화적 완비에서 선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집현전 시절 형성되었던 학문적 지향은 세조대에 이르러서 더욱 강화되고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世道와 문학, 인재와 氣化 관계의 필연성은 국가의 정치와 문화라는 현실적 필요성 속에서 강조되고 있다. 한편으로 중국 사신 및 군신 간의 시문 수창에서는 사장학적 경향과 퇴영적인 정서가 동반적으로 강화되는 측면도 나타나고 있었다. 낙관적 세계를 향유하고 재현하여 世道를 반영한다는 이념적 지향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동일한 이념을 담아 내는 방식에서는 화려한 수사적 기교가 동원되고 정서는 다소 퇴영적인 측면이 보인다.
이러한 집현전 학사의 문학은 서거정·이승소·성현 등 15세기 후반의 관인과, 김종직과 같은 신진 사림들에게서도 그 의의를 적극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들이 축적한 문화적 역량과 전통은 광범위하게는 성종대까지도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할 것이다. 학사들이 보여 준 사장학에 대한 가치 부여와 관심은 서거정·이승소의 세대에 이르러 문학 자체에 대한 애호와 기교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어 갔다. 한편, 집현전 학사와 신진 사림은 문학의 현실적 효용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思考틀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집현전 학사의 문학은 15세기 관인과 16세기 사림의 문학이 단절과 대립 논의를 넘어 연속성 또한 논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집현전 학사는 文學史에서 조선 전기 문학의 한 구성 요소로서 항상 거론되고, 그들의 문학적 역량 또한 일찍부터 지적되어 왔다. 본고는 이러한 선학들의 지적과 연구 성과를 자양분으로 하여, 집현전 학사의 문학을 고찰하되 특히 한 시대 문학 담당층으로서 그들의 문학이 가진 공통적 특성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집현전 학사들은 생원·진사시를 단계적으로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에 들어 갔고, 好文君主 세종의 인도와 지원 하에 조선의 문화적 토대를 구축해 가는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세종 말년을 기점으로 言官의 역할에 좀더 비중을 두었으며, 문종대 이후로는 대부분 臺諫으로 진출하여 강력한 언론 활동을 벌였다. 특히 활발한 闢佛 언론 활동을 벌였는데 강력한 불교 비판과 벽이단론은 군신 간의 갈등을 일으키고 신하의 발언권과 견해를 존중해야 한다는 臣權에 대한 요구로 확장되고 있었다. 또 집현전 활동에서 학사들은 백성중심적 사고와, 실용적이며 공리적인 학문관을 보여 주었다. 학문적으로는 경학과 시학의 균형적인 발전을 추구했는데, 전문성을 담보한 경학 연구로 정치의 大體를 깨닫고, 또 詩賦와 국가 공용 문서를 능숙하게 짓는 인재를 양성하여 국가적 필요를 충족해야 한다는 실용성과 공리성이 강조하였다.
집현전 학사들이 가졌던 공동 문화 경험 중 주목되는 부분은 집단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그림을 감상하고 제화시를 창작했다는 점이다. 창업기의 이념을 계승하여 국가의 體貌를 갖추어 가는 과정에서 회화의 쓰임이 많아졌고, 이에 따라 회화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회화의 기능과 긍정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어 갔고, 더 나아가서는 예술로서 그 심미적 가치를 향유하는 일 또한 가능해졌다. 이러한 문화적 경험은 학사들이 집현전에서, 또 중앙의 관료로서 일생을 보내었던 관력과 상호 작용하면서 집현전 학사의 특성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즉 그들은 관인으로서의 생활을 유지하면서 정원과 그림을 통해 산수에 대한 애호를 충족하는 방식을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간접적인 산수 경험을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만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낙관적 세계 인식과 출처관에서 원천을 확인할 수 있다.
집현전 학사의 문학은 守成의 시대를 사는 관인이 그 시대를 향유하고 즐기고, 뿐만 아니라 정치의 핵심적인 주체가 되는 군주와 관인을 警戒하고 정치의 비전을 제시하여 세계의 긍정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는 이념의 실천이었다. 그리하여 학사들은 君臣相遇의 치세를 향유하고 변방에서도 중심부로부터 확장되어 온 군주의 교화에 주목하였으며, 또 한편으로 군주에게 수성기의 治術과 백성의 안정을 절대적으로 중시해야 한다는 점을 경계하였다. 또 명나라 사신과의 시문 수창에서 조선의 문물 제도에 대한 자부심과 문화적 개별성을 과감하게 표현하고, 수창이 거듭될수록 중국 문사와 문학적인 역량을 대결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학사들이 공적 담론에서도 강조하였듯 文章華國의 이념을 구현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집현전 학사들은 관인으로서의 공적 임무를 수행하면서 한정된 도성 공간과 집 안에서 그림을 통해서 산수경을 추체험하였다. 몸은 현실 공간에 있지만 그림과 함께 옮겨져 온 산수경을 통해 앉은 자리에서 아름다운 자연경을 감상하고 맑고 그윽한 경지를 체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추체험의 방식은 심미적 가치의 내용에도 영향을 주었다. 즉 추체험되는 자연 경물은 자연 혹은 산수로서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이미지로 향유되면서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完美함을 표방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회화에 대한 의론과 다른 畵目에 부쳐지는 제화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단종과 세조대를 거치면서 집현전 학사들의 정치적 행보가 달라졌고, 집현전 출신 문인 중 일부는 정치력과 경제력을 갖고 또 훈구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와 분기가 곧 집현전 학사로서 형성했던 사유와 문학의 특성을 완전히 단절시키지는 않았다. 세조대에도 집현전 출신 문인들은 세종대부터 다져 온 이념적 지향과 사유 방식의 견인 하에 세조 정권의 정치적 이념과 문화적 완비에서 선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집현전 시절 형성되었던 학문적 지향은 세조대에 이르러서 더욱 강화되고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世道와 문학, 인재와 氣化 관계의 필연성은 국가의 정치와 문화라는 현실적 필요성 속에서 강조되고 있다. 한편으로 중국 사신 및 군신 간의 시문 수창에서는 사장학적 경향과 퇴영적인 정서가 동반적으로 강화되는 측면도 나타나고 있었다. 낙관적 세계를 향유하고 재현하여 世道를 반영한다는 이념적 지향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동일한 이념을 담아 내는 방식에서는 화려한 수사적 기교가 동원되고 정서는 다소 퇴영적인 측면이 보인다.
이러한 집현전 학사의 문학은 서거정·이승소·성현 등 15세기 후반의 관인과, 김종직과 같은 신진 사림들에게서도 그 의의를 적극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들이 축적한 문화적 역량과 전통은 광범위하게는 성종대까지도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할 것이다. 학사들이 보여 준 사장학에 대한 가치 부여와 관심은 서거정·이승소의 세대에 이르러 문학 자체에 대한 애호와 기교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어 갔다. 한편, 집현전 학사와 신진 사림은 문학의 현실적 효용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思考틀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집현전 학사의 문학은 15세기 관인과 16세기 사림의 문학이 단절과 대립 논의를 넘어 연속성 또한 논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take notice of the literary accomplishments of the Jiphyeonjeon[集賢殿] scholars as the principal leaders of the 15th century Korean literature and to investigate common characteristics in their works. Although the Jiphyeonjeon scholar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cu...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take notice of the literary accomplishments of the Jiphyeonjeon[集賢殿] scholars as the principal leaders of the 15th century Korean literature and to investigate common characteristics in their works. Although the Jiphyeonjeon scholar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cultural history of the 15th century, studies on their literature can hardly be seen. Under this circumstance, investigation of their literature was thought to be very significant for identifying the multifariousness and overall features of the 15th century Korean literature.
Therefore, for the 2nd chapter of this study, the personal histories of the Jiphyeonjeon scholars such as family background and official career were examined. From the last year of King Sejong[世宗]s reign, the Jiphyeonjeon scholars began to focus on their role as an official advisor[言官] on national affairs. And it was clear that they mostly launched into Daegan[臺諫] and took an active part in advisory activities after the reign of King Munjong[文宗]. Such practical engagements of them in politics made the author of this Study reconsider the harsh criticism of some existing studies of them that regarded them as a ruling class with both economically and politically strong vested rights and their works as a product of conservatism and estheticism.
For the 3rd chapter, their activities and the contents and characteristics of their peculiar consciousness formed by the official careers as Jiphyeonjeon scholars were looked into. The contents of consiousness can be broadly divided into three categories as follows : First, various propositions on the executional directions of national policy and orientations of discourse. Second, thoughts about the meaning of academic learning and literature. Third, perceptions of arts, especially of painting, of that time and cultural tastes formed by the official careers as Jiphyeonjeon scholars.
As a result, it was revealed that the Jiphyeonjeon scholars valued common people high as the core of politics and in the academic aspect gave much weight on practicality and public welfare. Such emphasis on academic practicality and public welfare gave birth to assertions that there should be an educational system for specializing the study of confucian classics[經學] and drilling compositional ability. The artistic perceptions of painting were the same as the practical and public-oriented academic perspectives. Also the scholars accomplished certain harmony between carrying out their official duties and enjoying nature by deductively experiencing nature and landscape in the natural garden or through painting. These changes in the public and personal perceptions of painting brought about the increase opportunies for artistic experience and abundant creations of poems dedicated to painting or after appreciation of it.
For the 4th chapter, the literary context of the Jiphyeonjeon Scholars activities and experiences in the 15th century was investigated. The scholars claimed that literature reflected the Sedo[世道] best. Such literary perspective had two orientations : first, to represent and enjoy the positive sides of political realities through literature ; second, to promote enlightenment and watchfulness to maintain and fix the optimistic qualities of life. The scholars actively embodied the ideology of Munjangwhaguk[文章華國] through poetical correspondence with envoys from Ming. The poetical correspondence was a kind of channel through which the scholars expressed pride for the civilization of Joseon dynasty and its cultural independence from Chima. Therefore, the literature of the Jiphyeonjeon scholars discussed in the 3rd chapter had a close relationship with their public discourse and professional orientations as a Jiphyeonjeon scholar.
For the 5th chapter, the literary characteristics and aesthetics of the Jiphyeonjeon scholars as an appreciator of arts were examined. As we have seen in the 3rd and 4th chapter, the scholars actively granted deductive experience of landscape through painting to be very meaningful for enjoying the aesthetical value of nature while carrying out their official duties. Here the beauty of landscape was transcendental and ideal one that reflected the appreciators ideology and sense of value. and this aesthetic concept revealed itself in their perception of artistic techniques. That is, the scholars expressed their deep interest in the exquisite stage of artistic accomplishment and thought this stage could not be reached by simple drilling of techniques but by self-training to clean and purify mind[心].
For the 6th chapter, the activities and literature of the Jiphyeonjeon scholars and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ir literature ofter the closure of the Jiphyeonjeon were investigated. The scholars began to hold a critical position in politics and culture after the closure. And their common discourse of the Jiphyeonjeon years began to be unfold in the form of personal opinion. that is, their experiences and mental orientations didnt cease as a passing phenomenon but continuously exerted influences on the public.
The literary characteristics of the works of the Jiphyeonjeon scholars can be defined as follows : first, their making much account of the relationship between literature and the reality was consistent with the Siwunron[時運論](the theory of the fortune of the times) of the late Goryeo[高麗] dynasty and the early Joseon dynasty. And their literary characteristics came from their views of the political realities defining their time as Susung-gi[守成期]. Because they wanted to represent the positive sides of the world in their literature and emphasized the warning and enlightening role of literature to maintain them. This was different from the emphasis on the heavenly will in the official literature of the late Goryeo[高麗] dynasty and the early Joseon dynasty.
Close examination of the Jiphyeonjeon scholars literature makes us reconsider the claims of the existing studies that point out the rhetorical and manneristic tendencies of the Jiphyeonjeon scholars literature. Their emphasis on the necessity of rhetorical and manneristic styles was related with the political needs. In this respect, rhetoric and mannerism was understood by those scholars as an essential part of literature rather than a techniqu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take notice of the literary accomplishments of the Jiphyeonjeon[集賢殿] scholars as the principal leaders of the 15th century Korean literature and to investigate common characteristics in their works. Although the Jiphyeonjeon scholar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cultural history of the 15th century, studies on their literature can hardly be seen. Under this circumstance, investigation of their literature was thought to be very significant for identifying the multifariousness and overall features of the 15th century Korean literature.
Therefore, for the 2nd chapter of this study, the personal histories of the Jiphyeonjeon scholars such as family background and official career were examined. From the last year of King Sejong[世宗]s reign, the Jiphyeonjeon scholars began to focus on their role as an official advisor[言官] on national affairs. And it was clear that they mostly launched into Daegan[臺諫] and took an active part in advisory activities after the reign of King Munjong[文宗]. Such practical engagements of them in politics made the author of this Study reconsider the harsh criticism of some existing studies of them that regarded them as a ruling class with both economically and politically strong vested rights and their works as a product of conservatism and estheticism.
For the 3rd chapter, their activities and the contents and characteristics of their peculiar consciousness formed by the official careers as Jiphyeonjeon scholars were looked into. The contents of consiousness can be broadly divided into three categories as follows : First, various propositions on the executional directions of national policy and orientations of discourse. Second, thoughts about the meaning of academic learning and literature. Third, perceptions of arts, especially of painting, of that time and cultural tastes formed by the official careers as Jiphyeonjeon scholars.
As a result, it was revealed that the Jiphyeonjeon scholars valued common people high as the core of politics and in the academic aspect gave much weight on practicality and public welfare. Such emphasis on academic practicality and public welfare gave birth to assertions that there should be an educational system for specializing the study of confucian classics[經學] and drilling compositional ability. The artistic perceptions of painting were the same as the practical and public-oriented academic perspectives. Also the scholars accomplished certain harmony between carrying out their official duties and enjoying nature by deductively experiencing nature and landscape in the natural garden or through painting. These changes in the public and personal perceptions of painting brought about the increase opportunies for artistic experience and abundant creations of poems dedicated to painting or after appreciation of it.
For the 4th chapter, the literary context of the Jiphyeonjeon Scholars activities and experiences in the 15th century was investigated. The scholars claimed that literature reflected the Sedo[世道] best. Such literary perspective had two orientations : first, to represent and enjoy the positive sides of political realities through literature ; second, to promote enlightenment and watchfulness to maintain and fix the optimistic qualities of life. The scholars actively embodied the ideology of Munjangwhaguk[文章華國] through poetical correspondence with envoys from Ming. The poetical correspondence was a kind of channel through which the scholars expressed pride for the civilization of Joseon dynasty and its cultural independence from Chima. Therefore, the literature of the Jiphyeonjeon scholars discussed in the 3rd chapter had a close relationship with their public discourse and professional orientations as a Jiphyeonjeon scholar.
For the 5th chapter, the literary characteristics and aesthetics of the Jiphyeonjeon scholars as an appreciator of arts were examined. As we have seen in the 3rd and 4th chapter, the scholars actively granted deductive experience of landscape through painting to be very meaningful for enjoying the aesthetical value of nature while carrying out their official duties. Here the beauty of landscape was transcendental and ideal one that reflected the appreciators ideology and sense of value. and this aesthetic concept revealed itself in their perception of artistic techniques. That is, the scholars expressed their deep interest in the exquisite stage of artistic accomplishment and thought this stage could not be reached by simple drilling of techniques but by self-training to clean and purify mind[心].
For the 6th chapter, the activities and literature of the Jiphyeonjeon scholars and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ir literature ofter the closure of the Jiphyeonjeon were investigated. The scholars began to hold a critical position in politics and culture after the closure. And their common discourse of the Jiphyeonjeon years began to be unfold in the form of personal opinion. that is, their experiences and mental orientations didnt cease as a passing phenomenon but continuously exerted influences on the public.
The literary characteristics of the works of the Jiphyeonjeon scholars can be defined as follows : first, their making much account of the relationship between literature and the reality was consistent with the Siwunron[時運論](the theory of the fortune of the times) of the late Goryeo[高麗] dynasty and the early Joseon dynasty. And their literary characteristics came from their views of the political realities defining their time as Susung-gi[守成期]. Because they wanted to represent the positive sides of the world in their literature and emphasized the warning and enlightening role of literature to maintain them. This was different from the emphasis on the heavenly will in the official literature of the late Goryeo[高麗] dynasty and the early Joseon dynasty.
Close examination of the Jiphyeonjeon scholars literature makes us reconsider the claims of the existing studies that point out the rhetorical and manneristic tendencies of the Jiphyeonjeon scholars literature. Their emphasis on the necessity of rhetorical and manneristic styles was related with the political needs. In this respect, rhetoric and mannerism was understood by those scholars as an essential part of literature rather than a technique.
※ AI-Helper는 부적절한 답변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