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는 이 세상 속에 그리스도로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대리와 책임에 대해서 역설했다. 그가 강조한 책임을 지는 삶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학이 세상의 현실 속에서 세상에 대한 책임적인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책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본회퍼의 책임은 철저하게 그리스도론적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향하여 하시는 하나님 말씀에 응답함으로써 사는 응답 구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책임적 삶으로서 대리 행위의 근원과 본질과 목적이다. 책임은 타자를 위한 삶과 행위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책임은 죄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형제의 죄를 대신 걸머지신 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형제에 대한 사심 없는 사랑이며 책임적 행위이다. 본회퍼는 교회의 정치적 책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퀴 아래 깔린 희생자에게 붕대를 감아주는 것뿐만 아니라 바퀴 자체를 멈추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책임적인 삶은 하나님께 속박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이중적 형태로 규정된다. 그래서 본회퍼는 책임이란 속박과 자유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을 때 존재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께 속박된 삶은 대리 행위와 현실 적응성의 형태를 취하며, 자유는 삶과 행위에 대한 자기 검증과 구체적인 결단으로 증명된다. 이 책임을 지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대리적 행위에 근거하고 있다. 교회의 형성의 근거로써의 그리스도의 대리적 행위는 아담의 이기적 대리행위와 다른 기초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타락하고 새로워져도 다시 죄가 침범하지만, 그리스도의 인간은 대리 행위의 본질상 영원한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대리적으로 율법을 성취함으로써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근거가 되시는 것이다. 이러한 대리적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하나님과 화해됨을 의미하므로 인간과 현실 긍정의 근거가 된다. 이 점에서 교회가 세상과 하나님을 화해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본회퍼 목사님의 교회론이 지닌 강점이라 생각된다. 그리스도로부터 이룩된 화해를 통하여 세계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책임의 영역이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책임적 행동의 성취자인 그리스도의 대리적 행동을 하도록 교회는 부름을 받은 것이다. 본회퍼 목사님은 옥중서신에서‘타인을 위한 존재’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교회는 그것이 타인을 위해서 있을 때만 교회다.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 교회는 전 재산을 궁핍한 사람들에게 내주지 않으면 안된다. 목사는 교인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바치는 헌금에 의해서만, 경우에 따라서는 세속적 직업에 의해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는 인간의 사회생활의 세속적 과제를 지배하면서가 아니라 도와주고 봉사함으로 관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는 모든 직업인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생활이 무엇이며, ‘타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우리들의 교회는 오만의 죄, 권력 숭배의 죄, 시기와 환상주의의 죄에 대해서 그것을 모든 악의 근원으로 보고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는 절제, 순수, 신회, 성실, 견인, 인내, 훈련, 겸허, 온화, 검소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교회는 인간의 ‘모범’의 의의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의 말은 개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범에 의해서 무게와 힘을 얻는다. 타자를 위한 존재는 기독론적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 행위를 말한다. 대리 행위는 타자를 위한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준 고난의 사랑을 말한다. 따라서 교회도 그리스도의 대리 행위를 본 받아서 십자가를 통한 고난과 사랑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십자가에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대속을 삶을 산 대리자 예수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이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성육신하고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타자를 위한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타자를 위한 존재이듯이 기독교인의 삶은, 교회의 삶은 이 세상 속에서 타자를 위하여 고난 받는 책임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그래서 늘 타자를 위한 교회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본회퍼는 히틀러를 옹호하는 독일 국가 교회에 반대하여 심지어 교회는 타자를 위하여 존재할 때만 교회라고 말하기도 했다. 교회는 인류를 위해서 실존할 때만 참다운 존재가 된다. 교회는 새로운 출발로서 자기의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들에게 내주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이 세상의 사회생활에 깊이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돕고 섬겨야 한다. 교회는 무슨 직업의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을 타자를 위해서 실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해야 한다. 이러한 면을 볼 때 그의 교회론은 모든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대리로서 위임받은 삶을 성실히 살아가며 타자를 위한 실존이 되어야 한다는 주제와 직결된다. 이는 교회로 존재하는 그리스도께서 타자를 위해서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모두를 위한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교회론의 일관적인 강조점이라 할 수 있다. 본회퍼는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의 모습을 말로만 주장한 것이 아니다. 그는 유대인 문제에 아주 민감하게 대응했다.본회퍼는 이 문제를 정치-사회적으로만 보지 않고 교회의 존재가 걸린 문제로 보았다. 그는 1933년 4월 7일에 아리안조항이 공포되기 전부터 유대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던 극소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 문제를 투쟁의 핵심문제로 제기한 첫 번째 인물이다. 프러시아지역 총회에서 처음으로 아리안 조항을 교회에 적용하기로 한 직후, 본회퍼는 니뮐러와 공동명의로 목사들에게 보낸 선언문에서 아리안 조항이 ‘신앙고백의 기본조항을 침해하는 것이며 침해에 동조하는 것은 교회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유대인은 고통당하는 이웃이었다. 교회는 고통당하는 이웃과 함께 해야 한다. 고통당하는 이웃을 외면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참된 신앙이며 성숙한 세상에서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
본회퍼는 이 세상 속에 그리스도로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대리와 책임에 대해서 역설했다. 그가 강조한 책임을 지는 삶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학이 세상의 현실 속에서 세상에 대한 책임적인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책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본회퍼의 책임은 철저하게 그리스도론적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향하여 하시는 하나님 말씀에 응답함으로써 사는 응답 구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책임적 삶으로서 대리 행위의 근원과 본질과 목적이다. 책임은 타자를 위한 삶과 행위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책임은 죄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형제의 죄를 대신 걸머지신 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형제에 대한 사심 없는 사랑이며 책임적 행위이다. 본회퍼는 교회의 정치적 책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퀴 아래 깔린 희생자에게 붕대를 감아주는 것뿐만 아니라 바퀴 자체를 멈추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책임적인 삶은 하나님께 속박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이중적 형태로 규정된다. 그래서 본회퍼는 책임이란 속박과 자유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을 때 존재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께 속박된 삶은 대리 행위와 현실 적응성의 형태를 취하며, 자유는 삶과 행위에 대한 자기 검증과 구체적인 결단으로 증명된다. 이 책임을 지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대리적 행위에 근거하고 있다. 교회의 형성의 근거로써의 그리스도의 대리적 행위는 아담의 이기적 대리행위와 다른 기초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타락하고 새로워져도 다시 죄가 침범하지만, 그리스도의 인간은 대리 행위의 본질상 영원한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대리적으로 율법을 성취함으로써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근거가 되시는 것이다. 이러한 대리적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하나님과 화해됨을 의미하므로 인간과 현실 긍정의 근거가 된다. 이 점에서 교회가 세상과 하나님을 화해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본회퍼 목사님의 교회론이 지닌 강점이라 생각된다. 그리스도로부터 이룩된 화해를 통하여 세계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책임의 영역이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책임적 행동의 성취자인 그리스도의 대리적 행동을 하도록 교회는 부름을 받은 것이다. 본회퍼 목사님은 옥중서신에서‘타인을 위한 존재’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교회는 그것이 타인을 위해서 있을 때만 교회다.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 교회는 전 재산을 궁핍한 사람들에게 내주지 않으면 안된다. 목사는 교인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바치는 헌금에 의해서만, 경우에 따라서는 세속적 직업에 의해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는 인간의 사회생활의 세속적 과제를 지배하면서가 아니라 도와주고 봉사함으로 관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는 모든 직업인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생활이 무엇이며, ‘타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우리들의 교회는 오만의 죄, 권력 숭배의 죄, 시기와 환상주의의 죄에 대해서 그것을 모든 악의 근원으로 보고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는 절제, 순수, 신회, 성실, 견인, 인내, 훈련, 겸허, 온화, 검소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교회는 인간의 ‘모범’의 의의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의 말은 개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범에 의해서 무게와 힘을 얻는다. 타자를 위한 존재는 기독론적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 행위를 말한다. 대리 행위는 타자를 위한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준 고난의 사랑을 말한다. 따라서 교회도 그리스도의 대리 행위를 본 받아서 십자가를 통한 고난과 사랑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십자가에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대속을 삶을 산 대리자 예수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이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성육신하고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타자를 위한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타자를 위한 존재이듯이 기독교인의 삶은, 교회의 삶은 이 세상 속에서 타자를 위하여 고난 받는 책임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그래서 늘 타자를 위한 교회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본회퍼는 히틀러를 옹호하는 독일 국가 교회에 반대하여 심지어 교회는 타자를 위하여 존재할 때만 교회라고 말하기도 했다. 교회는 인류를 위해서 실존할 때만 참다운 존재가 된다. 교회는 새로운 출발로서 자기의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들에게 내주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이 세상의 사회생활에 깊이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돕고 섬겨야 한다. 교회는 무슨 직업의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을 타자를 위해서 실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해야 한다. 이러한 면을 볼 때 그의 교회론은 모든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대리로서 위임받은 삶을 성실히 살아가며 타자를 위한 실존이 되어야 한다는 주제와 직결된다. 이는 교회로 존재하는 그리스도께서 타자를 위해서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모두를 위한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교회론의 일관적인 강조점이라 할 수 있다. 본회퍼는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의 모습을 말로만 주장한 것이 아니다. 그는 유대인 문제에 아주 민감하게 대응했다.본회퍼는 이 문제를 정치-사회적으로만 보지 않고 교회의 존재가 걸린 문제로 보았다. 그는 1933년 4월 7일에 아리안조항이 공포되기 전부터 유대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던 극소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 문제를 투쟁의 핵심문제로 제기한 첫 번째 인물이다. 프러시아지역 총회에서 처음으로 아리안 조항을 교회에 적용하기로 한 직후, 본회퍼는 니뮐러와 공동명의로 목사들에게 보낸 선언문에서 아리안 조항이 ‘신앙고백의 기본조항을 침해하는 것이며 침해에 동조하는 것은 교회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유대인은 고통당하는 이웃이었다. 교회는 고통당하는 이웃과 함께 해야 한다. 고통당하는 이웃을 외면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참된 신앙이며 성숙한 세상에서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회퍼의 교회론과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은 한국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더 관심을 가져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본회퍼는 1933년 7월 23일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는 서기관들, 교사들 위에 세워질 수가 없고, 그리스도에게 부름 받고 따라가는 이 제자들의 작은 무리들이다. 그것은 예루살렘,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 성전의 도시가 아니다. 그는 광야로 나갔다. 여기서는 설교의 외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가 없는 곳이다. 예수의 교회는 요란한 축제가 아니다. 적은 무리의 교회, 광야로 나간 교회, 죽음에 직면한 교회를 의미한다. 교회는 사람들의 의견이 아니다. 예수는 사람들이 말하는 예언자, 위대한 스승 인간, 이상주의자, 영웅이 아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교회는 무엇인가?’라고 예수는 묻는다.이 직접적인 대결에서 아마도‘사람들은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베드로와 같이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는 고백만이 있을 수 있다. 본회퍼가 언급했던 베드로의 고백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고백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그 고백이 가능하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도 하나님의 도우심 안에서 이러한 고백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실천하는 교회, 세상을 품고, 치유하며, 행복하게 만드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교회가 고난 받고 박해 받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호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날마다 굳건히 서 나갈 것이다. 예수는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냈다. 부름을 따라 모든 것을 단념했으며 지금은 결핍과 곤궁 속에서 살고 있고 가난한 자 중에 가장 가난하며 시험받는 자들 중에 제일 많은 시험을 당하는 자들이요, 배고픈 자 중에서 가장 배고픈 자들이다. 그들이 가진 것이 있다면 오직 예수 한 분뿐이다.
본회퍼는 이 세상 속에 그리스도로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대리와 책임에 대해서 역설했다. 그가 강조한 책임을 지는 삶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학이 세상의 현실 속에서 세상에 대한 책임적인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책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본회퍼의 책임은 철저하게 그리스도론적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향하여 하시는 하나님 말씀에 응답함으로써 사는 응답 구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책임적 삶으로서 대리 행위의 근원과 본질과 목적이다. 책임은 타자를 위한 삶과 행위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책임은 죄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형제의 죄를 대신 걸머지신 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형제에 대한 사심 없는 사랑이며 책임적 행위이다. 본회퍼는 교회의 정치적 책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퀴 아래 깔린 희생자에게 붕대를 감아주는 것뿐만 아니라 바퀴 자체를 멈추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책임적인 삶은 하나님께 속박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이중적 형태로 규정된다. 그래서 본회퍼는 책임이란 속박과 자유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을 때 존재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께 속박된 삶은 대리 행위와 현실 적응성의 형태를 취하며, 자유는 삶과 행위에 대한 자기 검증과 구체적인 결단으로 증명된다. 이 책임을 지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대리적 행위에 근거하고 있다. 교회의 형성의 근거로써의 그리스도의 대리적 행위는 아담의 이기적 대리행위와 다른 기초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타락하고 새로워져도 다시 죄가 침범하지만, 그리스도의 인간은 대리 행위의 본질상 영원한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대리적으로 율법을 성취함으로써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근거가 되시는 것이다. 이러한 대리적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하나님과 화해됨을 의미하므로 인간과 현실 긍정의 근거가 된다. 이 점에서 교회가 세상과 하나님을 화해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본회퍼 목사님의 교회론이 지닌 강점이라 생각된다. 그리스도로부터 이룩된 화해를 통하여 세계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책임의 영역이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책임적 행동의 성취자인 그리스도의 대리적 행동을 하도록 교회는 부름을 받은 것이다. 본회퍼 목사님은 옥중서신에서‘타인을 위한 존재’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교회는 그것이 타인을 위해서 있을 때만 교회다.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 교회는 전 재산을 궁핍한 사람들에게 내주지 않으면 안된다. 목사는 교인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바치는 헌금에 의해서만, 경우에 따라서는 세속적 직업에 의해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는 인간의 사회생활의 세속적 과제를 지배하면서가 아니라 도와주고 봉사함으로 관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는 모든 직업인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생활이 무엇이며, ‘타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우리들의 교회는 오만의 죄, 권력 숭배의 죄, 시기와 환상주의의 죄에 대해서 그것을 모든 악의 근원으로 보고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는 절제, 순수, 신회, 성실, 견인, 인내, 훈련, 겸허, 온화, 검소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교회는 인간의 ‘모범’의 의의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의 말은 개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범에 의해서 무게와 힘을 얻는다. 타자를 위한 존재는 기독론적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 행위를 말한다. 대리 행위는 타자를 위한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준 고난의 사랑을 말한다. 따라서 교회도 그리스도의 대리 행위를 본 받아서 십자가를 통한 고난과 사랑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십자가에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대속을 삶을 산 대리자 예수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이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성육신하고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타자를 위한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타자를 위한 존재이듯이 기독교인의 삶은, 교회의 삶은 이 세상 속에서 타자를 위하여 고난 받는 책임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그래서 늘 타자를 위한 교회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본회퍼는 히틀러를 옹호하는 독일 국가 교회에 반대하여 심지어 교회는 타자를 위하여 존재할 때만 교회라고 말하기도 했다. 교회는 인류를 위해서 실존할 때만 참다운 존재가 된다. 교회는 새로운 출발로서 자기의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들에게 내주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이 세상의 사회생활에 깊이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돕고 섬겨야 한다. 교회는 무슨 직업의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을 타자를 위해서 실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해야 한다. 이러한 면을 볼 때 그의 교회론은 모든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대리로서 위임받은 삶을 성실히 살아가며 타자를 위한 실존이 되어야 한다는 주제와 직결된다. 이는 교회로 존재하는 그리스도께서 타자를 위해서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모두를 위한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교회론의 일관적인 강조점이라 할 수 있다. 본회퍼는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의 모습을 말로만 주장한 것이 아니다. 그는 유대인 문제에 아주 민감하게 대응했다.본회퍼는 이 문제를 정치-사회적으로만 보지 않고 교회의 존재가 걸린 문제로 보았다. 그는 1933년 4월 7일에 아리안조항이 공포되기 전부터 유대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던 극소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 문제를 투쟁의 핵심문제로 제기한 첫 번째 인물이다. 프러시아지역 총회에서 처음으로 아리안 조항을 교회에 적용하기로 한 직후, 본회퍼는 니뮐러와 공동명의로 목사들에게 보낸 선언문에서 아리안 조항이 ‘신앙고백의 기본조항을 침해하는 것이며 침해에 동조하는 것은 교회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유대인은 고통당하는 이웃이었다. 교회는 고통당하는 이웃과 함께 해야 한다. 고통당하는 이웃을 외면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참된 신앙이며 성숙한 세상에서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회퍼의 교회론과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은 한국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더 관심을 가져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본회퍼는 1933년 7월 23일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는 서기관들, 교사들 위에 세워질 수가 없고, 그리스도에게 부름 받고 따라가는 이 제자들의 작은 무리들이다. 그것은 예루살렘,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 성전의 도시가 아니다. 그는 광야로 나갔다. 여기서는 설교의 외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가 없는 곳이다. 예수의 교회는 요란한 축제가 아니다. 적은 무리의 교회, 광야로 나간 교회, 죽음에 직면한 교회를 의미한다. 교회는 사람들의 의견이 아니다. 예수는 사람들이 말하는 예언자, 위대한 스승 인간, 이상주의자, 영웅이 아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교회는 무엇인가?’라고 예수는 묻는다.이 직접적인 대결에서 아마도‘사람들은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베드로와 같이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는 고백만이 있을 수 있다. 본회퍼가 언급했던 베드로의 고백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고백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그 고백이 가능하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도 하나님의 도우심 안에서 이러한 고백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실천하는 교회, 세상을 품고, 치유하며, 행복하게 만드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교회가 고난 받고 박해 받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호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날마다 굳건히 서 나갈 것이다. 예수는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냈다. 부름을 따라 모든 것을 단념했으며 지금은 결핍과 곤궁 속에서 살고 있고 가난한 자 중에 가장 가난하며 시험받는 자들 중에 제일 많은 시험을 당하는 자들이요, 배고픈 자 중에서 가장 배고픈 자들이다. 그들이 가진 것이 있다면 오직 예수 한 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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