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끼고 형성된 곡물의 집산지였던 대구는 조선후기 이래 경상 내륙지방의 상권 중심지였다. 일제 강점 시기에 상권의 중심지로서 대구는 일본상인들에게 매력적인 곳이었고 개항장을 벗어나 내륙으로 들어갈 때 일본상인이 먼저 진출한 곳이기도 하다.
1893년에 이주한 소수와 1894년 청․일 전쟁 시기에 이주한 군인 및 상인들은 주로 조선인 상권이 밀집한 곳에 자리 잡았다. 이들과 비교하여 대구역사 건립을 전후하여 대거로 이주한 일본상인들은 대구 북동부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대구 지역 상권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상인들이 대구지역에서 상권을 확대하기 위해서 읍성곽은 不必要한 것이었다. 읍성곽은 도로사정을 더욱 열악하게 만들었고 일본상인들은 읍성곽으로 인해 읍성 내부로 진입하기도 어려웠다. 또한 유곽을 설치하기 위해 일본인이 매입한 땅이 저습지였기 때문에 遊廓의 건축을 위해서는 매립할 수 있는 자재가 필요하였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읍성의 철거는 진행되었다.
읍성의 철거 과정에서 성벽의 철거가 먼저 진행되었다. 성벽 철거의 진행은 日本居留民團에서 결성한 도로위원회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이들의 요구에 의해 친일 관찰사 박중양은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1906년 성곽의 철거를 실시하였다. 읍성 철거 후 대구지역의 상권은 일약 다른 개항장과 개시장을 앞질러 신장하여 나갔다.
읍성이 철거되기 전에는 성곽 밖에는 京釜街道가 지나는 서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행상을 통한 상권이 중심시가지였다. 그리고 성곽 내에서는 부상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주거지 및 관공서가 입지하였다. 그러나 읍성이 철거 된 후에는 성곽을 따라 4城路가 개통되고 성내부에는 十字형의 도로와 중앙통의 개통이 이어졌다. 이들 도로들은 4성로를 기본틀로 하여 주변으로 시가지를 확대해 나가는 형세였다. 주로 그 시가지는 북동부지역으로 확장되었는데 그 곳은 후기에 이주한 일본인들이 장악한 곳이다. 새로운 新作路 대부분에 일본상인이 상설점포를 입점 시키면서 남부지역의 일부를 제외하고 북동부지역을 일본상인들이 장악하였다. 이들은 서부지역에까지 영향을 확대하고 있었고 결국 남부지역에서만이 조선상권이 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읍성곽을 허문 후 나온 ...
낙동강을 끼고 형성된 곡물의 집산지였던 대구는 조선후기 이래 경상 내륙지방의 상권 중심지였다. 일제 강점 시기에 상권의 중심지로서 대구는 일본상인들에게 매력적인 곳이었고 개항장을 벗어나 내륙으로 들어갈 때 일본상인이 먼저 진출한 곳이기도 하다.
1893년에 이주한 소수와 1894년 청․일 전쟁 시기에 이주한 군인 및 상인들은 주로 조선인 상권이 밀집한 곳에 자리 잡았다. 이들과 비교하여 대구역사 건립을 전후하여 대거로 이주한 일본상인들은 대구 북동부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대구 지역 상권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상인들이 대구지역에서 상권을 확대하기 위해서 읍성곽은 不必要한 것이었다. 읍성곽은 도로사정을 더욱 열악하게 만들었고 일본상인들은 읍성곽으로 인해 읍성 내부로 진입하기도 어려웠다. 또한 유곽을 설치하기 위해 일본인이 매입한 땅이 저습지였기 때문에 遊廓의 건축을 위해서는 매립할 수 있는 자재가 필요하였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읍성의 철거는 진행되었다.
읍성의 철거 과정에서 성벽의 철거가 먼저 진행되었다. 성벽 철거의 진행은 日本居留民團에서 결성한 도로위원회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이들의 요구에 의해 친일 관찰사 박중양은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1906년 성곽의 철거를 실시하였다. 읍성 철거 후 대구지역의 상권은 일약 다른 개항장과 개시장을 앞질러 신장하여 나갔다.
읍성이 철거되기 전에는 성곽 밖에는 京釜街道가 지나는 서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행상을 통한 상권이 중심시가지였다. 그리고 성곽 내에서는 부상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주거지 및 관공서가 입지하였다. 그러나 읍성이 철거 된 후에는 성곽을 따라 4城路가 개통되고 성내부에는 十字형의 도로와 중앙통의 개통이 이어졌다. 이들 도로들은 4성로를 기본틀로 하여 주변으로 시가지를 확대해 나가는 형세였다. 주로 그 시가지는 북동부지역으로 확장되었는데 그 곳은 후기에 이주한 일본인들이 장악한 곳이다. 새로운 新作路 대부분에 일본상인이 상설점포를 입점 시키면서 남부지역의 일부를 제외하고 북동부지역을 일본상인들이 장악하였다. 이들은 서부지역에까지 영향을 확대하고 있었고 결국 남부지역에서만이 조선상권이 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읍성곽을 허문 후 나온 건축자재는 북동부 지역 저습지의 매립에 이용되었고 팔중원정에 유곽의 설립이 마무리되었다.
읍성의 철거는 일본상인이 4성로와 주변 도로를 통해 상권을 확대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오늘의 대구를 이해하기 위해서 일제 강점 초기 대구에 나타난 변화를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대구읍성이 철거되기 전과 후에 나타난 상권의 변화는 내륙도시가 일본의 경제 침탈 과정에서 겪게 되는 변화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낙동강을 끼고 형성된 곡물의 집산지였던 대구는 조선후기 이래 경상 내륙지방의 상권 중심지였다. 일제 강점 시기에 상권의 중심지로서 대구는 일본상인들에게 매력적인 곳이었고 개항장을 벗어나 내륙으로 들어갈 때 일본상인이 먼저 진출한 곳이기도 하다.
1893년에 이주한 소수와 1894년 청․일 전쟁 시기에 이주한 군인 및 상인들은 주로 조선인 상권이 밀집한 곳에 자리 잡았다. 이들과 비교하여 대구역사 건립을 전후하여 대거로 이주한 일본상인들은 대구 북동부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대구 지역 상권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상인들이 대구지역에서 상권을 확대하기 위해서 읍성곽은 不必要한 것이었다. 읍성곽은 도로사정을 더욱 열악하게 만들었고 일본상인들은 읍성곽으로 인해 읍성 내부로 진입하기도 어려웠다. 또한 유곽을 설치하기 위해 일본인이 매입한 땅이 저습지였기 때문에 遊廓의 건축을 위해서는 매립할 수 있는 자재가 필요하였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읍성의 철거는 진행되었다.
읍성의 철거 과정에서 성벽의 철거가 먼저 진행되었다. 성벽 철거의 진행은 日本居留民團에서 결성한 도로위원회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이들의 요구에 의해 친일 관찰사 박중양은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1906년 성곽의 철거를 실시하였다. 읍성 철거 후 대구지역의 상권은 일약 다른 개항장과 개시장을 앞질러 신장하여 나갔다.
읍성이 철거되기 전에는 성곽 밖에는 京釜街道가 지나는 서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행상을 통한 상권이 중심시가지였다. 그리고 성곽 내에서는 부상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주거지 및 관공서가 입지하였다. 그러나 읍성이 철거 된 후에는 성곽을 따라 4城路가 개통되고 성내부에는 十字형의 도로와 중앙통의 개통이 이어졌다. 이들 도로들은 4성로를 기본틀로 하여 주변으로 시가지를 확대해 나가는 형세였다. 주로 그 시가지는 북동부지역으로 확장되었는데 그 곳은 후기에 이주한 일본인들이 장악한 곳이다. 새로운 新作路 대부분에 일본상인이 상설점포를 입점 시키면서 남부지역의 일부를 제외하고 북동부지역을 일본상인들이 장악하였다. 이들은 서부지역에까지 영향을 확대하고 있었고 결국 남부지역에서만이 조선상권이 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읍성곽을 허문 후 나온 건축자재는 북동부 지역 저습지의 매립에 이용되었고 팔중원정에 유곽의 설립이 마무리되었다.
읍성의 철거는 일본상인이 4성로와 주변 도로를 통해 상권을 확대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오늘의 대구를 이해하기 위해서 일제 강점 초기 대구에 나타난 변화를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대구읍성이 철거되기 전과 후에 나타난 상권의 변화는 내륙도시가 일본의 경제 침탈 과정에서 겪게 되는 변화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Daegu, a commercial, trading center of grain established by the Nak-dong river had been the center of commercial power since latter term of Joseon. During the time of japanese occupation, Daegu was an attractive inland area, which Japanese commercial power first entered through an open port.
A Few p...
Daegu, a commercial, trading center of grain established by the Nak-dong river had been the center of commercial power since latter term of Joseon. During the time of japanese occupation, Daegu was an attractive inland area, which Japanese commercial power first entered through an open port.
A Few people in 1893, soldiers and merchants in 1894 during the Sino-Japanese war moved into the place where Korean commercial power was concentrated. In contrast, huge number of Japanese people moved into the north-east area of Daegu in the vicinity of Daegu train station construction and soon began to exercise their substantial power to Daegu commercial area. Castle wall was an obstruction to commercial power expansion for Japanese. It aggravated the road situation and entering the area was also very difficult. Since the land for building a red-light district owned by Japanese people was low, swampy place. They need great amount of construction material to fill up the swamp. Such reason carried out the withdrawal of castle wall.
Demolition was the first step for the whole withdrawal process. The process had been discussed with detail in Road commission that was established by Japanese resident organization. As requested, pro-Japanese director Jung-yang, Park started the withdrawal without any permission given by the government. After the withdrawal, the commercial power of Daegu province became superior to other open ports and markets.
Before the withdrawal, south-west area where Seoul and Busan highway pass through was the commercial center and some residential area, government offices were built. However, "the intersection which was the main road heading 4 directions was established along the castle wall and cross road and Joongahngtong were opened after the withdrawal. They expanded the urban area to circumference in the base of the intersection in which latter Japanese migrants took over. Japanese shops have seized the most of the new built roads except some part of south area and they continued to expand to the west area. All the materials that came out from the withdrawal process was used to fill up north-east low swamp area and red-light district was also established in Pal-zhong wonzheng.
Withdrawal of wall influenced commercial power expansion of Japanese to the intersection and nearby area greatly. In order to understand current Daegu, knowing the Daegu's intial changes that happened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is crucial. The changes of commercial power will help you to understand the whole changes happened throughout the initial economic pillage process of Japanese.
Daegu, a commercial, trading center of grain established by the Nak-dong river had been the center of commercial power since latter term of Joseon. During the time of japanese occupation, Daegu was an attractive inland area, which Japanese commercial power first entered through an open port.
A Few people in 1893, soldiers and merchants in 1894 during the Sino-Japanese war moved into the place where Korean commercial power was concentrated. In contrast, huge number of Japanese people moved into the north-east area of Daegu in the vicinity of Daegu train station construction and soon began to exercise their substantial power to Daegu commercial area. Castle wall was an obstruction to commercial power expansion for Japanese. It aggravated the road situation and entering the area was also very difficult. Since the land for building a red-light district owned by Japanese people was low, swampy place. They need great amount of construction material to fill up the swamp. Such reason carried out the withdrawal of castle wall.
Demolition was the first step for the whole withdrawal process. The process had been discussed with detail in Road commission that was established by Japanese resident organization. As requested, pro-Japanese director Jung-yang, Park started the withdrawal without any permission given by the government. After the withdrawal, the commercial power of Daegu province became superior to other open ports and markets.
Before the withdrawal, south-west area where Seoul and Busan highway pass through was the commercial center and some residential area, government offices were built. However, "the intersection which was the main road heading 4 directions was established along the castle wall and cross road and Joongahngtong were opened after the withdrawal. They expanded the urban area to circumference in the base of the intersection in which latter Japanese migrants took over. Japanese shops have seized the most of the new built roads except some part of south area and they continued to expand to the west area. All the materials that came out from the withdrawal process was used to fill up north-east low swamp area and red-light district was also established in Pal-zhong wonzheng.
Withdrawal of wall influenced commercial power expansion of Japanese to the intersection and nearby area greatly. In order to understand current Daegu, knowing the Daegu's intial changes that happened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is crucial. The changes of commercial power will help you to understand the whole changes happened throughout the initial economic pillage process of Japan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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