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강원도 영동 남부 지역 고을 및 마을신앙을 연구한 논문이다. 연구 과정에서 마을신앙이 지닌 의미를 자세하게 살펴보기 위해 이를 고을신앙과 마을신앙으로 좀 더 세분화하여 구분하였다. 본 연구의 지역 범위는 과거의 삼척군 지역을 주로 하되 울진 지역을 여기에 포함시켰다. 즉, 행정 단위로서의 삼척시와 함께 과거 삼척의 영역이었던 태백시와 동해시를 포함하였는데, 이는 고대국가 단계부터 이어져 온 사회ㆍ경제ㆍ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하는 지역을 대상으로 하기 위함이다. 울진 지역을 포함한 이유는 전근대까지 삼척문화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1963년까지 강원도에 속하여 삼척 지역과 많은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 범위는 현재를 기준으로 이전의 각종 문헌 자료와 마을 내에 보관하는 자료 등을 발굴하여 지속과 변화 양상을 분석하였으며, 古形을 간직한 사례와 변화가 심한 사례는 비교 분석하여 서술하였다. 연구 방법은 현지 조사 자료를 문헌 자료와 연결시키고, 다른 지역의 마을신앙 사례와 비교해 봄으로서 이 지역 고을 및 마을신앙의 발생, 전개, 변화와 그 변화의 요인을 역사의 발전 체계와 논리 속에서 이해하려는 역사민속학의 입장에서 논지를 전개하였다. 필자는 이 지역 마을신앙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마을신앙의 유형을 자연 마을 단위의 祭堂과 고갯마루를 오가며 장사를 하였던 보부상이나 선질꾼들이 위하였던 제당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이와 함께 마을신을 그 위상과 기능에 따라 上堂神과 下堂神으로 구분하였을 때, 자연 마을 단위에서 上堂神으로 모시는 神靈을 기준으로 天祭堂型ㆍ山神堂型ㆍ서낭당형으로 구분하였다. 이와 함께 해안지역 마을신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서낭당형 마을신앙을 서낭당형과 해서낭당형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구분하여 살펴봄으로서 현재 각 마을의 자연 환경과 사회ㆍ경제ㆍ문화적 차이에 따라 다양하게 모셔지는 神靈과 함께 祭堂ㆍ祭次ㆍ祭需 등의 지속과 변동 양상에 대한 조사와 분석을 통해 이 지역 마을신앙의 다양한 구조와 특징을 잘 이해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강원도 영동 남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지역 공동체신앙의 역사성을 살펴보기 위하여 각종 기록을 검토하여 본 결과, 삼척지역에 있었던 주요 제당은 태백산 정상에 있었던 天王祠와 함께 邑治 城隍祠ㆍ近山祠ㆍ社稷壇ㆍ厲壇ㆍ先農壇ㆍ纛神廟ㆍ里社 등이 있었으며, 祭儀와 관련한 곡식을 보관하는 粢盛庫를 宣祖 8年(1575) 乙亥年에 三陟府使 金孝元이 설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관청에서 주도한 祭儀가 매우 체계적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官行祭와 고을신앙의 실상과 변화 양상을 이해하기 위해 三陟 邑治城隍祠와 烏金簪, 太白山 天祭를 주요 사례로 하여 살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三陟 邑治城隍祠에서 烏金簪을 받들어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다양하게 나타나는 城隍神의 모습들 중 呪物을 모신 사례로서 이해될 수 있으며,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읍치 성황사를 설치하기 전에 이미 이 지방에서의 전통적인 신앙 관념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척부사가 금지하였어도 향리들이 주도하여 烏金簪祭가 계속 되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오금잠제를 통해 지역 내에서 나름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설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전근대 사회에서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많은 시대였기에 烏金簪祭를 지낼 때 각종 물건을 바치고, 무당의 공수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오금잠제는 내륙지역에서 미로면 단오굿과 근덕면 선흥마을 단오굿 등으로 전승되고 있으며, 해안지역에서는 2~10년을 주기로 별신굿이 열리는 등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신라대부터 시작된 태백산에서의 제사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신라에서는 대외 팽창과 정복지 巡狩라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국가 祀典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태백산을 中祀를 지낸 곳으로서 중시하였으며, 고려시대에도 이러한 인식은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祀典 體制에 비록 편입되지는 않았지만 조선 전기인 世祖代까지 국가 차원에서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와 함께 각종 기록을 종합해 보면 ‘太白山祠 = 天王堂’ 이고, ‘太白祠 = 天王祠’ 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太白山祠나 太白祠 등으로 불리우는 제당에서도 天神을 모시고 天祭를 지냈음을 알 수 있게 하며, 太白山祭가 곧 天祭였다고 볼 수 있게 한다. 또한 민간에서 太白山祭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고, 이에 지방 관청과 무당들이 백성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태백산에서의 致祭를 조선시대 이곳 주변에 살았던 사람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태백산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있는 마을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거리 등의 문제로 인해 태백산에서 제사를 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태백산 줄기가 내려온 산봉우리나 능선 아래에 上堂으로 여기는 天祭壇[天祭堂 또는 天地壇]을 마을 단위로 만들어 天祭를 지내는 사례를 많은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민간에서 행해진 天祭는 각종 거사 성공을 기원하거나,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을 추구할 때, 또는 獨立 祈願ㆍ祈雨ㆍ祈穀 등을 그 목적으로 하여 지내는 예가 매우 많다. 따라서 天祭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그 목적하는 바가 다양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마을신앙을 마을에서 모시는 上堂神을 기준으로 天祭堂型, 山神堂型, 서낭당형, 해서낭당형으로 분류하였고, 이와는 별도로 보부상단 관련 서낭당을 분석하였는데,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天祭堂型 마을신앙에서 모시는 神靈은 天神만 모시는 예, 天神과 山神을 함께 모시는 예, 天神과 기타 여러 神을 함께 모시는 예로 나눌 수 있다. 天神만 모시는 예는 주로 산 중턱에 돌담을 말굽형으로 둘러 祭壇을 설치한 사례, 산 정상이나 그 아래에 祭壇을 설치한 사례, 하천 옆에 임시로 설치한 祭壇 등이 있다. 이들 祭堂은 주로 마을에서 上堂의 기능을 하거나, 비가 안 올 경우 祈雨를 위한 祭堂의 기능을 한다. 그리고 천제당에 天神과 함께 山神을 모신 사례도 있는데, 이곳에서 모신 山神은 주로 제당이 위치한 主山의 山神靈을 天神과 함께 모시고 있다. 이들 제당에서의 致祭는 비록 매년 지내지는 않더라도 1년 또는 그 이상의 주기를 설정하여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天祭堂에서 天神과 함께 여러 신령을 모심으로서 다양한 종교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하려는 마을도 있는데, 이들 제당에서 함께 모셔지는 神靈은 주로 城隍神ㆍ土地神ㆍ厲疫神ㆍ龍王神이다. 이들 신령 중 天神을 능가하는 신령은 없으며, 모신 신령들은 마을 내에서 요구되는 구체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신령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천제당형 마을신앙을 祭儀 구조에 따라 구분하면 천제, 천제-성황제, 성황제-거리제(천신 위함), 천제-성황제-수부신 위함, 천제-용왕제, 천제-성황제-용왕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비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천제는 대부분 천제만을 지내어 그 기원하는 바를 이루려 한다. 이에 비해 마을 내의 제당이나 다른 신령과 관련을 맺고 있는 천제는 대부분 정기적인 신앙 행위가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마을의 여건을 반영한 祭儀 형태가 형성되고 유지된다. 山神堂型 마을신앙을 祭儀 구조에 따라 구분하면 산신제, 산신제 → 성황제 → 수부신 위함, 산신제 → 서낭제, 산신과 서낭, 수부 등을 같이 위하는 형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마을에서 上堂으로 여기는 山神堂에서는 마을 서낭당과 연계하여 ‘산신제 → 서낭제’, ‘산신제 → 성황제 → 수부신 위함’의 제의 형태가 나타난다. 산신제만 지내는 마을과 산신당을 마을제당으로 여기는 마을에서의 祭儀는 山神만을 위하는 의례를 행한다. 이와는 달리 山神과 함께 다른 神靈들을 모신 마을이나 山神이 그 명칭을 바꾸어 서낭신으로 좌정한 마을에서는 ‘산신제[서낭제]’ 또는 ‘산신제[서낭제] → 수부신 위함’의 제의 형태가 주로 나타난다. 그리고 제의 진행 과정은 대부분 엄숙한 유교식으로 진행된다. 서낭당형 마을신앙은 대부분의 마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제의 진행과정은 마을마다 다양하게 나타나고, 그 과정에서 추구하는 기능이나 의미 또한 마을마다 다르다. 그러나 전체적인 흐름은 ‘부정치기 → 陳設과 獻爵, 再拜 → 讀祝 → 燒紙 → 수부신과 객귀 물림 → 飮福’의 순으로 진행된다. 물론 이와 같은 과정이외에 하위 제차로 거리고사나 용왕제 등을 지내면 그 과정은 훨씬 다양해진다. 가곡면, 노곡면과 도계읍 등의 사례를 보면 복재[卜者]가 서낭고사에 적극 관여한 마을이 많다. 복재들이 관여하게 되면 祝文을 읽어 나름의 염원을 담아내기도 하지만 주로 축원경을 구송하거나 소지를 올리며 말로 초들어 마을 전체의 안녕과 풍요, 다양한 현안들에 대하여 축원을 해 주며, 가구별 燒紙를 올릴 때 다양한 염원을 담은 축원을 해 준다. 축문을 고하지 않거나 복재가 없는 마을에서는 마을 주민 중 입담이 좋은 사람이 소지를 올리며 축원을 해 준다. 그리고 소지를 올릴 때 별도로 가축소지를 올리는 마을들도 많으며, 노곡면 하월산리와 하반천리에서는 지나가는 보부상이나 장사꾼들도 소지를 올려달라고 별비를 내고 가면 소지를 올려 주었다. 이는 이곳이 주요 교통로에 해당함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마을 서낭당이 마을 주민들만을 위한 제당이 아니라 이를 지나는 모든 이들의 안전과 행복을 기원하는 신앙의 處所로 여김을 알 수 있다. 수부신은 서낭신을 모시고 다닌 하위 신으로 여긴다. 많은 마을에서 인식하는 ‘수배’는 마을 주민들 중 서낭신을 잘 모시고 위하던 분들을 초들어서 모시는데, 옛날부터 서낭신을 잘 모시던 사람이 수배 노릇을 한다고 여긴다. 이와 같이 수부신을 위하는 이유는 서낭신이나 토지신처럼 마을 전체를 관장하는 신령으로 인식하여 위하는 것도 아니고, 冤魂으로 여겨 잘 대해주어 해꼬지를 ...
이 글은 강원도 영동 남부 지역 고을 및 마을신앙을 연구한 논문이다. 연구 과정에서 마을신앙이 지닌 의미를 자세하게 살펴보기 위해 이를 고을신앙과 마을신앙으로 좀 더 세분화하여 구분하였다. 본 연구의 지역 범위는 과거의 삼척군 지역을 주로 하되 울진 지역을 여기에 포함시켰다. 즉, 행정 단위로서의 삼척시와 함께 과거 삼척의 영역이었던 태백시와 동해시를 포함하였는데, 이는 고대국가 단계부터 이어져 온 사회ㆍ경제ㆍ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하는 지역을 대상으로 하기 위함이다. 울진 지역을 포함한 이유는 전근대까지 삼척문화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1963년까지 강원도에 속하여 삼척 지역과 많은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 범위는 현재를 기준으로 이전의 각종 문헌 자료와 마을 내에 보관하는 자료 등을 발굴하여 지속과 변화 양상을 분석하였으며, 古形을 간직한 사례와 변화가 심한 사례는 비교 분석하여 서술하였다. 연구 방법은 현지 조사 자료를 문헌 자료와 연결시키고, 다른 지역의 마을신앙 사례와 비교해 봄으로서 이 지역 고을 및 마을신앙의 발생, 전개, 변화와 그 변화의 요인을 역사의 발전 체계와 논리 속에서 이해하려는 역사민속학의 입장에서 논지를 전개하였다. 필자는 이 지역 마을신앙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마을신앙의 유형을 자연 마을 단위의 祭堂과 고갯마루를 오가며 장사를 하였던 보부상이나 선질꾼들이 위하였던 제당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이와 함께 마을신을 그 위상과 기능에 따라 上堂神과 下堂神으로 구분하였을 때, 자연 마을 단위에서 上堂神으로 모시는 神靈을 기준으로 天祭堂型ㆍ山神堂型ㆍ서낭당형으로 구분하였다. 이와 함께 해안지역 마을신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서낭당형 마을신앙을 서낭당형과 해서낭당형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구분하여 살펴봄으로서 현재 각 마을의 자연 환경과 사회ㆍ경제ㆍ문화적 차이에 따라 다양하게 모셔지는 神靈과 함께 祭堂ㆍ祭次ㆍ祭需 등의 지속과 변동 양상에 대한 조사와 분석을 통해 이 지역 마을신앙의 다양한 구조와 특징을 잘 이해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강원도 영동 남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지역 공동체신앙의 역사성을 살펴보기 위하여 각종 기록을 검토하여 본 결과, 삼척지역에 있었던 주요 제당은 태백산 정상에 있었던 天王祠와 함께 邑治 城隍祠ㆍ近山祠ㆍ社稷壇ㆍ厲壇ㆍ先農壇ㆍ纛神廟ㆍ里社 등이 있었으며, 祭儀와 관련한 곡식을 보관하는 粢盛庫를 宣祖 8年(1575) 乙亥年에 三陟府使 金孝元이 설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관청에서 주도한 祭儀가 매우 체계적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官行祭와 고을신앙의 실상과 변화 양상을 이해하기 위해 三陟 邑治城隍祠와 烏金簪, 太白山 天祭를 주요 사례로 하여 살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三陟 邑治城隍祠에서 烏金簪을 받들어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다양하게 나타나는 城隍神의 모습들 중 呪物을 모신 사례로서 이해될 수 있으며,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읍치 성황사를 설치하기 전에 이미 이 지방에서의 전통적인 신앙 관념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척부사가 금지하였어도 향리들이 주도하여 烏金簪祭가 계속 되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오금잠제를 통해 지역 내에서 나름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설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전근대 사회에서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많은 시대였기에 烏金簪祭를 지낼 때 각종 물건을 바치고, 무당의 공수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오금잠제는 내륙지역에서 미로면 단오굿과 근덕면 선흥마을 단오굿 등으로 전승되고 있으며, 해안지역에서는 2~10년을 주기로 별신굿이 열리는 등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신라대부터 시작된 태백산에서의 제사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신라에서는 대외 팽창과 정복지 巡狩라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국가 祀典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태백산을 中祀를 지낸 곳으로서 중시하였으며, 고려시대에도 이러한 인식은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祀典 體制에 비록 편입되지는 않았지만 조선 전기인 世祖代까지 국가 차원에서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와 함께 각종 기록을 종합해 보면 ‘太白山祠 = 天王堂’ 이고, ‘太白祠 = 天王祠’ 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太白山祠나 太白祠 등으로 불리우는 제당에서도 天神을 모시고 天祭를 지냈음을 알 수 있게 하며, 太白山祭가 곧 天祭였다고 볼 수 있게 한다. 또한 민간에서 太白山祭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고, 이에 지방 관청과 무당들이 백성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태백산에서의 致祭를 조선시대 이곳 주변에 살았던 사람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태백산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있는 마을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거리 등의 문제로 인해 태백산에서 제사를 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태백산 줄기가 내려온 산봉우리나 능선 아래에 上堂으로 여기는 天祭壇[天祭堂 또는 天地壇]을 마을 단위로 만들어 天祭를 지내는 사례를 많은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민간에서 행해진 天祭는 각종 거사 성공을 기원하거나,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을 추구할 때, 또는 獨立 祈願ㆍ祈雨ㆍ祈穀 등을 그 목적으로 하여 지내는 예가 매우 많다. 따라서 天祭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그 목적하는 바가 다양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마을신앙을 마을에서 모시는 上堂神을 기준으로 天祭堂型, 山神堂型, 서낭당형, 해서낭당형으로 분류하였고, 이와는 별도로 보부상단 관련 서낭당을 분석하였는데,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天祭堂型 마을신앙에서 모시는 神靈은 天神만 모시는 예, 天神과 山神을 함께 모시는 예, 天神과 기타 여러 神을 함께 모시는 예로 나눌 수 있다. 天神만 모시는 예는 주로 산 중턱에 돌담을 말굽형으로 둘러 祭壇을 설치한 사례, 산 정상이나 그 아래에 祭壇을 설치한 사례, 하천 옆에 임시로 설치한 祭壇 등이 있다. 이들 祭堂은 주로 마을에서 上堂의 기능을 하거나, 비가 안 올 경우 祈雨를 위한 祭堂의 기능을 한다. 그리고 천제당에 天神과 함께 山神을 모신 사례도 있는데, 이곳에서 모신 山神은 주로 제당이 위치한 主山의 山神靈을 天神과 함께 모시고 있다. 이들 제당에서의 致祭는 비록 매년 지내지는 않더라도 1년 또는 그 이상의 주기를 설정하여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天祭堂에서 天神과 함께 여러 신령을 모심으로서 다양한 종교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하려는 마을도 있는데, 이들 제당에서 함께 모셔지는 神靈은 주로 城隍神ㆍ土地神ㆍ厲疫神ㆍ龍王神이다. 이들 신령 중 天神을 능가하는 신령은 없으며, 모신 신령들은 마을 내에서 요구되는 구체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신령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천제당형 마을신앙을 祭儀 구조에 따라 구분하면 천제, 천제-성황제, 성황제-거리제(천신 위함), 천제-성황제-수부신 위함, 천제-용왕제, 천제-성황제-용왕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비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천제는 대부분 천제만을 지내어 그 기원하는 바를 이루려 한다. 이에 비해 마을 내의 제당이나 다른 신령과 관련을 맺고 있는 천제는 대부분 정기적인 신앙 행위가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마을의 여건을 반영한 祭儀 형태가 형성되고 유지된다. 山神堂型 마을신앙을 祭儀 구조에 따라 구분하면 산신제, 산신제 → 성황제 → 수부신 위함, 산신제 → 서낭제, 산신과 서낭, 수부 등을 같이 위하는 형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마을에서 上堂으로 여기는 山神堂에서는 마을 서낭당과 연계하여 ‘산신제 → 서낭제’, ‘산신제 → 성황제 → 수부신 위함’의 제의 형태가 나타난다. 산신제만 지내는 마을과 산신당을 마을제당으로 여기는 마을에서의 祭儀는 山神만을 위하는 의례를 행한다. 이와는 달리 山神과 함께 다른 神靈들을 모신 마을이나 山神이 그 명칭을 바꾸어 서낭신으로 좌정한 마을에서는 ‘산신제[서낭제]’ 또는 ‘산신제[서낭제] → 수부신 위함’의 제의 형태가 주로 나타난다. 그리고 제의 진행 과정은 대부분 엄숙한 유교식으로 진행된다. 서낭당형 마을신앙은 대부분의 마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제의 진행과정은 마을마다 다양하게 나타나고, 그 과정에서 추구하는 기능이나 의미 또한 마을마다 다르다. 그러나 전체적인 흐름은 ‘부정치기 → 陳設과 獻爵, 再拜 → 讀祝 → 燒紙 → 수부신과 객귀 물림 → 飮福’의 순으로 진행된다. 물론 이와 같은 과정이외에 하위 제차로 거리고사나 용왕제 등을 지내면 그 과정은 훨씬 다양해진다. 가곡면, 노곡면과 도계읍 등의 사례를 보면 복재[卜者]가 서낭고사에 적극 관여한 마을이 많다. 복재들이 관여하게 되면 祝文을 읽어 나름의 염원을 담아내기도 하지만 주로 축원경을 구송하거나 소지를 올리며 말로 초들어 마을 전체의 안녕과 풍요, 다양한 현안들에 대하여 축원을 해 주며, 가구별 燒紙를 올릴 때 다양한 염원을 담은 축원을 해 준다. 축문을 고하지 않거나 복재가 없는 마을에서는 마을 주민 중 입담이 좋은 사람이 소지를 올리며 축원을 해 준다. 그리고 소지를 올릴 때 별도로 가축소지를 올리는 마을들도 많으며, 노곡면 하월산리와 하반천리에서는 지나가는 보부상이나 장사꾼들도 소지를 올려달라고 별비를 내고 가면 소지를 올려 주었다. 이는 이곳이 주요 교통로에 해당함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마을 서낭당이 마을 주민들만을 위한 제당이 아니라 이를 지나는 모든 이들의 안전과 행복을 기원하는 신앙의 處所로 여김을 알 수 있다. 수부신은 서낭신을 모시고 다닌 하위 신으로 여긴다. 많은 마을에서 인식하는 ‘수배’는 마을 주민들 중 서낭신을 잘 모시고 위하던 분들을 초들어서 모시는데, 옛날부터 서낭신을 잘 모시던 사람이 수배 노릇을 한다고 여긴다. 이와 같이 수부신을 위하는 이유는 서낭신이나 토지신처럼 마을 전체를 관장하는 신령으로 인식하여 위하는 것도 아니고, 冤魂으로 여겨 잘 대해주어 해꼬지를 막자는 의미도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서낭신을 호위하는 神으로서, 살아 생전에 마을을 열었고, 마을신으로 좌정한 산신이나 서낭신을 잘 모셨기에 집에서 조상 모시듯이 마을에서 잘 위하는 의미로 볼 수 있는데, 구체적로는 마을마다 그 의미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다. 해서낭당형 마을신앙은 祭儀 구조를 기준으로 5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서낭당과 해신당으로 구성된 유형, 해신당만으로 구성된 유형, 서낭당만으로 구성된 유형, 서낭당과 해신당이 분리되어 운영되는 유형, 어업과 관련 없는 마을신앙형이 그것이다. 이는 다시 용왕제, 수부신 위함, 봉헌체 등의 요소를 기준으로 세부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유형이 나타나는 이유는 각 마을이 지닌 농업과 어업이라는 생업 기반의 비중 차이와 어업과 관련한 사회ㆍ자연적인 조건의 차이 등에 기인한다. 이러한 5가지 유형 중에서 가장 비중이 있는 유형은 ‘서낭당과 해신당으로 구성된 유형’으로, 이 유형은 해안지역 마을신앙의 기본형으로 삼을 수 있다. 즉, 해안마을에서는 성황당을 上堂으로 여겨 마을 최고의 신이 좌정한 곳으로 인식한다. 이에 비해 海神堂은 下堂의 의미를 지닌 곳으로서 어민들의 염원을 대변하는 祭堂으로 여긴다. 보부상단 관련 서낭당형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일부 고갯마루에서 확인할 수 있는 祭堂으로 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이를 오가는 보부상[이후 선질꾼]들이 만들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훼손되면 이들이 重修하였다. 이와 함께 이들이 祭儀를 주도하였는데, 울진 샛재 성황사ㆍ태백시 사길령 산령각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祭堂의 내부 重修 懸板 분석과 현지 조사 등을 통하여 그 연혁과 기능을 알 수 있다. 울진 12嶺의 샛재 성황사 내에서 발견한 현판 중 1919년에 만들어진 <齋所重修發起人> 현판은 샛재 성황사를 마을제당으로서의 기능과 함께 선배 보부상들을 위한 齋所로 활용하려는 의지가 투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비록 보부상단의 공식적인 조직은 와해되었어도, 샛재성황사 重修와 유지, 제사에 보부상단의 후예들과 선질꾼으로 대표되는 행상단들이 지속적으로 관여함으로서 과거 보부상단의 맥을 이어가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祭堂 樣相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통신을 위해 만들었던 烽燧가 그 기능이 폐지된 후 마을신앙의 處所로 활용되는 사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삼척시 근덕면 덕산리의 봉할머니당은 양야산 봉수가 있었던 곳인데, 어로 활동에서의 풍요와 안전을 기원하며, 해상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제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가곡산 봉수도 그 기능을 廢한 이후 天祭堂으로서 월천 3리에서 上堂의 위상과 역할을 하고 있으며, 바닷가에 할머니당이 별도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는 祭場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경북 영덕의 광산봉수, 충북 제천의 오티봉수와 함께 충남 외연도에서 옛 烽燧臺를 山祭堂으로 하여 마을신앙의 祭場으로 여긴 사례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마을 내의 祭場이 자연물이나 인위적으로 만든 곳만이 아니라 다른 용도로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도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마을신앙의 祭場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점과, 이 과정에서 해당 마을의 사회・경제・문화적 배경들이 반영되어 致祭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강원도 영동 남부지역의 고을 및 마을 단위로 운영되는 祭堂과 여기서 이루어지는 신앙을 분석해 보면 마을과 주변 여건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祭堂에 모시는 神靈 또한 이에 맞게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마을 내 신앙 구조도 이러한 모습들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강원도 영동 남부 지역 고을 및 마을신앙을 연구한 논문이다. 연구 과정에서 마을신앙이 지닌 의미를 자세하게 살펴보기 위해 이를 고을신앙과 마을신앙으로 좀 더 세분화하여 구분하였다. 본 연구의 지역 범위는 과거의 삼척군 지역을 주로 하되 울진 지역을 여기에 포함시켰다. 즉, 행정 단위로서의 삼척시와 함께 과거 삼척의 영역이었던 태백시와 동해시를 포함하였는데, 이는 고대국가 단계부터 이어져 온 사회ㆍ경제ㆍ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하는 지역을 대상으로 하기 위함이다. 울진 지역을 포함한 이유는 전근대까지 삼척문화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1963년까지 강원도에 속하여 삼척 지역과 많은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 범위는 현재를 기준으로 이전의 각종 문헌 자료와 마을 내에 보관하는 자료 등을 발굴하여 지속과 변화 양상을 분석하였으며, 古形을 간직한 사례와 변화가 심한 사례는 비교 분석하여 서술하였다. 연구 방법은 현지 조사 자료를 문헌 자료와 연결시키고, 다른 지역의 마을신앙 사례와 비교해 봄으로서 이 지역 고을 및 마을신앙의 발생, 전개, 변화와 그 변화의 요인을 역사의 발전 체계와 논리 속에서 이해하려는 역사민속학의 입장에서 논지를 전개하였다. 필자는 이 지역 마을신앙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마을신앙의 유형을 자연 마을 단위의 祭堂과 고갯마루를 오가며 장사를 하였던 보부상이나 선질꾼들이 위하였던 제당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이와 함께 마을신을 그 위상과 기능에 따라 上堂神과 下堂神으로 구분하였을 때, 자연 마을 단위에서 上堂神으로 모시는 神靈을 기준으로 天祭堂型ㆍ山神堂型ㆍ서낭당형으로 구분하였다. 이와 함께 해안지역 마을신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서낭당형 마을신앙을 서낭당형과 해서낭당형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구분하여 살펴봄으로서 현재 각 마을의 자연 환경과 사회ㆍ경제ㆍ문화적 차이에 따라 다양하게 모셔지는 神靈과 함께 祭堂ㆍ祭次ㆍ祭需 등의 지속과 변동 양상에 대한 조사와 분석을 통해 이 지역 마을신앙의 다양한 구조와 특징을 잘 이해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강원도 영동 남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지역 공동체신앙의 역사성을 살펴보기 위하여 각종 기록을 검토하여 본 결과, 삼척지역에 있었던 주요 제당은 태백산 정상에 있었던 天王祠와 함께 邑治 城隍祠ㆍ近山祠ㆍ社稷壇ㆍ厲壇ㆍ先農壇ㆍ纛神廟ㆍ里社 등이 있었으며, 祭儀와 관련한 곡식을 보관하는 粢盛庫를 宣祖 8年(1575) 乙亥年에 三陟府使 金孝元이 설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관청에서 주도한 祭儀가 매우 체계적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官行祭와 고을신앙의 실상과 변화 양상을 이해하기 위해 三陟 邑治城隍祠와 烏金簪, 太白山 天祭를 주요 사례로 하여 살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三陟 邑治城隍祠에서 烏金簪을 받들어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다양하게 나타나는 城隍神의 모습들 중 呪物을 모신 사례로서 이해될 수 있으며,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읍치 성황사를 설치하기 전에 이미 이 지방에서의 전통적인 신앙 관념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척부사가 금지하였어도 향리들이 주도하여 烏金簪祭가 계속 되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오금잠제를 통해 지역 내에서 나름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설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전근대 사회에서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많은 시대였기에 烏金簪祭를 지낼 때 각종 물건을 바치고, 무당의 공수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오금잠제는 내륙지역에서 미로면 단오굿과 근덕면 선흥마을 단오굿 등으로 전승되고 있으며, 해안지역에서는 2~10년을 주기로 별신굿이 열리는 등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신라대부터 시작된 태백산에서의 제사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신라에서는 대외 팽창과 정복지 巡狩라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국가 祀典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태백산을 中祀를 지낸 곳으로서 중시하였으며, 고려시대에도 이러한 인식은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祀典 體制에 비록 편입되지는 않았지만 조선 전기인 世祖代까지 국가 차원에서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와 함께 각종 기록을 종합해 보면 ‘太白山祠 = 天王堂’ 이고, ‘太白祠 = 天王祠’ 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太白山祠나 太白祠 등으로 불리우는 제당에서도 天神을 모시고 天祭를 지냈음을 알 수 있게 하며, 太白山祭가 곧 天祭였다고 볼 수 있게 한다. 또한 민간에서 太白山祭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고, 이에 지방 관청과 무당들이 백성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태백산에서의 致祭를 조선시대 이곳 주변에 살았던 사람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태백산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있는 마을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거리 등의 문제로 인해 태백산에서 제사를 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태백산 줄기가 내려온 산봉우리나 능선 아래에 上堂으로 여기는 天祭壇[天祭堂 또는 天地壇]을 마을 단위로 만들어 天祭를 지내는 사례를 많은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민간에서 행해진 天祭는 각종 거사 성공을 기원하거나,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을 추구할 때, 또는 獨立 祈願ㆍ祈雨ㆍ祈穀 등을 그 목적으로 하여 지내는 예가 매우 많다. 따라서 天祭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그 목적하는 바가 다양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마을신앙을 마을에서 모시는 上堂神을 기준으로 天祭堂型, 山神堂型, 서낭당형, 해서낭당형으로 분류하였고, 이와는 별도로 보부상단 관련 서낭당을 분석하였는데,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天祭堂型 마을신앙에서 모시는 神靈은 天神만 모시는 예, 天神과 山神을 함께 모시는 예, 天神과 기타 여러 神을 함께 모시는 예로 나눌 수 있다. 天神만 모시는 예는 주로 산 중턱에 돌담을 말굽형으로 둘러 祭壇을 설치한 사례, 산 정상이나 그 아래에 祭壇을 설치한 사례, 하천 옆에 임시로 설치한 祭壇 등이 있다. 이들 祭堂은 주로 마을에서 上堂의 기능을 하거나, 비가 안 올 경우 祈雨를 위한 祭堂의 기능을 한다. 그리고 천제당에 天神과 함께 山神을 모신 사례도 있는데, 이곳에서 모신 山神은 주로 제당이 위치한 主山의 山神靈을 天神과 함께 모시고 있다. 이들 제당에서의 致祭는 비록 매년 지내지는 않더라도 1년 또는 그 이상의 주기를 설정하여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天祭堂에서 天神과 함께 여러 신령을 모심으로서 다양한 종교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하려는 마을도 있는데, 이들 제당에서 함께 모셔지는 神靈은 주로 城隍神ㆍ土地神ㆍ厲疫神ㆍ龍王神이다. 이들 신령 중 天神을 능가하는 신령은 없으며, 모신 신령들은 마을 내에서 요구되는 구체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신령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천제당형 마을신앙을 祭儀 구조에 따라 구분하면 천제, 천제-성황제, 성황제-거리제(천신 위함), 천제-성황제-수부신 위함, 천제-용왕제, 천제-성황제-용왕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비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천제는 대부분 천제만을 지내어 그 기원하는 바를 이루려 한다. 이에 비해 마을 내의 제당이나 다른 신령과 관련을 맺고 있는 천제는 대부분 정기적인 신앙 행위가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마을의 여건을 반영한 祭儀 형태가 형성되고 유지된다. 山神堂型 마을신앙을 祭儀 구조에 따라 구분하면 산신제, 산신제 → 성황제 → 수부신 위함, 산신제 → 서낭제, 산신과 서낭, 수부 등을 같이 위하는 형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마을에서 上堂으로 여기는 山神堂에서는 마을 서낭당과 연계하여 ‘산신제 → 서낭제’, ‘산신제 → 성황제 → 수부신 위함’의 제의 형태가 나타난다. 산신제만 지내는 마을과 산신당을 마을제당으로 여기는 마을에서의 祭儀는 山神만을 위하는 의례를 행한다. 이와는 달리 山神과 함께 다른 神靈들을 모신 마을이나 山神이 그 명칭을 바꾸어 서낭신으로 좌정한 마을에서는 ‘산신제[서낭제]’ 또는 ‘산신제[서낭제] → 수부신 위함’의 제의 형태가 주로 나타난다. 그리고 제의 진행 과정은 대부분 엄숙한 유교식으로 진행된다. 서낭당형 마을신앙은 대부분의 마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제의 진행과정은 마을마다 다양하게 나타나고, 그 과정에서 추구하는 기능이나 의미 또한 마을마다 다르다. 그러나 전체적인 흐름은 ‘부정치기 → 陳設과 獻爵, 再拜 → 讀祝 → 燒紙 → 수부신과 객귀 물림 → 飮福’의 순으로 진행된다. 물론 이와 같은 과정이외에 하위 제차로 거리고사나 용왕제 등을 지내면 그 과정은 훨씬 다양해진다. 가곡면, 노곡면과 도계읍 등의 사례를 보면 복재[卜者]가 서낭고사에 적극 관여한 마을이 많다. 복재들이 관여하게 되면 祝文을 읽어 나름의 염원을 담아내기도 하지만 주로 축원경을 구송하거나 소지를 올리며 말로 초들어 마을 전체의 안녕과 풍요, 다양한 현안들에 대하여 축원을 해 주며, 가구별 燒紙를 올릴 때 다양한 염원을 담은 축원을 해 준다. 축문을 고하지 않거나 복재가 없는 마을에서는 마을 주민 중 입담이 좋은 사람이 소지를 올리며 축원을 해 준다. 그리고 소지를 올릴 때 별도로 가축소지를 올리는 마을들도 많으며, 노곡면 하월산리와 하반천리에서는 지나가는 보부상이나 장사꾼들도 소지를 올려달라고 별비를 내고 가면 소지를 올려 주었다. 이는 이곳이 주요 교통로에 해당함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마을 서낭당이 마을 주민들만을 위한 제당이 아니라 이를 지나는 모든 이들의 안전과 행복을 기원하는 신앙의 處所로 여김을 알 수 있다. 수부신은 서낭신을 모시고 다닌 하위 신으로 여긴다. 많은 마을에서 인식하는 ‘수배’는 마을 주민들 중 서낭신을 잘 모시고 위하던 분들을 초들어서 모시는데, 옛날부터 서낭신을 잘 모시던 사람이 수배 노릇을 한다고 여긴다. 이와 같이 수부신을 위하는 이유는 서낭신이나 토지신처럼 마을 전체를 관장하는 신령으로 인식하여 위하는 것도 아니고, 冤魂으로 여겨 잘 대해주어 해꼬지를 막자는 의미도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서낭신을 호위하는 神으로서, 살아 생전에 마을을 열었고, 마을신으로 좌정한 산신이나 서낭신을 잘 모셨기에 집에서 조상 모시듯이 마을에서 잘 위하는 의미로 볼 수 있는데, 구체적로는 마을마다 그 의미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다. 해서낭당형 마을신앙은 祭儀 구조를 기준으로 5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서낭당과 해신당으로 구성된 유형, 해신당만으로 구성된 유형, 서낭당만으로 구성된 유형, 서낭당과 해신당이 분리되어 운영되는 유형, 어업과 관련 없는 마을신앙형이 그것이다. 이는 다시 용왕제, 수부신 위함, 봉헌체 등의 요소를 기준으로 세부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유형이 나타나는 이유는 각 마을이 지닌 농업과 어업이라는 생업 기반의 비중 차이와 어업과 관련한 사회ㆍ자연적인 조건의 차이 등에 기인한다. 이러한 5가지 유형 중에서 가장 비중이 있는 유형은 ‘서낭당과 해신당으로 구성된 유형’으로, 이 유형은 해안지역 마을신앙의 기본형으로 삼을 수 있다. 즉, 해안마을에서는 성황당을 上堂으로 여겨 마을 최고의 신이 좌정한 곳으로 인식한다. 이에 비해 海神堂은 下堂의 의미를 지닌 곳으로서 어민들의 염원을 대변하는 祭堂으로 여긴다. 보부상단 관련 서낭당형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일부 고갯마루에서 확인할 수 있는 祭堂으로 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이를 오가는 보부상[이후 선질꾼]들이 만들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훼손되면 이들이 重修하였다. 이와 함께 이들이 祭儀를 주도하였는데, 울진 샛재 성황사ㆍ태백시 사길령 산령각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祭堂의 내부 重修 懸板 분석과 현지 조사 등을 통하여 그 연혁과 기능을 알 수 있다. 울진 12嶺의 샛재 성황사 내에서 발견한 현판 중 1919년에 만들어진 <齋所重修發起人> 현판은 샛재 성황사를 마을제당으로서의 기능과 함께 선배 보부상들을 위한 齋所로 활용하려는 의지가 투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비록 보부상단의 공식적인 조직은 와해되었어도, 샛재성황사 重修와 유지, 제사에 보부상단의 후예들과 선질꾼으로 대표되는 행상단들이 지속적으로 관여함으로서 과거 보부상단의 맥을 이어가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祭堂 樣相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통신을 위해 만들었던 烽燧가 그 기능이 폐지된 후 마을신앙의 處所로 활용되는 사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삼척시 근덕면 덕산리의 봉할머니당은 양야산 봉수가 있었던 곳인데, 어로 활동에서의 풍요와 안전을 기원하며, 해상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제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가곡산 봉수도 그 기능을 廢한 이후 天祭堂으로서 월천 3리에서 上堂의 위상과 역할을 하고 있으며, 바닷가에 할머니당이 별도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는 祭場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경북 영덕의 광산봉수, 충북 제천의 오티봉수와 함께 충남 외연도에서 옛 烽燧臺를 山祭堂으로 하여 마을신앙의 祭場으로 여긴 사례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마을 내의 祭場이 자연물이나 인위적으로 만든 곳만이 아니라 다른 용도로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도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마을신앙의 祭場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점과, 이 과정에서 해당 마을의 사회・경제・문화적 배경들이 반영되어 致祭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강원도 영동 남부지역의 고을 및 마을 단위로 운영되는 祭堂과 여기서 이루어지는 신앙을 분석해 보면 마을과 주변 여건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祭堂에 모시는 神靈 또한 이에 맞게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마을 내 신앙 구조도 이러한 모습들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characteristic of village-community beliefs in Samcheok and the complex meanings involved in the offering of male sexual organ, related shrine myths, and the religion of dragon god which are related with the shrine of the sea god at Sinnam. The rec...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characteristic of village-community beliefs in Samcheok and the complex meanings involved in the offering of male sexual organ, related shrine myths, and the religion of dragon god which are related with the shrine of the sea god at Sinnam. The record that people prayed to the god for fertility by offering Ogeumjam at Eupchi Seunghwangsa in May and the materials in『Village Shrines of Korea(Kangwon-do)』researched in 1967 show that more than half of the rituals were held in Samcheok area and this shows practically that this area was the center of Kangwon-do Dano Cultural area. Though the ritual at the shrine of sea god in Sinnam was managed by village-community, in that they prayed only for fishermen when flying Soji and they offered several male sexual organs made of wood, and from the origin in a related shrine myths that they personally offered male sexual organ made of wood, the ritual have changed from the fishermen's personal ritual praying for the safe sea journey to the communal ritual and even to the Village-Community Beliefs. And this was settled as a representative faith for sexual organs which has the meaning of the sorcery of complying with similarity. In this process, the religion of dragon god which has similar objectives appeared in the ritual of the shrine of sea god of Sinnam along with the faith for the sexual organs. And by adding the ritual of offering the male sexual organ made of wood to the religion of dragon god which were usually held for the safe sea journey and good fishing, the degree of their desire was deepened. Besides, through various styles of the shrine myths, the ritual offering male sexual organ made of wood to the shrine of the sea god was strengthened and sacredness was given to the ritual. In Samcheok, as we know through Gijuldanggigi, Bulmangbi and Gongdeokbi, there are several examples of playing cultures, sculptures, and religious rituals which symbolize sexual intercourse. And we can see Sinnam's case is one of those examples which reflected such regional atmosphere. The structure of the coastal village-community beliefs in Samcheok has been formed in the process of incorporating religious services for wellbeing, fruitful year and abundant breeding of domestic animals which were performed at Seongwhangdang, a village shrine with the individual seamen's rituals at Haesindang, the shrine of the sea god. Of course, while Seongwhangdang held its superior status, the added Haesindang remaining at the lower position in this process . The dual structure of Sansindang, the shrine of the mountain god and Georijedang, shrines of other gods in the inland area appears the same structure of Seongwhangdang and Haesindang in this coastal area. More specifically, the rituals of the coastal villages in Samcheok can be divided into five types by structure as following: the type of Seongwhangdang and Haesindang, only Haesindang, only Seongwhangdang, separately worshiped type of Seongwhangdang and Haesindang, the type of village shrine irrelevant to fishery. These five types can be divided more specifically by the elements of the religion of dragon god, the ritual for Subusin, the offerings. The reason why the rituals appear in various types results from the relative importance between farming and fishing and the difference in social and natural conditions related to fishing. The most important type of these five is the integrated type of Seongwhangdang and Haesindang, which has seldom been separated. In other words, it has been general for Seongwhangdang and Haesindang to be united and structured to a form in coastal villages of Samcheok. This means that while fishing has been major means for living, the religious beliefs for farming has been handed down more importantly even in the coastal villages, which are revealed in the date of rituals, ritual addresses, farming-related elements in rituals. In this area, the village-community beliefs are more developed than any other regions in Korea, which represents that the ways for living have to do with the reliefs. For a fishermen who have to fight the sea and have hard life, religion should be a refuge personally as well as collectively. The evidences that Rituals developed enough to be called a religion among the fishermen can be found in this area in result. In other words, Haesindang can be a refuge for fishermen and more dramatic scene appears in the religious service for dragon god, Yongwangje as well as phallus worship, a religious ritual for rich fishing. Although Samcheok is not big area, the facts above mean that there are religious rituals which can be evident enough to be called the coastal religion, and it is probably because the east coastal area has a condition which can be distinguished from the other areas in Korea. During the Joseon Dynasty, five signal fire towers were operated around Samcheok area. Based upon the survey conducted through this study and the map published in the Joseon Dynasty, signal fires found in the area appeared to be indirect signal fires. All signal fires found in the area could be classified as coastal signal fires on the basis of the locations and functions of beacons. Most of them were established on the hills, 100 meters above the sea level with a good view of the connecting signal fires. Field investigation revealed that they were mostly located within 20 minutes walking distance from the village. Although none of the signal fire towers surveyed in the study remained intact, signal fire towers located in four areas such as Mt Gwangjin, Mt Yangya, Mt. Limwon, and Mt. Gagok showed traces of the foundation (stereobate) with a cone-shaped stone tower on top. It was said that the signal fire tower on Mt. Chogok was destroyed as the militaries moved to the area. The foundations and beacons of the signal fire towers were mostly constructed on the flat top of the hill and all of them were characterized by having a single beacon. All of existing signal fire towers investigated in the present study were maintained in similar shape with some damage. Therefore it was assumed that they were mainly built during the King Sejong, the early era of the Joseon Dynasty. It is not clear when the signal fire tower ceased to operate. However, Bonghalmeonidang in Deoksanli, keundeokmyeon, Samcheok has served as a religious object to worship for a god since its original function discontinued. Although its ritual process and the public perception to the sacred object showed slight differences when compared to those of Heaseonang prevalent in the coastal regions of the East Sea, it has served similar roles among local people. Evidence indicated that people have prayed for abundance in fishing and for the fishing dead. The fact that in Deoksanli, there was no Heaseonang found in other coastal villages indicated that Bonghalmeonidang has served the same function as Heaseonang. In the case of the signal fire tower in Mt. Kagok,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it has served as not only a sacred altar for a god but also a religious object praying for abundance in fishing and safety in spite of the presence of the Heaseonang in Wolcheon 3 li. Besides two of signal fire towers found in Samcheok area, there were more examples showing that sacred objects could be not only nature and artificially-made objects for the purpose of religious rituals but also artificially-constructed structures that lost their original functions as found in signal fire towers in Kwangsan, Youngdeok, Kyeongbuk and Ohyun, Jaecheon, Chungbuk. During the course of the transition from a functional structure to a religious object, social, economical, and cultural background were well reflected. In future, much research need to be done in the area, where artificially-constructed structures were used in religious practices as sacred objects comparing to the existing other kinds of folk religious objects. This will provide good information of diverse kinds and characteristics of folk religion in Korea.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characteristic of village-community beliefs in Samcheok and the complex meanings involved in the offering of male sexual organ, related shrine myths, and the religion of dragon god which are related with the shrine of the sea god at Sinnam. The record that people prayed to the god for fertility by offering Ogeumjam at Eupchi Seunghwangsa in May and the materials in『Village Shrines of Korea(Kangwon-do)』researched in 1967 show that more than half of the rituals were held in Samcheok area and this shows practically that this area was the center of Kangwon-do Dano Cultural area. Though the ritual at the shrine of sea god in Sinnam was managed by village-community, in that they prayed only for fishermen when flying Soji and they offered several male sexual organs made of wood, and from the origin in a related shrine myths that they personally offered male sexual organ made of wood, the ritual have changed from the fishermen's personal ritual praying for the safe sea journey to the communal ritual and even to the Village-Community Beliefs. And this was settled as a representative faith for sexual organs which has the meaning of the sorcery of complying with similarity. In this process, the religion of dragon god which has similar objectives appeared in the ritual of the shrine of sea god of Sinnam along with the faith for the sexual organs. And by adding the ritual of offering the male sexual organ made of wood to the religion of dragon god which were usually held for the safe sea journey and good fishing, the degree of their desire was deepened. Besides, through various styles of the shrine myths, the ritual offering male sexual organ made of wood to the shrine of the sea god was strengthened and sacredness was given to the ritual. In Samcheok, as we know through Gijuldanggigi, Bulmangbi and Gongdeokbi, there are several examples of playing cultures, sculptures, and religious rituals which symbolize sexual intercourse. And we can see Sinnam's case is one of those examples which reflected such regional atmosphere. The structure of the coastal village-community beliefs in Samcheok has been formed in the process of incorporating religious services for wellbeing, fruitful year and abundant breeding of domestic animals which were performed at Seongwhangdang, a village shrine with the individual seamen's rituals at Haesindang, the shrine of the sea god. Of course, while Seongwhangdang held its superior status, the added Haesindang remaining at the lower position in this process . The dual structure of Sansindang, the shrine of the mountain god and Georijedang, shrines of other gods in the inland area appears the same structure of Seongwhangdang and Haesindang in this coastal area. More specifically, the rituals of the coastal villages in Samcheok can be divided into five types by structure as following: the type of Seongwhangdang and Haesindang, only Haesindang, only Seongwhangdang, separately worshiped type of Seongwhangdang and Haesindang, the type of village shrine irrelevant to fishery. These five types can be divided more specifically by the elements of the religion of dragon god, the ritual for Subusin, the offerings. The reason why the rituals appear in various types results from the relative importance between farming and fishing and the difference in social and natural conditions related to fishing. The most important type of these five is the integrated type of Seongwhangdang and Haesindang, which has seldom been separated. In other words, it has been general for Seongwhangdang and Haesindang to be united and structured to a form in coastal villages of Samcheok. This means that while fishing has been major means for living, the religious beliefs for farming has been handed down more importantly even in the coastal villages, which are revealed in the date of rituals, ritual addresses, farming-related elements in rituals. In this area, the village-community beliefs are more developed than any other regions in Korea, which represents that the ways for living have to do with the reliefs. For a fishermen who have to fight the sea and have hard life, religion should be a refuge personally as well as collectively. The evidences that Rituals developed enough to be called a religion among the fishermen can be found in this area in result. In other words, Haesindang can be a refuge for fishermen and more dramatic scene appears in the religious service for dragon god, Yongwangje as well as phallus worship, a religious ritual for rich fishing. Although Samcheok is not big area, the facts above mean that there are religious rituals which can be evident enough to be called the coastal religion, and it is probably because the east coastal area has a condition which can be distinguished from the other areas in Korea. During the Joseon Dynasty, five signal fire towers were operated around Samcheok area. Based upon the survey conducted through this study and the map published in the Joseon Dynasty, signal fires found in the area appeared to be indirect signal fires. All signal fires found in the area could be classified as coastal signal fires on the basis of the locations and functions of beacons. Most of them were established on the hills, 100 meters above the sea level with a good view of the connecting signal fires. Field investigation revealed that they were mostly located within 20 minutes walking distance from the village. Although none of the signal fire towers surveyed in the study remained intact, signal fire towers located in four areas such as Mt Gwangjin, Mt Yangya, Mt. Limwon, and Mt. Gagok showed traces of the foundation (stereobate) with a cone-shaped stone tower on top. It was said that the signal fire tower on Mt. Chogok was destroyed as the militaries moved to the area. The foundations and beacons of the signal fire towers were mostly constructed on the flat top of the hill and all of them were characterized by having a single beacon. All of existing signal fire towers investigated in the present study were maintained in similar shape with some damage. Therefore it was assumed that they were mainly built during the King Sejong, the early era of the Joseon Dynasty. It is not clear when the signal fire tower ceased to operate. However, Bonghalmeonidang in Deoksanli, keundeokmyeon, Samcheok has served as a religious object to worship for a god since its original function discontinued. Although its ritual process and the public perception to the sacred object showed slight differences when compared to those of Heaseonang prevalent in the coastal regions of the East Sea, it has served similar roles among local people. Evidence indicated that people have prayed for abundance in fishing and for the fishing dead. The fact that in Deoksanli, there was no Heaseonang found in other coastal villages indicated that Bonghalmeonidang has served the same function as Heaseonang. In the case of the signal fire tower in Mt. Kagok,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it has served as not only a sacred altar for a god but also a religious object praying for abundance in fishing and safety in spite of the presence of the Heaseonang in Wolcheon 3 li. Besides two of signal fire towers found in Samcheok area, there were more examples showing that sacred objects could be not only nature and artificially-made objects for the purpose of religious rituals but also artificially-constructed structures that lost their original functions as found in signal fire towers in Kwangsan, Youngdeok, Kyeongbuk and Ohyun, Jaecheon, Chungbuk. During the course of the transition from a functional structure to a religious object, social, economical, and cultural background were well reflected. In future, much research need to be done in the area, where artificially-constructed structures were used in religious practices as sacred objects comparing to the existing other kinds of folk religious objects. This will provide good information of diverse kinds and characteristics of folk religion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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