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까지 불교에 수용된 용신앙은 창사설화에 등장하거나 불전을 장엄하는 회화로써만 표현되었다. 이렇듯 불교에서의 용은 소극적으로 존재하다가 임란이후 부터는 목재로 조각되었고, 건축의 중요부재와 결구되어 주·부불전의 정면을 장식하는 중요한 상징기호가 된다. 불교건축의 장식기호로써 용은 호법(護法)과 벽사(辟邪)적인 의미를 가지며, 불교와 용신앙의 습합과정을 거쳐 온 상징 코드이다. 용조각을 건축물의 중요한 목부재에 꽂아 장식하거나,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집중되는 정면 공포부에 용장식을 베푸는 수법은 궁궐건축이나 서원, 향교 등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데 유독히 사찰건축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본 연구는 현존하는 사찰건축 중에서 조선후기에 들어서 사찰건축의 중요한 상징물로 적극적으로 등장하는 용장식에 주목하여 그 시대적 상황을 고찰하고 용신앙과 불교의 습합과정을 사찰건축을 통해 살펴보고자 했다. 역사적으로 불교가 정치와 문화를 지배하고 유교가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여 질 때도 용신앙은 다른 종교와 결합하면서도 기우제나 풍어제 등으로 국가나 민간인들에게 독자적으로 신앙되어져 왔다.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국가와 마을에 재난이나 위기가 닥쳐올 때 토착신앙으로써 용신의 존재는 언제라도 부상했다. 용은 불교도입 이전부터 숭배되고 치제(致祭)되어 온 토착신앙의 대상이었다. 토속신앙과 함께 용신앙은 불교와 관계에서 결코 습복되지 않고 자신들의 종교체계에 불교를 수용하여 사상적인 측면을 발전시켰다. 삼국시대 창사설화에서 나타나는 용에 대한 관념에서부터 조선시대 사찰건축의 주불전에 나타나는 용장식에 이르기까지 용신앙은 민족고유의 토착신앙으로서 면면히 그 자리를 이어왔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현존하는 사찰건축에 나타나는 토속신앙의 숭배대상이 되었던 용이 창사설화에 등장하거나 조선후기에 불전에 직접 장식됨으로써 적극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시대적인 새로운 조류가 아니라 역사 저변에 흐르는 고대부터 습합되어 온 토속신앙과 불교의 한 단면임을 알 수 있다. 용신앙이 불교에 습복되지 않고 사찰건축의 상징기호로 나타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조선후기 용신앙이 새롭게 부상하는 것은 조선후기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관련하여 볼 수 있다. 이앙법과 같은 새로운 농법으로 노동력이 절감되었고 이에 따라 발생한 잉여 노동력은 조운의 발달에 힘입어 상업에 종사하거나 도시로 유입되어 새로운 업종에 종사하게 되었으며 시장을 형성하여 상품화폐 경제를 발달시켰다. 이러한 발전에 의해 추동된 서민사회의 성장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주도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로는 새로운 방식의 서민문화의 창조를 염원하였다. 즉 서민들이 보편적인 종교터전인 불교사찰에서 용신앙을 찾고, 승려들이 서민들의 요구인 용신앙을 불교사찰의 의장에 적극적으로 반영함으로써 사찰건축에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새롭게 성장한 서민층은 불교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세력으로 불교세력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으며 이들의 지원으로 불교 건축은 새로운 면모를 갖추어 갔다. 조선후기에 들어서 사찰건축에 용장식이 전면에 부상하여 건축의 주요 부재로 제작되거나 시각적으로 안정된 부분에 용장식이 나타나는 것은 불교와 용신앙의 새로운 습합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불교세력은 백성들에게 뿌리 깊게 신앙되어진 토속신앙과 용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그동안 계속된 고립을 타파하고 새롭게 성장하는 민중의식과 시대상황에 맞춰 적극적으로 변화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으로 조선후기에 들어서 서민들에게 친숙하고 다양한 상징물들이 사찰건축의 내·외부, ...
조선전기까지 불교에 수용된 용신앙은 창사설화에 등장하거나 불전을 장엄하는 회화로써만 표현되었다. 이렇듯 불교에서의 용은 소극적으로 존재하다가 임란이후 부터는 목재로 조각되었고, 건축의 중요부재와 결구되어 주·부불전의 정면을 장식하는 중요한 상징기호가 된다. 불교건축의 장식기호로써 용은 호법(護法)과 벽사(辟邪)적인 의미를 가지며, 불교와 용신앙의 습합과정을 거쳐 온 상징 코드이다. 용조각을 건축물의 중요한 목부재에 꽂아 장식하거나,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집중되는 정면 공포부에 용장식을 베푸는 수법은 궁궐건축이나 서원, 향교 등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데 유독히 사찰건축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본 연구는 현존하는 사찰건축 중에서 조선후기에 들어서 사찰건축의 중요한 상징물로 적극적으로 등장하는 용장식에 주목하여 그 시대적 상황을 고찰하고 용신앙과 불교의 습합과정을 사찰건축을 통해 살펴보고자 했다. 역사적으로 불교가 정치와 문화를 지배하고 유교가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여 질 때도 용신앙은 다른 종교와 결합하면서도 기우제나 풍어제 등으로 국가나 민간인들에게 독자적으로 신앙되어져 왔다.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국가와 마을에 재난이나 위기가 닥쳐올 때 토착신앙으로써 용신의 존재는 언제라도 부상했다. 용은 불교도입 이전부터 숭배되고 치제(致祭)되어 온 토착신앙의 대상이었다. 토속신앙과 함께 용신앙은 불교와 관계에서 결코 습복되지 않고 자신들의 종교체계에 불교를 수용하여 사상적인 측면을 발전시켰다. 삼국시대 창사설화에서 나타나는 용에 대한 관념에서부터 조선시대 사찰건축의 주불전에 나타나는 용장식에 이르기까지 용신앙은 민족고유의 토착신앙으로서 면면히 그 자리를 이어왔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현존하는 사찰건축에 나타나는 토속신앙의 숭배대상이 되었던 용이 창사설화에 등장하거나 조선후기에 불전에 직접 장식됨으로써 적극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시대적인 새로운 조류가 아니라 역사 저변에 흐르는 고대부터 습합되어 온 토속신앙과 불교의 한 단면임을 알 수 있다. 용신앙이 불교에 습복되지 않고 사찰건축의 상징기호로 나타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조선후기 용신앙이 새롭게 부상하는 것은 조선후기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관련하여 볼 수 있다. 이앙법과 같은 새로운 농법으로 노동력이 절감되었고 이에 따라 발생한 잉여 노동력은 조운의 발달에 힘입어 상업에 종사하거나 도시로 유입되어 새로운 업종에 종사하게 되었으며 시장을 형성하여 상품화폐 경제를 발달시켰다. 이러한 발전에 의해 추동된 서민사회의 성장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주도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로는 새로운 방식의 서민문화의 창조를 염원하였다. 즉 서민들이 보편적인 종교터전인 불교사찰에서 용신앙을 찾고, 승려들이 서민들의 요구인 용신앙을 불교사찰의 의장에 적극적으로 반영함으로써 사찰건축에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새롭게 성장한 서민층은 불교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세력으로 불교세력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으며 이들의 지원으로 불교 건축은 새로운 면모를 갖추어 갔다. 조선후기에 들어서 사찰건축에 용장식이 전면에 부상하여 건축의 주요 부재로 제작되거나 시각적으로 안정된 부분에 용장식이 나타나는 것은 불교와 용신앙의 새로운 습합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불교세력은 백성들에게 뿌리 깊게 신앙되어진 토속신앙과 용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그동안 계속된 고립을 타파하고 새롭게 성장하는 민중의식과 시대상황에 맞춰 적극적으로 변화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으로 조선후기에 들어서 서민들에게 친숙하고 다양한 상징물들이 사찰건축의 내·외부, 기단, 주춧돌 등에 나타난다. 그 중 가장 중요하게 자주 사용되는 장식물은 용이었다. 현존하는 사찰건축 중에서 처음으로 용이 등장한 완주 화암사를 시작으로 서해안과 남해안에 위치하는 사찰불전에 특히 용장식이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또 운송체계의 발달로 시작된 포구 시장권 형성은 주변 장시 시장권과 연계되어 상업자본 발달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고, 그 지역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쳐 사찰건축에도 그 고유의 지역적 특성을 나타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조선후기의 역사상황과 맞물려서 새롭게 나타난 용장식은 지역과 시대에 따른차이점을 보인다. 먼저 시대적으로 용장식은 초기는 단순하지만 건축부재 자체에 용의 전체 형태를 나타내는데 노력했고, 중기는 절제되고 위엄 있는 용의 모습을 표현한 완성도 높은 조각술을 보여 주었다. 마지막 단계는 조각술은 매우 섬세하고 유려하나 조선말 혼란스런 시대를 반영하듯 강직한 모습은 사라지고 번다하고 섬약해진다. 지역적으로는 호남지역은 용을 하나의 완벽한 작품으로 인식하여 따로 목재를 마련하여 조각한 다음 다른 부재와 연결하고 가능한 용의 전체 모습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반면에 영남지역의 용조각은 부재 끝부분에 직접 조각하여 형태만 만들었다. 그래서 용의 전체적인 형태보다 용두만을 조각하는 경우가 많으며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도 호남지역에 비해 미숙한 표현에 그치고 있어 호남지역 사찰건물이 용장식에 더 많은 노력과 뛰어난 구성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지역적인 특수성에서 갖는 용신앙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와 사찰 조영에 참여한 지지층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찰건축에 투영된 용 의장의 기능적 의미를 보면 수호, 풍수지리, 권위, 음양오행, 수신, 토속성, 벽사진경 등으로 분화되어 감을 볼 수 있다.
조선전기까지 불교에 수용된 용신앙은 창사설화에 등장하거나 불전을 장엄하는 회화로써만 표현되었다. 이렇듯 불교에서의 용은 소극적으로 존재하다가 임란이후 부터는 목재로 조각되었고, 건축의 중요부재와 결구되어 주·부불전의 정면을 장식하는 중요한 상징기호가 된다. 불교건축의 장식기호로써 용은 호법(護法)과 벽사(辟邪)적인 의미를 가지며, 불교와 용신앙의 습합과정을 거쳐 온 상징 코드이다. 용조각을 건축물의 중요한 목부재에 꽂아 장식하거나,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집중되는 정면 공포부에 용장식을 베푸는 수법은 궁궐건축이나 서원, 향교 등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데 유독히 사찰건축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본 연구는 현존하는 사찰건축 중에서 조선후기에 들어서 사찰건축의 중요한 상징물로 적극적으로 등장하는 용장식에 주목하여 그 시대적 상황을 고찰하고 용신앙과 불교의 습합과정을 사찰건축을 통해 살펴보고자 했다. 역사적으로 불교가 정치와 문화를 지배하고 유교가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여 질 때도 용신앙은 다른 종교와 결합하면서도 기우제나 풍어제 등으로 국가나 민간인들에게 독자적으로 신앙되어져 왔다.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국가와 마을에 재난이나 위기가 닥쳐올 때 토착신앙으로써 용신의 존재는 언제라도 부상했다. 용은 불교도입 이전부터 숭배되고 치제(致祭)되어 온 토착신앙의 대상이었다. 토속신앙과 함께 용신앙은 불교와 관계에서 결코 습복되지 않고 자신들의 종교체계에 불교를 수용하여 사상적인 측면을 발전시켰다. 삼국시대 창사설화에서 나타나는 용에 대한 관념에서부터 조선시대 사찰건축의 주불전에 나타나는 용장식에 이르기까지 용신앙은 민족고유의 토착신앙으로서 면면히 그 자리를 이어왔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현존하는 사찰건축에 나타나는 토속신앙의 숭배대상이 되었던 용이 창사설화에 등장하거나 조선후기에 불전에 직접 장식됨으로써 적극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시대적인 새로운 조류가 아니라 역사 저변에 흐르는 고대부터 습합되어 온 토속신앙과 불교의 한 단면임을 알 수 있다. 용신앙이 불교에 습복되지 않고 사찰건축의 상징기호로 나타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조선후기 용신앙이 새롭게 부상하는 것은 조선후기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관련하여 볼 수 있다. 이앙법과 같은 새로운 농법으로 노동력이 절감되었고 이에 따라 발생한 잉여 노동력은 조운의 발달에 힘입어 상업에 종사하거나 도시로 유입되어 새로운 업종에 종사하게 되었으며 시장을 형성하여 상품화폐 경제를 발달시켰다. 이러한 발전에 의해 추동된 서민사회의 성장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주도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로는 새로운 방식의 서민문화의 창조를 염원하였다. 즉 서민들이 보편적인 종교터전인 불교사찰에서 용신앙을 찾고, 승려들이 서민들의 요구인 용신앙을 불교사찰의 의장에 적극적으로 반영함으로써 사찰건축에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새롭게 성장한 서민층은 불교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세력으로 불교세력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으며 이들의 지원으로 불교 건축은 새로운 면모를 갖추어 갔다. 조선후기에 들어서 사찰건축에 용장식이 전면에 부상하여 건축의 주요 부재로 제작되거나 시각적으로 안정된 부분에 용장식이 나타나는 것은 불교와 용신앙의 새로운 습합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불교세력은 백성들에게 뿌리 깊게 신앙되어진 토속신앙과 용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그동안 계속된 고립을 타파하고 새롭게 성장하는 민중의식과 시대상황에 맞춰 적극적으로 변화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으로 조선후기에 들어서 서민들에게 친숙하고 다양한 상징물들이 사찰건축의 내·외부, 기단, 주춧돌 등에 나타난다. 그 중 가장 중요하게 자주 사용되는 장식물은 용이었다. 현존하는 사찰건축 중에서 처음으로 용이 등장한 완주 화암사를 시작으로 서해안과 남해안에 위치하는 사찰불전에 특히 용장식이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또 운송체계의 발달로 시작된 포구 시장권 형성은 주변 장시 시장권과 연계되어 상업자본 발달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고, 그 지역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쳐 사찰건축에도 그 고유의 지역적 특성을 나타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조선후기의 역사상황과 맞물려서 새롭게 나타난 용장식은 지역과 시대에 따른차이점을 보인다. 먼저 시대적으로 용장식은 초기는 단순하지만 건축부재 자체에 용의 전체 형태를 나타내는데 노력했고, 중기는 절제되고 위엄 있는 용의 모습을 표현한 완성도 높은 조각술을 보여 주었다. 마지막 단계는 조각술은 매우 섬세하고 유려하나 조선말 혼란스런 시대를 반영하듯 강직한 모습은 사라지고 번다하고 섬약해진다. 지역적으로는 호남지역은 용을 하나의 완벽한 작품으로 인식하여 따로 목재를 마련하여 조각한 다음 다른 부재와 연결하고 가능한 용의 전체 모습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반면에 영남지역의 용조각은 부재 끝부분에 직접 조각하여 형태만 만들었다. 그래서 용의 전체적인 형태보다 용두만을 조각하는 경우가 많으며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도 호남지역에 비해 미숙한 표현에 그치고 있어 호남지역 사찰건물이 용장식에 더 많은 노력과 뛰어난 구성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지역적인 특수성에서 갖는 용신앙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와 사찰 조영에 참여한 지지층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찰건축에 투영된 용 의장의 기능적 의미를 보면 수호, 풍수지리, 권위, 음양오행, 수신, 토속성, 벽사진경 등으로 분화되어 감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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