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루터의 생애와 그의 신학의 꽃인 십자가 신학에 대해 살펴보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의 생애를 살펴볼 때 그가 종교개혁자로서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해 볼 수 있다. 그는 진리의 밝은 빛 앞에서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은 곧 인간의 역사에 깊이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의 몸된 교회를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래서 루터라는 한 사람을 사용하셨고, 루터는 이러한 하나님의 부름 앞에 온전히 순종하였던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루터의 어린 시절은 그저 평범한 한 소년으로서 당시의 시대적 흐름에 따라 살았다. 하지만 청년기로 접어들면서 그의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공부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루터로 하여금 법을 공부를 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루터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후원으로 법을 공부하였지만, 루터는 신학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그는 신학을 하기로 서원했으며, 이것이 루터의 일생에 있어 분명한 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학을 하기로 서원한 루터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로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수도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성경을 접하게 되었고, 성경을 연구하기 하면서 그는 서서히 진리에 눈을 뜨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는 당시 교회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하나씩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고, 그 진리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게 된다. 루터의 삶에 있어서 바로 이러한 것이 있었기에 그는 그냥 평범하게 ...
지금까지 루터의 생애와 그의 신학의 꽃인 십자가 신학에 대해 살펴보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의 생애를 살펴볼 때 그가 종교개혁자로서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해 볼 수 있다. 그는 진리의 밝은 빛 앞에서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은 곧 인간의 역사에 깊이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의 몸된 교회를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래서 루터라는 한 사람을 사용하셨고, 루터는 이러한 하나님의 부름 앞에 온전히 순종하였던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루터의 어린 시절은 그저 평범한 한 소년으로서 당시의 시대적 흐름에 따라 살았다. 하지만 청년기로 접어들면서 그의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공부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루터로 하여금 법을 공부를 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루터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후원으로 법을 공부하였지만, 루터는 신학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그는 신학을 하기로 서원했으며, 이것이 루터의 일생에 있어 분명한 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학을 하기로 서원한 루터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로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수도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성경을 접하게 되었고, 성경을 연구하기 하면서 그는 서서히 진리에 눈을 뜨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는 당시 교회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하나씩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고, 그 진리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게 된다. 루터의 삶에 있어서 바로 이러한 것이 있었기에 그는 그냥 평범하게 살 수 없었던 것이었다. 특별히 ‘탑속의 경험’을 통해서 루터는 구원에 관한 심각한 고민과 갈등을 경험하였고, 이 고민을 성경 연구를 통해 복음적 진리,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이 경험이 신학자 루터로써의 그의 길을 걷게 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이것은 곧 루터의 신학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신학의 꽃인 십자가 신학이 태동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십자가 신학에 영향을 준 사상적 배경으로는 중세 전반을 지배했던 스콜라주의와 스콜라의 집대성을 이룩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들 수 있다. 스콜라주의를 루터는 영광의 신학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지목하여 비판하였다. 루터는 오캄에게서 깊은 사상적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지만, 오캄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를 극복 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또한 어거스틴에게서도 루터는 그의 은혜와 죄에 대한 사상에 영향을 받았지만, 전적으로 그를 따르지는 않았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중세 말기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중세의 봉건적인 사회, 경제 질서가 와해되어가고 로마 교황청의 강력했던 통제력이 상실되어 가든 역사적 배경을 그 전제로 하고 있다. 중세 말기, 십자군 전쟁은 단지 군사적인 부분에만 변화를 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이슬람을 통해 새로운 사상들이 유입되었고, 군주들은 자신들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확장하는 기회였으며, 평민들에게는 그들이 사는 세상이외의 새로운 세상이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는 기회였다. 새로운 사상의 유입은 자연스럽게 기존 질서에 대해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특별히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가톨릭의 영광의 신학이라는 화려한 옷 속에 가리워진 십자가를 재발견하고 재평가한 신학이다. 십자가를 신학적 진술들 중 어느 한 곳에 배치하는 신학이 아니라 신학의 중심에 놓은 신학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다. 숨어계신 하나님은 계시되신 하나님(Deus Revelatus)으로 나타난다. 계시된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시다. 우리 인간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통해서만 숨어계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십자가를 믿음으로서만 숨어계신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결국 믿음 안에서 숨어계신 하나님과 계시된 하나님 즉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하나가 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바로 우리들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하나님이신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이 낯선 일을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실 때 우리에게는 전혀 낯선 방법을 사용하셨는데 이것은 인간의 의와 공로에 대한 전면적 거부를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뿐만 아니라 개인의 실제적 삶에 있어서도 십자가의 낯선 방법을 사용하신다. 십자가 신학은 고난과 십자가를 통한 참된 하나님의 인식을 통해서, 인간이 자기 확신을 부수고, 하나님만을 홀로 하나님 되게 하는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 앞에서 ‘하나님과 구원, 은혜,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의 교회의 참된 실재가 드러난다. 십자가 신학은 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목하는 신학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감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참된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십자가와 고난을 통해 부활과 승리를 선포하는 은혜의 하나님을 말하는 희망의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음미하는데 머무르지 말고 직접 그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고난을 받자는 신학이며, 고난의 중요성을 가장 크게 부각시킨 신학이다. 신학과 교회가 고난을 싫어할 때 이미 그것은 죽은 것이다. 교회가 십자가의 멸시와 시험과 천대를 당할 때 그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라 말 할 수 있으며, 헌신의 삶이 지나가는 삶임을 잊어버리고 안주하는 교회와 개인은 죽어있다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자가 신학은 오늘의 참된 교회를 세우는데 중요한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루터의 생애와 그의 신학의 꽃인 십자가 신학에 대해 살펴보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의 생애를 살펴볼 때 그가 종교개혁자로서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해 볼 수 있다. 그는 진리의 밝은 빛 앞에서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은 곧 인간의 역사에 깊이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의 몸된 교회를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래서 루터라는 한 사람을 사용하셨고, 루터는 이러한 하나님의 부름 앞에 온전히 순종하였던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루터의 어린 시절은 그저 평범한 한 소년으로서 당시의 시대적 흐름에 따라 살았다. 하지만 청년기로 접어들면서 그의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공부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루터로 하여금 법을 공부를 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루터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후원으로 법을 공부하였지만, 루터는 신학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그는 신학을 하기로 서원했으며, 이것이 루터의 일생에 있어 분명한 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학을 하기로 서원한 루터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로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수도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성경을 접하게 되었고, 성경을 연구하기 하면서 그는 서서히 진리에 눈을 뜨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는 당시 교회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하나씩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고, 그 진리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게 된다. 루터의 삶에 있어서 바로 이러한 것이 있었기에 그는 그냥 평범하게 살 수 없었던 것이었다. 특별히 ‘탑속의 경험’을 통해서 루터는 구원에 관한 심각한 고민과 갈등을 경험하였고, 이 고민을 성경 연구를 통해 복음적 진리,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이 경험이 신학자 루터로써의 그의 길을 걷게 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이것은 곧 루터의 신학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신학의 꽃인 십자가 신학이 태동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십자가 신학에 영향을 준 사상적 배경으로는 중세 전반을 지배했던 스콜라주의와 스콜라의 집대성을 이룩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들 수 있다. 스콜라주의를 루터는 영광의 신학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지목하여 비판하였다. 루터는 오캄에게서 깊은 사상적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지만, 오캄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를 극복 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또한 어거스틴에게서도 루터는 그의 은혜와 죄에 대한 사상에 영향을 받았지만, 전적으로 그를 따르지는 않았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중세 말기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중세의 봉건적인 사회, 경제 질서가 와해되어가고 로마 교황청의 강력했던 통제력이 상실되어 가든 역사적 배경을 그 전제로 하고 있다. 중세 말기, 십자군 전쟁은 단지 군사적인 부분에만 변화를 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이슬람을 통해 새로운 사상들이 유입되었고, 군주들은 자신들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확장하는 기회였으며, 평민들에게는 그들이 사는 세상이외의 새로운 세상이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는 기회였다. 새로운 사상의 유입은 자연스럽게 기존 질서에 대해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특별히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가톨릭의 영광의 신학이라는 화려한 옷 속에 가리워진 십자가를 재발견하고 재평가한 신학이다. 십자가를 신학적 진술들 중 어느 한 곳에 배치하는 신학이 아니라 신학의 중심에 놓은 신학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다. 숨어계신 하나님은 계시되신 하나님(Deus Revelatus)으로 나타난다. 계시된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시다. 우리 인간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통해서만 숨어계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십자가를 믿음으로서만 숨어계신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결국 믿음 안에서 숨어계신 하나님과 계시된 하나님 즉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하나가 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바로 우리들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하나님이신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이 낯선 일을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실 때 우리에게는 전혀 낯선 방법을 사용하셨는데 이것은 인간의 의와 공로에 대한 전면적 거부를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뿐만 아니라 개인의 실제적 삶에 있어서도 십자가의 낯선 방법을 사용하신다. 십자가 신학은 고난과 십자가를 통한 참된 하나님의 인식을 통해서, 인간이 자기 확신을 부수고, 하나님만을 홀로 하나님 되게 하는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 앞에서 ‘하나님과 구원, 은혜,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의 교회의 참된 실재가 드러난다. 십자가 신학은 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목하는 신학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감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참된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십자가와 고난을 통해 부활과 승리를 선포하는 은혜의 하나님을 말하는 희망의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음미하는데 머무르지 말고 직접 그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고난을 받자는 신학이며, 고난의 중요성을 가장 크게 부각시킨 신학이다. 신학과 교회가 고난을 싫어할 때 이미 그것은 죽은 것이다. 교회가 십자가의 멸시와 시험과 천대를 당할 때 그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라 말 할 수 있으며, 헌신의 삶이 지나가는 삶임을 잊어버리고 안주하는 교회와 개인은 죽어있다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자가 신학은 오늘의 참된 교회를 세우는데 중요한 신학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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