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박한 재림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던 초대교회에 예수 재림의 지연은 많은 문제를 안겨주었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재림의 지연에 따른 신학적인 해답을 찾아야 했다. 또한 재림의 지연으로 인한 땅에서의 삶에 나타나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이것은 공동체에 위해를 가하는 외부적인 핍박의 문제도 있었지만 공동체 내부의 불평등과 빈부의 격차문제도 있었다. 누가는 이러한 문제에 본격적으로 대처하였다. 빈부의 격차에 대한 문제는 사회에서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소외계층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누가는 예수의 출생에서부터 예수의 오심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쁜 소식이라고 선포한다. 누가는 더 나아가 평지설교를 통하여 가난한 자에 대한 복만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부자에 대한 화를 선포함으로 자신의 뜻을 더욱 확실하게 한다. 누가의 가난에 대한 이해는 물질적으로 이웃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절대 빈곤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이웃의 도움이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누가에게 있어서 저주의 대상이 된다. 더군다나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이나, 넉넉한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지 못하는 부자 청년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누가가 사유재산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사유재산을 가졌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은 아니다. 누가는 재산의 분배를 이야기하면서 재물을 가진 것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다만 재물의 사용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부유한 삭개오를 모범적인 비유로 이야기하면서 재산의 절반을 나누고자 하는 삭개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선포한다. 죄인이며 부자인 삭개오의 회개는 재산의 나눔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또한 고넬료의 예에서 보았듯이 가지고 있는 소유로 구제하는 일에 대하여 "경건한 사람" 이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반면 누가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 대하여는 엄격한 잣대를 제시한다. 부자 관원의 예에서 누가는 "모든 것"의 포기를 요구한다. 예수의 제자가 되어 공동체의 추구점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재물에 대한 완전한 포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누가는 재물에 대하여 완전한 포기를 한 사람만이 당시 공동체의 지도자인 제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가 이렇게 분배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은 공동체 안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가 지향하는 공동체는 나눔을 실천하는 나눔 공동체이다. 그리하여 먼저 줄 것을 강조하며 이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연결시킨다. 누가가 추구하는 나눔 공동체는 다시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주는 나눔의 공동체이다. 누가에게 있어서 제자도는 예수의 가르침만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의 인격을 닮고 생활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부르심을 받고 그의 인격과 헌신에 동참하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다. 베드로가 소명을 받을 때나(눅 5:1~11), 레위가 소명을 받을 때(눅 5:27~28), "모든 것"의 포기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베드로가 소명을 받을 때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반응을 나타내면서 죄인인 인간이 회개할 때에 모든 소유의 포기가 따라옴을 강조하고 있다. 세리 레위는 죄인이며 부자였다. 그러나 죄인이며 부자인 레위도 "모든 것"을 포기할 때에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조건으로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제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그가 죄인이든, 부자든, 경건한 사람이든 외부적인 조건은 중요하지가 않다. 다만 그가 "모든 것"을 버리는 조건만 충족하면 누구든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은 당시의 상황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한 예로 당시의 "집단" 지향적인 사회에서 가족을 버리는 것은, 가족의 보호로부터 분리 되는 것을 의미하며, 가족에게 수치를 안겨주는 것을 의미하였다. 누가에게 있어서 "모든 것"의 포기란 "가족의 포기"와 "자기 목숨의 포기"와 "모든 소유의 포기"를 의미한다. 이것을 포기하지 못하면 제자가 될 수 없다. 동시에 누가는 제자가 되기 전에 충분히 숙고할 것을 요구한다. ...
임박한 재림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던 초대교회에 예수 재림의 지연은 많은 문제를 안겨주었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재림의 지연에 따른 신학적인 해답을 찾아야 했다. 또한 재림의 지연으로 인한 땅에서의 삶에 나타나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이것은 공동체에 위해를 가하는 외부적인 핍박의 문제도 있었지만 공동체 내부의 불평등과 빈부의 격차문제도 있었다. 누가는 이러한 문제에 본격적으로 대처하였다. 빈부의 격차에 대한 문제는 사회에서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소외계층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누가는 예수의 출생에서부터 예수의 오심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쁜 소식이라고 선포한다. 누가는 더 나아가 평지설교를 통하여 가난한 자에 대한 복만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부자에 대한 화를 선포함으로 자신의 뜻을 더욱 확실하게 한다. 누가의 가난에 대한 이해는 물질적으로 이웃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절대 빈곤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이웃의 도움이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누가에게 있어서 저주의 대상이 된다. 더군다나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이나, 넉넉한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지 못하는 부자 청년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누가가 사유재산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사유재산을 가졌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은 아니다. 누가는 재산의 분배를 이야기하면서 재물을 가진 것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다만 재물의 사용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부유한 삭개오를 모범적인 비유로 이야기하면서 재산의 절반을 나누고자 하는 삭개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선포한다. 죄인이며 부자인 삭개오의 회개는 재산의 나눔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또한 고넬료의 예에서 보았듯이 가지고 있는 소유로 구제하는 일에 대하여 "경건한 사람" 이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반면 누가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 대하여는 엄격한 잣대를 제시한다. 부자 관원의 예에서 누가는 "모든 것"의 포기를 요구한다. 예수의 제자가 되어 공동체의 추구점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재물에 대한 완전한 포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누가는 재물에 대하여 완전한 포기를 한 사람만이 당시 공동체의 지도자인 제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가 이렇게 분배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은 공동체 안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가 지향하는 공동체는 나눔을 실천하는 나눔 공동체이다. 그리하여 먼저 줄 것을 강조하며 이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연결시킨다. 누가가 추구하는 나눔 공동체는 다시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주는 나눔의 공동체이다. 누가에게 있어서 제자도는 예수의 가르침만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의 인격을 닮고 생활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부르심을 받고 그의 인격과 헌신에 동참하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다. 베드로가 소명을 받을 때나(눅 5:1~11), 레위가 소명을 받을 때(눅 5:27~28), "모든 것"의 포기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베드로가 소명을 받을 때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반응을 나타내면서 죄인인 인간이 회개할 때에 모든 소유의 포기가 따라옴을 강조하고 있다. 세리 레위는 죄인이며 부자였다. 그러나 죄인이며 부자인 레위도 "모든 것"을 포기할 때에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조건으로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제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그가 죄인이든, 부자든, 경건한 사람이든 외부적인 조건은 중요하지가 않다. 다만 그가 "모든 것"을 버리는 조건만 충족하면 누구든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은 당시의 상황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한 예로 당시의 "집단" 지향적인 사회에서 가족을 버리는 것은, 가족의 보호로부터 분리 되는 것을 의미하며, 가족에게 수치를 안겨주는 것을 의미하였다. 누가에게 있어서 "모든 것"의 포기란 "가족의 포기"와 "자기 목숨의 포기"와 "모든 소유의 포기"를 의미한다. 이것을 포기하지 못하면 제자가 될 수 없다. 동시에 누가는 제자가 되기 전에 충분히 숙고할 것을 요구한다. 망대를 쌓기 전에 가진 돈을 계산하듯이, 전쟁을 하기 전에 충분히 숙고하듯이, 제자가 되기 전에 경솔히 결정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제자직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면 맛을 잃어 버려진 소금과 같이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눅 14:35) 라는 표현으로 강조한다. 누가의 공동체에서 추구했던 것 중의 하나는 "재물의 정당한 사용"이었다. 누가는 그의 공동체에게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떠돌아 다니며, 구걸하며 살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예수의 정신과 재물의 올바른 사용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의 첫 설교는 이사야 56:19의 "주의 은혜의 해"인 "희년"을 선포한다. 이는 사회경제적으로 볼 때 빛의 탕감을 의미한다. 즉 재물의 올바른 사용을 처음부터 제시하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면 사랑은 말이나 이론이 아닌 자기 소유의 적절한 희생이나, 사용을 통한 구제에 있다. 다시 말하면 재물의 정당한 사용이 없으면 사랑도 없는 것이고 친구도 아닌 것이다. 어리석은 부자는 오직 자기의 배를 채우는데만 관심이 있다. 누가에게 있어서 이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는 자기만 생각하는 부자를 향한 경고이다. 반면 불의한 청지기는 임박한 심판의 도래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민첩함을 보임으로 칭찬을 받는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두 사람 모두의 도덕성이나 종교성에 관하여는 언급이 없다. 그럼에도 부자는 하데스의 고통을 다한다. 이것은 누가에게 있어서 재물을 나누는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세리장 삭개오는 그가 비록 죄인이며, 부자이지만 재산의 절반을 나눈다는 약속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재물의 올바른 사용이 누가에게 있어서 복음이라는 도식을 가지게 하는 좋은 예이다.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남의 재산에 욕심내지 말 것을 경고하는 비유다. 즉 부유한 자들의 나눔도 중요하지만 소작농들도 타인의 재산을 인정하고 욕심을 버려야 한다. 이렇게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통하여 재산의 포기, 또는 올바른 사용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의 공동체가 추구했던 또 한가지는 "나눔의 공동체"였다. 누가는 그의 두 번째 문서를 통하여 나눔 공동체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초대교회 공동체(행 2:42~47)의 삶의 모습은 누가가 꿈꾸던 공동체의 모습이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나눔 공동체를 실현시키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 마음에 소유욕을 극복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눔 공동체는 소유욕(탐욕)을 극복한 사람들만이 이룰 수 있는 공동체이다. 또한 마가의 다락방 교회(눅 4:32~37)에서도 성령이 충만한 무리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물건을 서로 통용하게 되었다. 누가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은 물건을 나누는 결과로 나타난다. 누가의 나눔 공동체에 대한 추구는 초대 교회에 새로운 조직(집사)을 만들면서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무절제하게 나누는 것이 아니라 공평한 나눔을 추구 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울 때 안디옥 교회의 너그러운 반응은, 누가가 교회간의 나눔과 국가간의 나눔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해 준다. 에베소 장로들에게 하는 바울의 고별 설교도 나눔의 추구를 강조한다. 여기에서 누가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누가가 추구했던 나눔 공동체는 자발적인 공동체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공동체이다. 이러한 누가의 추구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많은 교훈과 충격이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크게 몇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기복주의 신앙이다. 기복신앙은 자신의 현실적인 조건의 충족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사상에는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이나, 이웃에 대한 배려의식이 자리잡지 못한다. 두 번째 물질주의 사상이다. 모든 성공의 척도나 복의 추구가 물질에 매여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물질주의는 기독교의 근본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사치와 낭비가 죄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세 번째는 반지성주의다. 이러한 사상은 기복주의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기독교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면을 제거하면,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사상이 나타날 우려가 있다. 네 번째는 배타주의이다.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문제와 타 집단에 대한 적대감을 구분하지 못하는 배타성은 교회분열과 사회분열이라는 커다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다섯 번째는 집단이기주의 이다. 이 집단이기주의는 배타성과 같이 공동체의 화합을 파괴한다. 이러한 사상의 확대는 교회간의 교류와 협력도 방해하는 요소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누가의 사상과 비교해 볼 때 오는날에는 누가적인 제자도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 진다. 누가의 부와 가난, 분배, 제자도는 오늘의 교회에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사상이며 교훈이다.
임박한 재림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던 초대교회에 예수 재림의 지연은 많은 문제를 안겨주었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재림의 지연에 따른 신학적인 해답을 찾아야 했다. 또한 재림의 지연으로 인한 땅에서의 삶에 나타나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이것은 공동체에 위해를 가하는 외부적인 핍박의 문제도 있었지만 공동체 내부의 불평등과 빈부의 격차문제도 있었다. 누가는 이러한 문제에 본격적으로 대처하였다. 빈부의 격차에 대한 문제는 사회에서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소외계층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누가는 예수의 출생에서부터 예수의 오심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쁜 소식이라고 선포한다. 누가는 더 나아가 평지설교를 통하여 가난한 자에 대한 복만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부자에 대한 화를 선포함으로 자신의 뜻을 더욱 확실하게 한다. 누가의 가난에 대한 이해는 물질적으로 이웃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절대 빈곤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이웃의 도움이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누가에게 있어서 저주의 대상이 된다. 더군다나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이나, 넉넉한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지 못하는 부자 청년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누가가 사유재산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사유재산을 가졌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은 아니다. 누가는 재산의 분배를 이야기하면서 재물을 가진 것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다만 재물의 사용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부유한 삭개오를 모범적인 비유로 이야기하면서 재산의 절반을 나누고자 하는 삭개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선포한다. 죄인이며 부자인 삭개오의 회개는 재산의 나눔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또한 고넬료의 예에서 보았듯이 가지고 있는 소유로 구제하는 일에 대하여 "경건한 사람" 이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반면 누가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 대하여는 엄격한 잣대를 제시한다. 부자 관원의 예에서 누가는 "모든 것"의 포기를 요구한다. 예수의 제자가 되어 공동체의 추구점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재물에 대한 완전한 포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누가는 재물에 대하여 완전한 포기를 한 사람만이 당시 공동체의 지도자인 제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가 이렇게 분배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은 공동체 안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가 지향하는 공동체는 나눔을 실천하는 나눔 공동체이다. 그리하여 먼저 줄 것을 강조하며 이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연결시킨다. 누가가 추구하는 나눔 공동체는 다시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주는 나눔의 공동체이다. 누가에게 있어서 제자도는 예수의 가르침만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의 인격을 닮고 생활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부르심을 받고 그의 인격과 헌신에 동참하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다. 베드로가 소명을 받을 때나(눅 5:1~11), 레위가 소명을 받을 때(눅 5:27~28), "모든 것"의 포기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베드로가 소명을 받을 때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반응을 나타내면서 죄인인 인간이 회개할 때에 모든 소유의 포기가 따라옴을 강조하고 있다. 세리 레위는 죄인이며 부자였다. 그러나 죄인이며 부자인 레위도 "모든 것"을 포기할 때에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조건으로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제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그가 죄인이든, 부자든, 경건한 사람이든 외부적인 조건은 중요하지가 않다. 다만 그가 "모든 것"을 버리는 조건만 충족하면 누구든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은 당시의 상황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한 예로 당시의 "집단" 지향적인 사회에서 가족을 버리는 것은, 가족의 보호로부터 분리 되는 것을 의미하며, 가족에게 수치를 안겨주는 것을 의미하였다. 누가에게 있어서 "모든 것"의 포기란 "가족의 포기"와 "자기 목숨의 포기"와 "모든 소유의 포기"를 의미한다. 이것을 포기하지 못하면 제자가 될 수 없다. 동시에 누가는 제자가 되기 전에 충분히 숙고할 것을 요구한다. 망대를 쌓기 전에 가진 돈을 계산하듯이, 전쟁을 하기 전에 충분히 숙고하듯이, 제자가 되기 전에 경솔히 결정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제자직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면 맛을 잃어 버려진 소금과 같이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눅 14:35) 라는 표현으로 강조한다. 누가의 공동체에서 추구했던 것 중의 하나는 "재물의 정당한 사용"이었다. 누가는 그의 공동체에게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떠돌아 다니며, 구걸하며 살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예수의 정신과 재물의 올바른 사용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의 첫 설교는 이사야 56:19의 "주의 은혜의 해"인 "희년"을 선포한다. 이는 사회경제적으로 볼 때 빛의 탕감을 의미한다. 즉 재물의 올바른 사용을 처음부터 제시하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면 사랑은 말이나 이론이 아닌 자기 소유의 적절한 희생이나, 사용을 통한 구제에 있다. 다시 말하면 재물의 정당한 사용이 없으면 사랑도 없는 것이고 친구도 아닌 것이다. 어리석은 부자는 오직 자기의 배를 채우는데만 관심이 있다. 누가에게 있어서 이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는 자기만 생각하는 부자를 향한 경고이다. 반면 불의한 청지기는 임박한 심판의 도래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민첩함을 보임으로 칭찬을 받는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두 사람 모두의 도덕성이나 종교성에 관하여는 언급이 없다. 그럼에도 부자는 하데스의 고통을 다한다. 이것은 누가에게 있어서 재물을 나누는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세리장 삭개오는 그가 비록 죄인이며, 부자이지만 재산의 절반을 나눈다는 약속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재물의 올바른 사용이 누가에게 있어서 복음이라는 도식을 가지게 하는 좋은 예이다.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남의 재산에 욕심내지 말 것을 경고하는 비유다. 즉 부유한 자들의 나눔도 중요하지만 소작농들도 타인의 재산을 인정하고 욕심을 버려야 한다. 이렇게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통하여 재산의 포기, 또는 올바른 사용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의 공동체가 추구했던 또 한가지는 "나눔의 공동체"였다. 누가는 그의 두 번째 문서를 통하여 나눔 공동체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초대교회 공동체(행 2:42~47)의 삶의 모습은 누가가 꿈꾸던 공동체의 모습이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나눔 공동체를 실현시키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 마음에 소유욕을 극복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눔 공동체는 소유욕(탐욕)을 극복한 사람들만이 이룰 수 있는 공동체이다. 또한 마가의 다락방 교회(눅 4:32~37)에서도 성령이 충만한 무리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물건을 서로 통용하게 되었다. 누가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은 물건을 나누는 결과로 나타난다. 누가의 나눔 공동체에 대한 추구는 초대 교회에 새로운 조직(집사)을 만들면서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무절제하게 나누는 것이 아니라 공평한 나눔을 추구 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울 때 안디옥 교회의 너그러운 반응은, 누가가 교회간의 나눔과 국가간의 나눔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해 준다. 에베소 장로들에게 하는 바울의 고별 설교도 나눔의 추구를 강조한다. 여기에서 누가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누가가 추구했던 나눔 공동체는 자발적인 공동체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공동체이다. 이러한 누가의 추구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많은 교훈과 충격이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크게 몇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기복주의 신앙이다. 기복신앙은 자신의 현실적인 조건의 충족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사상에는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이나, 이웃에 대한 배려의식이 자리잡지 못한다. 두 번째 물질주의 사상이다. 모든 성공의 척도나 복의 추구가 물질에 매여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물질주의는 기독교의 근본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사치와 낭비가 죄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세 번째는 반지성주의다. 이러한 사상은 기복주의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기독교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면을 제거하면,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사상이 나타날 우려가 있다. 네 번째는 배타주의이다.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문제와 타 집단에 대한 적대감을 구분하지 못하는 배타성은 교회분열과 사회분열이라는 커다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다섯 번째는 집단이기주의 이다. 이 집단이기주의는 배타성과 같이 공동체의 화합을 파괴한다. 이러한 사상의 확대는 교회간의 교류와 협력도 방해하는 요소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누가의 사상과 비교해 볼 때 오는날에는 누가적인 제자도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 진다. 누가의 부와 가난, 분배, 제자도는 오늘의 교회에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사상이며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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