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와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고찰은 한국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모순의 근원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다. 본 논문에서는 '연고주의(緣故主義), 권위주의(權威主義), 심정주의(心情主義)'라는 세 가지의 개념을 통하여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을 규명해 나간다. 한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리의 첫 번째는 '연고주의'이다. 혈연, 지연, 학연 등 정성을 기울인다. 향우회, 종친회, 동문회 등의 각종 모임을 통해서 한국인들은 가족 같은 인간관계의 유대를 맺으려고 한다. 가족과 같은 끈끈한 정으로 똘똘뭉친 소집단의 구성원들은 이렇게 해서 '우리'를 만들고, '우리' 밖의 타인들을 우리와 분명히 구분짓는다. '우리' 안에서 사람들은 더없는 일체감으로 한 덩어리가 된다. 그들이 상호간에 맺는 유대는 공감을 넘어 거의 공범적 밀착, 아니 유착관계라 할 만하다. 이 관계는 감정적 차원에서 흔히 '...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고찰은 한국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모순의 근원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다. 본 논문에서는 '연고주의(緣故主義), 권위주의(權威主義), 심정주의(心情主義)'라는 세 가지의 개념을 통하여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을 규명해 나간다. 한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리의 첫 번째는 '연고주의'이다. 혈연, 지연, 학연 등 정성을 기울인다. 향우회, 종친회, 동문회 등의 각종 모임을 통해서 한국인들은 가족 같은 인간관계의 유대를 맺으려고 한다. 가족과 같은 끈끈한 정으로 똘똘뭉친 소집단의 구성원들은 이렇게 해서 '우리'를 만들고, '우리' 밖의 타인들을 우리와 분명히 구분짓는다. '우리' 안에서 사람들은 더없는 일체감으로 한 덩어리가 된다. 그들이 상호간에 맺는 유대는 공감을 넘어 거의 공범적 밀착, 아니 유착관계라 할 만하다. 이 관계는 감정적 차원에서 흔히 '정(情)' 또는 '의리(義理)'라 불린다. 이 유착관계 속에 진정한 의미의 윤리적 요청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다시 말해, 그들이 하는 행위가 일반 도덕율에 합치하느냐 혹은 합리성에 부합되느냐는 부차적이고 또 별 의미가 없는 문제가 된다. 중요한 것은 시키는 일, 의리가 명하는 일을 조건 없이 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족하다. 한국사회의 연고주의는 각종 비리와 부정한 유착의 온상인 것이다. 한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리의 두 번째는 '권위주의'이다. 한국은 개별적 이고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개인보다는 집단의 관계망 속에서 개인을 규정하는 집단준의사회이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이 땅을 500연 이상 지배해온 유교 문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의 지배층은 법제적으로, 사상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집단주의사회의 근간이 되는 수직적 위계질서를 합리화하고 체계화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신분은 물론이고 성별(性別), 장유(長幼), 위계(位階), 친소(親疎), 등에 따라 사물들에 엄격한 차별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은 이러한 작업을 학문적 차원에서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한국인은 타인을 만나면 우선 집단 속에서 그 사람과 자신의 서열을 파악하려고 한다. 이때 가장 먼저 고려되는 것이 '나이'에 따른 서열이다. 하지만 지금은 예의로써 대접받았던 나이도 그다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어떤 형태든지 힘을 가진 사람이 그 힘을 통해서 권위를 유지하려고 한다. 오늘날의 한국은 힘이 지배하는 권위주의사회이다. 사람들은 윗사람,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는 고개를 죽이고 아랫사람, 힘없는 이들에 대하여서는 그 위에 군림하려 한다. 직장의 상관과 동등한 인간으로서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는 직장 분위기는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는 대단히 드물다. 권위주의는 평등한 인간관계를 거부한다. 평등한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되는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을 권위주의는 권위라는 이름으로 억누른다. 권위주의는 결국 기득권자들의 지배구조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된다. 한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리의 세 번째는 '심정주의(心情主義)'이다. 한국인의 심정주의적 삶의 방식에서는 마음의 쓰임이 모든 것을 좌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외부에 있는 객관적 규정보다 내부에 있는 주관적 기준을 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동일한 상화 속에서도 '나'와 '너'가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과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씀의 기초가 되는 '너'와 '나'의 관계가 일차적 중요성을 갖는다. '나'와 '너'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고, '나'와 '너'가 포함되어 있는 '우리'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마음의 쓰임도 달라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인의 심정주의적 삶의 방식은 마음의 쓰임이 엄격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리와 불의를 낳는 온상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심리적 한통속을 중심으로 한 연계적(連繫的) 부조리가 일상적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부정과 부패, 비리와 결탁, 한국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모순의 근원에는 한국사회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심정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흔히들 "한국인의 시민의식은 높은데 정치인들의 수준은 엉망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대한히 피상적인 판단이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원리와 시민들의 사소한 일상을 지배하는 원리가 결코 다르지 않다. 높은 시민의식이 계속해서 엉터리 정치인들을 선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한국사회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심정주의를 교회는 극복하였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권위주의에 있어서는 사회의 변화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의 소리들이 높은 실정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회개와 성찰을 통한 자기복음화(自己福音化)이다. 교회는 먼저 스스로 새롭게 복음화 되어야 한다. 복음정신에 입각하여 먼저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 형제적 우애의 공동체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대안적(代案的) 모델이 되어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하고 주도해야 한다. 한국사회의 인간관계의 원리, 게임의 법칙이 바뀌어야 한다. 교회는 이것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를 지속적으로 펼쳐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한국사회의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지배와 소유의 문화, 죽음의 문화는 인간존중과 사랑의 문화로 변화되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에 한국교회가 암울했던 한국사회에 횃불이 되어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듯이 어제는 복음정신에 입각한 생명과 사랑의 문화를 이 땅에 건설해 나가는 것이 오늘날 한국사회를 향한 교회의 가장 우선적이고 절박한 사명일 것이다.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고찰은 한국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모순의 근원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다. 본 논문에서는 '연고주의(緣故主義), 권위주의(權威主義), 심정주의(心情主義)'라는 세 가지의 개념을 통하여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을 규명해 나간다. 한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리의 첫 번째는 '연고주의'이다. 혈연, 지연, 학연 등 정성을 기울인다. 향우회, 종친회, 동문회 등의 각종 모임을 통해서 한국인들은 가족 같은 인간관계의 유대를 맺으려고 한다. 가족과 같은 끈끈한 정으로 똘똘뭉친 소집단의 구성원들은 이렇게 해서 '우리'를 만들고, '우리' 밖의 타인들을 우리와 분명히 구분짓는다. '우리' 안에서 사람들은 더없는 일체감으로 한 덩어리가 된다. 그들이 상호간에 맺는 유대는 공감을 넘어 거의 공범적 밀착, 아니 유착관계라 할 만하다. 이 관계는 감정적 차원에서 흔히 '정(情)' 또는 '의리(義理)'라 불린다. 이 유착관계 속에 진정한 의미의 윤리적 요청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다시 말해, 그들이 하는 행위가 일반 도덕율에 합치하느냐 혹은 합리성에 부합되느냐는 부차적이고 또 별 의미가 없는 문제가 된다. 중요한 것은 시키는 일, 의리가 명하는 일을 조건 없이 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족하다. 한국사회의 연고주의는 각종 비리와 부정한 유착의 온상인 것이다. 한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리의 두 번째는 '권위주의'이다. 한국은 개별적 이고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개인보다는 집단의 관계망 속에서 개인을 규정하는 집단준의사회이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이 땅을 500연 이상 지배해온 유교 문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의 지배층은 법제적으로, 사상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집단주의사회의 근간이 되는 수직적 위계질서를 합리화하고 체계화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신분은 물론이고 성별(性別), 장유(長幼), 위계(位階), 친소(親疎), 등에 따라 사물들에 엄격한 차별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은 이러한 작업을 학문적 차원에서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한국인은 타인을 만나면 우선 집단 속에서 그 사람과 자신의 서열을 파악하려고 한다. 이때 가장 먼저 고려되는 것이 '나이'에 따른 서열이다. 하지만 지금은 예의로써 대접받았던 나이도 그다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어떤 형태든지 힘을 가진 사람이 그 힘을 통해서 권위를 유지하려고 한다. 오늘날의 한국은 힘이 지배하는 권위주의사회이다. 사람들은 윗사람,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는 고개를 죽이고 아랫사람, 힘없는 이들에 대하여서는 그 위에 군림하려 한다. 직장의 상관과 동등한 인간으로서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는 직장 분위기는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는 대단히 드물다. 권위주의는 평등한 인간관계를 거부한다. 평등한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되는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을 권위주의는 권위라는 이름으로 억누른다. 권위주의는 결국 기득권자들의 지배구조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된다. 한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리의 세 번째는 '심정주의(心情主義)'이다. 한국인의 심정주의적 삶의 방식에서는 마음의 쓰임이 모든 것을 좌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외부에 있는 객관적 규정보다 내부에 있는 주관적 기준을 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동일한 상화 속에서도 '나'와 '너'가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과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씀의 기초가 되는 '너'와 '나'의 관계가 일차적 중요성을 갖는다. '나'와 '너'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고, '나'와 '너'가 포함되어 있는 '우리'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마음의 쓰임도 달라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인의 심정주의적 삶의 방식은 마음의 쓰임이 엄격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리와 불의를 낳는 온상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심리적 한통속을 중심으로 한 연계적(連繫的) 부조리가 일상적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부정과 부패, 비리와 결탁, 한국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모순의 근원에는 한국사회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심정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흔히들 "한국인의 시민의식은 높은데 정치인들의 수준은 엉망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대한히 피상적인 판단이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원리와 시민들의 사소한 일상을 지배하는 원리가 결코 다르지 않다. 높은 시민의식이 계속해서 엉터리 정치인들을 선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한국사회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심정주의를 교회는 극복하였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권위주의에 있어서는 사회의 변화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의 소리들이 높은 실정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회개와 성찰을 통한 자기복음화(自己福音化)이다. 교회는 먼저 스스로 새롭게 복음화 되어야 한다. 복음정신에 입각하여 먼저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 형제적 우애의 공동체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대안적(代案的) 모델이 되어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하고 주도해야 한다. 한국사회의 인간관계의 원리, 게임의 법칙이 바뀌어야 한다. 교회는 이것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를 지속적으로 펼쳐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한국사회의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지배와 소유의 문화, 죽음의 문화는 인간존중과 사랑의 문화로 변화되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에 한국교회가 암울했던 한국사회에 횃불이 되어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듯이 어제는 복음정신에 입각한 생명과 사랑의 문화를 이 땅에 건설해 나가는 것이 오늘날 한국사회를 향한 교회의 가장 우선적이고 절박한 사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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