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에서는, 지금까지 연구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결론을 내리면서 몇 가지 문제점을 비판할 것이다. 첫째, 바르트의 계시 개념과 성경관은 개혁주의적 입장이 결코 아니다. 바르트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나 성경 사건 자체를 철저하게 계시 개념에 종속시켜 버린다. 이 말은 계시 개념 그 자체 안에 삼위일체론이 담겨져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말씀 자체보다 계시 개념의 타당성을 합리화시키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즉 삼위일체론의 근거가 성경에 직접적으로 기초한 것이 아니라 계시 개념이라고 하는 ‘개념’에 기초한다는 바르트의 말은 그의 성경관과 관련해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경과 계시는 다르게 이해되며, 그의 삼위일체론 또한 성경이 아니라 계시 개념에 근거한 것이다. 바르트는 성경을 직접 계시 혹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시키지 않는다. 계시 사건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치시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없고 간접적으로 말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래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사건을 우리를 기대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되는 사건을 통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공중에 뜨게 되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 왜냐하면 그가 말씀하시는 그분이기 때문이다. 말씀은 로고스로 존재하시는 제2위 하나님이 아니다. 이것은 바르트의 ...
이 장에서는, 지금까지 연구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결론을 내리면서 몇 가지 문제점을 비판할 것이다. 첫째, 바르트의 계시 개념과 성경관은 개혁주의적 입장이 결코 아니다. 바르트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나 성경 사건 자체를 철저하게 계시 개념에 종속시켜 버린다. 이 말은 계시 개념 그 자체 안에 삼위일체론이 담겨져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말씀 자체보다 계시 개념의 타당성을 합리화시키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즉 삼위일체론의 근거가 성경에 직접적으로 기초한 것이 아니라 계시 개념이라고 하는 ‘개념’에 기초한다는 바르트의 말은 그의 성경관과 관련해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경과 계시는 다르게 이해되며, 그의 삼위일체론 또한 성경이 아니라 계시 개념에 근거한 것이다. 바르트는 성경을 직접 계시 혹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시키지 않는다. 계시 사건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치시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없고 간접적으로 말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래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사건을 우리를 기대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되는 사건을 통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공중에 뜨게 되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 왜냐하면 그가 말씀하시는 그분이기 때문이다. 말씀은 로고스로 존재하시는 제2위 하나님이 아니다. 이것은 바르트의 행동주의(activitism)를 대변하며, 결국 하나님을 삼위일체요 인격자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지시과정으로 만들어버렸다. 바르트의 성경관에 비추어, 바르트는 계시를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이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언제 만나는가? 매 순간 만난다는 것이다. 즉 성경이 그 자체로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선포될 때 내 심령에서 내 존재 깊이에서 만나면 하나님 말씀이 된다. 만남, 대면, 대화로 된다. 따라서 구체적인 명제형태로 계시가 오는 것이 아니다. 문장형태로 계시가 오는 것이 아니다. 계시가 내게 사건으로 와야 계시가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말씀이 계시가 되는 사건을 통해서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 된다면 성경은 결코 하나님 말씀일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바르트는 정통주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성경 말씀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유대교의 일신론을 드러낸다. 이 신관은 제2위 하나님과 제3위 하나님을 부인하는 결과를 낳는다. 바르트는 성부, 성자, 성령이 한분 하나님의 존재 방식일 뿐이라고 말한다. 결국 바르트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배척하고 자기대로 새로운 해석을 하였고 하나님은 한 위격적 한 하나님으로 유대교와 같은 신관을 전개한 것이다. 전통적인 삼위일체를 버리는 그 순간부터 기독교이기를 그치는 것이기에, 바르트는 근세 자유주의와 동일한 신학자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의 영원한 반복(repetitio aetrrnitatis)이다. 사실 바르트가 사용하는 용어인, ‘영원한 반복’이란 개념도 독일 관념철학의 관념주의적 유산이다. 즉 바르트는 관념론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변증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결국 바르트는 세계의 역사가 신적 정신의 존재 안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헤겔(Hegel)의 관념론적 신 이해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셈이며, 또한 헤겔처럼 세계사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존재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본질의 단일성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인격을 세 위격과 연결시키지 않고 단일적인 하나님의 본질과 연결시킨다. 따라서 바르트에 의하면, 한분 하나님만 있을 뿐, 정통주의에서 강조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 구분이 없다. 바르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이 각기 하나님으로 신앙고백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만 한분 하나님만 존재하실 뿐이며, 삼위로서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시자는 성부와, 계시 작용은 성자와, 그리고 계시된 내용은 성령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한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계시 안에서 삼위일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그의 계시 행위이기 때문이다. 셋째, 인격이란 용어를 버리고 존재 방식이라는 개념을 선호한 결과, 삼위 하나님의 위격들을 하나님의 본질에 종속시키고 말았다. 바르트가 말하는 그 하나님은 ‘전적 타자’였으며, 어떻게 그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갖는 일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결코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한 존재는 다른 존재들과 관련해서 정의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전적인 타자라면, 그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접촉점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우리 인간 쪽에서 볼 때,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넷째, 바르트는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을 saga로 이해한다. 즉 바르트 신학에 의하면 창조 역사는 결코 사실적 역사(historische Geschichte)가 아니다. 따라서 그는 성경의 기사 혹은 창조 역사는 사실적 역사가 아니라고 반복하여 말한다. 이와 같이 바르트에 의하면, 성경은 많은 saga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적인 역사(historie)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saga이다. 즉 둘을 포함하면 사실적인 역사와 saga의 혼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발트에 의하면, 성경의 창조 역사는 순수한 saga이다. 즉 사실적인 역사의 혼합도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점치고 시를 짓는 역사로서 saga일 뿐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창조 설명은 역사적 창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의 창조기사를 설명한 것뿐이고, 그런 기사는 다 saga이지 역사적 사실이 전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 신학에는 역사적 창조가 전혀 없다. 다섯째, 바르트가 말하는 언약 혹은 협약, 즉 의견을 교환한 형식(form of councel)은 한분 하나님 안에 둘 혹은 셋의 신적 본질로 계시는 하나님 사이의 의견 교환이 아니었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그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한 이유가 바로 하나님이 인간과의 언약을 성취하기 원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그의 창조 사역에 특별한 사역을 취하신 것이다. 바르트는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의 말씀으로 그의 피조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를 위하여 자기 자신과 언약 혹은 협약하셨다. 왜냐하면 새로운 창조물은 그의 언약 파트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격으로 계시는 하나님 간의 의견 교환, 구원 협약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르트가 하나님이 한분이라고 말할 때, 그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이루어진 ‘협약(pactum)’에 관한 성경적인 사고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삼위일체의 제2위격으로 선재한 것이 아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을 소유하신 분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가 아니라 창조 세계에 속한 피조물일 뿐이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즉 화해자를 제2위격에 일치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예수를 말하는 것이지 영원한 Logos로 연결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창조목표로 하나님의 경륜 안에 선재할 뿐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교제하신 후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피조물을 자기의 존재에 동참하도록 하는 작정을 하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 전에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신 것이다. 바르트가 삼신론으로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위격 개념을 버린 결과,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고 기독교를 허무는 신학을 전개하고 만 것이다. 또한 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의 목표이고 그 내용이라고 말할 때, 여기서 바르트의 존재 방식 개념에 비추어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격적으로 선재한 것이 아니고 만물의 목표이기 때문에 만물에 선행한 것이 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것을 말하는데, 그리스도의 도덕적 완전성 때문에 하나님으로 간주해 주는 것 뿐이다. 결과적으로 예수를 주님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인간으로서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무엇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자의 개념은 계시 과정 가운데 계시 작용과 일치하는 개념일 뿐이다. 한분 하나님 안에 제2위격의 하나님은 없다. 단지 계시 작용으로서 성자로 불려질 뿐이다. 일곱째, 창조가 언약의 외적 증거라면, 언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라고 바르트는 이해한다. 즉 그는 그의 신학에서 창조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발생하지 않았고 언약 때문에 발생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그가 창조 사고(creation-idea)보다 언약 사고(covernant-idea)에 근거해서 창조론을 설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그는 ‘창조(creation)-언약(covernant)-타락(fall)‘이라는 개혁주의 전통의 틀을 ’언약-창조-타락‘의 틀로 바꾸어 버렸다. 여덟째,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령 또한 성자와 마찬가지로 인격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방식일 뿐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한분 하나님 안에 삼위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원자 하나님이신 성령론에 대한 바르트의 관점 또한 정통주의적이지 않다. 그는 성부와 성자와 함께 성령까지 존재 방식의 하나로 만들어버렸다. 본질에 종속된 인격을 상정하고, 인격 개념을 상실시켜 버림으로 말미암아 한분 하나님은 일신론적 하나님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령도 하나님의 존재 방식으로서 어떤 energy로 전락해 버린다. 바르트의 성령론은 미완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가 성령론을 마무리 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신학에 근거한 성령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격도 신성도 소유하지 못한 성령이 도출될 수밖에 없다. 신이 아닌 성령에 대한 경배는 결국 우상숭배로 나아간다. 이처럼 바르트는 성령도 자기의 합리적인 해석에 근거하여 개념화시켜버린다. 철저하게 ‘복음을 주관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인격적으로 교통하고 예배하는 성경적인 삼위 하나님을 상실한 결과 바르트 신학의 신앙론 또한 지나치게 인식이나 개념과 관계된 것으로 만들고 만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성부와 성자의 사귐이다. 이것은 바르트가 말하는 계시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귐의 행동에 상응하는 것이다. 성령은 사귐, 즉 사랑이시다. 그런데 문제는 바르트의 설명에서, 사랑은 단지 다른 두 존재 방식의 기능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만일 성부와 성자의 공통적인 행동이 성령이시라면 성령의 인격성이 부인되고 또한 손상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은 ‘제3의 인격’이라고 불리워질 수 없다.” 바르트의 이 말은 분명히 성령의 인격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고에서 나온 언어 표출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령의 개념은 계시 과정 가운데 계시된 내용과 일치하는 개념일 뿐이다. 한분 하나님 안에 제3위격의 하나님은 없다. 단지 계시된 내용으로서 성령으로 불려질 뿐이다.
이 장에서는, 지금까지 연구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결론을 내리면서 몇 가지 문제점을 비판할 것이다. 첫째, 바르트의 계시 개념과 성경관은 개혁주의적 입장이 결코 아니다. 바르트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나 성경 사건 자체를 철저하게 계시 개념에 종속시켜 버린다. 이 말은 계시 개념 그 자체 안에 삼위일체론이 담겨져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말씀 자체보다 계시 개념의 타당성을 합리화시키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즉 삼위일체론의 근거가 성경에 직접적으로 기초한 것이 아니라 계시 개념이라고 하는 ‘개념’에 기초한다는 바르트의 말은 그의 성경관과 관련해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경과 계시는 다르게 이해되며, 그의 삼위일체론 또한 성경이 아니라 계시 개념에 근거한 것이다. 바르트는 성경을 직접 계시 혹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시키지 않는다. 계시 사건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치시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없고 간접적으로 말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래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사건을 우리를 기대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되는 사건을 통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공중에 뜨게 되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 왜냐하면 그가 말씀하시는 그분이기 때문이다. 말씀은 로고스로 존재하시는 제2위 하나님이 아니다. 이것은 바르트의 행동주의(activitism)를 대변하며, 결국 하나님을 삼위일체요 인격자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지시과정으로 만들어버렸다. 바르트의 성경관에 비추어, 바르트는 계시를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이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언제 만나는가? 매 순간 만난다는 것이다. 즉 성경이 그 자체로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선포될 때 내 심령에서 내 존재 깊이에서 만나면 하나님 말씀이 된다. 만남, 대면, 대화로 된다. 따라서 구체적인 명제형태로 계시가 오는 것이 아니다. 문장형태로 계시가 오는 것이 아니다. 계시가 내게 사건으로 와야 계시가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말씀이 계시가 되는 사건을 통해서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 된다면 성경은 결코 하나님 말씀일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바르트는 정통주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성경 말씀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유대교의 일신론을 드러낸다. 이 신관은 제2위 하나님과 제3위 하나님을 부인하는 결과를 낳는다. 바르트는 성부, 성자, 성령이 한분 하나님의 존재 방식일 뿐이라고 말한다. 결국 바르트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배척하고 자기대로 새로운 해석을 하였고 하나님은 한 위격적 한 하나님으로 유대교와 같은 신관을 전개한 것이다. 전통적인 삼위일체를 버리는 그 순간부터 기독교이기를 그치는 것이기에, 바르트는 근세 자유주의와 동일한 신학자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의 영원한 반복(repetitio aetrrnitatis)이다. 사실 바르트가 사용하는 용어인, ‘영원한 반복’이란 개념도 독일 관념철학의 관념주의적 유산이다. 즉 바르트는 관념론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변증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결국 바르트는 세계의 역사가 신적 정신의 존재 안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헤겔(Hegel)의 관념론적 신 이해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셈이며, 또한 헤겔처럼 세계사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존재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본질의 단일성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인격을 세 위격과 연결시키지 않고 단일적인 하나님의 본질과 연결시킨다. 따라서 바르트에 의하면, 한분 하나님만 있을 뿐, 정통주의에서 강조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 구분이 없다. 바르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이 각기 하나님으로 신앙고백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만 한분 하나님만 존재하실 뿐이며, 삼위로서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시자는 성부와, 계시 작용은 성자와, 그리고 계시된 내용은 성령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한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계시 안에서 삼위일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그의 계시 행위이기 때문이다. 셋째, 인격이란 용어를 버리고 존재 방식이라는 개념을 선호한 결과, 삼위 하나님의 위격들을 하나님의 본질에 종속시키고 말았다. 바르트가 말하는 그 하나님은 ‘전적 타자’였으며, 어떻게 그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갖는 일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결코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한 존재는 다른 존재들과 관련해서 정의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전적인 타자라면, 그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접촉점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우리 인간 쪽에서 볼 때,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넷째, 바르트는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을 saga로 이해한다. 즉 바르트 신학에 의하면 창조 역사는 결코 사실적 역사(historische Geschichte)가 아니다. 따라서 그는 성경의 기사 혹은 창조 역사는 사실적 역사가 아니라고 반복하여 말한다. 이와 같이 바르트에 의하면, 성경은 많은 saga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적인 역사(historie)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saga이다. 즉 둘을 포함하면 사실적인 역사와 saga의 혼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발트에 의하면, 성경의 창조 역사는 순수한 saga이다. 즉 사실적인 역사의 혼합도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점치고 시를 짓는 역사로서 saga일 뿐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창조 설명은 역사적 창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의 창조기사를 설명한 것뿐이고, 그런 기사는 다 saga이지 역사적 사실이 전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 신학에는 역사적 창조가 전혀 없다. 다섯째, 바르트가 말하는 언약 혹은 협약, 즉 의견을 교환한 형식(form of councel)은 한분 하나님 안에 둘 혹은 셋의 신적 본질로 계시는 하나님 사이의 의견 교환이 아니었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그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한 이유가 바로 하나님이 인간과의 언약을 성취하기 원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그의 창조 사역에 특별한 사역을 취하신 것이다. 바르트는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의 말씀으로 그의 피조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를 위하여 자기 자신과 언약 혹은 협약하셨다. 왜냐하면 새로운 창조물은 그의 언약 파트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격으로 계시는 하나님 간의 의견 교환, 구원 협약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르트가 하나님이 한분이라고 말할 때, 그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이루어진 ‘협약(pactum)’에 관한 성경적인 사고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삼위일체의 제2위격으로 선재한 것이 아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을 소유하신 분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가 아니라 창조 세계에 속한 피조물일 뿐이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즉 화해자를 제2위격에 일치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예수를 말하는 것이지 영원한 Logos로 연결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창조목표로 하나님의 경륜 안에 선재할 뿐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교제하신 후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피조물을 자기의 존재에 동참하도록 하는 작정을 하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 전에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신 것이다. 바르트가 삼신론으로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위격 개념을 버린 결과,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고 기독교를 허무는 신학을 전개하고 만 것이다. 또한 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의 목표이고 그 내용이라고 말할 때, 여기서 바르트의 존재 방식 개념에 비추어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격적으로 선재한 것이 아니고 만물의 목표이기 때문에 만물에 선행한 것이 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것을 말하는데, 그리스도의 도덕적 완전성 때문에 하나님으로 간주해 주는 것 뿐이다. 결과적으로 예수를 주님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인간으로서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무엇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자의 개념은 계시 과정 가운데 계시 작용과 일치하는 개념일 뿐이다. 한분 하나님 안에 제2위격의 하나님은 없다. 단지 계시 작용으로서 성자로 불려질 뿐이다. 일곱째, 창조가 언약의 외적 증거라면, 언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라고 바르트는 이해한다. 즉 그는 그의 신학에서 창조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발생하지 않았고 언약 때문에 발생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그가 창조 사고(creation-idea)보다 언약 사고(covernant-idea)에 근거해서 창조론을 설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그는 ‘창조(creation)-언약(covernant)-타락(fall)‘이라는 개혁주의 전통의 틀을 ’언약-창조-타락‘의 틀로 바꾸어 버렸다. 여덟째,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령 또한 성자와 마찬가지로 인격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방식일 뿐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한분 하나님 안에 삼위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원자 하나님이신 성령론에 대한 바르트의 관점 또한 정통주의적이지 않다. 그는 성부와 성자와 함께 성령까지 존재 방식의 하나로 만들어버렸다. 본질에 종속된 인격을 상정하고, 인격 개념을 상실시켜 버림으로 말미암아 한분 하나님은 일신론적 하나님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령도 하나님의 존재 방식으로서 어떤 energy로 전락해 버린다. 바르트의 성령론은 미완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가 성령론을 마무리 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신학에 근거한 성령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격도 신성도 소유하지 못한 성령이 도출될 수밖에 없다. 신이 아닌 성령에 대한 경배는 결국 우상숭배로 나아간다. 이처럼 바르트는 성령도 자기의 합리적인 해석에 근거하여 개념화시켜버린다. 철저하게 ‘복음을 주관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인격적으로 교통하고 예배하는 성경적인 삼위 하나님을 상실한 결과 바르트 신학의 신앙론 또한 지나치게 인식이나 개념과 관계된 것으로 만들고 만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성부와 성자의 사귐이다. 이것은 바르트가 말하는 계시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귐의 행동에 상응하는 것이다. 성령은 사귐, 즉 사랑이시다. 그런데 문제는 바르트의 설명에서, 사랑은 단지 다른 두 존재 방식의 기능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만일 성부와 성자의 공통적인 행동이 성령이시라면 성령의 인격성이 부인되고 또한 손상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은 ‘제3의 인격’이라고 불리워질 수 없다.” 바르트의 이 말은 분명히 성령의 인격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고에서 나온 언어 표출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령의 개념은 계시 과정 가운데 계시된 내용과 일치하는 개념일 뿐이다. 한분 하나님 안에 제3위격의 하나님은 없다. 단지 계시된 내용으로서 성령으로 불려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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