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기관으로 발족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원회’)는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09년 말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판정한 문인 31명의 명단(김기진,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억(안서),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女), 모윤숙(女), 박영희, 백(세)철, 서정주, 유진오, 윤두헌, 이광수, 이무영, 이석훈, 이 찬, 임학수, 장덕조(女), 장은중(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용만, 조우식, 주영섭, 주요한, 채만식, 최재서, 최정희(女))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이 연구는 친일문인들의 작품 발표에 영향을 준 일제의 정책적 환경요인들과 개별적 내부요인 및 매개요인 등을 파악하여 각 영향요인들과 문인들과의 관계 등을 찾아내고, 일제의 탄압・유인정책과 공작에 대하여 ‘친일반민족 판정 시인’ 15명(김기진, 김동환, 김억(안서),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女), 모윤숙(女), 서정주, 윤두헌, 이광수, 이 찬, 임학수, 조우식, 주영섭, 주요한 등)이 어떻게 순응하였으며 또한 어떠한 전략으로 대응했는지를 비교문학적 시각과 관점에서 분석했다. 이를 위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 작품’으로 판정한 詩 총 138편의 텍스트를 전수(全數) 분석하였고, ‘친일반민족 판정 문인 산문’ 268편중에서 139편을 ‘매개 담론’으로서 함께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주요 연구결과를 얻었다:
(1) ‘친일반민족 작품’(이하 ‘친일작품’)의 개념: 문학계에서의 ‘친일’이란 일반적인 개념이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친일반민족’이란 용어로 과장되게 환치되어 문학작품들과 문인들에게 등가적(等價的)으로 적용되었음이 발견된다. 이러한 적용은 ‘진상규명위원회’가 문인들을 31명이나 ‘반민족행위자’로 양산(量産)한 결과를 만든 ‘문학작품에 대한 국가기관 판정의 구조적인 하자’로 이어지게 되었다.
(2) ‘친일반민족 작품’의 발표 시기: 그간 문학계에서는 ‘친일문학’의 시기를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또는 1940년 전후 10년을 기준으로 흔히 설정하고 있으나 이 연구에서 이는 ‘산문’의 경우에나 적절한 것으로 나타났다. ‘친일반민족행위’로 판정된 시와 소설의 80%이상은 태평양전쟁 최초 3년간(41.12.~44.12.)에 집중적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3) ‘친일반민족 판정 문인’(이하 ‘친일문인’) 31명의 민족의식: 김문집을 제외하고는, ‘친일문인’들이 조선어와 조선식 필명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 등 민족의식이 강했다는 점이 발견된다. 또한 이들 31명 중에는 좌파이든 우파이든 민족주의자로서 항일운동에 참여하여 구속되었다가 출옥한 ‘반일운동 주동자’들이 12명이나 된다는 사실도 발견된다. 일제는 이들을 출옥시키는 대신 조선민족에 대한 배신자라는 이미지로 낙인을 찍고 일본을 위한 ‘전향자’라는 딱지를 붙여놓고 감시・탄압・동원했지만, 이들은 ‘유사(類似)순응적 불응’ 행태를 은밀히 그리고 자주 나타낸 것으로 드러난다.
(4) 일제의 동화정책에 대한 대응전략: ‘친일반민족 판정 시인들’(이하 ‘친일시인’)은 ‘내선일체・황민화’를 선전・선동하는 ‘친일 시’의 발표를 거의 회피했으며, ‘친일소설가들’도 ‘내선일체・황민화’ 문제에 소극적이었음이 발견된다. 이와 같이 조선 문인들은, ‘친일작품’을 발표해야 할 경우라도, 식민통치의 핵심인 일제의 ‘내선일체・황민화정책’을 선전・선동해 주는 역할을 피해 가는 전략을 택한 것으로 드러난다. ‘내선일체・황민화’ 관련 작품을 발표했을 때에도, 작가는 대부분의 경우에 양가적이거나 다의적인 의미를 내장시키는 문학적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5)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인식: ‘친일문인들’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조선민족의 앞날을 위한 ‘대운(大運)’의 ‘기회’와 ‘기대’로 인식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기회’와 ‘기대’가 중일전쟁 기간 중에는 개전 2년차인 1939년도에, 태평양전쟁 기간 중에는 개전 1년차인 1942년에 최고 절정을 이루었다.
(6) ‘일본국민’에 대한 인식: ‘친일문인들’이 전쟁 시기에 내세운 ‘일본국민’은 ‘조선민족 2500만 명’과 ‘대화(일본)민족 7500만 명’으로 구성된 ‘1억 국민’을 의미했다. 조선민족의 소멸이나 말살을 요구하거나 기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국가’ 내에서의 조선민족의 역할 및 전체국민의 ‘4분의 1’이라는 2500만 명의 지분(持分)을 내세우는 기능과 전략으로서의 ‘일본국민’임을 활용한 측면이 드러난다. 또한 기성문인들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일본국민으로서의 충의와 천황에 대한 충성을 외면상으로 강조하긴 했지만, 조선동포와 조선남아로서의 의기(義氣)도 바로 할 것을 덧붙이는 전략도 구사한 사례들이 많이 발견된다.
(7) 중일전쟁 중의 ‘친일 시’ 발표 동기: 이 연구는 중일전쟁 기간에 발표된 ‘친일반민족 판정 시’ 총 24편중 23편이 일제의 탄압・유인정책 및 4개 유형의 공작에 의해 대응 창작된 것이라는 ...
2005년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기관으로 발족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원회’)는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09년 말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판정한 문인 31명의 명단(김기진,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억(안서),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女), 모윤숙(女), 박영희, 백(세)철, 서정주, 유진오, 윤두헌, 이광수, 이무영, 이석훈, 이 찬, 임학수, 장덕조(女), 장은중(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용만, 조우식, 주영섭, 주요한, 채만식, 최재서, 최정희(女))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이 연구는 친일문인들의 작품 발표에 영향을 준 일제의 정책적 환경요인들과 개별적 내부요인 및 매개요인 등을 파악하여 각 영향요인들과 문인들과의 관계 등을 찾아내고, 일제의 탄압・유인정책과 공작에 대하여 ‘친일반민족 판정 시인’ 15명(김기진, 김동환, 김억(안서),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女), 모윤숙(女), 서정주, 윤두헌, 이광수, 이 찬, 임학수, 조우식, 주영섭, 주요한 등)이 어떻게 순응하였으며 또한 어떠한 전략으로 대응했는지를 비교문학적 시각과 관점에서 분석했다. 이를 위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 작품’으로 판정한 詩 총 138편의 텍스트를 전수(全數) 분석하였고, ‘친일반민족 판정 문인 산문’ 268편중에서 139편을 ‘매개 담론’으로서 함께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주요 연구결과를 얻었다:
(1) ‘친일반민족 작품’(이하 ‘친일작품’)의 개념: 문학계에서의 ‘친일’이란 일반적인 개념이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친일반민족’이란 용어로 과장되게 환치되어 문학작품들과 문인들에게 등가적(等價的)으로 적용되었음이 발견된다. 이러한 적용은 ‘진상규명위원회’가 문인들을 31명이나 ‘반민족행위자’로 양산(量産)한 결과를 만든 ‘문학작품에 대한 국가기관 판정의 구조적인 하자’로 이어지게 되었다.
(2) ‘친일반민족 작품’의 발표 시기: 그간 문학계에서는 ‘친일문학’의 시기를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또는 1940년 전후 10년을 기준으로 흔히 설정하고 있으나 이 연구에서 이는 ‘산문’의 경우에나 적절한 것으로 나타났다. ‘친일반민족행위’로 판정된 시와 소설의 80%이상은 태평양전쟁 최초 3년간(41.12.~44.12.)에 집중적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3) ‘친일반민족 판정 문인’(이하 ‘친일문인’) 31명의 민족의식: 김문집을 제외하고는, ‘친일문인’들이 조선어와 조선식 필명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 등 민족의식이 강했다는 점이 발견된다. 또한 이들 31명 중에는 좌파이든 우파이든 민족주의자로서 항일운동에 참여하여 구속되었다가 출옥한 ‘반일운동 주동자’들이 12명이나 된다는 사실도 발견된다. 일제는 이들을 출옥시키는 대신 조선민족에 대한 배신자라는 이미지로 낙인을 찍고 일본을 위한 ‘전향자’라는 딱지를 붙여놓고 감시・탄압・동원했지만, 이들은 ‘유사(類似)순응적 불응’ 행태를 은밀히 그리고 자주 나타낸 것으로 드러난다.
(4) 일제의 동화정책에 대한 대응전략: ‘친일반민족 판정 시인들’(이하 ‘친일시인’)은 ‘내선일체・황민화’를 선전・선동하는 ‘친일 시’의 발표를 거의 회피했으며, ‘친일소설가들’도 ‘내선일체・황민화’ 문제에 소극적이었음이 발견된다. 이와 같이 조선 문인들은, ‘친일작품’을 발표해야 할 경우라도, 식민통치의 핵심인 일제의 ‘내선일체・황민화정책’을 선전・선동해 주는 역할을 피해 가는 전략을 택한 것으로 드러난다. ‘내선일체・황민화’ 관련 작품을 발표했을 때에도, 작가는 대부분의 경우에 양가적이거나 다의적인 의미를 내장시키는 문학적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5)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인식: ‘친일문인들’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조선민족의 앞날을 위한 ‘대운(大運)’의 ‘기회’와 ‘기대’로 인식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기회’와 ‘기대’가 중일전쟁 기간 중에는 개전 2년차인 1939년도에, 태평양전쟁 기간 중에는 개전 1년차인 1942년에 최고 절정을 이루었다.
(6) ‘일본국민’에 대한 인식: ‘친일문인들’이 전쟁 시기에 내세운 ‘일본국민’은 ‘조선민족 2500만 명’과 ‘대화(일본)민족 7500만 명’으로 구성된 ‘1억 국민’을 의미했다. 조선민족의 소멸이나 말살을 요구하거나 기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국가’ 내에서의 조선민족의 역할 및 전체국민의 ‘4분의 1’이라는 2500만 명의 지분(持分)을 내세우는 기능과 전략으로서의 ‘일본국민’임을 활용한 측면이 드러난다. 또한 기성문인들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일본국민으로서의 충의와 천황에 대한 충성을 외면상으로 강조하긴 했지만, 조선동포와 조선남아로서의 의기(義氣)도 바로 할 것을 덧붙이는 전략도 구사한 사례들이 많이 발견된다.
(7) 중일전쟁 중의 ‘친일 시’ 발표 동기: 이 연구는 중일전쟁 기간에 발표된 ‘친일반민족 판정 시’ 총 24편중 23편이 일제의 탄압・유인정책 및 4개 유형의 공작에 의해 대응 창작된 것이라는 인과관계를 발견했다.
(8) ‘친일시인들’의 ‘내선일체・황민화 선전・선동’ 기피 전략: ‘내선일체・황민화’ 유형에 해당된 ‘친일반민족 시’는 두 전쟁 모두 합쳐도 총 6편에 지나지 않으며 해당된 시인도 두 전쟁에서 각각 2명에 불과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문인들은 ‘반민족행위’에 해당되기 쉬운 ‘내선일체・황민화 정책’에 협력하기 보다는, ‘반미・반영・반백인종’ 등을 부르짖는 일제의 ‘침략전쟁 미화・찬양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차원에서 ‘친일의 대안’을 찾은 것으로 드러난다. ‘내선일체・황민화’를 선전・선동해야 할 경우에도 ‘친일시인’은 ‘친일적이고 친민족적인 이중 전략’을 흔히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환언하면 친일적이면서도 친민족적인 ‘양가적 틈새 전략’으로 대응했음이 발견된다.
(9) ‘친일시인들’의 ‘일본군 전사자 미화・찬양’ 전략: ‘친일시인들’은 ‘일본군전사자를 미화・찬양’하라는 일제의 정책에 대응하여, 1943년 말기부터 ‘조선인 전사자들’을 선택해 이들이 공식적으로 ‘일본군 병사’이지만 조선인임을 은밀히 알리고 추모하는 전략을 택한 것으로 드러난다. 결국 일제는 조선에서 일본군 전사자를 미화・찬양하는 작품 발표가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제동을 걸게 되었다. 이는 ‘조선 시인들’의 일제에 대한 ‘유사(類似)순응적 불응 전략’이 성공한 사례로 나타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위원회’는 일제의 태평양함대를 총지휘했던 전범(戰犯) 야마모토(山本) 원수의 전사를 대표적으로 미화・찬양한 김소운의 ‘친일 시’는 ‘친일반민족 작품’에서 제외시키는 결정을 만들어 놓은 반면, 일제의 삼엄했던 검열 틈새를 헤치고 조선인 전사자들을 추모한 작품들에 대해서는 ‘일본군 전사자를 미화・찬양’한 ‘친일반민족행위’로 판정한 카오스를 만들어 놓았음을 이 연구는 발견했다.
(10) ‘친일시인들’의 ‘지원병 선전・선동’ 전략: ‘지원병 동원 시들’에서는 네 가지 유형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음이 나타난다. 첫째는 일제의 ‘기대에 미치지 않거나 기대와 다른 것’을 발표하는 전략이고, 둘째는 위장술을 활용하여 정보적 가치가 있는 사실이나 실상 등을 후세에 알리는 전략이며, 셋째는 특정 이슈에 대하여 조선인들이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직접 조선인들의 역할과 중요성 등을 알리는 전략이고, 넷째는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조선 젊은이들이 해양에 대한 관심과 경험을 축적하도록 해군특별지원병 모병에 응하도록 장려하는 전략으로 드러난다.
(11) ‘친일시인들’의 ‘징병 선전・선동’ 전략: 징병은 군무동원의 핵심인데도 의외로 소수(6명)의 시인들이 참가했다. 이에는 ‘친일시인들’이 네 가지의 대응전략으로 임한 것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징병을 소재로만 삼을 뿐 이를 선전하거나 선동하는 것을 회피하거나 기피하는 전략이다. 둘째는 시국적 용어나 친일적인 표현들을 배제하거나 극도로 절제하면서 징병제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젊은이로서는 반드시 짊어져야 되는 국민의 의무라는 ‘일반성’을 부각시키는 전략이다. 셋째는 조선인에게 징병은 국민의 의무이고 특권인 동시에 천황의 위대한 은혜이기 때문에 천황의 방패가 되고 출정병이 되어 죽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영광이 되는 위대한 행위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인식은 임종국이 분류한 대부분의 ‘신인작가’들에게 조국과 징병의 정당성이 그렇게 각인되어 있었다.
넷째는 시각적으로 선동성이 강한 그림의 ‘보조 역할’로서 징병 관련 <시화(詩畵)>에 참여한 전략이다. 1943년 8월 1일 징병제의 공식적인 실시를 맞이하여 '매일신보'가 기획 연재한 <시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에는 화가 7명과 시인 7명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중에서 그림 2편과 시 5편만을 ‘친일반민족 작품’으로 판정했다. 그런데 ‘시국적인 친일용어들’과 ‘선동적인 표현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이하윤과 김상용의 시가 오히려 ‘친일반민족 판정 작품’에서 제외되었다. 이하윤과 김상용을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로 선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작품이 아니라 사람에서 시작되는 조사방법론상의 구조적인 하자 등에서 비롯된 결과로 보인다. 또한 詩가 그림의 ‘보조역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는 5편, 그림은 2편이 ‘친일반민족 작품’으로 판정된 것은 문학계에서 ‘친일반민족 문인’을 31명이나 선정한 반면, 미술계에서는 4명만이 ‘친일반민족 미술가’로 선정되도록 축소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12) ‘친일시인들’의 ‘학병 선전・선동’ 전략: 학병동원은 전쟁 말기 일제의 마지막 이벤트였고, ‘친일시인들’은 대학생들에게 간부후보생으로 응소하라는 전략으로 대응한 것으로 나타난다. 학병에 불응하여 강제노역에 동원되는 ‘징용 학도’가 되기보다는 정정당당하게 출정하는 것이 본인이나 민족의 장래를 위해 보탬이 된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13) ‘전략적 친일문학’ 개념의 정립 필요성: 이 연구는 ‘친일문인들’의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친일적인 요소’와 ‘친민족적인 전략’이 함께 내재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또한 던컨(Dunkan)의 ‘순응이론’을 일제 강점기의 우리 문학에 적용하면, ‘친일문학’은 외면적으로 친일협력이 드러나는 ‘친일순응문학’ 및 내면적으로까지 친일협력이 용해된 ‘친일수용문학’으로 구별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연구는 ‘친일반민족 판정 시’들의 텍스트 분석에서 ‘친일순응행위’를 발견했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에 ‘친민족적인 요소’들이 함께 내장되어 있음으로써 내면까지 완전히 친일화된 ‘친일수용작품’은 극히 소수임을 발견했다. 환언하면 대부분의 ‘친일반민족 판정 시’는 ‘친일순응문학’에 속한다. 반면에 ‘친일수용문학’은, 김문집의 산문 사례들과 같이, ‘친일적이고 또한 반민족적인 글’로 구성되어 있거나 조우식(‘친일반민족 문인’에서 이미 벗어난 많은 신인작가 포함)의 사례와 같이 ‘맹목적인 친일협력 詩’로 드러난다.
따라서 앞으로는 ‘친일문학’을 구분해서 정리하고 개념화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 연구는 ‘친일적이면서 친민족적인 양가성을 지닌 작품군(群)’을 ‘전략적 친일문학’으로 구분할 것을 제의한다. 일제가 개전한 전쟁을 ‘대운(大運)의 기회’로 인식하고 이를 붙잡기 위한 전략적 사고와 고민 하에서 작품들이 창작되었으며 일제의 삼엄했던 전시(戰時)검열의 틈새를 뚫고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친일문학’이란 용어에는 패배주의적이고 열등적인 국가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전략적 전쟁협력 문학작품’까지 우리 스스로 다른 나라의 국가명칭을 붙여 패배적인 의미로 지칭하는 것은 오늘날의 국격(國格)과 국익(國益)에도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2005년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기관으로 발족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원회’)는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09년 말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판정한 문인 31명의 명단(김기진,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억(안서),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女), 모윤숙(女), 박영희, 백(세)철, 서정주, 유진오, 윤두헌, 이광수, 이무영, 이석훈, 이 찬, 임학수, 장덕조(女), 장은중(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용만, 조우식, 주영섭, 주요한, 채만식, 최재서, 최정희(女))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이 연구는 친일문인들의 작품 발표에 영향을 준 일제의 정책적 환경요인들과 개별적 내부요인 및 매개요인 등을 파악하여 각 영향요인들과 문인들과의 관계 등을 찾아내고, 일제의 탄압・유인정책과 공작에 대하여 ‘친일반민족 판정 시인’ 15명(김기진, 김동환, 김억(안서),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女), 모윤숙(女), 서정주, 윤두헌, 이광수, 이 찬, 임학수, 조우식, 주영섭, 주요한 등)이 어떻게 순응하였으며 또한 어떠한 전략으로 대응했는지를 비교문학적 시각과 관점에서 분석했다. 이를 위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 작품’으로 판정한 詩 총 138편의 텍스트를 전수(全數) 분석하였고, ‘친일반민족 판정 문인 산문’ 268편중에서 139편을 ‘매개 담론’으로서 함께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주요 연구결과를 얻었다:
(1) ‘친일반민족 작품’(이하 ‘친일작품’)의 개념: 문학계에서의 ‘친일’이란 일반적인 개념이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친일반민족’이란 용어로 과장되게 환치되어 문학작품들과 문인들에게 등가적(等價的)으로 적용되었음이 발견된다. 이러한 적용은 ‘진상규명위원회’가 문인들을 31명이나 ‘반민족행위자’로 양산(量産)한 결과를 만든 ‘문학작품에 대한 국가기관 판정의 구조적인 하자’로 이어지게 되었다.
(2) ‘친일반민족 작품’의 발표 시기: 그간 문학계에서는 ‘친일문학’의 시기를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또는 1940년 전후 10년을 기준으로 흔히 설정하고 있으나 이 연구에서 이는 ‘산문’의 경우에나 적절한 것으로 나타났다. ‘친일반민족행위’로 판정된 시와 소설의 80%이상은 태평양전쟁 최초 3년간(41.12.~44.12.)에 집중적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3) ‘친일반민족 판정 문인’(이하 ‘친일문인’) 31명의 민족의식: 김문집을 제외하고는, ‘친일문인’들이 조선어와 조선식 필명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 등 민족의식이 강했다는 점이 발견된다. 또한 이들 31명 중에는 좌파이든 우파이든 민족주의자로서 항일운동에 참여하여 구속되었다가 출옥한 ‘반일운동 주동자’들이 12명이나 된다는 사실도 발견된다. 일제는 이들을 출옥시키는 대신 조선민족에 대한 배신자라는 이미지로 낙인을 찍고 일본을 위한 ‘전향자’라는 딱지를 붙여놓고 감시・탄압・동원했지만, 이들은 ‘유사(類似)순응적 불응’ 행태를 은밀히 그리고 자주 나타낸 것으로 드러난다.
(4) 일제의 동화정책에 대한 대응전략: ‘친일반민족 판정 시인들’(이하 ‘친일시인’)은 ‘내선일체・황민화’를 선전・선동하는 ‘친일 시’의 발표를 거의 회피했으며, ‘친일소설가들’도 ‘내선일체・황민화’ 문제에 소극적이었음이 발견된다. 이와 같이 조선 문인들은, ‘친일작품’을 발표해야 할 경우라도, 식민통치의 핵심인 일제의 ‘내선일체・황민화정책’을 선전・선동해 주는 역할을 피해 가는 전략을 택한 것으로 드러난다. ‘내선일체・황민화’ 관련 작품을 발표했을 때에도, 작가는 대부분의 경우에 양가적이거나 다의적인 의미를 내장시키는 문학적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5)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인식: ‘친일문인들’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조선민족의 앞날을 위한 ‘대운(大運)’의 ‘기회’와 ‘기대’로 인식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기회’와 ‘기대’가 중일전쟁 기간 중에는 개전 2년차인 1939년도에, 태평양전쟁 기간 중에는 개전 1년차인 1942년에 최고 절정을 이루었다.
(6) ‘일본국민’에 대한 인식: ‘친일문인들’이 전쟁 시기에 내세운 ‘일본국민’은 ‘조선민족 2500만 명’과 ‘대화(일본)민족 7500만 명’으로 구성된 ‘1억 국민’을 의미했다. 조선민족의 소멸이나 말살을 요구하거나 기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국가’ 내에서의 조선민족의 역할 및 전체국민의 ‘4분의 1’이라는 2500만 명의 지분(持分)을 내세우는 기능과 전략으로서의 ‘일본국민’임을 활용한 측면이 드러난다. 또한 기성문인들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일본국민으로서의 충의와 천황에 대한 충성을 외면상으로 강조하긴 했지만, 조선동포와 조선남아로서의 의기(義氣)도 바로 할 것을 덧붙이는 전략도 구사한 사례들이 많이 발견된다.
(7) 중일전쟁 중의 ‘친일 시’ 발표 동기: 이 연구는 중일전쟁 기간에 발표된 ‘친일반민족 판정 시’ 총 24편중 23편이 일제의 탄압・유인정책 및 4개 유형의 공작에 의해 대응 창작된 것이라는 인과관계를 발견했다.
(8) ‘친일시인들’의 ‘내선일체・황민화 선전・선동’ 기피 전략: ‘내선일체・황민화’ 유형에 해당된 ‘친일반민족 시’는 두 전쟁 모두 합쳐도 총 6편에 지나지 않으며 해당된 시인도 두 전쟁에서 각각 2명에 불과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문인들은 ‘반민족행위’에 해당되기 쉬운 ‘내선일체・황민화 정책’에 협력하기 보다는, ‘반미・반영・반백인종’ 등을 부르짖는 일제의 ‘침략전쟁 미화・찬양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차원에서 ‘친일의 대안’을 찾은 것으로 드러난다. ‘내선일체・황민화’를 선전・선동해야 할 경우에도 ‘친일시인’은 ‘친일적이고 친민족적인 이중 전략’을 흔히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환언하면 친일적이면서도 친민족적인 ‘양가적 틈새 전략’으로 대응했음이 발견된다.
(9) ‘친일시인들’의 ‘일본군 전사자 미화・찬양’ 전략: ‘친일시인들’은 ‘일본군전사자를 미화・찬양’하라는 일제의 정책에 대응하여, 1943년 말기부터 ‘조선인 전사자들’을 선택해 이들이 공식적으로 ‘일본군 병사’이지만 조선인임을 은밀히 알리고 추모하는 전략을 택한 것으로 드러난다. 결국 일제는 조선에서 일본군 전사자를 미화・찬양하는 작품 발표가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제동을 걸게 되었다. 이는 ‘조선 시인들’의 일제에 대한 ‘유사(類似)순응적 불응 전략’이 성공한 사례로 나타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위원회’는 일제의 태평양함대를 총지휘했던 전범(戰犯) 야마모토(山本) 원수의 전사를 대표적으로 미화・찬양한 김소운의 ‘친일 시’는 ‘친일반민족 작품’에서 제외시키는 결정을 만들어 놓은 반면, 일제의 삼엄했던 검열 틈새를 헤치고 조선인 전사자들을 추모한 작품들에 대해서는 ‘일본군 전사자를 미화・찬양’한 ‘친일반민족행위’로 판정한 카오스를 만들어 놓았음을 이 연구는 발견했다.
(10) ‘친일시인들’의 ‘지원병 선전・선동’ 전략: ‘지원병 동원 시들’에서는 네 가지 유형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음이 나타난다. 첫째는 일제의 ‘기대에 미치지 않거나 기대와 다른 것’을 발표하는 전략이고, 둘째는 위장술을 활용하여 정보적 가치가 있는 사실이나 실상 등을 후세에 알리는 전략이며, 셋째는 특정 이슈에 대하여 조선인들이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직접 조선인들의 역할과 중요성 등을 알리는 전략이고, 넷째는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조선 젊은이들이 해양에 대한 관심과 경험을 축적하도록 해군특별지원병 모병에 응하도록 장려하는 전략으로 드러난다.
(11) ‘친일시인들’의 ‘징병 선전・선동’ 전략: 징병은 군무동원의 핵심인데도 의외로 소수(6명)의 시인들이 참가했다. 이에는 ‘친일시인들’이 네 가지의 대응전략으로 임한 것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징병을 소재로만 삼을 뿐 이를 선전하거나 선동하는 것을 회피하거나 기피하는 전략이다. 둘째는 시국적 용어나 친일적인 표현들을 배제하거나 극도로 절제하면서 징병제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젊은이로서는 반드시 짊어져야 되는 국민의 의무라는 ‘일반성’을 부각시키는 전략이다. 셋째는 조선인에게 징병은 국민의 의무이고 특권인 동시에 천황의 위대한 은혜이기 때문에 천황의 방패가 되고 출정병이 되어 죽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영광이 되는 위대한 행위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인식은 임종국이 분류한 대부분의 ‘신인작가’들에게 조국과 징병의 정당성이 그렇게 각인되어 있었다.
넷째는 시각적으로 선동성이 강한 그림의 ‘보조 역할’로서 징병 관련 <시화(詩畵)>에 참여한 전략이다. 1943년 8월 1일 징병제의 공식적인 실시를 맞이하여 '매일신보'가 기획 연재한 <시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에는 화가 7명과 시인 7명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중에서 그림 2편과 시 5편만을 ‘친일반민족 작품’으로 판정했다. 그런데 ‘시국적인 친일용어들’과 ‘선동적인 표현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이하윤과 김상용의 시가 오히려 ‘친일반민족 판정 작품’에서 제외되었다. 이하윤과 김상용을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로 선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작품이 아니라 사람에서 시작되는 조사방법론상의 구조적인 하자 등에서 비롯된 결과로 보인다. 또한 詩가 그림의 ‘보조역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는 5편, 그림은 2편이 ‘친일반민족 작품’으로 판정된 것은 문학계에서 ‘친일반민족 문인’을 31명이나 선정한 반면, 미술계에서는 4명만이 ‘친일반민족 미술가’로 선정되도록 축소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12) ‘친일시인들’의 ‘학병 선전・선동’ 전략: 학병동원은 전쟁 말기 일제의 마지막 이벤트였고, ‘친일시인들’은 대학생들에게 간부후보생으로 응소하라는 전략으로 대응한 것으로 나타난다. 학병에 불응하여 강제노역에 동원되는 ‘징용 학도’가 되기보다는 정정당당하게 출정하는 것이 본인이나 민족의 장래를 위해 보탬이 된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13) ‘전략적 친일문학’ 개념의 정립 필요성: 이 연구는 ‘친일문인들’의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친일적인 요소’와 ‘친민족적인 전략’이 함께 내재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또한 던컨(Dunkan)의 ‘순응이론’을 일제 강점기의 우리 문학에 적용하면, ‘친일문학’은 외면적으로 친일협력이 드러나는 ‘친일순응문학’ 및 내면적으로까지 친일협력이 용해된 ‘친일수용문학’으로 구별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연구는 ‘친일반민족 판정 시’들의 텍스트 분석에서 ‘친일순응행위’를 발견했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에 ‘친민족적인 요소’들이 함께 내장되어 있음으로써 내면까지 완전히 친일화된 ‘친일수용작품’은 극히 소수임을 발견했다. 환언하면 대부분의 ‘친일반민족 판정 시’는 ‘친일순응문학’에 속한다. 반면에 ‘친일수용문학’은, 김문집의 산문 사례들과 같이, ‘친일적이고 또한 반민족적인 글’로 구성되어 있거나 조우식(‘친일반민족 문인’에서 이미 벗어난 많은 신인작가 포함)의 사례와 같이 ‘맹목적인 친일협력 詩’로 드러난다.
따라서 앞으로는 ‘친일문학’을 구분해서 정리하고 개념화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 연구는 ‘친일적이면서 친민족적인 양가성을 지닌 작품군(群)’을 ‘전략적 친일문학’으로 구분할 것을 제의한다. 일제가 개전한 전쟁을 ‘대운(大運)의 기회’로 인식하고 이를 붙잡기 위한 전략적 사고와 고민 하에서 작품들이 창작되었으며 일제의 삼엄했던 전시(戰時)검열의 틈새를 뚫고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친일문학’이란 용어에는 패배주의적이고 열등적인 국가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전략적 전쟁협력 문학작품’까지 우리 스스로 다른 나라의 국가명칭을 붙여 패배적인 의미로 지칭하는 것은 오늘날의 국격(國格)과 국익(國益)에도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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