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예수기도의 바탕이 되었던 동방교회의 사상들, 예수기도의 기원과 그 시대적인 발단과정, 그리고 예수기도의 실제와 그 실천을 위한 방법들에 대해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알아보았다. 여기서 필자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극히 일부분에 집중되어 있는 한국 개신교회의 편식적인 기도 생활과 이해 속에 예수기도를 소개함으로 이를 통해서 더욱더 다양하고 풍족하게 기도의 영성을 향유하게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고, 다른 하나는 예수기도를 통해서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 앞으로 한국 개신교회가 지향해야할 기도의 모습들을 제시해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한국 개신교회 기도의 모습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형식적인 면에서는 통성, ...
지금까지 예수기도의 바탕이 되었던 동방교회의 사상들, 예수기도의 기원과 그 시대적인 발단과정, 그리고 예수기도의 실제와 그 실천을 위한 방법들에 대해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알아보았다. 여기서 필자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극히 일부분에 집중되어 있는 한국 개신교회의 편식적인 기도 생활과 이해 속에 예수기도를 소개함으로 이를 통해서 더욱더 다양하고 풍족하게 기도의 영성을 향유하게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고, 다른 하나는 예수기도를 통해서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 앞으로 한국 개신교회가 지향해야할 기도의 모습들을 제시해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한국 개신교회 기도의 모습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형식적인 면에서는 통성, 간구, 간청, 탄원기도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고, 내용적인 면에서는 '주십시오, 간절히 원합니다.' 등과 같은 다분히 기복적인 것, 곧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의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물론 이러한 입으로 하는 기도의 형태나 요구적인 내용이 모두 부정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기도가 기독교 기도의 영성에 있어서 전부 즉, 유일한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 본질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외부적 환경을 변화시키려 하거나, 하느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으려하는 왜곡된 형태의 기도 영성은 더 이상은 우리들의 기도 생활을 풍족하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삶을 더 궁핍하고 메마르게 만들 뿐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과 깊은 교제를 바라는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간절한 소망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메일이 극도로 발단한 요즘 시대에 우리가 할 기도의 내용들을 이메일이란 전달방법을 통해서 예수님께 보내고, 예수님께서 기도내용이 저장된 이메일을 받아서 읽어 보신다면,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보낸 이메일의 내용들을 다 읽어보실 것이다. 하지만 후에는 많은 기도의 이메일들이 자동 필터기능에 의해서 스펨 메일로 분류되어 휴지통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예수기도를 바탕으로 기도의 본질과 기도의 정의를 다시 해보고, 한국 개신교회 기도의 모습과 내용이 어디로 향해가야 할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먼저, 기도는 데살로니가 5장 17절의 말씀처럼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다.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가능한가? 만약에 우리가 생각하는 '입으로 하는 기도'를 예로 든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활동을 정지하고 심지어 숨 쉬는 것조차도 포기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이해로의 '쉬지 말고 하는 기도'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기도의 본질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환경에 있던지 끊임없이 하느님을 생각하고 기억하고 그 거룩한 이름을 불러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한 가지 생각, 즉 한 분이신 하느님을 향하도록 하는 것에 기초한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기도의 실천방법에서처럼, 단순한 성구를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암송하거나 예수기도의 표준적인 형태인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불쌍히 여기소서)반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도의 효력은 주문을 외우듯 단지 그 이름을 부르고 생각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과 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경배하며 나의 죄를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노출시키는 믿음이 바탕이 될 때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 할 수 있을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던지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기도의 시작은 하느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유한한 현실적 계기 즉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하지만 종국에 가서는 더 이상 나 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 단지 절대자인 하느님을 향하는 기도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헨리 나우웬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 가운데 생각하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삶의 작은 부분까지라도 하느님께 모두 드리는 것이고, 우리의 모든 생각을 하느님과의 사랑스러운 대화로 가져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을 체험하게 될 때, 「순례자의 기도」에서 순례자가 어느 날 아침 어찌 된 영문인지 기도가 자신을 깨우게 되는 것을 체험하고, 일상적으로 외워오던 기도문을 외우려 할 때, 오히려 내 의지와 노력이 소멸되고 무의적으로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기도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두 번째로, 기도는 '마음 안에서 지성이 드리는 기도'이다. 기도함에 있어서 우리는 몸이라는 부분과 영적이고 내면적인 요소를 분리해서 생각할 때가 있다. 예수 기도에 있어서도 신체적인 방법들(호흡법과 기도자세)이 중요시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었고, 오직 내면적이고 영적인 것 역시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몸과 마음을 가진 인간은 먼저 말하는 것으로만 기도를 시작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도를 할수륵 점점 소리의 요소가 줄어들면서, 기도의 본질과 의미를 깨닫기 위해 노력하고 훈련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정신적인 기도를 하게 되고 종국에 가서는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전인의 존재로서 기도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마음의 기도', 즉 '마음 안에서 지성이 드리는 기도' 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기도는 몸 따라 마음 따로 가 아니라, 예수기도에서 말하듯 차가운 머리에서 시작한 것이 뜨거운 가슴 깊은 곳으로 들어와 몸과 마음이 서로 상호작용하고 하나 되는 연합을 통한 기도가 참 기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은 기도 가운데 함께 호흡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도의 훈련이라는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인간 혼자의 힘만으로는 진실로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이며 우리내면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분은 하느님 자신이시며, 이 기도는 바로 하느님 자신의 기도가 된다. 세 번째로, 기도는 하느님과의 교제이면서 관계이다. 교제에 있어서 주된 목적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과 부르심 즉 엄마가 어린아이를 따듯한 가슴에 더욱더 품고 싶듯 그런 하느님의 교제의 초청에 응답함으로 내 안에 주님과의 교제를 위한 식탁을 준비하는 것이다. 역으로 우리도 역시 우리의 교제에 주님을 초청 할 수 있고 우리가 주님을 초청할 때 주님 또한 그것에 응답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들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목말라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관계라는 말을 언제나 무엇인가를 주거나 혹은 받거나 하는 것과 같은 이해타산적인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기도에 있어서의 관계라는 것은 그런 '주고 받음'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인 우리는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만을 생각하며 하느님 앞에 몸과 마음이 부동(不動)의 상태인 정적인 상태로 조용히 그냥 서는 것이고 하느님 또한 인간존재(human being)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며 당신의 자리에 있어 주심을 말하는 것이다. 즉 서로에게 인격적인 존재로서 단지 서 있어 주는 것이다. 나우웬 또한 기도의 주요 목적은 '하느님이 들어오셔서 말씀하실 공간을 창조하며, 하느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데 있다'고 말하며, 그는 기도에 대해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는 분과 더 가까운 교제 속에 살도록 초청하는 것이라고 하며,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를 유익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관심을 원하시기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 고 말한다. 이러한 깊은 사귐이 있을 때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세상의 것들을 찌꺼기와 같이 여길 수 있고, 그러므로 언제나 기쁨과 만족 속에서 살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주님 한 분 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충만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기도는 비우고 침묵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기도는 내 안에 있는 모든 생각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내 내면의 한가운데 주님의 처소를 만들어 드리고 초대하는 것이고, 내중심이 오직 주님만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무룻 지킬 만한 것 중에 우리의 마음을 힘써 지키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이 바로 그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의 중심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은 우리의 생명을 건강하고 살아있게 하는 당연한 길인 것이다 사람은 말을 하게 되면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특히 개신교회의 기독교인들은 기도 가운데 많은 말 때문에 에너지를 많이 소비한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을 비우는 것은 이런 없어짐의 비움이 아니라 역으로 하나님으로 풍족해지는 채워짐의 비움이다. 이렇게 우리 존재의 중심을 주님께 드리고 우리는 침묵할 때 그 때 우리의 침묵 속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즉, 말보다 더 큰 말이 침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덴마크의 종교 사상가 키에르케르고는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처음에는 기도가 말하는 것인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점점 더 그윽한 경지에 이르면 결국에 가서는 기도가 듣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다(누가복음 5:4). 이 상황을 기도의 관점에서 한번 바라보자. 우리는 얕은 물가에 가서 물속을 보면 쉽게 물속을 들여다 볼 수 있고,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한 눈에 다 보이는 거 같다. 고기가 어디에 많고 적게 있는지 나름대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이고 부분적인 것이며 본질을 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다는 것은 육적인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은 '왜 예수님이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냐.'하는 것이다. 깊은 곳에 가서 물속을 들여다보면 물속 깊은 곳에 무엇이 얼마나 어디에 있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어두움만이 보일뿐만 아니라 얕은 곳 보다 보는 것이 더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은 내 눈을 통해서 볼 수 없을 뿐이다. 내 눈을 감고서 내 눈으로 보려하는 것을 포기할 때 혹은 우리의 한계를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온전히 우리의 모든 주파수를 하나님께 집중하게 된다. 이 때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주님의 영적인 눈을 가지고 물속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이전에 볼 수 없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일반인들이 가질 수 없는 청각이 발달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촉각이 예민하게 발달되는 것과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즉, 주님께서는 빛으로 우리의 모든 어두움을 비추시는 것이고,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것을 못 보게 되지만 내가 육적인 눈으로 파악할 수 없었고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새롭게 보게 되는 것이다. 즉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어두운 심해의 환경들까지 주님이 비취시는 빛으로 더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이처럼, 몸과 마음을 다해서 차분하고 주의 깊게 하느님을 응시할 때, 영적 부주의와 부산함으로 인해서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사물들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본성 즉 핵심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신 것이다. 이처럼, 깊이 있고 진실 된 기도를 위해서는 우리의 한계와 무능력이 온전히 드러나는 깊은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창조적인 것이며 내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다. 기도는 기도를 해서 내가 목적하는 바를 이루고 사회적, 경제적인 지위나 신분의 변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 빛 되신 주님을 만나고 그 빛의 에너지로 인해서 내 자신이 주님의 빛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로인해 자신의 존재의 본질을 찾는 것이고 현실에 치우지지 않는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는 내가 기도함으로 인해서 무엇을 해내는 것과 같은 나에 의한 창조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형상대로 창조 하셨듯이, 다시금 계속적으로 나를 주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도록 내어드리고 그 창조의 부름에 절대자인 하느님을 향해 나를 순응시키고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변화와 창조의 과정 중에는 언제나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와 고백이 담겨있기에 이것은 체념이나 포기와는 다른 의미이다. 단순히 주님의 변화와 창조의 부름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8)",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36)"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 내면에는 주님이 거하실 전이 만들어 지고 우리는 옛 구습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형상인 새 사람을 입는 변화와 창조 즉 '신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주님은 우리의 내면에 주님의 거처를 정하시고 항상 기도하시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기도 모습은 많은 말을 함으로 비우는 기도였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비움일 뿐 내면적으로는 오히려 자신의 것들을 빼곡하게 채우는 자기중심적인 기도였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없었으며, 그로인해 그분과의 인격적인 깊은 만남이 힘들었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 했다. 하지만 "예수기도"는 자신을 부정함으로 자신의 모든 정욕과 생각들을 비우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비움이지만 역설적으로는 분명하게 명확하게 '있음과 채워짐의 기도'이다. 그렇게 나를 비움으로 온전히 주님을 내안에 모시는 기도며, 나를 비움으로 인해서 내 존재의 중심에 주님의 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주님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기도가 바로 예수기도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삶의 목표가 되는 신화, 즉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기도가 절대적인 기도의 형태나 방법은 아니다. 만약에 예수기도만이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서 순수한 마음의 기도에 이르기 위한 절대적이고 유일한 기도의 형태라고 단정 지어 버린다면, 기존의 한국 개신교회 기도의 모습에서 보여 왔던 악습을 답습할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기도는 우리들 각각의 사람들에게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주님의 뜻대로 기도의 여정을 다양하게 인도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리차드 포스터는 관상적 전통의 특징적인 강점 중의 하나로 기도가 삶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는데, 여기에 바로 기도의 핵심이 숨어있다. 그것은 '관상 전통에서는 기도를 좋은 것, 중요한 것으로 보지 않고,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기도는 개신교 영성과 삶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으로서, "나는 진정으로 누구에게 속해있는가?"라는 질문을 쉼 없이 던지게 하는 것이며, 점검하게 하는 소중한 전통이며 통로이다. 이 질문에서처럼, 기도의 본질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행위(doing)의 문제 이전에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존재됨(being)의 문제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많은 무리가 당신을 에워쌈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시기 위해서 배에 오르신다. 그 때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은 안절부절 하면서 예수님께 죽겠다고 살려달려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은 고요하게 주무시고 계셨다(마태복음 9:18-27). 우리들 또한 이와 같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변의 환경이나 상황들이 비바람이 몰아치는 폭풍우와 같은 상황에 처할 경우가 있다. 그 상황에서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했고, 어떠할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조용히 배에 누워 잠을 청하였던 예수님의 모습, 그 모습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철저한 내적 고요 그리고 마음의 견고함과 완전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언제나 고요한 기도와 경청의 필요를 느끼고 실천하셨던 그분의 마음과 영과 영성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진정한 헤시카스트셨다. 우리도 예수기도를 온전히 실천함으로 예수님을 본받아 소음, 혼란 그리고 영적 무감각이 팽배한 이 시대에 각자의 처소에서 어느 순간에나 무엇을 하던지 진정한 헤시카스트가 되어야겠다. 필자는 다시 한번 예수기도가 기도의 영성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경시되어 왔던 동방교회 영성의 핵심인 예수기도의 온전한 실천은 결국 한국 개신교회 영성 개혁 특히 기도의 영성에 있어서 단비와 같은 고마운 역할 그리고 지렁이와 같이 새 생명의 터전을 일구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믿는다. 왜냐하면 예수기도를 통해서 내 자의식의 소멸과 함께 하느님과 우주에 대한 의식을 확대할 수 있고, 넓고 다양하고 풍성한 기도의 영성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간절히 소망하는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끊임없이 쉬지 않고 하느님과 인격적인 깊은 만남을 가지고 그 분과의 '하나됨'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진정한 기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예수기도의 바탕이 되었던 동방교회의 사상들, 예수기도의 기원과 그 시대적인 발단과정, 그리고 예수기도의 실제와 그 실천을 위한 방법들에 대해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알아보았다. 여기서 필자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극히 일부분에 집중되어 있는 한국 개신교회의 편식적인 기도 생활과 이해 속에 예수기도를 소개함으로 이를 통해서 더욱더 다양하고 풍족하게 기도의 영성을 향유하게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고, 다른 하나는 예수기도를 통해서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 앞으로 한국 개신교회가 지향해야할 기도의 모습들을 제시해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한국 개신교회 기도의 모습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형식적인 면에서는 통성, 간구, 간청, 탄원기도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고, 내용적인 면에서는 '주십시오, 간절히 원합니다.' 등과 같은 다분히 기복적인 것, 곧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의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물론 이러한 입으로 하는 기도의 형태나 요구적인 내용이 모두 부정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기도가 기독교 기도의 영성에 있어서 전부 즉, 유일한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 본질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외부적 환경을 변화시키려 하거나, 하느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으려하는 왜곡된 형태의 기도 영성은 더 이상은 우리들의 기도 생활을 풍족하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삶을 더 궁핍하고 메마르게 만들 뿐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과 깊은 교제를 바라는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간절한 소망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메일이 극도로 발단한 요즘 시대에 우리가 할 기도의 내용들을 이메일이란 전달방법을 통해서 예수님께 보내고, 예수님께서 기도내용이 저장된 이메일을 받아서 읽어 보신다면,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보낸 이메일의 내용들을 다 읽어보실 것이다. 하지만 후에는 많은 기도의 이메일들이 자동 필터기능에 의해서 스펨 메일로 분류되어 휴지통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예수기도를 바탕으로 기도의 본질과 기도의 정의를 다시 해보고, 한국 개신교회 기도의 모습과 내용이 어디로 향해가야 할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먼저, 기도는 데살로니가 5장 17절의 말씀처럼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다.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가능한가? 만약에 우리가 생각하는 '입으로 하는 기도'를 예로 든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활동을 정지하고 심지어 숨 쉬는 것조차도 포기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이해로의 '쉬지 말고 하는 기도'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기도의 본질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환경에 있던지 끊임없이 하느님을 생각하고 기억하고 그 거룩한 이름을 불러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한 가지 생각, 즉 한 분이신 하느님을 향하도록 하는 것에 기초한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기도의 실천방법에서처럼, 단순한 성구를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암송하거나 예수기도의 표준적인 형태인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불쌍히 여기소서)반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도의 효력은 주문을 외우듯 단지 그 이름을 부르고 생각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과 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경배하며 나의 죄를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노출시키는 믿음이 바탕이 될 때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 할 수 있을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던지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기도의 시작은 하느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유한한 현실적 계기 즉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하지만 종국에 가서는 더 이상 나 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 단지 절대자인 하느님을 향하는 기도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헨리 나우웬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 가운데 생각하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삶의 작은 부분까지라도 하느님께 모두 드리는 것이고, 우리의 모든 생각을 하느님과의 사랑스러운 대화로 가져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을 체험하게 될 때, 「순례자의 기도」에서 순례자가 어느 날 아침 어찌 된 영문인지 기도가 자신을 깨우게 되는 것을 체험하고, 일상적으로 외워오던 기도문을 외우려 할 때, 오히려 내 의지와 노력이 소멸되고 무의적으로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기도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두 번째로, 기도는 '마음 안에서 지성이 드리는 기도'이다. 기도함에 있어서 우리는 몸이라는 부분과 영적이고 내면적인 요소를 분리해서 생각할 때가 있다. 예수 기도에 있어서도 신체적인 방법들(호흡법과 기도자세)이 중요시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었고, 오직 내면적이고 영적인 것 역시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몸과 마음을 가진 인간은 먼저 말하는 것으로만 기도를 시작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도를 할수륵 점점 소리의 요소가 줄어들면서, 기도의 본질과 의미를 깨닫기 위해 노력하고 훈련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정신적인 기도를 하게 되고 종국에 가서는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전인의 존재로서 기도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마음의 기도', 즉 '마음 안에서 지성이 드리는 기도' 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기도는 몸 따라 마음 따로 가 아니라, 예수기도에서 말하듯 차가운 머리에서 시작한 것이 뜨거운 가슴 깊은 곳으로 들어와 몸과 마음이 서로 상호작용하고 하나 되는 연합을 통한 기도가 참 기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은 기도 가운데 함께 호흡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도의 훈련이라는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인간 혼자의 힘만으로는 진실로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이며 우리내면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분은 하느님 자신이시며, 이 기도는 바로 하느님 자신의 기도가 된다. 세 번째로, 기도는 하느님과의 교제이면서 관계이다. 교제에 있어서 주된 목적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과 부르심 즉 엄마가 어린아이를 따듯한 가슴에 더욱더 품고 싶듯 그런 하느님의 교제의 초청에 응답함으로 내 안에 주님과의 교제를 위한 식탁을 준비하는 것이다. 역으로 우리도 역시 우리의 교제에 주님을 초청 할 수 있고 우리가 주님을 초청할 때 주님 또한 그것에 응답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들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목말라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관계라는 말을 언제나 무엇인가를 주거나 혹은 받거나 하는 것과 같은 이해타산적인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기도에 있어서의 관계라는 것은 그런 '주고 받음'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인 우리는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만을 생각하며 하느님 앞에 몸과 마음이 부동(不動)의 상태인 정적인 상태로 조용히 그냥 서는 것이고 하느님 또한 인간존재(human being)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며 당신의 자리에 있어 주심을 말하는 것이다. 즉 서로에게 인격적인 존재로서 단지 서 있어 주는 것이다. 나우웬 또한 기도의 주요 목적은 '하느님이 들어오셔서 말씀하실 공간을 창조하며, 하느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데 있다'고 말하며, 그는 기도에 대해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는 분과 더 가까운 교제 속에 살도록 초청하는 것이라고 하며,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를 유익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관심을 원하시기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 고 말한다. 이러한 깊은 사귐이 있을 때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세상의 것들을 찌꺼기와 같이 여길 수 있고, 그러므로 언제나 기쁨과 만족 속에서 살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주님 한 분 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충만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기도는 비우고 침묵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기도는 내 안에 있는 모든 생각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내 내면의 한가운데 주님의 처소를 만들어 드리고 초대하는 것이고, 내중심이 오직 주님만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무룻 지킬 만한 것 중에 우리의 마음을 힘써 지키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이 바로 그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의 중심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은 우리의 생명을 건강하고 살아있게 하는 당연한 길인 것이다 사람은 말을 하게 되면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특히 개신교회의 기독교인들은 기도 가운데 많은 말 때문에 에너지를 많이 소비한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을 비우는 것은 이런 없어짐의 비움이 아니라 역으로 하나님으로 풍족해지는 채워짐의 비움이다. 이렇게 우리 존재의 중심을 주님께 드리고 우리는 침묵할 때 그 때 우리의 침묵 속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즉, 말보다 더 큰 말이 침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덴마크의 종교 사상가 키에르케르고는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처음에는 기도가 말하는 것인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점점 더 그윽한 경지에 이르면 결국에 가서는 기도가 듣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다(누가복음 5:4). 이 상황을 기도의 관점에서 한번 바라보자. 우리는 얕은 물가에 가서 물속을 보면 쉽게 물속을 들여다 볼 수 있고,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한 눈에 다 보이는 거 같다. 고기가 어디에 많고 적게 있는지 나름대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이고 부분적인 것이며 본질을 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다는 것은 육적인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은 '왜 예수님이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냐.'하는 것이다. 깊은 곳에 가서 물속을 들여다보면 물속 깊은 곳에 무엇이 얼마나 어디에 있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어두움만이 보일뿐만 아니라 얕은 곳 보다 보는 것이 더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은 내 눈을 통해서 볼 수 없을 뿐이다. 내 눈을 감고서 내 눈으로 보려하는 것을 포기할 때 혹은 우리의 한계를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온전히 우리의 모든 주파수를 하나님께 집중하게 된다. 이 때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주님의 영적인 눈을 가지고 물속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이전에 볼 수 없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일반인들이 가질 수 없는 청각이 발달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촉각이 예민하게 발달되는 것과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즉, 주님께서는 빛으로 우리의 모든 어두움을 비추시는 것이고,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것을 못 보게 되지만 내가 육적인 눈으로 파악할 수 없었고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새롭게 보게 되는 것이다. 즉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어두운 심해의 환경들까지 주님이 비취시는 빛으로 더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이처럼, 몸과 마음을 다해서 차분하고 주의 깊게 하느님을 응시할 때, 영적 부주의와 부산함으로 인해서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사물들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본성 즉 핵심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신 것이다. 이처럼, 깊이 있고 진실 된 기도를 위해서는 우리의 한계와 무능력이 온전히 드러나는 깊은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창조적인 것이며 내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다. 기도는 기도를 해서 내가 목적하는 바를 이루고 사회적, 경제적인 지위나 신분의 변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 빛 되신 주님을 만나고 그 빛의 에너지로 인해서 내 자신이 주님의 빛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로인해 자신의 존재의 본질을 찾는 것이고 현실에 치우지지 않는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는 내가 기도함으로 인해서 무엇을 해내는 것과 같은 나에 의한 창조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형상대로 창조 하셨듯이, 다시금 계속적으로 나를 주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도록 내어드리고 그 창조의 부름에 절대자인 하느님을 향해 나를 순응시키고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변화와 창조의 과정 중에는 언제나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와 고백이 담겨있기에 이것은 체념이나 포기와는 다른 의미이다. 단순히 주님의 변화와 창조의 부름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8)",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36)"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 내면에는 주님이 거하실 전이 만들어 지고 우리는 옛 구습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형상인 새 사람을 입는 변화와 창조 즉 '신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주님은 우리의 내면에 주님의 거처를 정하시고 항상 기도하시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기도 모습은 많은 말을 함으로 비우는 기도였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비움일 뿐 내면적으로는 오히려 자신의 것들을 빼곡하게 채우는 자기중심적인 기도였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없었으며, 그로인해 그분과의 인격적인 깊은 만남이 힘들었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 했다. 하지만 "예수기도"는 자신을 부정함으로 자신의 모든 정욕과 생각들을 비우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비움이지만 역설적으로는 분명하게 명확하게 '있음과 채워짐의 기도'이다. 그렇게 나를 비움으로 온전히 주님을 내안에 모시는 기도며, 나를 비움으로 인해서 내 존재의 중심에 주님의 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주님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기도가 바로 예수기도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삶의 목표가 되는 신화, 즉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기도가 절대적인 기도의 형태나 방법은 아니다. 만약에 예수기도만이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서 순수한 마음의 기도에 이르기 위한 절대적이고 유일한 기도의 형태라고 단정 지어 버린다면, 기존의 한국 개신교회 기도의 모습에서 보여 왔던 악습을 답습할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기도는 우리들 각각의 사람들에게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주님의 뜻대로 기도의 여정을 다양하게 인도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리차드 포스터는 관상적 전통의 특징적인 강점 중의 하나로 기도가 삶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는데, 여기에 바로 기도의 핵심이 숨어있다. 그것은 '관상 전통에서는 기도를 좋은 것, 중요한 것으로 보지 않고,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기도는 개신교 영성과 삶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으로서, "나는 진정으로 누구에게 속해있는가?"라는 질문을 쉼 없이 던지게 하는 것이며, 점검하게 하는 소중한 전통이며 통로이다. 이 질문에서처럼, 기도의 본질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행위(doing)의 문제 이전에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존재됨(being)의 문제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많은 무리가 당신을 에워쌈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시기 위해서 배에 오르신다. 그 때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은 안절부절 하면서 예수님께 죽겠다고 살려달려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은 고요하게 주무시고 계셨다(마태복음 9:18-27). 우리들 또한 이와 같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변의 환경이나 상황들이 비바람이 몰아치는 폭풍우와 같은 상황에 처할 경우가 있다. 그 상황에서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했고, 어떠할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조용히 배에 누워 잠을 청하였던 예수님의 모습, 그 모습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철저한 내적 고요 그리고 마음의 견고함과 완전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언제나 고요한 기도와 경청의 필요를 느끼고 실천하셨던 그분의 마음과 영과 영성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진정한 헤시카스트셨다. 우리도 예수기도를 온전히 실천함으로 예수님을 본받아 소음, 혼란 그리고 영적 무감각이 팽배한 이 시대에 각자의 처소에서 어느 순간에나 무엇을 하던지 진정한 헤시카스트가 되어야겠다. 필자는 다시 한번 예수기도가 기도의 영성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경시되어 왔던 동방교회 영성의 핵심인 예수기도의 온전한 실천은 결국 한국 개신교회 영성 개혁 특히 기도의 영성에 있어서 단비와 같은 고마운 역할 그리고 지렁이와 같이 새 생명의 터전을 일구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믿는다. 왜냐하면 예수기도를 통해서 내 자의식의 소멸과 함께 하느님과 우주에 대한 의식을 확대할 수 있고, 넓고 다양하고 풍성한 기도의 영성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간절히 소망하는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끊임없이 쉬지 않고 하느님과 인격적인 깊은 만남을 가지고 그 분과의 '하나됨'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진정한 기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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