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위논문]17세기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신학적 딜레마: : 존 코튼(John Cotton)의 언약사상의 성격과 특징 The Puritan Theological Dilemma : John Cotton's Covenant Theology and Its Characteristics원문보기
본고는 17세기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대표적 지도자였던 존 코튼(John Cotton)의 사상, 특히 언약신학의 성격과 특징을 통해 이 시기 청교도들이 당면한 신학적, 사상적 문제와 더불어 그와 관계된 청교도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문제를 고찰하려는 시도이다. 17세기 초반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교회 및 공동체와 하나님 ...
본고는 17세기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대표적 지도자였던 존 코튼(John Cotton)의 사상, 특히 언약신학의 성격과 특징을 통해 이 시기 청교도들이 당면한 신학적, 사상적 문제와 더불어 그와 관계된 청교도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문제를 고찰하려는 시도이다. 17세기 초반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교회 및 공동체와 하나님 사이에 ‘언약’을 체결하고 순수하고 이상적인 교회와 거룩한 사회 공동체로서 ‘언덕 위의 도시’를 세우고자 했다. 그들의 개혁의 의지와 실천에 있어서 영적, 사상적, 신학적 원동력으로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언약사상’ 이었다. 대륙에서 건너 온 언약사상은 당시 영국의 상황과 맞물려 개인언약, 교회언약, 사회언약으로 발전되었는데, 청교도들은 이를 개인의 삶과 경건, 교회 정치제도의 개혁, 더 나아가 사회 전체를 언약사상에 기초한 신앙의 영역으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 중심에 바로 존 코튼이 있었다. 영국 청교도 운동의 저명한 지도자로서 이미 영국에서부터 교회 개혁 운동에 앞장 서 온 코튼은 1630년대 이후 뉴잉글랜드의 대표적 신학자이자 목회자로 활동하면서 뉴잉글랜드 회중교회와 신정체제의 신학적, 사상적 토대를 놓았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뉴잉글랜드 교회와 신학 그리고 정치체제에 도전하는 여러 조류에 대한 주요 변호자이자 옹호자로서 그들에 대해 불관용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코튼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당시 뉴잉글랜드 사회의 제반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코튼의 언약사상의 배경은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는 쯔빙글리― 불링거의 전통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는 칼빈의 전통에 있다. 당시 많은 영국과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로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물론 교회와 사회, 그리고 국가의 개혁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인간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였고 그 결과 점차 알미니우스주의에 경도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코튼은 칼빈주의 전통에 따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기초한 은혜언약을 강조하였고, 인간의 역할과 책임, 행위언약을 보다 더 강조하려는 경향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 그러나 코튼이 제안하고 추진한 교회언약 및 사회언약, 그리고 그에 기초한 여러 제도와 그 시행 과정을 살펴보면 그가 은혜언약만을 강조했다는 주장은 매우 단편적임을 알 수 있다. 우선 분리파 청교도들에게서 시작되어 독립파 청교도 및 코튼에게 수용된 ‘교회언약’ 사상은 그 구성원들이 ‘은혜언약’에 기초한 구원받은 성도들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언약의 시행과 유지에 있어서 이 언약이 기본적으로 ‘자발성’과 ‘조건성’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는 ‘행위언약’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러한 교회언약의 시행은 뉴잉글랜드 회중교회의 회원 자격 심사제도 및 회원 자격 강화의 노력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개인의 회심을 공적으로 확인하고 성도로서의 행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행위언약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언약적 특징은 사회언약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당시 뉴잉글랜드 사회에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언약신학적 측면에서 교회언약과 사회언약이 행위언약적 속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코튼은 그 누구보다 뉴잉글랜드가 구원 받은 ‘성도들’이 자발적 참여와 책임에 기초하는 사회언약을 통한 신정정치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창하였는데, 사회언약은 개인의 구원과 상관없이 사회공동체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번창하는가 아니면 저주를 받아 몰락하는가에 초점이 있기 때문에 그 근본적 성격이 행위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사회언약에는 공동체의 책임과 그 순결을 위한 강력한 규율과 제재가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코튼은 개인의 구원론적 차원에서는 당시의 많은 청교도 신학자들과 달리 은혜언약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론과 정치 및 국가론에 있어서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행위언약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코튼의 신학적 딜레마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는 칼빈주의 신학과 사상이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는 시대적 요청에 의해 점점 희석되어 가는 당시 뉴잉글랜드의 상황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본고는 17세기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대표적 지도자였던 존 코튼(John Cotton)의 사상, 특히 언약신학의 성격과 특징을 통해 이 시기 청교도들이 당면한 신학적, 사상적 문제와 더불어 그와 관계된 청교도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문제를 고찰하려는 시도이다. 17세기 초반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교회 및 공동체와 하나님 사이에 ‘언약’을 체결하고 순수하고 이상적인 교회와 거룩한 사회 공동체로서 ‘언덕 위의 도시’를 세우고자 했다. 그들의 개혁의 의지와 실천에 있어서 영적, 사상적, 신학적 원동력으로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언약사상’ 이었다. 대륙에서 건너 온 언약사상은 당시 영국의 상황과 맞물려 개인언약, 교회언약, 사회언약으로 발전되었는데, 청교도들은 이를 개인의 삶과 경건, 교회 정치제도의 개혁, 더 나아가 사회 전체를 언약사상에 기초한 신앙의 영역으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 중심에 바로 존 코튼이 있었다. 영국 청교도 운동의 저명한 지도자로서 이미 영국에서부터 교회 개혁 운동에 앞장 서 온 코튼은 1630년대 이후 뉴잉글랜드의 대표적 신학자이자 목회자로 활동하면서 뉴잉글랜드 회중교회와 신정체제의 신학적, 사상적 토대를 놓았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뉴잉글랜드 교회와 신학 그리고 정치체제에 도전하는 여러 조류에 대한 주요 변호자이자 옹호자로서 그들에 대해 불관용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코튼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당시 뉴잉글랜드 사회의 제반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코튼의 언약사상의 배경은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는 쯔빙글리― 불링거의 전통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는 칼빈의 전통에 있다. 당시 많은 영국과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로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물론 교회와 사회, 그리고 국가의 개혁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인간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였고 그 결과 점차 알미니우스주의에 경도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코튼은 칼빈주의 전통에 따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기초한 은혜언약을 강조하였고, 인간의 역할과 책임, 행위언약을 보다 더 강조하려는 경향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 그러나 코튼이 제안하고 추진한 교회언약 및 사회언약, 그리고 그에 기초한 여러 제도와 그 시행 과정을 살펴보면 그가 은혜언약만을 강조했다는 주장은 매우 단편적임을 알 수 있다. 우선 분리파 청교도들에게서 시작되어 독립파 청교도 및 코튼에게 수용된 ‘교회언약’ 사상은 그 구성원들이 ‘은혜언약’에 기초한 구원받은 성도들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언약의 시행과 유지에 있어서 이 언약이 기본적으로 ‘자발성’과 ‘조건성’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는 ‘행위언약’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러한 교회언약의 시행은 뉴잉글랜드 회중교회의 회원 자격 심사제도 및 회원 자격 강화의 노력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개인의 회심을 공적으로 확인하고 성도로서의 행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행위언약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언약적 특징은 사회언약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당시 뉴잉글랜드 사회에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언약신학적 측면에서 교회언약과 사회언약이 행위언약적 속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코튼은 그 누구보다 뉴잉글랜드가 구원 받은 ‘성도들’이 자발적 참여와 책임에 기초하는 사회언약을 통한 신정정치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창하였는데, 사회언약은 개인의 구원과 상관없이 사회공동체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번창하는가 아니면 저주를 받아 몰락하는가에 초점이 있기 때문에 그 근본적 성격이 행위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사회언약에는 공동체의 책임과 그 순결을 위한 강력한 규율과 제재가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코튼은 개인의 구원론적 차원에서는 당시의 많은 청교도 신학자들과 달리 은혜언약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론과 정치 및 국가론에 있어서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행위언약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코튼의 신학적 딜레마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는 칼빈주의 신학과 사상이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는 시대적 요청에 의해 점점 희석되어 가는 당시 뉴잉글랜드의 상황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This paper examines John Cotton’s covenant theology and its characteristics, which show that the dilemma of the New England Puritan’s political, social, and theological thoughts in the seventeenth Century. The New England Puritans tried to establish a ‘City upon a Hill’ as an ideal church and ho...
This paper examines John Cotton’s covenant theology and its characteristics, which show that the dilemma of the New England Puritan’s political, social, and theological thoughts in the seventeenth Century. The New England Puritans tried to establish a ‘City upon a Hill’ as an ideal church and holy community in the New World. In the process of the puritan’s movement, covenant theology did a very important role, because puritans accepted Covenant theology from the continent, adjusted it to their political, social environment, and developed it into ‘Church Covenant’ and ‘Social Covenant’ for the purification of the church and government. As a representative of them, Cotton, a famous reformative puritan leader, tried to reform the Church of England and eventually set up the foundation of Congregationalism and the New England church government. Some scholars say that Cotton was characteristic in that he was a speaker of the covenant of grace in times of the covenant of works. They believe that Cotton insisted the importance of the Covenant of Grace in contrast to most of the New England theologians and ministers who were inclined to Arminianism. However, when we look through the other side of Cotton’s theology, we would come to assure that cotton also maintained the significance of the covenant of works. In church covenant which was originated in the Separatist puritans and accepted by the Independent puritans including Cotton, it is true that the church covenant consisted of members who are in ‘the covenant of grace,’ but the nature of the church covenant is in the covenant of works, for it depends on the ‘voluntariness’ and ‘conditionality’ of the community in its maintenance of the covenant. Actually, in practice, it was followed by the test of ‘saints’ and rigid restriction of the church membership, which made the people follow the covenant of works. This is the same for the Social Covenant. As a symbol of the New England church government, Cotton strongly insisted that the New England should be the ‘theocracy’ by the covenant which was based on the saints’ voluntarily participation and responsibility. Regardless of the personal covenant of grace, the social covenant focused on whether they would be prosper through the blessing of God or perish by the curse of Him. So, it necessarily caused forceful regulations and put restrictions on the people for the responsibility and purity of the community. Thus, it is possible to say that Cotton upheld the importance of the ‘Grace’ in respect of Soteriology and the ‘Works’ in Church―Social Covenant at the same time. And this Cotton’s dilemma represents the core of the situations of that time in which the New England’s Calvinists should construct new church and commonwealth.
This paper examines John Cotton’s covenant theology and its characteristics, which show that the dilemma of the New England Puritan’s political, social, and theological thoughts in the seventeenth Century. The New England Puritans tried to establish a ‘City upon a Hill’ as an ideal church and holy community in the New World. In the process of the puritan’s movement, covenant theology did a very important role, because puritans accepted Covenant theology from the continent, adjusted it to their political, social environment, and developed it into ‘Church Covenant’ and ‘Social Covenant’ for the purification of the church and government. As a representative of them, Cotton, a famous reformative puritan leader, tried to reform the Church of England and eventually set up the foundation of Congregationalism and the New England church government. Some scholars say that Cotton was characteristic in that he was a speaker of the covenant of grace in times of the covenant of works. They believe that Cotton insisted the importance of the Covenant of Grace in contrast to most of the New England theologians and ministers who were inclined to Arminianism. However, when we look through the other side of Cotton’s theology, we would come to assure that cotton also maintained the significance of the covenant of works. In church covenant which was originated in the Separatist puritans and accepted by the Independent puritans including Cotton, it is true that the church covenant consisted of members who are in ‘the covenant of grace,’ but the nature of the church covenant is in the covenant of works, for it depends on the ‘voluntariness’ and ‘conditionality’ of the community in its maintenance of the covenant. Actually, in practice, it was followed by the test of ‘saints’ and rigid restriction of the church membership, which made the people follow the covenant of works. This is the same for the Social Covenant. As a symbol of the New England church government, Cotton strongly insisted that the New England should be the ‘theocracy’ by the covenant which was based on the saints’ voluntarily participation and responsibility. Regardless of the personal covenant of grace, the social covenant focused on whether they would be prosper through the blessing of God or perish by the curse of Him. So, it necessarily caused forceful regulations and put restrictions on the people for the responsibility and purity of the community. Thus, it is possible to say that Cotton upheld the importance of the ‘Grace’ in respect of Soteriology and the ‘Works’ in Church―Social Covenant at the same time. And this Cotton’s dilemma represents the core of the situations of that time in which the New England’s Calvinists should construct new church and commonw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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