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4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사우스센트럴에서 아프리칸아메리카인 로드니킹(Rodney King)을 구타한 LA경찰관의 무죄 평결에 항의하는 LA폭동이 일어났다. 건물파괴, 기물파손, 약탈, 방화 등을 동반한 폭동은 닷새 동안 사우스센트럴을 너머 코리아타운과 LA카운티 일부지역으로 확대되었다. 폭동의 시작은 아프리칸아메리카인이었지만 폭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라티노가 폭동에 참여하였고 한국이주민이 피해자로 폭동에 연루되었다. LA폭동은 미국 현대사에 기록될만한 대규모 인종폭동이자, 동시에 미국 역사상 최초의 다인종 ...
1992년 4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사우스센트럴에서 아프리칸아메리카인 로드니킹(Rodney King)을 구타한 LA경찰관의 무죄 평결에 항의하는 LA폭동이 일어났다. 건물파괴, 기물파손, 약탈, 방화 등을 동반한 폭동은 닷새 동안 사우스센트럴을 너머 코리아타운과 LA카운티 일부지역으로 확대되었다. 폭동의 시작은 아프리칸아메리카인이었지만 폭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라티노가 폭동에 참여하였고 한국이주민이 피해자로 폭동에 연루되었다. LA폭동은 미국 현대사에 기록될만한 대규모 인종폭동이자, 동시에 미국 역사상 최초의 다인종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A폭동에 관한 기존의 연구는 주로 아프리칸아메리카인과 백인사회, 한국이주민의 갈등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폭동의 주체였던 라티노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LA폭동 사망자의 3분의 1, 체포자의 2분의 1은 라티노였다. 또한 약탈을 포함한 전체 폭동 범죄에서 라티노 체포자가 아메리칸아프리카인의 수를 능가하였다. 또한 거주지와 사업장을 상실하고 폭동 체포자의 사후처리로 1천 여 명의 불법체류자가 본국으로 송환조치 되는 등, 폭동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인종 가운데 하나였다.
LA폭동에서 라티노의 참여 여부는 거주 지역, 출신국가, 이주기간, 경제적 위치, 개인적 차이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LA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보다 경제적, 정치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마련한 멕시코 이주민 집단은 폭동에 가담하지 않은 반면, 사우스센트럴 및 코리아타운 등을 중심으로 멕시코 및 중앙아메리카 지역에서 온 가난한 신규 이주민이나 불법체류자들이 주로 폭동에 참여하였다.
폭동에 참여한 라티노의 동기와 정서 또한 다양했다. 라티노는 절대적, 상대적 빈곤, 대중 소요 시 군중심리 등으로 인하여 폭동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기존 연구에서 간과되어 온 라티노의 인종적 불만 또한 라티노를 폭동으로 이끈 요인이었다. 폭동에 참여한 라티노는 빈곤과 인종차별, 공권력의 감시에서 해방되어 재화를 약탈하고 지역을 파괴하며 쾌감을 느꼈고, 현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였으며, 본국의 내전에서 경험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였다.
이처럼 라티노는 매우 역동적으로 폭동에 참여하였고, 다방면으로 폭동의 영향을 받았다. 지금까지 LA폭동 연구에서 라티노가 아프리칸아메리카인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은 폭동에 연루된 다른 인종에 비해 라티노의 정치적 영향력이 적었기 때문이다. 폭동 당시 이미 LA카운티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인종이자 폭동 주요 파괴지역에서 다수를 이루는 인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묻혀있는 존재였다. LA폭동의 주체로서 라티노를 복원하는 것은 미국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다수였던 라티노의 존재를 가시화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1992년 4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사우스센트럴에서 아프리칸아메리카인 로드니킹(Rodney King)을 구타한 LA경찰관의 무죄 평결에 항의하는 LA폭동이 일어났다. 건물파괴, 기물파손, 약탈, 방화 등을 동반한 폭동은 닷새 동안 사우스센트럴을 너머 코리아타운과 LA카운티 일부지역으로 확대되었다. 폭동의 시작은 아프리칸아메리카인이었지만 폭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라티노가 폭동에 참여하였고 한국이주민이 피해자로 폭동에 연루되었다. LA폭동은 미국 현대사에 기록될만한 대규모 인종폭동이자, 동시에 미국 역사상 최초의 다인종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A폭동에 관한 기존의 연구는 주로 아프리칸아메리카인과 백인사회, 한국이주민의 갈등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폭동의 주체였던 라티노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LA폭동 사망자의 3분의 1, 체포자의 2분의 1은 라티노였다. 또한 약탈을 포함한 전체 폭동 범죄에서 라티노 체포자가 아메리칸아프리카인의 수를 능가하였다. 또한 거주지와 사업장을 상실하고 폭동 체포자의 사후처리로 1천 여 명의 불법체류자가 본국으로 송환조치 되는 등, 폭동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인종 가운데 하나였다.
LA폭동에서 라티노의 참여 여부는 거주 지역, 출신국가, 이주기간, 경제적 위치, 개인적 차이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LA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보다 경제적, 정치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마련한 멕시코 이주민 집단은 폭동에 가담하지 않은 반면, 사우스센트럴 및 코리아타운 등을 중심으로 멕시코 및 중앙아메리카 지역에서 온 가난한 신규 이주민이나 불법체류자들이 주로 폭동에 참여하였다.
폭동에 참여한 라티노의 동기와 정서 또한 다양했다. 라티노는 절대적, 상대적 빈곤, 대중 소요 시 군중심리 등으로 인하여 폭동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기존 연구에서 간과되어 온 라티노의 인종적 불만 또한 라티노를 폭동으로 이끈 요인이었다. 폭동에 참여한 라티노는 빈곤과 인종차별, 공권력의 감시에서 해방되어 재화를 약탈하고 지역을 파괴하며 쾌감을 느꼈고, 현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였으며, 본국의 내전에서 경험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였다.
이처럼 라티노는 매우 역동적으로 폭동에 참여하였고, 다방면으로 폭동의 영향을 받았다. 지금까지 LA폭동 연구에서 라티노가 아프리칸아메리카인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은 폭동에 연루된 다른 인종에 비해 라티노의 정치적 영향력이 적었기 때문이다. 폭동 당시 이미 LA카운티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인종이자 폭동 주요 파괴지역에서 다수를 이루는 인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묻혀있는 존재였다. LA폭동의 주체로서 라티노를 복원하는 것은 미국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다수였던 라티노의 존재를 가시화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주제어
#LA폭동
#다인종폭동
#라티노
#아프리칸아메리카인
#빈곤
#인종갈등
#the 1992 Los Angels riots
#multiethnic riots
#Latino
#African American
#poverty
#racial conflict
※ AI-Helper는 부적절한 답변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