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지리교육의 시작은 신교육의 태동기인 구한말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지리과”란 교과목은 1885년에 설립된 배재학당과 1886년에 설립된 육영공원에서 주요 과목의 하나로 강의가 시작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화기가 우리나라 지리교육사의 천이점(遷移點)으로서, 근대적 학교교육을 통한 계몽지리적 지식의 전달에 입각해 세계지리 및 한국지리의 소개에 중점을 두어, 국민들의 애국심을 기르고 국제적인 시야를 확대하는 데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면, 일제강점기는 식민통치의 정당화와 한국인의 민족의식의...
우리나라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지리교육의 시작은 신교육의 태동기인 구한말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지리과”란 교과목은 1885년에 설립된 배재학당과 1886년에 설립된 육영공원에서 주요 과목의 하나로 강의가 시작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화기가 우리나라 지리교육사의 천이점(遷移點)으로서, 근대적 학교교육을 통한 계몽지리적 지식의 전달에 입각해 세계지리 및 한국지리의 소개에 중점을 두어, 국민들의 애국심을 기르고 국제적인 시야를 확대하는 데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면, 일제강점기는 식민통치의 정당화와 한국인의 민족의식의 붕괴를 위해 열등의식ㆍ예속의식 등을 주입시키는 데 활용하거나, 경제적 수탈 및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왜곡 및 변질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광복 이후 한국의 지리교육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지리교육의 실제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수업의 계획단계에서 교사가 작성하는 수업지도안을 활용하여 『조선의교육연구』에 수록된 자료를 중심으로 지리교수의 내용과 방법을 살펴보았다. 『조선의교육연구』가 갖는 일제 당국의 관변잡지로서의 성격에 의해, 여기에 수록된 내용은 지극히 모범적인 사례로서 보통학교에서 조선인 학생들이 받았던 보편적인 지리교육의 실제와는 다소 괴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기관인 경성사범학교가 당시 초등교육의 교육연구소로 기능했다는 점, 경성사범학교에서 실시된 연구수업 등에 전국 각지의 교원들이 참관하였다는 점 등을 통해 경성사범학교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사실로부터 일제 당시의 수업 실제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수업지도안은 히라타 구라타(平田庫太), 오이시 운페이(大石運平), 이성근의 3명에 의해 모두 작성되었으며, 이들 3명은 모두 경성사범학교 부속학교 훈도라는 점에서 본 연구에 활용된 수업지도안은 주로 재조일본인 학생들과 일부 조선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 연구를 통해 살펴본, 1928년부터 1937년까지의 초등교육에서 이루어진 지리교육의 실천적 모습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학습자 본위의 흥미있는 수업을 유도하였다. 둘째, 독자학습을 통한 아동의 주도적인 학습을 시도하였다. 셋째, 제재의 향토화를 통한 향토지리교육을 중시하였다. 넷째, 수업의 제재를 취급함에 있어, 자연과 인문과의 관계를 고찰하는 측면, 즉 지인상관의 지리교수가 강화되었다. 다섯째, 지리작업, 즉 실습이 장려되었다. 여섯째, 문답식 수업에서 고찰력 향상을 도모한 발문방법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평가는 고찰력, 독도력, 실습력, 기억 및 이해도의 4가지 준거를 통하여, 지필에 의한 평가와 평소 관찰에 의한 평가가 병행되었다. 그러나 수업지도안에 나타난 제재관 등을 통해 교사의 제국주의적 신념이 수업에 개입될 요지가 있음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일례로 위치학습에서는 일본의 제도(帝都)가 있는 간토지방을 우선시 한다거나, 조선과의 관계적 위치를 취급함에 있어 ‘황궁요배’의 방향으로써 설명한 경우, 만주국의 학습에서는 만주사변ㆍ중일전쟁 등 일본의 대륙침략적 전쟁수행을 일본의 자위를 위한 방어적 전쟁으로 연결시키고 대동아 안정을 위한 일본의 노력으로 만주국이 건국되었다는 등의 인식이 제재관에 기재됨을 통해서, 수업에서도 이러한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주입시켰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지리교육의 시작은 신교육의 태동기인 구한말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지리과”란 교과목은 1885년에 설립된 배재학당과 1886년에 설립된 육영공원에서 주요 과목의 하나로 강의가 시작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화기가 우리나라 지리교육사의 천이점(遷移點)으로서, 근대적 학교교육을 통한 계몽지리적 지식의 전달에 입각해 세계지리 및 한국지리의 소개에 중점을 두어, 국민들의 애국심을 기르고 국제적인 시야를 확대하는 데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면, 일제강점기는 식민통치의 정당화와 한국인의 민족의식의 붕괴를 위해 열등의식ㆍ예속의식 등을 주입시키는 데 활용하거나, 경제적 수탈 및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왜곡 및 변질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광복 이후 한국의 지리교육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지리교육의 실제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수업의 계획단계에서 교사가 작성하는 수업지도안을 활용하여 『조선의교육연구』에 수록된 자료를 중심으로 지리교수의 내용과 방법을 살펴보았다. 『조선의교육연구』가 갖는 일제 당국의 관변잡지로서의 성격에 의해, 여기에 수록된 내용은 지극히 모범적인 사례로서 보통학교에서 조선인 학생들이 받았던 보편적인 지리교육의 실제와는 다소 괴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기관인 경성사범학교가 당시 초등교육의 교육연구소로 기능했다는 점, 경성사범학교에서 실시된 연구수업 등에 전국 각지의 교원들이 참관하였다는 점 등을 통해 경성사범학교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사실로부터 일제 당시의 수업 실제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수업지도안은 히라타 구라타(平田庫太), 오이시 운페이(大石運平), 이성근의 3명에 의해 모두 작성되었으며, 이들 3명은 모두 경성사범학교 부속학교 훈도라는 점에서 본 연구에 활용된 수업지도안은 주로 재조일본인 학생들과 일부 조선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 연구를 통해 살펴본, 1928년부터 1937년까지의 초등교육에서 이루어진 지리교육의 실천적 모습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학습자 본위의 흥미있는 수업을 유도하였다. 둘째, 독자학습을 통한 아동의 주도적인 학습을 시도하였다. 셋째, 제재의 향토화를 통한 향토지리교육을 중시하였다. 넷째, 수업의 제재를 취급함에 있어, 자연과 인문과의 관계를 고찰하는 측면, 즉 지인상관의 지리교수가 강화되었다. 다섯째, 지리작업, 즉 실습이 장려되었다. 여섯째, 문답식 수업에서 고찰력 향상을 도모한 발문방법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평가는 고찰력, 독도력, 실습력, 기억 및 이해도의 4가지 준거를 통하여, 지필에 의한 평가와 평소 관찰에 의한 평가가 병행되었다. 그러나 수업지도안에 나타난 제재관 등을 통해 교사의 제국주의적 신념이 수업에 개입될 요지가 있음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일례로 위치학습에서는 일본의 제도(帝都)가 있는 간토지방을 우선시 한다거나, 조선과의 관계적 위치를 취급함에 있어 ‘황궁요배’의 방향으로써 설명한 경우, 만주국의 학습에서는 만주사변ㆍ중일전쟁 등 일본의 대륙침략적 전쟁수행을 일본의 자위를 위한 방어적 전쟁으로 연결시키고 대동아 안정을 위한 일본의 노력으로 만주국이 건국되었다는 등의 인식이 제재관에 기재됨을 통해서, 수업에서도 이러한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주입시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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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지리수업 수업지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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