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으로 웨슬리의 산상수훈 설교를 연구한 결과 다른 학자들의 견해와 가톨릭적인 입장에서와 달리 웨슬리는 영혼에 중심을 두려고 노력하였다. 인간 안에 있는 영혼이 기질로 되어 있어서 그 기질로 하여금 외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았을 때 진정한 기독교는 내적종교라고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팔복에 통해 나타난 영혼의 기질들, 즉 마음의 가난, 애통, 긍휼이 여기는 마음, 온유, 의에 주리고 목마름, 마음의 청결, 화평케하는 마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마음들은 도덕적 형상의 회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단 마음의 가난은 칭의 단계 전 회개하는 마음과 칭의 후 마음의 가난과 동시에 다른 영혼의 기질도 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듯이 또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경험한 후에도 계속되며 진정한 기독교는 이러한 기질로부터 나오는 내적종교라는 결론을 내려 본다. 진정한 기독교는 영혼의 기질, 성품(disposition), 성질(...
이상으로 웨슬리의 산상수훈 설교를 연구한 결과 다른 학자들의 견해와 가톨릭적인 입장에서와 달리 웨슬리는 영혼에 중심을 두려고 노력하였다. 인간 안에 있는 영혼이 기질로 되어 있어서 그 기질로 하여금 외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았을 때 진정한 기독교는 내적종교라고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팔복에 통해 나타난 영혼의 기질들, 즉 마음의 가난, 애통, 긍휼이 여기는 마음, 온유, 의에 주리고 목마름, 마음의 청결, 화평케하는 마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마음들은 도덕적 형상의 회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단 마음의 가난은 칭의 단계 전 회개하는 마음과 칭의 후 마음의 가난과 동시에 다른 영혼의 기질도 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듯이 또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경험한 후에도 계속되며 진정한 기독교는 이러한 기질로부터 나오는 내적종교라는 결론을 내려 본다. 진정한 기독교는 영혼의 기질, 성품(disposition), 성질(affection) 이세가지를 포함한 내적종교이다. 내적종교는 이러한 영혼의 기질들을 통한 내적인 의도의 순수성으로부터 외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포함된다. 정리해보면 하나님사랑으로 충만해진 상태로 내 자신을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의 기질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경계해야 할 것들을 철저히 경계해야 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고립으로 만들고 세상과 단절하여 무조건 금욕적인 자세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하는 신비주의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믿음의 정도를 보고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음의 척도를 신비적인 체험으로 보는 것이다. 그들은 묵상을 주장하면서 개인적인 시간을 요구한다. 그러나 웨슬리가 주장하는 참된 기독교는 고립이 아니라 사회적 종교, 열려진 종교, 행동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빛과 소금의 비유와 같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들어가야 하고 모임을 만들며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나아가 많은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의 상급을 기대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또한 경계해야 할 것은 정숙주의이다. 이것은 모라비안 교도들의 오직 믿음에만 강조한 결과 나타나는 오류이다. 믿음 전에도, 믿음 후에도 구원의 직접적인 조건은 되지 못하지만 할 수만 있는 대로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고 동참하라는 것인데 모라비안의 사람들은 믿음 전에는 어떤 은혜의 수단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웨슬리와는 맞지 않게 생각하고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에 관하여 무조건 율법과 예수님을 따로 보고 예수님을 향해 새로운 가르침을 주려고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율법주의자들의 말에 경계하고 반대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처럼 말하는 율법 폐기론 자들의 말에도 경계해야 한다. 율법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요, 그 속에 약속과 성취가 들어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율법을 행할 때 믿음으로 나오는 결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믿음이 없는 사람의 선한 행동도 죄로 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죄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웨슬리는 영혼의 기질에 관하여 중요시 여기고 그 속에 믿음을 통한 의도가 순수해야 그 열매도 거룩하고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을 잘 보호하고, 경계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여지고 그 사랑을 통해 이웃을 대하고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은혜의 수단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자 약속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목표가 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얻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 설교를 통해 이웃을 사랑함에 교훈을 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얻어야 한다. 물론 그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의와 진정한 거룩으로 우리 영혼의 도덕적 형상이 완전히 회복이 되어야 한다. 도덕적 형상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지(understanding)와 의(will)와 정(affection)의 완전한 기능회복이 이루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충만해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으로 온전히 채워질 때 온전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으며 그 영혼이 깨끗하고 거룩하여 지며, 그 행동들 또한 선한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의 기질이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그리스도인의 삶속에 남아있는 죄의 뿌리도 완전히 뽑혀지므로 온전해 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할 방향이다.
이상으로 웨슬리의 산상수훈 설교를 연구한 결과 다른 학자들의 견해와 가톨릭적인 입장에서와 달리 웨슬리는 영혼에 중심을 두려고 노력하였다. 인간 안에 있는 영혼이 기질로 되어 있어서 그 기질로 하여금 외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았을 때 진정한 기독교는 내적종교라고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팔복에 통해 나타난 영혼의 기질들, 즉 마음의 가난, 애통, 긍휼이 여기는 마음, 온유, 의에 주리고 목마름, 마음의 청결, 화평케하는 마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마음들은 도덕적 형상의 회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단 마음의 가난은 칭의 단계 전 회개하는 마음과 칭의 후 마음의 가난과 동시에 다른 영혼의 기질도 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듯이 또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경험한 후에도 계속되며 진정한 기독교는 이러한 기질로부터 나오는 내적종교라는 결론을 내려 본다. 진정한 기독교는 영혼의 기질, 성품(disposition), 성질(affection) 이세가지를 포함한 내적종교이다. 내적종교는 이러한 영혼의 기질들을 통한 내적인 의도의 순수성으로부터 외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포함된다. 정리해보면 하나님사랑으로 충만해진 상태로 내 자신을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의 기질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경계해야 할 것들을 철저히 경계해야 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고립으로 만들고 세상과 단절하여 무조건 금욕적인 자세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하는 신비주의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믿음의 정도를 보고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음의 척도를 신비적인 체험으로 보는 것이다. 그들은 묵상을 주장하면서 개인적인 시간을 요구한다. 그러나 웨슬리가 주장하는 참된 기독교는 고립이 아니라 사회적 종교, 열려진 종교, 행동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빛과 소금의 비유와 같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들어가야 하고 모임을 만들며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나아가 많은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의 상급을 기대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또한 경계해야 할 것은 정숙주의이다. 이것은 모라비안 교도들의 오직 믿음에만 강조한 결과 나타나는 오류이다. 믿음 전에도, 믿음 후에도 구원의 직접적인 조건은 되지 못하지만 할 수만 있는 대로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고 동참하라는 것인데 모라비안의 사람들은 믿음 전에는 어떤 은혜의 수단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웨슬리와는 맞지 않게 생각하고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에 관하여 무조건 율법과 예수님을 따로 보고 예수님을 향해 새로운 가르침을 주려고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율법주의자들의 말에 경계하고 반대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처럼 말하는 율법 폐기론 자들의 말에도 경계해야 한다. 율법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요, 그 속에 약속과 성취가 들어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율법을 행할 때 믿음으로 나오는 결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믿음이 없는 사람의 선한 행동도 죄로 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죄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웨슬리는 영혼의 기질에 관하여 중요시 여기고 그 속에 믿음을 통한 의도가 순수해야 그 열매도 거룩하고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을 잘 보호하고, 경계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여지고 그 사랑을 통해 이웃을 대하고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은혜의 수단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자 약속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목표가 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얻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 설교를 통해 이웃을 사랑함에 교훈을 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얻어야 한다. 물론 그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의와 진정한 거룩으로 우리 영혼의 도덕적 형상이 완전히 회복이 되어야 한다. 도덕적 형상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지(understanding)와 의(will)와 정(affection)의 완전한 기능회복이 이루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충만해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으로 온전히 채워질 때 온전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으며 그 영혼이 깨끗하고 거룩하여 지며, 그 행동들 또한 선한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의 기질이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그리스도인의 삶속에 남아있는 죄의 뿌리도 완전히 뽑혀지므로 온전해 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할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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