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어두웠던 중세 말기의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린 시작이었으며, 개혁신학의 기초를 쌓은 디딤돌의 역할을 했다. 루터의 신학은 중세말기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중세의 봉건적인 사회. 경제 질서가 와해되어가고 로마 교황청의 강력했던 통제력이 상실되어 가던 역사적인 배경을 그 전제로 하고 있다. 중세 말기, 십자군 전쟁은 단지 군사적인 부분에만 변화를 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이슬람을 통해 새로운 사상들이 유입되었고, 군주들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확장하는 기회였으며, 평민들에게는 그들이 사는 세상이외의 새로운 세상이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는 기회였다. 새로운 사상의 유입은 자연스럽게 기존 질서에 대해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해 중세 말기의 교회와 수도원은 그 초기의 설립 취지와 초대 교회의 건전한 정신을 상실한 채,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었으며, 실천을 상실한 이론적인 신학만으로 교회를 공허하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또한 이들의 약화되어 있는 도덕적 기반의 몰락을 부추긴 것은 면죄부 판매를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면죄부가 일반 대중들에게 그들의 당초 계획에 비해 많은 호응을 보이자, 이를 합리화 시키는 공적을 바탕으로 하는 신학과 교황의 칙서들을 통해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리게 된다. 이에 대항하여, 물질에만 눈이 어두워 바른 성경적인 시각에서 멀어져 버린 로마 카톨릭 교회를 향하여 거센 각성과 개혁의 목소리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위클리프와 후스는 교회 내부에서 교회의 정화와 개혁을 위하여 목소리를 높였으며, 에라스무스는 교회의 밖에서 교회가 바른 자리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두 부류가 모두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으나, 그들의 주장이 직접 로마 카톨릭을 변화시키는데 까지 가지는 못했다는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으며, 또한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의 신학 형성에 직.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를 같이 한다. 십자가 신학에 영향을 준 사상적 배경으로는 중세 전반을 지배했던 스콜라주의와 스콜라의 집대성을 이룩한 ...
지금까지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어두웠던 중세 말기의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린 시작이었으며, 개혁신학의 기초를 쌓은 디딤돌의 역할을 했다. 루터의 신학은 중세말기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중세의 봉건적인 사회. 경제 질서가 와해되어가고 로마 교황청의 강력했던 통제력이 상실되어 가던 역사적인 배경을 그 전제로 하고 있다. 중세 말기, 십자군 전쟁은 단지 군사적인 부분에만 변화를 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이슬람을 통해 새로운 사상들이 유입되었고, 군주들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확장하는 기회였으며, 평민들에게는 그들이 사는 세상이외의 새로운 세상이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는 기회였다. 새로운 사상의 유입은 자연스럽게 기존 질서에 대해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해 중세 말기의 교회와 수도원은 그 초기의 설립 취지와 초대 교회의 건전한 정신을 상실한 채,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었으며, 실천을 상실한 이론적인 신학만으로 교회를 공허하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또한 이들의 약화되어 있는 도덕적 기반의 몰락을 부추긴 것은 면죄부 판매를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면죄부가 일반 대중들에게 그들의 당초 계획에 비해 많은 호응을 보이자, 이를 합리화 시키는 공적을 바탕으로 하는 신학과 교황의 칙서들을 통해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리게 된다. 이에 대항하여, 물질에만 눈이 어두워 바른 성경적인 시각에서 멀어져 버린 로마 카톨릭 교회를 향하여 거센 각성과 개혁의 목소리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위클리프와 후스는 교회 내부에서 교회의 정화와 개혁을 위하여 목소리를 높였으며, 에라스무스는 교회의 밖에서 교회가 바른 자리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두 부류가 모두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으나, 그들의 주장이 직접 로마 카톨릭을 변화시키는데 까지 가지는 못했다는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으며, 또한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의 신학 형성에 직.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를 같이 한다. 십자가 신학에 영향을 준 사상적 배경으로는 중세 전반을 지배했던 스콜라주의와 스콜라의 집대성을 이룩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들 수 있다. 스콜라주의를 루터는 영광의 신학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지목하여 비판하였다. 루터는 오캄에게서 깊은 사상적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지만, 오캄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는데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어거스틴에게서도 루터는 그의 은혜와 죄에 대한 사상에 영향을 받았지만, 전적으로 그를 따르지는 않았다. 내용의 측면에서 보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감추어진 하나님’이 계시되심과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이 의롭게 되었음을 말하는 신학이다. 즉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의 은폐적 속성을 ‘십자가의 지혜’로 밝히는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인간의 공적에 의지하는 영광의 신학과는 대조되며 십자가 신학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참된 모습과 그의 참된 의지를 인식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십자가 신학은 그 독특한 신인식에서 부터 시작한다. 십자가 신학이란 고난과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하는 신학이다. 영광의 신학과는 달리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속성을 간파한다. 십자가 신학은 시종일관 하나님의 감추이심에 주목하며 ‘숨어계시는 하나님’과 십자가와의 관계를 밝힌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본 논문에서 다룬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계시의 신학이며 사변적인 신학과는 완전히 구별된다. 이 계시의 핵심은 그리스도이다. 말씀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가르킨다. 즉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인식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이다. 둘째, 이러한 계시는 간접적이고 감추어져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폐된 모습, 즉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의미한다. 즉 십자가 신학은 ‘감추어진 하나님’, ‘하나님의 뒷 모습’, ‘감추인 계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는 신학이다. 십자가의 신학은 숨어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신학이다. 셋째는 이 감추인 계는 인간의 도덕적 행업이나 만든바 된 것들 안에서 인식될 수없고, 오직 십자가의 지혜로만 인식된다. 십자가는 인간의 지헤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환상을 산산히 조각낸다. 십자가의 지혜는 세상과 인간의 지혜와는 모순되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이 십자가의 지혜는 은폐된 하나님의 참된 모습과 참된 의지를 밝힌다. 즉 십자가 신학은 오직 십자가의 지혜만을 설교한다. 넷째로 이러한 계시 속에 감추이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이는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숨어계신’ 하나님, 즉 하나님의 은폐성은 믿음의 절대개념이다. 하나님은 그의 은폐적 속성 때문에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 오직 간접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만 인식될 뿐이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혜이다. 십자가 신학은 믿음의 신학이다. 다섯째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 영적인 시련 즉 십자가를 지는 삶 가운데 드러난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거부하거나 사변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삶의 일부이며 믿음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그가 최초에 찬탈했던 하나님의 자리와 이웃의 자리를 돌려주는 삶을 산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의의 전가를 통해 의인이 된 존재이다. 그는 매일 죄와 싸우는 사람이며, 그러한 죄와의 싸움에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만난다. 시종일관 ‘감추어진 하나님’(Deus absconditus) 즉, 하나님의 은폐성 을 논구하는 신학이 십자가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고난과 십자가를 통한 참된 하나님 인식을 통해서, 인간이 자기 확신을 부수고, 하나님만을 홀로 하나님 되게 하는 신학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선언하는 십자가 신학은 종교적 지성주의와, 도덕적 경건주의를 배격한다.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을 가장한 사탄적 권세를 심판하는 칼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신학 앞에서 ‘하나님과 구원, 은혜,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의 교회의 참된 실재가 드러난다. 십자가 신학은 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목하는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감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참된 신학이며, 십자가 신학은 십자가와 고난을 통해 부활과 승리를 선물하는 은헤의 하나님을 말하는 희망의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의 부정 아래에 깊이 감추인 하나님의 긍정을 단단히 붙잡는 신학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신학에서 십자가의 길이 부활의 길로, 고난의 길이 승리의 길로 질적인 비약이 가능하게 된다. 진정한 십자가의 길은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부활의 새 아침을 안게 된 부활의 길과 연합되는 길이다. 동시에 부활의 길은 십자가의 길과 상관관계 속에서만, 값싼 영광의 길, 승리의 길로 전락되지 않는다. 십자가 신학은 이 같은 역설적, 역동적인 기독교의 진리를 함축한 참된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냉혹하고 모순된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참된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책임적이고도 실존적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유일한 신학이다.
지금까지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어두웠던 중세 말기의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린 시작이었으며, 개혁신학의 기초를 쌓은 디딤돌의 역할을 했다. 루터의 신학은 중세말기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중세의 봉건적인 사회. 경제 질서가 와해되어가고 로마 교황청의 강력했던 통제력이 상실되어 가던 역사적인 배경을 그 전제로 하고 있다. 중세 말기, 십자군 전쟁은 단지 군사적인 부분에만 변화를 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이슬람을 통해 새로운 사상들이 유입되었고, 군주들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확장하는 기회였으며, 평민들에게는 그들이 사는 세상이외의 새로운 세상이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는 기회였다. 새로운 사상의 유입은 자연스럽게 기존 질서에 대해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해 중세 말기의 교회와 수도원은 그 초기의 설립 취지와 초대 교회의 건전한 정신을 상실한 채,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었으며, 실천을 상실한 이론적인 신학만으로 교회를 공허하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또한 이들의 약화되어 있는 도덕적 기반의 몰락을 부추긴 것은 면죄부 판매를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면죄부가 일반 대중들에게 그들의 당초 계획에 비해 많은 호응을 보이자, 이를 합리화 시키는 공적을 바탕으로 하는 신학과 교황의 칙서들을 통해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리게 된다. 이에 대항하여, 물질에만 눈이 어두워 바른 성경적인 시각에서 멀어져 버린 로마 카톨릭 교회를 향하여 거센 각성과 개혁의 목소리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위클리프와 후스는 교회 내부에서 교회의 정화와 개혁을 위하여 목소리를 높였으며, 에라스무스는 교회의 밖에서 교회가 바른 자리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두 부류가 모두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으나, 그들의 주장이 직접 로마 카톨릭을 변화시키는데 까지 가지는 못했다는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으며, 또한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의 신학 형성에 직.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를 같이 한다. 십자가 신학에 영향을 준 사상적 배경으로는 중세 전반을 지배했던 스콜라주의와 스콜라의 집대성을 이룩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들 수 있다. 스콜라주의를 루터는 영광의 신학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지목하여 비판하였다. 루터는 오캄에게서 깊은 사상적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지만, 오캄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는데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어거스틴에게서도 루터는 그의 은혜와 죄에 대한 사상에 영향을 받았지만, 전적으로 그를 따르지는 않았다. 내용의 측면에서 보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감추어진 하나님’이 계시되심과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이 의롭게 되었음을 말하는 신학이다. 즉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의 은폐적 속성을 ‘십자가의 지혜’로 밝히는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인간의 공적에 의지하는 영광의 신학과는 대조되며 십자가 신학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참된 모습과 그의 참된 의지를 인식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십자가 신학은 그 독특한 신인식에서 부터 시작한다. 십자가 신학이란 고난과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하는 신학이다. 영광의 신학과는 달리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속성을 간파한다. 십자가 신학은 시종일관 하나님의 감추이심에 주목하며 ‘숨어계시는 하나님’과 십자가와의 관계를 밝힌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본 논문에서 다룬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계시의 신학이며 사변적인 신학과는 완전히 구별된다. 이 계시의 핵심은 그리스도이다. 말씀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가르킨다. 즉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인식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이다. 둘째, 이러한 계시는 간접적이고 감추어져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폐된 모습, 즉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의미한다. 즉 십자가 신학은 ‘감추어진 하나님’, ‘하나님의 뒷 모습’, ‘감추인 계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는 신학이다. 십자가의 신학은 숨어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신학이다. 셋째는 이 감추인 계는 인간의 도덕적 행업이나 만든바 된 것들 안에서 인식될 수없고, 오직 십자가의 지혜로만 인식된다. 십자가는 인간의 지헤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환상을 산산히 조각낸다. 십자가의 지혜는 세상과 인간의 지혜와는 모순되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이 십자가의 지혜는 은폐된 하나님의 참된 모습과 참된 의지를 밝힌다. 즉 십자가 신학은 오직 십자가의 지혜만을 설교한다. 넷째로 이러한 계시 속에 감추이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이는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숨어계신’ 하나님, 즉 하나님의 은폐성은 믿음의 절대개념이다. 하나님은 그의 은폐적 속성 때문에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 오직 간접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만 인식될 뿐이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혜이다. 십자가 신학은 믿음의 신학이다. 다섯째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 영적인 시련 즉 십자가를 지는 삶 가운데 드러난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거부하거나 사변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삶의 일부이며 믿음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그가 최초에 찬탈했던 하나님의 자리와 이웃의 자리를 돌려주는 삶을 산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의의 전가를 통해 의인이 된 존재이다. 그는 매일 죄와 싸우는 사람이며, 그러한 죄와의 싸움에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만난다. 시종일관 ‘감추어진 하나님’(Deus absconditus) 즉, 하나님의 은폐성 을 논구하는 신학이 십자가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고난과 십자가를 통한 참된 하나님 인식을 통해서, 인간이 자기 확신을 부수고, 하나님만을 홀로 하나님 되게 하는 신학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선언하는 십자가 신학은 종교적 지성주의와, 도덕적 경건주의를 배격한다.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을 가장한 사탄적 권세를 심판하는 칼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신학 앞에서 ‘하나님과 구원, 은혜,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의 교회의 참된 실재가 드러난다. 십자가 신학은 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목하는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감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참된 신학이며, 십자가 신학은 십자가와 고난을 통해 부활과 승리를 선물하는 은헤의 하나님을 말하는 희망의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의 부정 아래에 깊이 감추인 하나님의 긍정을 단단히 붙잡는 신학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신학에서 십자가의 길이 부활의 길로, 고난의 길이 승리의 길로 질적인 비약이 가능하게 된다. 진정한 십자가의 길은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부활의 새 아침을 안게 된 부활의 길과 연합되는 길이다. 동시에 부활의 길은 십자가의 길과 상관관계 속에서만, 값싼 영광의 길, 승리의 길로 전락되지 않는다. 십자가 신학은 이 같은 역설적, 역동적인 기독교의 진리를 함축한 참된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냉혹하고 모순된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참된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책임적이고도 실존적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유일한 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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