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의 목적은 한국뮤지컬의 변천과정을 1960년대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한국초창기 뮤지컬 운동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 시기의 뮤지컬운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는 미국적 뮤지컬 양식 그대로 번역 뮤지컬 혹은 창작 뮤지컬을 공연한 흐름이다. 이 경우, 연기력과 가창력, 춤 실력을 고루 갖춘 뮤지컬 전문배우의 부족과 막대한 제작비 등 여건이 부실하여 이러한 시도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창작 뮤지컬을 공연한 제3극장의 창작 뮤지컬 실험이라든지 한국 고전을 브로드웨이식 뮤지컬로 공연한 퀴어리신부의 뮤지컬 <춘향전>의 시도는 창작 뮤지컬의 가능성을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두 번째는 서구적 뮤지컬 양식에 한국 전통적 음악과 춤을 접맥하여 ‘한국적 뮤지컬’을 정립하려 한 경향이다. 서구 스타일의 뮤지컬 공연이 여러 극단에 의해 단발적으로 이루어진 반면, 이 ‘한국적 뮤지컬’ 창조는 한 뮤지컬 전문단체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북한의 대형 가무극과 대결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창단된 ‘예그린악단’의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예그린악단은 서구 뮤지컬 양식을 우리 전통과 정서의 토양 위에서 수용하고자 했다. 이들은 미국 뮤지컬을 이식하려고 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1940년대 민족적 위기의식에서 태동한 한국 자생적 음악극인 ‘향토가극’에서 우리적 뮤지컬의 전통을 발견하고 ‘한국적 뮤지컬’의 방법론을 찾았던 것이다. 따라서 고전을 소재로, 한국 전통음악과 춤을 서구 뮤지컬 양식에 접맥시킴으로써 민족정서를 담은 뮤지컬을 창조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살짜기 옵서예> (1966)는 우리 창작 뮤지컬의 고전으로 평가를 받는 동시에 ‘한국적 뮤지컬’의 전범이 되었다. 또하나의 공적은 수많은 뮤지컬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뮤지컬 제작 역량을 키워낸 일이다. 예그린악단의 전통은 그 후신인 국립가무단, 서울시립뮤지컬단으로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우리 뮤지컬계의 전문인력들은 대부분 예그린악단에서 서울시립뮤지컬단에 이어지는 단체들에서 양성되었다고 ...
본 논문의 목적은 한국뮤지컬의 변천과정을 1960년대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한국초창기 뮤지컬 운동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 시기의 뮤지컬운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는 미국적 뮤지컬 양식 그대로 번역 뮤지컬 혹은 창작 뮤지컬을 공연한 흐름이다. 이 경우, 연기력과 가창력, 춤 실력을 고루 갖춘 뮤지컬 전문배우의 부족과 막대한 제작비 등 여건이 부실하여 이러한 시도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창작 뮤지컬을 공연한 제3극장의 창작 뮤지컬 실험이라든지 한국 고전을 브로드웨이식 뮤지컬로 공연한 퀴어리신부의 뮤지컬 <춘향전>의 시도는 창작 뮤지컬의 가능성을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두 번째는 서구적 뮤지컬 양식에 한국 전통적 음악과 춤을 접맥하여 ‘한국적 뮤지컬’을 정립하려 한 경향이다. 서구 스타일의 뮤지컬 공연이 여러 극단에 의해 단발적으로 이루어진 반면, 이 ‘한국적 뮤지컬’ 창조는 한 뮤지컬 전문단체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북한의 대형 가무극과 대결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창단된 ‘예그린악단’의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예그린악단은 서구 뮤지컬 양식을 우리 전통과 정서의 토양 위에서 수용하고자 했다. 이들은 미국 뮤지컬을 이식하려고 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1940년대 민족적 위기의식에서 태동한 한국 자생적 음악극인 ‘향토가극’에서 우리적 뮤지컬의 전통을 발견하고 ‘한국적 뮤지컬’의 방법론을 찾았던 것이다. 따라서 고전을 소재로, 한국 전통음악과 춤을 서구 뮤지컬 양식에 접맥시킴으로써 민족정서를 담은 뮤지컬을 창조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살짜기 옵서예> (1966)는 우리 창작 뮤지컬의 고전으로 평가를 받는 동시에 ‘한국적 뮤지컬’의 전범이 되었다. 또하나의 공적은 수많은 뮤지컬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뮤지컬 제작 역량을 키워낸 일이다. 예그린악단의 전통은 그 후신인 국립가무단, 서울시립뮤지컬단으로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우리 뮤지컬계의 전문인력들은 대부분 예그린악단에서 서울시립뮤지컬단에 이어지는 단체들에서 양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 논문의 목적은 한국뮤지컬의 변천과정을 1960년대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한국초창기 뮤지컬 운동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 시기의 뮤지컬운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는 미국적 뮤지컬 양식 그대로 번역 뮤지컬 혹은 창작 뮤지컬을 공연한 흐름이다. 이 경우, 연기력과 가창력, 춤 실력을 고루 갖춘 뮤지컬 전문배우의 부족과 막대한 제작비 등 여건이 부실하여 이러한 시도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창작 뮤지컬을 공연한 제3극장의 창작 뮤지컬 실험이라든지 한국 고전을 브로드웨이식 뮤지컬로 공연한 퀴어리신부의 뮤지컬 <춘향전>의 시도는 창작 뮤지컬의 가능성을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두 번째는 서구적 뮤지컬 양식에 한국 전통적 음악과 춤을 접맥하여 ‘한국적 뮤지컬’을 정립하려 한 경향이다. 서구 스타일의 뮤지컬 공연이 여러 극단에 의해 단발적으로 이루어진 반면, 이 ‘한국적 뮤지컬’ 창조는 한 뮤지컬 전문단체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북한의 대형 가무극과 대결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창단된 ‘예그린악단’의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예그린악단은 서구 뮤지컬 양식을 우리 전통과 정서의 토양 위에서 수용하고자 했다. 이들은 미국 뮤지컬을 이식하려고 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1940년대 민족적 위기의식에서 태동한 한국 자생적 음악극인 ‘향토가극’에서 우리적 뮤지컬의 전통을 발견하고 ‘한국적 뮤지컬’의 방법론을 찾았던 것이다. 따라서 고전을 소재로, 한국 전통음악과 춤을 서구 뮤지컬 양식에 접맥시킴으로써 민족정서를 담은 뮤지컬을 창조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살짜기 옵서예> (1966)는 우리 창작 뮤지컬의 고전으로 평가를 받는 동시에 ‘한국적 뮤지컬’의 전범이 되었다. 또하나의 공적은 수많은 뮤지컬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뮤지컬 제작 역량을 키워낸 일이다. 예그린악단의 전통은 그 후신인 국립가무단, 서울시립뮤지컬단으로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우리 뮤지컬계의 전문인력들은 대부분 예그린악단에서 서울시립뮤지컬단에 이어지는 단체들에서 양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iew the conditions, implications and limits of the earlier musical movement in Korea around 1960's. The musical movement during this period can be divided in large into two tendencies; the first tendency was an attempt to introduce the American musical forms to r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iew the conditions, implications and limits of the earlier musical movement in Korea around 1960's. The musical movement during this period can be divided in large into two tendencies; the first tendency was an attempt to introduce the American musical forms to re-create or translate them into local ones. However, due to the lack of the musical performers well versed in performance, sing and dance as well as the lack of the financial resources, such attempts were not much successful. The second tendency was the attempt to graft the American musical forms onto the Korean traditional music and dance to establish a 'Koreanish musical'. It should be noted that while the American style musicals were intermittently performed by various troupes, the 'Koreanish musicals' were performed continuously and successfully by a specialized musical troupe. "Yegreen Troupe" which was launched by some political motives to counter North Korea's large sing and dance troupe attempted not to imitate the American musicals blindly but to accommodate our tradition; in particular, the troupe attempted to strike a harmony between the Korean traditional 'opera' and the American musical. Namely, they tried to create the musicals featuring the national emotion and the universal nature. One of such efforts was "Sweet, Come to Me Stealthily"(1966), which is appreciated as classic of our Korean musicals. Moreover, the professional manpower and production capacity fostered by the troupe have been succeeded by National Musical Troupe and Seoul City Musical Company. In short, Yegreen Troupe demonstrated model Korean musicals.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iew the conditions, implications and limits of the earlier musical movement in Korea around 1960's. The musical movement during this period can be divided in large into two tendencies; the first tendency was an attempt to introduce the American musical forms to re-create or translate them into local ones. However, due to the lack of the musical performers well versed in performance, sing and dance as well as the lack of the financial resources, such attempts were not much successful. The second tendency was the attempt to graft the American musical forms onto the Korean traditional music and dance to establish a 'Koreanish musical'. It should be noted that while the American style musicals were intermittently performed by various troupes, the 'Koreanish musicals' were performed continuously and successfully by a specialized musical troupe. "Yegreen Troupe" which was launched by some political motives to counter North Korea's large sing and dance troupe attempted not to imitate the American musicals blindly but to accommodate our tradition; in particular, the troupe attempted to strike a harmony between the Korean traditional 'opera' and the American musical. Namely, they tried to create the musicals featuring the national emotion and the universal nature. One of such efforts was "Sweet, Come to Me Stealthily"(1966), which is appreciated as classic of our Korean musicals. Moreover, the professional manpower and production capacity fostered by the troupe have been succeeded by National Musical Troupe and Seoul City Musical Company. In short, Yegreen Troupe demonstrated model Korean music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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