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자도의 실현 오늘날 교회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절망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는 힘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교회는 너무도 빈번하게 사회와 국가를 향하여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교회 내에서 문제를 안고 있는 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교회 밖의 대중들은 교회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이와 같은 문제가 일어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강단이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무기력한 강단의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해자가 선행된 신학의 정보 제공을 받은 본문의 단일 의미에 근거한 권위 있는 내용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하며, "위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옷 입을"(눅24:49) 때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자 하는 결단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교회는 다시 한번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임"(롬1:16)을 증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제자도의 실현, 그 첫 번째 관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다. 오늘 본문이 담고 있는 ‘선한 목자’의 비유를 통한 메시지의 지속적인 호소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고 한다. 이 문은 즉 영생의 통로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관문임과 동시에, 모든 에너지를 얻는 원천의 창구이기도 하다. 성경은 이 문을 곧 그리스도 예수시라고 선언하신다. 따라서 제자이길 스스로 인정하는 자는 성경을 가장 권위 있는 지도자 지침서로 신뢰하고 배우며 실천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실천의 능력은 표면적인 신앙의 열심만으로 이룰 수 없으며, 반드시 知․情․意라는 全人格的 충직한 삶과 기도 속에서 실현해 ...
1. 제자도의 실현 오늘날 교회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절망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는 힘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교회는 너무도 빈번하게 사회와 국가를 향하여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교회 내에서 문제를 안고 있는 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교회 밖의 대중들은 교회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이와 같은 문제가 일어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강단이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무기력한 강단의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해자가 선행된 신학의 정보 제공을 받은 본문의 단일 의미에 근거한 권위 있는 내용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하며, "위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옷 입을"(눅24:49) 때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자 하는 결단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교회는 다시 한번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임"(롬1:16)을 증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제자도의 실현, 그 첫 번째 관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다. 오늘 본문이 담고 있는 ‘선한 목자’의 비유를 통한 메시지의 지속적인 호소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고 한다. 이 문은 즉 영생의 통로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관문임과 동시에, 모든 에너지를 얻는 원천의 창구이기도 하다. 성경은 이 문을 곧 그리스도 예수시라고 선언하신다. 따라서 제자이길 스스로 인정하는 자는 성경을 가장 권위 있는 지도자 지침서로 신뢰하고 배우며 실천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실천의 능력은 표면적인 신앙의 열심만으로 이룰 수 없으며, 반드시 知․情․意라는 全人格的 충직한 삶과 기도 속에서 실현해 갈 수 있는, 끊임없는 自己改革의 성찰로 가능한 영역인 것이다. 만약 이런 조건들이 지도자 개인들에게 제시되었다면, 지도자는 자신의 삶의 방식이 충분히 성격적일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 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성경 안에 나타나는 지혜의 이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설명되어진다. 욥은 하나님을 敬畏(reverence)하는 것이 곧 지혜(wisdom)요, 악을 떠나는 것이 곧 明哲(wisdom)이라고 고백하고 있다121). 즉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의 全 방식이 있을 때, 지도자의 지도력은 상승해 가는 것이다. 더불어 지도력은 大義를 위한 결정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정약용의 목민심서 중 ‘자기 관리의 지혜’라는 편을 보면, 원칙 안에서도 최대한 편리를 도모하라는 지도자 지침이 있다. “한 가지 일이 생길 때마다 전에 처리해 보았던 방법의 일이라고 해서 아무 검토도 하지 않고 그대로 넘겨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반드시 그것이 타당성이 있는가 없는가를 다시 살펴보아야 하고, 그 원칙 안에서 최대한 편리한 방법으로 융통성 있게 처리하여 사람들을 편리하게 하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 목사는 교회를 위하여 존재함과 동시에 성도들(羊)을 위하여 존재한다. 이런 목사의 존재가치는 최선의 봉사력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봉사력을 위하여 지도자는 끊임없는 自己啓發에 진력해야만 한다. 헬라어에서 제자는 마데테스(μαθητηs)라고 불리우는데, 이 마데테스란 단어는 본래 만다노(μανθανω) 즉 ‘배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의 명사형이다. 만다노는 신약성경에서 25회 나타나는데, 공관복음 가운데 누가복음에서는 한 번도 없고, 마가복음에서는 한 번(13:28),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세 번 사용되고 있다(마9:13; 11:29; 24:32). 제자란 단어가 ‘배운다’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면, 일단 제자의 의미는 배우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으로서 계속하여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제자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입학은 있되 졸업은 없는 것이다, 성경은 배워서 끝낼 수 있는 교과서가 아니다, 성경은 배우고 또 배워도 다함이 없는 무궁무진한 진리와 교훈으로 가득 차 있다. 평생을 투자하여 배워도 다 깨달을 수 없는 생명의 진리가 담겨져 있는 책이다. 그러므로 제자된 자들은 기회가 닿는 대로, 아니면 일부러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지속적으로 성경을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성경 배우기를 게을리 한다는 것은 제자로서 살기를 포기한 것과 다름이 없음을 뜻한다. 그 이유는, 성경 속에서만 우리는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과 지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 자신이 그가 한 특정한 백성을 구원코자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u`pe.rtw/n proba,twn)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소유격인 하이퍼(u`pe.r)의 의미는 “~을 위하여”란 뜻이다. 이 구절은 에베소서 1:4124)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서로 일치된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입은 자들이 있으니 그의 양이라 일컬음을 받는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그의 목숨을 내어 놓으셨다. 따라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에 의하여 교회의 지도자가 된 개인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위임하신 양(성도)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을 만큼 철저한 성경 신학적 기반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최근 목회와 신학이라는 잡지에 “영혼에는 감동이 필요합니다.”라는 題下의 글이 실렸다. 교회의 경건 훈련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소개된 내용인데, 寄稿者는 한국교회의 현 주소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양적 성장에 비해 우리의 경건은 제자리에 머물거나, 하이테크에 묻혀 버려 그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시도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한국교회 풍토 속에서 경건을 회복하고 자하는 개 교회들의 영적 기지개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상의 시도들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복음이 문화의 영역과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福音이 文化라는 그릇 안에 담길 때에 복음의 내용은 가일층 힘(power)을 얻을 수 있음에서 지도자의 문화이해는 필연적인 것이 된다. 2. 항구적 지도력 기독교적 ‘영성’이란 어떤 일을 할 때, 갖는 정서와 열정과 자세의 표현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영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그래서 영성이란 하나님과 함께 함이다. 영성이 깊어지면 영적 민감성이 개발될 뿐만 아니라 원숙함에 이르러 전체를 보고 인생의 깊이를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영성은 일상적인 삶 속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장하고 성장을 넘어서 성숙하고 성숙을 넘어서 원숙함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지도자의 지도력은 철저한 자기 책임과 의무, 그리고 그 공동체가 정한 法 精神 안에서 오는 것이다. 따라서 지도자의 원칙을 근거한 치리는 마땅한 적법성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원칙을 따라 시행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우리는 사회생활, 다 방면을 통해 아쉬움을 배워왔다. 그 아쉬움은 아무래도 당면한 사안에 대한 최대 공약수를 위한 노력들이 시도되지 않은 것에서 찾아질 것이다. 목회도 이와 무관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교회는 간혹 철저한 원칙주의를 고수하는 바람에, 더 유익할 수 있는 요소들을 잃어가고 있다. 목회자의 집요한 원칙 고수는 때에 따라서는 독선적으로 비칠 수 있다. 강경한 지도자의 표현은 때로 공동체의 연대를 헤칠 위험까지 안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오는 폐허는 고스란히 그 공동체의 몫이기도 하다. 따라서 원칙 고수도 ‘사랑의 원리’ 안에서 조율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한 목자의 제자도적 위치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라난 영성임과 동시에 삶으로 고백되어지는 신앙고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를 실현해갈 수 있는 첩경이 禮拜(worship)를 통하여 가능할 수 있음은, 개혁교회의 산실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일 문의 ‘인간 존재의 규정’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사람의 제 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예배는 한 특정한 예배 행위에 국한하지 않으며, 인간 전체의 삶 속에 담겨진 신앙 고백이다. 따라서 언제나 주님을 모신 자의 생활이 예배가 될 때라야 항구적인 지도력은 유효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지도자의 신앙고백은 선명해야만 한다. 그가 무엇을 신앙하는지, 또한 어떻게 신앙하는지는 그래서 매우 중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도자의 고백 안에는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의 핵심적 고백이 담겨야만 한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자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고, 자신의 나라가 오게 하시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과 죄사함과 악한 자로부터의 구원과 승리를 가져오실 하나님 그분, 곧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그분이 송영을 받으실 분이라는 고백은 지도자 사역의 절정인 것이다. 3. 結語 성경적 리더십을 왜곡하고 있는 한국교회 리더십의 문제는 첫째, 기능적 서열을 계층적 서열로 이해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어느 한 직분을 다른 직분보다 우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교회의 본질에 왜곡된 인식과 직분과 은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둘째는, 지도자의 범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교회 지도자는 목사, 장로, 집사 등으로 이해된다. 이는 실제로 그들만이 지도자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교회에서는 제한된 인원만이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 본질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본질은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교회 사역자요,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데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셋째는, 유기적 상호작용의 결핍으로서 은사활용의 부재이다.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교회에 속한 교회 구성원은 각자 성령으로부터 독특한 은사를 부여받고 있다. 이 은사는 각자로 하여금 교회 유익과 성장을 위해 섬기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령운동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음에도 성령 은사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아직 부족한 상태이며, 많은 성도들이 은사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넷째는, 세속적 리더십의 잔재로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 부족하다. 한국교회 안에는 세속적인 리더십 개념이 아직 잔재해 있다. 한국교회 목회자 가운데서도 세속적인 권위를 내세워 자기를 과시하려는 경향이 오히려 비신자들보다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현실이다. 이 같은 사실은 교회 본질에 대한 몰이해와 교회의 영적 리더십이 섬김에 있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친 데서 기인한다. 섬기는 리더십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리더십(요10장)의 본질이다 한국교회 평신도들은 ‘90년대 이후 ’평신도 훈련’, ‘제자교육’ 등 일대 교육적인 측면에서 수직적인 상승 국면을 맛보았다. 따라서 그들이 갖는 성경관이나, 신학적인 측면은 이제 기본적인 토양 안에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런 평신도들의 수준은 그래서 바르고 건강한 지도자의 지도력이 무엇인지를 이미 설정하였으며, 여기에 부합하는 지도자를 고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는 일반적인 관점에서의 지도자 의식으로 充分되어 질 수 없다. 복음을 통하여 영혼을 깨우며, 하나님의 은총을 알고 누리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제자도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섬겨야 하는 것이 지도자의 사명이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상을 향하여 역동적인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론적인 구원 사건에 이미 참여하였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자녀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하며, 필시 자녀일수 있도록 최선의 지도력을 발휘해 섬겨야만 한다. 이러한 지도력은 목사의 의식에서 힘있게 발산되어지는 것이다. 자신이 ‘전투하는 교회’의 승리한 일원이라는 ‘영적 군사’의 투철한 사명감에 사로잡혔는가는 그래서 가장 중요한 복음 지도자의 자기 성찰인 것이다. Berkhof 선생도 교회의 성질을 논의하면서 전투하는 교회(militant church)와 승리한 교회(triumphant church)를 상기시키면서 현세의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고 명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거룩한 싸움을 싸우도록 부름을 받았으며 실제로이 싸움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싸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서 승리를 보장받는다. 참된 지도력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갈 때 비로소 가능해 진다. ‘선한 목자’가 보여주는 본문 연구의 중심에는, 그래서 말씀과 함께 하는 사역,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바라보는 사역, 그리고 사랑하되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기까지 진실함을 싣는 사랑의 사역만이 교회가 산다는 지도자의 철저한 고백 속에서, 全人의 인격으로 ‘眞理’와 ‘自由’를 제시하는 지도력이어야 하는 것이다. Lloyd Jones 목사의 지적과 같이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느냐 보다 더 중요하다. 그래서 주 예수님 使役의 骨子(essence)인 요 10장의 '선한 목자' 본문의 제시는, ‘복음과 사랑’을 향한 완결<편>으로 헌신자인 우리들 앞에 놓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아가페(agaph)는 인간 존재의 마지막 법칙’임을 지도자는 놓칠 수 없다. 오직 성경 안에서 눈물과 기도로 조국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길만이 本文의 精神을 繼承하는 ‘善한 牧者’이리라.
1. 제자도의 실현 오늘날 교회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절망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는 힘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교회는 너무도 빈번하게 사회와 국가를 향하여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교회 내에서 문제를 안고 있는 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교회 밖의 대중들은 교회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이와 같은 문제가 일어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강단이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무기력한 강단의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해자가 선행된 신학의 정보 제공을 받은 본문의 단일 의미에 근거한 권위 있는 내용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하며, "위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옷 입을"(눅24:49) 때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자 하는 결단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교회는 다시 한번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임"(롬1:16)을 증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제자도의 실현, 그 첫 번째 관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다. 오늘 본문이 담고 있는 ‘선한 목자’의 비유를 통한 메시지의 지속적인 호소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고 한다. 이 문은 즉 영생의 통로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관문임과 동시에, 모든 에너지를 얻는 원천의 창구이기도 하다. 성경은 이 문을 곧 그리스도 예수시라고 선언하신다. 따라서 제자이길 스스로 인정하는 자는 성경을 가장 권위 있는 지도자 지침서로 신뢰하고 배우며 실천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실천의 능력은 표면적인 신앙의 열심만으로 이룰 수 없으며, 반드시 知․情․意라는 全人格的 충직한 삶과 기도 속에서 실현해 갈 수 있는, 끊임없는 自己改革의 성찰로 가능한 영역인 것이다. 만약 이런 조건들이 지도자 개인들에게 제시되었다면, 지도자는 자신의 삶의 방식이 충분히 성격적일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 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성경 안에 나타나는 지혜의 이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설명되어진다. 욥은 하나님을 敬畏(reverence)하는 것이 곧 지혜(wisdom)요, 악을 떠나는 것이 곧 明哲(wisdom)이라고 고백하고 있다121). 즉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의 全 방식이 있을 때, 지도자의 지도력은 상승해 가는 것이다. 더불어 지도력은 大義를 위한 결정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정약용의 목민심서 중 ‘자기 관리의 지혜’라는 편을 보면, 원칙 안에서도 최대한 편리를 도모하라는 지도자 지침이 있다. “한 가지 일이 생길 때마다 전에 처리해 보았던 방법의 일이라고 해서 아무 검토도 하지 않고 그대로 넘겨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반드시 그것이 타당성이 있는가 없는가를 다시 살펴보아야 하고, 그 원칙 안에서 최대한 편리한 방법으로 융통성 있게 처리하여 사람들을 편리하게 하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 목사는 교회를 위하여 존재함과 동시에 성도들(羊)을 위하여 존재한다. 이런 목사의 존재가치는 최선의 봉사력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봉사력을 위하여 지도자는 끊임없는 自己啓發에 진력해야만 한다. 헬라어에서 제자는 마데테스(μαθητηs)라고 불리우는데, 이 마데테스란 단어는 본래 만다노(μανθανω) 즉 ‘배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의 명사형이다. 만다노는 신약성경에서 25회 나타나는데, 공관복음 가운데 누가복음에서는 한 번도 없고, 마가복음에서는 한 번(13:28),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세 번 사용되고 있다(마9:13; 11:29; 24:32). 제자란 단어가 ‘배운다’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면, 일단 제자의 의미는 배우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으로서 계속하여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제자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입학은 있되 졸업은 없는 것이다, 성경은 배워서 끝낼 수 있는 교과서가 아니다, 성경은 배우고 또 배워도 다함이 없는 무궁무진한 진리와 교훈으로 가득 차 있다. 평생을 투자하여 배워도 다 깨달을 수 없는 생명의 진리가 담겨져 있는 책이다. 그러므로 제자된 자들은 기회가 닿는 대로, 아니면 일부러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지속적으로 성경을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성경 배우기를 게을리 한다는 것은 제자로서 살기를 포기한 것과 다름이 없음을 뜻한다. 그 이유는, 성경 속에서만 우리는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과 지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 자신이 그가 한 특정한 백성을 구원코자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u`pe.rtw/n proba,twn)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소유격인 하이퍼(u`pe.r)의 의미는 “~을 위하여”란 뜻이다. 이 구절은 에베소서 1:4124)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서로 일치된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입은 자들이 있으니 그의 양이라 일컬음을 받는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그의 목숨을 내어 놓으셨다. 따라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에 의하여 교회의 지도자가 된 개인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위임하신 양(성도)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을 만큼 철저한 성경 신학적 기반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최근 목회와 신학이라는 잡지에 “영혼에는 감동이 필요합니다.”라는 題下의 글이 실렸다. 교회의 경건 훈련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소개된 내용인데, 寄稿者는 한국교회의 현 주소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양적 성장에 비해 우리의 경건은 제자리에 머물거나, 하이테크에 묻혀 버려 그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시도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한국교회 풍토 속에서 경건을 회복하고 자하는 개 교회들의 영적 기지개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상의 시도들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복음이 문화의 영역과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福音이 文化라는 그릇 안에 담길 때에 복음의 내용은 가일층 힘(power)을 얻을 수 있음에서 지도자의 문화이해는 필연적인 것이 된다. 2. 항구적 지도력 기독교적 ‘영성’이란 어떤 일을 할 때, 갖는 정서와 열정과 자세의 표현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영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그래서 영성이란 하나님과 함께 함이다. 영성이 깊어지면 영적 민감성이 개발될 뿐만 아니라 원숙함에 이르러 전체를 보고 인생의 깊이를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영성은 일상적인 삶 속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장하고 성장을 넘어서 성숙하고 성숙을 넘어서 원숙함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지도자의 지도력은 철저한 자기 책임과 의무, 그리고 그 공동체가 정한 法 精神 안에서 오는 것이다. 따라서 지도자의 원칙을 근거한 치리는 마땅한 적법성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원칙을 따라 시행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우리는 사회생활, 다 방면을 통해 아쉬움을 배워왔다. 그 아쉬움은 아무래도 당면한 사안에 대한 최대 공약수를 위한 노력들이 시도되지 않은 것에서 찾아질 것이다. 목회도 이와 무관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교회는 간혹 철저한 원칙주의를 고수하는 바람에, 더 유익할 수 있는 요소들을 잃어가고 있다. 목회자의 집요한 원칙 고수는 때에 따라서는 독선적으로 비칠 수 있다. 강경한 지도자의 표현은 때로 공동체의 연대를 헤칠 위험까지 안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오는 폐허는 고스란히 그 공동체의 몫이기도 하다. 따라서 원칙 고수도 ‘사랑의 원리’ 안에서 조율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한 목자의 제자도적 위치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라난 영성임과 동시에 삶으로 고백되어지는 신앙고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를 실현해갈 수 있는 첩경이 禮拜(worship)를 통하여 가능할 수 있음은, 개혁교회의 산실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일 문의 ‘인간 존재의 규정’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사람의 제 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예배는 한 특정한 예배 행위에 국한하지 않으며, 인간 전체의 삶 속에 담겨진 신앙 고백이다. 따라서 언제나 주님을 모신 자의 생활이 예배가 될 때라야 항구적인 지도력은 유효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지도자의 신앙고백은 선명해야만 한다. 그가 무엇을 신앙하는지, 또한 어떻게 신앙하는지는 그래서 매우 중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도자의 고백 안에는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의 핵심적 고백이 담겨야만 한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자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고, 자신의 나라가 오게 하시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과 죄사함과 악한 자로부터의 구원과 승리를 가져오실 하나님 그분, 곧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그분이 송영을 받으실 분이라는 고백은 지도자 사역의 절정인 것이다. 3. 結語 성경적 리더십을 왜곡하고 있는 한국교회 리더십의 문제는 첫째, 기능적 서열을 계층적 서열로 이해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어느 한 직분을 다른 직분보다 우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교회의 본질에 왜곡된 인식과 직분과 은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둘째는, 지도자의 범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교회 지도자는 목사, 장로, 집사 등으로 이해된다. 이는 실제로 그들만이 지도자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교회에서는 제한된 인원만이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 본질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본질은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교회 사역자요,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데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셋째는, 유기적 상호작용의 결핍으로서 은사활용의 부재이다.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교회에 속한 교회 구성원은 각자 성령으로부터 독특한 은사를 부여받고 있다. 이 은사는 각자로 하여금 교회 유익과 성장을 위해 섬기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령운동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음에도 성령 은사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아직 부족한 상태이며, 많은 성도들이 은사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넷째는, 세속적 리더십의 잔재로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 부족하다. 한국교회 안에는 세속적인 리더십 개념이 아직 잔재해 있다. 한국교회 목회자 가운데서도 세속적인 권위를 내세워 자기를 과시하려는 경향이 오히려 비신자들보다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현실이다. 이 같은 사실은 교회 본질에 대한 몰이해와 교회의 영적 리더십이 섬김에 있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친 데서 기인한다. 섬기는 리더십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리더십(요10장)의 본질이다 한국교회 평신도들은 ‘90년대 이후 ’평신도 훈련’, ‘제자교육’ 등 일대 교육적인 측면에서 수직적인 상승 국면을 맛보았다. 따라서 그들이 갖는 성경관이나, 신학적인 측면은 이제 기본적인 토양 안에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런 평신도들의 수준은 그래서 바르고 건강한 지도자의 지도력이 무엇인지를 이미 설정하였으며, 여기에 부합하는 지도자를 고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는 일반적인 관점에서의 지도자 의식으로 充分되어 질 수 없다. 복음을 통하여 영혼을 깨우며, 하나님의 은총을 알고 누리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제자도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섬겨야 하는 것이 지도자의 사명이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상을 향하여 역동적인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론적인 구원 사건에 이미 참여하였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자녀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하며, 필시 자녀일수 있도록 최선의 지도력을 발휘해 섬겨야만 한다. 이러한 지도력은 목사의 의식에서 힘있게 발산되어지는 것이다. 자신이 ‘전투하는 교회’의 승리한 일원이라는 ‘영적 군사’의 투철한 사명감에 사로잡혔는가는 그래서 가장 중요한 복음 지도자의 자기 성찰인 것이다. Berkhof 선생도 교회의 성질을 논의하면서 전투하는 교회(militant church)와 승리한 교회(triumphant church)를 상기시키면서 현세의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고 명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거룩한 싸움을 싸우도록 부름을 받았으며 실제로이 싸움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싸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서 승리를 보장받는다. 참된 지도력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갈 때 비로소 가능해 진다. ‘선한 목자’가 보여주는 본문 연구의 중심에는, 그래서 말씀과 함께 하는 사역,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바라보는 사역, 그리고 사랑하되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기까지 진실함을 싣는 사랑의 사역만이 교회가 산다는 지도자의 철저한 고백 속에서, 全人의 인격으로 ‘眞理’와 ‘自由’를 제시하는 지도력이어야 하는 것이다. Lloyd Jones 목사의 지적과 같이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느냐 보다 더 중요하다. 그래서 주 예수님 使役의 骨子(essence)인 요 10장의 '선한 목자' 본문의 제시는, ‘복음과 사랑’을 향한 완결<편>으로 헌신자인 우리들 앞에 놓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아가페(agaph)는 인간 존재의 마지막 법칙’임을 지도자는 놓칠 수 없다. 오직 성경 안에서 눈물과 기도로 조국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길만이 本文의 精神을 繼承하는 ‘善한 牧者’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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