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간의 역사교과서 문제는 하루 이틀사이의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는 1982년 교과서 파동 이후, 1986년, 2001년, 2005년까지 벌써 4차례에 이르고 있다. 일본 교과서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한국사에 대한 서술이 많으며, 또한 서술과정에서 객관적인 사실의 오류나 혹은 의도적인 은폐 등의 사례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이에 한․일 양국에 모두 영향을 끼쳤으며 양국의 교과서에 모두 기술되어 있는 내용을 선정하여 한․일 양국의 교과서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현재까지 한․일 양국의 첨예한 대립과 쟁점으로 남아 있는 주제의 하나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들 수 있다. 이는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조선주재특명전권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 하에 일본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말한다. 이는 일본 정부가 개입된 조직적인 범죄이나, 시해 이후 사건의 은폐와 축소로 인해 진실이 왜곡되었다. 또한 이듬해 일어난 춘생문 사건은 일본에 대한 책임소재를 계속 추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국내적으로 한말 조선내의 정치세력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나아가 제국주의시대 동아시아의 세력구도와도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대내적으로 근대화의 추진과 대외적으로 외세에 대항하여 자주권을 지켜야 한다는 2대 과제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대내외적 위기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다. 몇몇 선구적인 연구를 제외하고 ‘명성황후’ 및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연구도 부진한 것이 사실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시해 주모자인 미우라를 비롯한 사건 관련자와 일본 정부 당국에 의한 사건 조작 및 자료 은닉, 그리고 일본인 연구자의 고의적 연구 기피를 그 원인으로 들 수 있다. 또한 한국 학계에서는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여러 가지 제한적인 조건 속에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2000년을 전후로 한 시기의 연구 성과로 볼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역사상을 구성할 수 있는 바탕이 축척되었다고 본다. 최근 활발해진 남한 학계의 연구와는 달리 북한의 경우 명성황후 뿐 아니라 시해사건에 대한 서술이 거의 없다. 축척된 연구 성과와는 달리 교육 현장에서는 여전히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교수학습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하고 있다. 이는 현장교사가 학계의 성과를 받아들이지 못했음에도 그 원인이 있겠으나 학습의 중요한 교재인 교과서 상의 서술에도 원인이 있다. 교과서는 교육을 하는데 필요한 가장 기본이 되는 교수학습용 도서이다. 그런 교과서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서술은 ‘흉모’, ‘만행, ’불량배’ 등의 감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지나친 피해자 의식을 보이고 있다. 당연히 시해사건은 애석한 일이고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일본을 가해자로 우리는 피해자로 인식하는 대립적 가치에 입각한 역사교육은 지양해야 한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 자체에 대한 연구는 있었으나 현장에서 사용되는 교과서를 분석한 사례가 없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2002년 전후로 사용된 교과서만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서술되지 않았다. 즉, 과거에는 생략을 통한 오류가 많아 효과적인 분석에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불완전한 서술이지만 많은 일본사 교과서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기술되고 있다. 또한 한국 교과서도 국정에서 검정 체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6종의 교과서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들은 국정보다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교과서를 서술하고 있어 교과서간 비교 분석이 가능한 상황이다. 이에 본 연구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먼저 한․일 양국 ...
한․일간의 역사교과서 문제는 하루 이틀사이의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는 1982년 교과서 파동 이후, 1986년, 2001년, 2005년까지 벌써 4차례에 이르고 있다. 일본 교과서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한국사에 대한 서술이 많으며, 또한 서술과정에서 객관적인 사실의 오류나 혹은 의도적인 은폐 등의 사례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이에 한․일 양국에 모두 영향을 끼쳤으며 양국의 교과서에 모두 기술되어 있는 내용을 선정하여 한․일 양국의 교과서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현재까지 한․일 양국의 첨예한 대립과 쟁점으로 남아 있는 주제의 하나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들 수 있다. 이는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조선주재특명전권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 하에 일본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말한다. 이는 일본 정부가 개입된 조직적인 범죄이나, 시해 이후 사건의 은폐와 축소로 인해 진실이 왜곡되었다. 또한 이듬해 일어난 춘생문 사건은 일본에 대한 책임소재를 계속 추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국내적으로 한말 조선내의 정치세력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나아가 제국주의시대 동아시아의 세력구도와도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대내적으로 근대화의 추진과 대외적으로 외세에 대항하여 자주권을 지켜야 한다는 2대 과제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대내외적 위기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다. 몇몇 선구적인 연구를 제외하고 ‘명성황후’ 및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연구도 부진한 것이 사실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시해 주모자인 미우라를 비롯한 사건 관련자와 일본 정부 당국에 의한 사건 조작 및 자료 은닉, 그리고 일본인 연구자의 고의적 연구 기피를 그 원인으로 들 수 있다. 또한 한국 학계에서는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여러 가지 제한적인 조건 속에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2000년을 전후로 한 시기의 연구 성과로 볼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역사상을 구성할 수 있는 바탕이 축척되었다고 본다. 최근 활발해진 남한 학계의 연구와는 달리 북한의 경우 명성황후 뿐 아니라 시해사건에 대한 서술이 거의 없다. 축척된 연구 성과와는 달리 교육 현장에서는 여전히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교수학습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하고 있다. 이는 현장교사가 학계의 성과를 받아들이지 못했음에도 그 원인이 있겠으나 학습의 중요한 교재인 교과서 상의 서술에도 원인이 있다. 교과서는 교육을 하는데 필요한 가장 기본이 되는 교수학습용 도서이다. 그런 교과서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서술은 ‘흉모’, ‘만행, ’불량배’ 등의 감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지나친 피해자 의식을 보이고 있다. 당연히 시해사건은 애석한 일이고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일본을 가해자로 우리는 피해자로 인식하는 대립적 가치에 입각한 역사교육은 지양해야 한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 자체에 대한 연구는 있었으나 현장에서 사용되는 교과서를 분석한 사례가 없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2002년 전후로 사용된 교과서만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서술되지 않았다. 즉, 과거에는 생략을 통한 오류가 많아 효과적인 분석에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불완전한 서술이지만 많은 일본사 교과서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기술되고 있다. 또한 한국 교과서도 국정에서 검정 체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6종의 교과서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들은 국정보다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교과서를 서술하고 있어 교과서간 비교 분석이 가능한 상황이다. 이에 본 연구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먼저 한․일 양국 교과서 분석에 선행하여 교육과정 분석을 통해 교육목표와 교과서의 특징을 파악해 보겠다. 그 방법으로 한국 교과서의 경우 고등학교 국정『국사』와 검정 『한국 근현대사』로 총 7종을 분석한다. 일본 교과서의 경우 고등학교 『일본사』A와 『일본사』B로 총 18종을 대상으로 한다. 또한 교과서 분석에 있어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용어, 배경, 주모자, 시해장소, 결과 및 처리 등의 항목으로 구분하여 서술 분석을 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러한 서술을 바탕으로 향후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서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한․일간의 역사교과서 문제는 하루 이틀사이의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는 1982년 교과서 파동 이후, 1986년, 2001년, 2005년까지 벌써 4차례에 이르고 있다. 일본 교과서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한국사에 대한 서술이 많으며, 또한 서술과정에서 객관적인 사실의 오류나 혹은 의도적인 은폐 등의 사례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이에 한․일 양국에 모두 영향을 끼쳤으며 양국의 교과서에 모두 기술되어 있는 내용을 선정하여 한․일 양국의 교과서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현재까지 한․일 양국의 첨예한 대립과 쟁점으로 남아 있는 주제의 하나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들 수 있다. 이는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조선주재특명전권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 하에 일본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말한다. 이는 일본 정부가 개입된 조직적인 범죄이나, 시해 이후 사건의 은폐와 축소로 인해 진실이 왜곡되었다. 또한 이듬해 일어난 춘생문 사건은 일본에 대한 책임소재를 계속 추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국내적으로 한말 조선내의 정치세력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나아가 제국주의시대 동아시아의 세력구도와도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대내적으로 근대화의 추진과 대외적으로 외세에 대항하여 자주권을 지켜야 한다는 2대 과제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대내외적 위기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다. 몇몇 선구적인 연구를 제외하고 ‘명성황후’ 및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연구도 부진한 것이 사실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시해 주모자인 미우라를 비롯한 사건 관련자와 일본 정부 당국에 의한 사건 조작 및 자료 은닉, 그리고 일본인 연구자의 고의적 연구 기피를 그 원인으로 들 수 있다. 또한 한국 학계에서는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여러 가지 제한적인 조건 속에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2000년을 전후로 한 시기의 연구 성과로 볼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역사상을 구성할 수 있는 바탕이 축척되었다고 본다. 최근 활발해진 남한 학계의 연구와는 달리 북한의 경우 명성황후 뿐 아니라 시해사건에 대한 서술이 거의 없다. 축척된 연구 성과와는 달리 교육 현장에서는 여전히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교수학습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하고 있다. 이는 현장교사가 학계의 성과를 받아들이지 못했음에도 그 원인이 있겠으나 학습의 중요한 교재인 교과서 상의 서술에도 원인이 있다. 교과서는 교육을 하는데 필요한 가장 기본이 되는 교수학습용 도서이다. 그런 교과서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서술은 ‘흉모’, ‘만행, ’불량배’ 등의 감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지나친 피해자 의식을 보이고 있다. 당연히 시해사건은 애석한 일이고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일본을 가해자로 우리는 피해자로 인식하는 대립적 가치에 입각한 역사교육은 지양해야 한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 자체에 대한 연구는 있었으나 현장에서 사용되는 교과서를 분석한 사례가 없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2002년 전후로 사용된 교과서만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서술되지 않았다. 즉, 과거에는 생략을 통한 오류가 많아 효과적인 분석에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불완전한 서술이지만 많은 일본사 교과서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기술되고 있다. 또한 한국 교과서도 국정에서 검정 체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6종의 교과서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들은 국정보다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교과서를 서술하고 있어 교과서간 비교 분석이 가능한 상황이다. 이에 본 연구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먼저 한․일 양국 교과서 분석에 선행하여 교육과정 분석을 통해 교육목표와 교과서의 특징을 파악해 보겠다. 그 방법으로 한국 교과서의 경우 고등학교 국정『국사』와 검정 『한국 근현대사』로 총 7종을 분석한다. 일본 교과서의 경우 고등학교 『일본사』A와 『일본사』B로 총 18종을 대상으로 한다. 또한 교과서 분석에 있어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용어, 배경, 주모자, 시해장소, 결과 및 처리 등의 항목으로 구분하여 서술 분석을 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러한 서술을 바탕으로 향후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서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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