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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 주도 협동조합운동 연구 : 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 원문보기


김소남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국내박사)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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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원주지역의 사회운동은 지역의 사회경제적 현실을 반영하면서 당시의 민족해방운동의 흐름과 연계되면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해방 후 각 정치세력의 국가건설운동과 연계되면서 원주지역에서 다양한 정치지향을 가진 사회운동단체들이 족출하였으며, 문막과 부론지역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세력은 우익세력의 탄압에 대처하면서 물밑에서 활동을 도모해 나갔으나 한국전쟁을 거치며 궤멸되거나 파편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제하 이래의 사회운동세력은 거의 대부분 붕괴되었고, 중요인물들은 완전히 파편화되었다. 그 결과 전후 원주지역은 분단구조의 고착화 속에서 절대적인 우익 주도의 사회로 변모되었으며, 새로운 기반 위에서 장일순을 중심으로 혁신세력이 점차 새롭게 규합되고 활동해 나갈 수 있었다. 해방 이후 신협의 자발적인 설립운동이 부산과 서울지역의 가톨릭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1950년대 말부터 추진되었다. 1960년대 초 태백 탄광지역에서 3개의 광산신협이 설립될 수 있었으나 1960년대 중반~70년대 초 형성된 원주그룹에 의해 추동될 때까지 발전적으로 전개되지 못하였다. 1960년대 초 로마에서는 요한 23세에 의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개최되면서 세계교회혁신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으며, 그 결과 원주를 중심으로 가톨릭 원주교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주교로 지학순주교가 부임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톨릭 내 혁신계의 지학순주교와 혁신세력의 중심인물이었던 장일순의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제1차 원주그룹은 형성될 수 있었으며, 1970년대 민간 주도의 농촌개발운동이자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새로운 흐름을 형성해 나갈 수 있었다. 1970년대 초 박정희정권에 의해 농촌부흥정책의 일환으로 전국적으로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는 속에서 1972년 8월 남한강유역 대홍수를 계기로 災害委가 조직되면서 제2차 원주그룹은 형성되었으며, 1970년 4월의 삥땅사건과 1970년 11월의 전태일분신사건, 1971년 8월의 광주대단지사건 등을 경험하면서 민중의 생존권 실현을 위한 ‘생명’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제반활동들을 전개해 나가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원주그룹은 먼저 지학순주교의 1972년도 사목교서, 1973년도 사목지침 및 세부지침을 통해 원주교구 내에 이를 확산시킬 교육사업의 전개, 신용조합과 구판매조합 등의 각종 협동조합의 설립을 통해 이를 전개해 나가고자 하였다. 1972년 8월 남한강유역 대홍수를 계기로 조직된 災害委는 부락개발사업의 추진을 통해 농촌부락마다 생산협동체인 작목반과 부락총회를 구성하도록 하면서 농민 주도의 부락개발운동을 전개하도록 추동하고 있었다. 災害委는 정부정책에 의해 피폐화되고 있었던 농민과 광부들이 직접 신협과 소비조합의 설립·운영을 통해 당시 만연해 있던 고리채문제와 중간상인의 횡포 등을 극복해 나가도록 하였다. 1970년대 전반 災害委가 주도한 농촌지역의 신협운동은 부락개발운동에 기반하였으며, 이들의 협동조합론은 독일의 라이파이젠 계통의 신협운동에 기반한 캐나다의 안티고니쉬운동에서 영향을 받았다. 한편, 1970년대 초부터 새마을운동의 전개에 따라 각 부락마다 구판장이 설립되고 있었다. 당시 부락개발운동에 의해서도 각 부락마다 작목반과 부락총회가 운영하는 부녀구판장, 그리고 신협의 부대사업으로 구판장이 운영되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 신협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각 부락의 구판장은 신협의 부대사업으로 점차 통일되어 갔으며, ‘공산품의 파이프라인’적 성격을 가지고 운영되었다. 원주그룹은 1970년대 후반 광산소비조합을 육성하면서 소비조합론에 대한 자체 인식을 심화시켜 나갔으며, 1970년대 말 농촌소비조합 육성을 위한 시도로 나아갔다 1979년 초 원주그룹은 구판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농촌신협을 중심으로 農消協을 결성토록 추동하는 한편, 이의 자립성에 기반해 농촌소비조합을 지도?운영해 나가면서 단위조합의 소비조합에 물품을 공급하도록 운영자금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나갔다. 그러나 農消協은 항상적인 운영자금의 부족 등으로 자체적인 운영과 단위조합에 대한 지도가 극히 어려워져 갔으며, 그 결과 社開委가 직접 그 운영에 참여하는 결과로 나아갔다. 1984년 7월 農消協은 재정자립을 위한 숙원사업이었던 직매점인 ‘밝음슈퍼’를 개설·운영하는 한편, 소협중앙회를 중심으로 농촌·광산신협에서 농촌·광산소비조합을 독립시키고자 하였다. 농촌소비조합은 별도의 창립총회를 통해 독립되어 나갔으나 광산소비조합은 한국노총 소속으로 잔류하면서 독립에 이르지 못하였다. 1970년대 원주그룹은 부락개발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면서 성장과 개발중심의 경제정책 하에서 급속히 붕괴되어 가는 농촌지역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이러한 문제들이 농민뿐만 아니라 도시민들의 삶도 황폐하게 만든다는 점과 지속적으로 자연환경이 파괴되면서 인간 본연의 삶의 조건이 악화된다는 점 등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70년대 후반 원주그룹은 1970년대 초 형성된 민중의 생존권 실현을 위한 ‘생명’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근대성에 기반한 박정희정권의 개발주의와 ‘생산력주의’에 대한 근본적 성찰, 노자사상과 동학사상 등에 주목하면서 탈근대론적인 ...

주제어

#원주그룹 제2차 바티칸공의회 재해대책사업위원회 새마을운동 부락개발운동 협동조합운동 신협운동 소비조합운동(생협운동) 광산소비조합협의회 농촌소비조합협의회 생명운동 한 살림운동 

학위논문 정보

저자 김소남
학위수여기관 연세대학교 대학원
학위구분 국내박사
학과 사학과
지도교수 김성보
발행연도 2014
총페이지 xi, 486 p.
키워드 원주그룹 제2차 바티칸공의회 재해대책사업위원회 새마을운동 부락개발운동 협동조합운동 신협운동 소비조합운동(생협운동) 광산소비조합협의회 농촌소비조합협의회 생명운동 한 살림운동
언어 kor
원문 URL http://www.riss.kr/link?id=T13435636&outLink=K
정보원 한국교육학술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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