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갈망하고 자신의 뿌리를 찾아 본연의 자아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인간은 때로는 반항하는 모습으로 때로는 찬미의 모습으로 그 하느님 앞에 마주 서곤 하는데 성경 안에는 이런 인간의 모습이 갖가지 형식의 글을 통해 묘사되어 있다. 그 가운데 좀처럼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글들 또한 있으니, 성경에 나타나는 족보도 아마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구약성경을 읽어나가다 보면 우리는 심심찮게 족보들을 만난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창세기에는 족보의 가장 전형적 양식인 ‘이는 ~의 족보이다’라는 뜻인 히브리어 ‘엘레 톨러돗~’(~...
생명을 갈망하고 자신의 뿌리를 찾아 본연의 자아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인간은 때로는 반항하는 모습으로 때로는 찬미의 모습으로 그 하느님 앞에 마주 서곤 하는데 성경 안에는 이런 인간의 모습이 갖가지 형식의 글을 통해 묘사되어 있다. 그 가운데 좀처럼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글들 또한 있으니, 성경에 나타나는 족보도 아마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구약성경을 읽어나가다 보면 우리는 심심찮게 족보들을 만난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창세기에는 족보의 가장 전형적 양식인 ‘이는 ~의 족보이다’라는 뜻인 히브리어 ‘엘레 톨러돗~’(~תודלות הלא엘레 톨러돗 혹은 이와 매우 흡사한 모양으로 기록된다)이라는 문구가 가장 빈번하게 나타난다. 히브리어로 ‘톨러돗’(תודלות)은 ‘낳다, 생기게 한다, (자식)을 보다, 얻다’ 등을 의미하는 동사 דלי얄라드 의 여성복수명사이며 문자 그대로 직역한다면 “(자식을) 얻음(begettings)”이 되는데, 성경에서는 족보 혹은 계보를 뜻하는 말로서 쓰여졌다. 창세기에는 이 문구가 자주 등장하여 이름들의 목록은 물론 이야기조차도 족보라는 제목 아래서 전개되고 있는데, 목록족보의 경우 대부분 사람들은, 나아가 적지 않은 수의 성경학자들까지도, 이를 성경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삽입구 정도로 이해하며 어떤 흥미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채 불편함을 지니고 건너야 하는 사막정도로 여겼다. 그리고 많은 주석서에서 ‘편집자의 삽입구’라는 언급 정도로 넘어 간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창세기를 이해하는 올바른 방법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창세기는 왜 그렇게 많은 ‘엘레 톨러돗~’(~תודלות הלא)이라는 문구를 그 안에 담고 있는지, 이들은 창세기의 내용이나 구조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창세기의 편집자는 왜 족보의 긴 목록을 이야기의 흐름 안에 섞어 넣었으며, 또한 이야기를 왜 족보라는 명분으로 전개해 나가는지, 이 논문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해보려는 것이다. 방법론적으로는, 하나의 목록족보(11,10-26)가 끝나면서 바로 그 족보의 끝을 맞물어 ‘엘레 톨러돗~’(~תודלות הלא) 문구로 이야기를 펼쳐가는 11,27-32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족보로서의 11,27-32가 하나의 성경 본문으로서 갖는 의미, 현재 위치한 자리에서 하는 역할, 나아가 그것이 창세기의 여러 족보들 가운데서 갖는 고유한 기능을 살펴보면서 위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였다. 챨즈(B. S. Childs)의 정경비평(Canonical Criticism)노선을 취하여 창세기 전체를 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되 11,27-32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문맥인 ‘아브라함 이야기’를 문체론에 역점을 두고 설화분석 방법을 사용하였다. 더 구체적으로는, 우선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족보에 관한 오늘날까지의 학계의 연구 결과들을 간략하게 알아본 후 11,27-32의 본문을 연구하고, 11,27-32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문맥인 ‘아브라함 이야기’와 갖는 관련성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11,27-32가 전체 창세기와 갖는 관련성을 살펴봄으로써, 미시안적 관찰로부터 거시안적 관찰로 시야를 넓혀 고찰하였다. 우선 제2장에서는 족보에 대한 연구의 변천사를 간략하게 다루고 그 후 구약성경 족보의 형식과 기능에 대한 오늘날 학계의 일반적 견해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관찰은 족보에 관한 학계의 연구가 놀랄 만큼 많이 진전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논문은 이런 논제들을 역사비평학에 의거해 비판하거나 발전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학계가 성경본문의 위 혹은 옆에서 족보의 형식과 기능을 찾아왔다면, 여기서는 본문의 보다 깊은 세계 안에서 톨러돗 문구의 역할을 찾아보는 것이다. 결국 족보라는 창을 통해 창세기 전체를 새롭게 조망해보려 하는 것이다. 제3장에서는 11,27-32의 본문을 싣고 본문비판을 한 후, 본문을 주석하였다. 본문주석을 종합하면, 11,27-32의 주석은 본문 내용 전체가 생명에서 죽음, 시도에서 실패, 희망에서 미완성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가족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특별히 후손에 큰 관심을 두고 있음도 드러나는데, 석녀 모티프는 물론 잦게 나타나는 ‘아들’, ‘아이’, ‘낳다’ 등의 단어들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제4장에서는 11,27-32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하여 이어지는 아브라함 이야기와 더불어 살펴보았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범위에 대하여 대부분 학자들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범위를 11,27-25,11로 규정한다. 첫째, 형식상으로 볼 때, 테라 족보의 시작(xr;T,ê tdoål.AT hL,ae'w>)과 더불어 11,27에서는 아브람의 출생이 보도되고, 25,10에서는 그의 죽음이 보도되며 이후 25,12에 다시 한 번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편집 관용구 ‘엘레 톨러돗~’(~תודלות הלא)과 함께 목록식의 이스마엘의 족보가 나오기 때문이다. 둘째로, 아브라함 이야기가 11,27-25,11로 규정되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플롯의 구조에 있
생명을 갈망하고 자신의 뿌리를 찾아 본연의 자아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인간은 때로는 반항하는 모습으로 때로는 찬미의 모습으로 그 하느님 앞에 마주 서곤 하는데 성경 안에는 이런 인간의 모습이 갖가지 형식의 글을 통해 묘사되어 있다. 그 가운데 좀처럼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글들 또한 있으니, 성경에 나타나는 족보도 아마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구약성경을 읽어나가다 보면 우리는 심심찮게 족보들을 만난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창세기에는 족보의 가장 전형적 양식인 ‘이는 ~의 족보이다’라는 뜻인 히브리어 ‘엘레 톨러돗~’(~תודלות הלא엘레 톨러돗 혹은 이와 매우 흡사한 모양으로 기록된다)이라는 문구가 가장 빈번하게 나타난다. 히브리어로 ‘톨러돗’(תודלות)은 ‘낳다, 생기게 한다, (자식)을 보다, 얻다’ 등을 의미하는 동사 דלי얄라드 의 여성복수명사이며 문자 그대로 직역한다면 “(자식을) 얻음(begettings)”이 되는데, 성경에서는 족보 혹은 계보를 뜻하는 말로서 쓰여졌다. 창세기에는 이 문구가 자주 등장하여 이름들의 목록은 물론 이야기조차도 족보라는 제목 아래서 전개되고 있는데, 목록족보의 경우 대부분 사람들은, 나아가 적지 않은 수의 성경학자들까지도, 이를 성경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삽입구 정도로 이해하며 어떤 흥미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채 불편함을 지니고 건너야 하는 사막정도로 여겼다. 그리고 많은 주석서에서 ‘편집자의 삽입구’라는 언급 정도로 넘어 간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창세기를 이해하는 올바른 방법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창세기는 왜 그렇게 많은 ‘엘레 톨러돗~’(~תודלות הלא)이라는 문구를 그 안에 담고 있는지, 이들은 창세기의 내용이나 구조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창세기의 편집자는 왜 족보의 긴 목록을 이야기의 흐름 안에 섞어 넣었으며, 또한 이야기를 왜 족보라는 명분으로 전개해 나가는지, 이 논문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해보려는 것이다. 방법론적으로는, 하나의 목록족보(11,10-26)가 끝나면서 바로 그 족보의 끝을 맞물어 ‘엘레 톨러돗~’(~תודלות הלא) 문구로 이야기를 펼쳐가는 11,27-32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족보로서의 11,27-32가 하나의 성경 본문으로서 갖는 의미, 현재 위치한 자리에서 하는 역할, 나아가 그것이 창세기의 여러 족보들 가운데서 갖는 고유한 기능을 살펴보면서 위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였다. 챨즈(B. S. Childs)의 정경비평(Canonical Criticism)노선을 취하여 창세기 전체를 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되 11,27-32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문맥인 ‘아브라함 이야기’를 문체론에 역점을 두고 설화분석 방법을 사용하였다. 더 구체적으로는, 우선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족보에 관한 오늘날까지의 학계의 연구 결과들을 간략하게 알아본 후 11,27-32의 본문을 연구하고, 11,27-32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문맥인 ‘아브라함 이야기’와 갖는 관련성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11,27-32가 전체 창세기와 갖는 관련성을 살펴봄으로써, 미시안적 관찰로부터 거시안적 관찰로 시야를 넓혀 고찰하였다. 우선 제2장에서는 족보에 대한 연구의 변천사를 간략하게 다루고 그 후 구약성경 족보의 형식과 기능에 대한 오늘날 학계의 일반적 견해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관찰은 족보에 관한 학계의 연구가 놀랄 만큼 많이 진전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논문은 이런 논제들을 역사비평학에 의거해 비판하거나 발전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학계가 성경본문의 위 혹은 옆에서 족보의 형식과 기능을 찾아왔다면, 여기서는 본문의 보다 깊은 세계 안에서 톨러돗 문구의 역할을 찾아보는 것이다. 결국 족보라는 창을 통해 창세기 전체를 새롭게 조망해보려 하는 것이다. 제3장에서는 11,27-32의 본문을 싣고 본문비판을 한 후, 본문을 주석하였다. 본문주석을 종합하면, 11,27-32의 주석은 본문 내용 전체가 생명에서 죽음, 시도에서 실패, 희망에서 미완성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가족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특별히 후손에 큰 관심을 두고 있음도 드러나는데, 석녀 모티프는 물론 잦게 나타나는 ‘아들’, ‘아이’, ‘낳다’ 등의 단어들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제4장에서는 11,27-32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하여 이어지는 아브라함 이야기와 더불어 살펴보았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범위에 대하여 대부분 학자들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범위를 11,27-25,11로 규정한다. 첫째, 형식상으로 볼 때, 테라 족보의 시작(xr;T,ê tdoål.AT hL,ae'w>)과 더불어 11,27에서는 아브람의 출생이 보도되고, 25,10에서는 그의 죽음이 보도되며 이후 25,12에 다시 한 번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편집 관용구 ‘엘레 톨러돗~’(~תודלות הלא)과 함께 목록식의 이스마엘의 족보가 나오기 때문이다. 둘째로, 아브라함 이야기가 11,27-25,11로 규정되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플롯의 구조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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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1장 족보 아브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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