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먼저 본 논문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를 교회사에 나타난 대표적 논쟁을 통해 이 문제가 어떠한 시대적 정황과 환경가운데서 불거져 나왔는지를 살펴보며 전개시켜 보았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혼용되고 있는 자유 의지개념들 속에서 어떤 경우에는 아무런 시대적 상황의 이해 없이 자유 의지개념을 가르치므로 개인 중심적인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의지 개념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고, 그 나머지 자유의지 개념들을 무조건적으로 배제시킴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주권이해와 인간 편에서의 자유의지의 문제를 왜 끄집어내어 문제를 야기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다루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계속적으로 왜곡된, 그리고 편파적인 자유 의지의 개념들이 믿음의 성도들에게 선포되어진다면 이로 인해 인간의 삶이,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자유로운 모습을 지니게 되기는 커녕, 더욱 관계의 혼란 속에 빠지게 될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시대적 상황을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가 왜 부각되어졌는지를 살펴보면 첫째, 갑작스런 산업화로 말미암아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었을 때 자유의지의 문제가 나타났으며, 둘째, 종교적으로 성직자들의 부패와 탈선이 더욱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르짖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의 발달로 인한 인간의 능력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알게 모르게 신앙의 능력을 의심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를 통해 그 해답을 얻고자 했었을 것이다. 더불어 본 논문에서는 기존에 교회사에 나타난 대표적 자유의지의 논쟁을 중심으로 정리·연구함을 통하여 자유의지의 문제가 이 세대를 넘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제임을 인식하도록 하였다.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는 이미 오랜 교회의 신학적 관심이었다.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는 인간의 죄된 현실에 대한 신학적 응답의 과정에서 인간관, 구원관, 신관 등의 문제 전반에 걸쳐진 문제였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전적인 부패와 선행적 은총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하였다. 이에 반해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고유의 자유의지의 능력을 인정함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찬탈하는 한계를 넘어서서 인간의 본성은 타락하였지만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선행적 은총에 의해서 인간은 구원을 받는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예정론과 신인협력설이 나오게 된다. 어거스틴에 있어서의 인간의 본성은 악하고 타락하였지만 하나님은 그의 자비로우신 은혜로써 인간의 의지를 부분적으로 회복시켜 주셨다. 인간은 자신의 회복된 의지로써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로써 인간의 의지가 온전히 자유로워진 것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었기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강조가 또한 필요하였다. 결국 어거스틴은 인간이 비록 자유로운 존재이기는 하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지를 주장하시기도 하며, 절대적인 주권으로 구원하실 자들을 미리 선택하신다는 예정론을 주장하여 예정론적 자유 의지론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인간이해는 비록 자유주의적 이해이긴 하지만, 인간의 본성과 본래적인 인간의지의 전적인 부패가 강하게 강조되어,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 속에서 규정되게 되는 다소 소극적 자유의지론임을 알 수 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비교 연구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사상적 근원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에라스무스가 중세 ...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먼저 본 논문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를 교회사에 나타난 대표적 논쟁을 통해 이 문제가 어떠한 시대적 정황과 환경가운데서 불거져 나왔는지를 살펴보며 전개시켜 보았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혼용되고 있는 자유 의지개념들 속에서 어떤 경우에는 아무런 시대적 상황의 이해 없이 자유 의지개념을 가르치므로 개인 중심적인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의지 개념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고, 그 나머지 자유의지 개념들을 무조건적으로 배제시킴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주권이해와 인간 편에서의 자유의지의 문제를 왜 끄집어내어 문제를 야기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다루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계속적으로 왜곡된, 그리고 편파적인 자유 의지의 개념들이 믿음의 성도들에게 선포되어진다면 이로 인해 인간의 삶이,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자유로운 모습을 지니게 되기는 커녕, 더욱 관계의 혼란 속에 빠지게 될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시대적 상황을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가 왜 부각되어졌는지를 살펴보면 첫째, 갑작스런 산업화로 말미암아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었을 때 자유의지의 문제가 나타났으며, 둘째, 종교적으로 성직자들의 부패와 탈선이 더욱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르짖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의 발달로 인한 인간의 능력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알게 모르게 신앙의 능력을 의심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를 통해 그 해답을 얻고자 했었을 것이다. 더불어 본 논문에서는 기존에 교회사에 나타난 대표적 자유의지의 논쟁을 중심으로 정리·연구함을 통하여 자유의지의 문제가 이 세대를 넘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제임을 인식하도록 하였다.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는 이미 오랜 교회의 신학적 관심이었다.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는 인간의 죄된 현실에 대한 신학적 응답의 과정에서 인간관, 구원관, 신관 등의 문제 전반에 걸쳐진 문제였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전적인 부패와 선행적 은총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하였다. 이에 반해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고유의 자유의지의 능력을 인정함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찬탈하는 한계를 넘어서서 인간의 본성은 타락하였지만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선행적 은총에 의해서 인간은 구원을 받는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예정론과 신인협력설이 나오게 된다. 어거스틴에 있어서의 인간의 본성은 악하고 타락하였지만 하나님은 그의 자비로우신 은혜로써 인간의 의지를 부분적으로 회복시켜 주셨다. 인간은 자신의 회복된 의지로써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로써 인간의 의지가 온전히 자유로워진 것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었기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강조가 또한 필요하였다. 결국 어거스틴은 인간이 비록 자유로운 존재이기는 하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지를 주장하시기도 하며, 절대적인 주권으로 구원하실 자들을 미리 선택하신다는 예정론을 주장하여 예정론적 자유 의지론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인간이해는 비록 자유주의적 이해이긴 하지만, 인간의 본성과 본래적인 인간의지의 전적인 부패가 강하게 강조되어,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 속에서 규정되게 되는 다소 소극적 자유의지론임을 알 수 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비교 연구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사상적 근원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에라스무스가 중세 스콜라주의의 공로사상을 계속 버리지 않고, 인문주의의 인간론을 가지고 성서를 보는 반면, 루터는 중세 후기의 철학적인 구조를 벗어나 성서 그 자체로 몰입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루터는 어거스틴의 소극적 자유의지론보다 더 한발 물러서서, 인간의 본성과 의지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를 경계하여 인간의지의 전적인 타락을 보다 더 강조하였다. 루터의 이러한 견해는 노예의지론으로 나타났다. 인간은 오직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행복해질 수 있으며 구원받을 수 있다. 루터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속에서의 예정은 필연적인 것이다. 웨슬리는 루터의 노예의지론이나 어거스틴의 예정론적 자유의지론이 갖는 한계를 하나님의 초월적 역사하심 즉 성령의 임재를 통해 극복하려 하였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관계를 철저히 하나님 편에서의 자비와 긍휼로써 인도하시는 역사하시는 은혜로 보았다.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자유로운 인간의 이해를 담고 있지만 이것이 죄로 말미암아 부패하고 타락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을 알고 깨닫고, 그리고 선행을 행할 수도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고 이러한 가운데 놓여 있는 인간을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혜를 통하여 자각시키시고, 가르치시고, 설득하셔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역사 하셨다. 웨슬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주도적인 이끄심을 말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 부분을 하나님의 은혜로서 이끄심의 수동적인 자유의지론을 펼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더욱 강렬한(성령의 즉각적인 임재)은총으로 말미암아 칭의와 중생을 통해 자유의지의 회복을 말하고 이로써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자발적으로 행할 수 있는 주체가 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라 할지라도 믿음의 능력과 보호하심을 계속적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믿음 없음의 상태로 다시 떨어짐을 이야기함으로써 완전한 자유의지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의 수단을 통해 계속적인 성화로서의 삶을 추구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결국 존 웨슬리는 교회의 오랜 관심인 자유의지의 문제에 대하여 어거스틴에 대하여 일면적인 이해를 가진 루터와 편협한 입장에서 바라본 칼빈을 극복하고 어거스틴의 신학을 균형 있게 해석하여 받아들였고 또한 그것을 직접적으로 목회현장에서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어 하나님의 품을 스스로 떠나므로 시작되어진 인간의 악은 결국 자신의 노력으로는 악을 추구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이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항상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자신의 의지를 자랑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버림을 받아 왔고, 이러한 경향은 시대의 흐름을 통해서도 나타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가 타락되거나 인간 중심이 될 때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시는 것이 교회사를 통해 나타난 모습들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교회의 부패와 변질을 지적하면서 개혁과 회복을 주장하지만 역사적으로 증거되어 왔던 개혁신학의 교리적 체계를 정립해 놓지 못하고 이런 문제제기만 하게 될 때는 성경적인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을 극단적으로 치우친 사고로 이해함으로 이단으로 빠져들어 가거나 자신의 판단을 마치 진리인양 내세움으로 말미암아 신앙의 본질을 오도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의지론에 있어서도 성경의 총체적인 교리적 체계를 통해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먼저 본 논문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를 교회사에 나타난 대표적 논쟁을 통해 이 문제가 어떠한 시대적 정황과 환경가운데서 불거져 나왔는지를 살펴보며 전개시켜 보았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혼용되고 있는 자유 의지개념들 속에서 어떤 경우에는 아무런 시대적 상황의 이해 없이 자유 의지개념을 가르치므로 개인 중심적인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의지 개념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고, 그 나머지 자유의지 개념들을 무조건적으로 배제시킴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주권이해와 인간 편에서의 자유의지의 문제를 왜 끄집어내어 문제를 야기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다루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계속적으로 왜곡된, 그리고 편파적인 자유 의지의 개념들이 믿음의 성도들에게 선포되어진다면 이로 인해 인간의 삶이,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자유로운 모습을 지니게 되기는 커녕, 더욱 관계의 혼란 속에 빠지게 될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시대적 상황을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가 왜 부각되어졌는지를 살펴보면 첫째, 갑작스런 산업화로 말미암아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었을 때 자유의지의 문제가 나타났으며, 둘째, 종교적으로 성직자들의 부패와 탈선이 더욱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르짖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의 발달로 인한 인간의 능력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알게 모르게 신앙의 능력을 의심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를 통해 그 해답을 얻고자 했었을 것이다. 더불어 본 논문에서는 기존에 교회사에 나타난 대표적 자유의지의 논쟁을 중심으로 정리·연구함을 통하여 자유의지의 문제가 이 세대를 넘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제임을 인식하도록 하였다.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는 이미 오랜 교회의 신학적 관심이었다.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는 인간의 죄된 현실에 대한 신학적 응답의 과정에서 인간관, 구원관, 신관 등의 문제 전반에 걸쳐진 문제였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전적인 부패와 선행적 은총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하였다. 이에 반해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고유의 자유의지의 능력을 인정함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찬탈하는 한계를 넘어서서 인간의 본성은 타락하였지만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선행적 은총에 의해서 인간은 구원을 받는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예정론과 신인협력설이 나오게 된다. 어거스틴에 있어서의 인간의 본성은 악하고 타락하였지만 하나님은 그의 자비로우신 은혜로써 인간의 의지를 부분적으로 회복시켜 주셨다. 인간은 자신의 회복된 의지로써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로써 인간의 의지가 온전히 자유로워진 것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었기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강조가 또한 필요하였다. 결국 어거스틴은 인간이 비록 자유로운 존재이기는 하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지를 주장하시기도 하며, 절대적인 주권으로 구원하실 자들을 미리 선택하신다는 예정론을 주장하여 예정론적 자유 의지론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인간이해는 비록 자유주의적 이해이긴 하지만, 인간의 본성과 본래적인 인간의지의 전적인 부패가 강하게 강조되어,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 속에서 규정되게 되는 다소 소극적 자유의지론임을 알 수 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비교 연구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사상적 근원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에라스무스가 중세 스콜라주의의 공로사상을 계속 버리지 않고, 인문주의의 인간론을 가지고 성서를 보는 반면, 루터는 중세 후기의 철학적인 구조를 벗어나 성서 그 자체로 몰입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루터는 어거스틴의 소극적 자유의지론보다 더 한발 물러서서, 인간의 본성과 의지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를 경계하여 인간의지의 전적인 타락을 보다 더 강조하였다. 루터의 이러한 견해는 노예의지론으로 나타났다. 인간은 오직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행복해질 수 있으며 구원받을 수 있다. 루터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속에서의 예정은 필연적인 것이다. 웨슬리는 루터의 노예의지론이나 어거스틴의 예정론적 자유의지론이 갖는 한계를 하나님의 초월적 역사하심 즉 성령의 임재를 통해 극복하려 하였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관계를 철저히 하나님 편에서의 자비와 긍휼로써 인도하시는 역사하시는 은혜로 보았다.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자유로운 인간의 이해를 담고 있지만 이것이 죄로 말미암아 부패하고 타락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을 알고 깨닫고, 그리고 선행을 행할 수도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고 이러한 가운데 놓여 있는 인간을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혜를 통하여 자각시키시고, 가르치시고, 설득하셔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역사 하셨다. 웨슬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주도적인 이끄심을 말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 부분을 하나님의 은혜로서 이끄심의 수동적인 자유의지론을 펼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더욱 강렬한(성령의 즉각적인 임재)은총으로 말미암아 칭의와 중생을 통해 자유의지의 회복을 말하고 이로써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자발적으로 행할 수 있는 주체가 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라 할지라도 믿음의 능력과 보호하심을 계속적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믿음 없음의 상태로 다시 떨어짐을 이야기함으로써 완전한 자유의지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의 수단을 통해 계속적인 성화로서의 삶을 추구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결국 존 웨슬리는 교회의 오랜 관심인 자유의지의 문제에 대하여 어거스틴에 대하여 일면적인 이해를 가진 루터와 편협한 입장에서 바라본 칼빈을 극복하고 어거스틴의 신학을 균형 있게 해석하여 받아들였고 또한 그것을 직접적으로 목회현장에서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어 하나님의 품을 스스로 떠나므로 시작되어진 인간의 악은 결국 자신의 노력으로는 악을 추구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이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항상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자신의 의지를 자랑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버림을 받아 왔고, 이러한 경향은 시대의 흐름을 통해서도 나타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가 타락되거나 인간 중심이 될 때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시는 것이 교회사를 통해 나타난 모습들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교회의 부패와 변질을 지적하면서 개혁과 회복을 주장하지만 역사적으로 증거되어 왔던 개혁신학의 교리적 체계를 정립해 놓지 못하고 이런 문제제기만 하게 될 때는 성경적인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을 극단적으로 치우친 사고로 이해함으로 이단으로 빠져들어 가거나 자신의 판단을 마치 진리인양 내세움으로 말미암아 신앙의 본질을 오도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의지론에 있어서도 성경의 총체적인 교리적 체계를 통해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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