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통일신라시대 여러 매장방식 중 특수성이 많은 화장묘에 관한 연구이다. 통일신라시대 화장묘는 다른 시대에 비해 유적에서 확인된 예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인 연구가 미흡하였다. 이는 화장묘의 단순한 형태적 구조와 기년자료 및 인식의 부족으로 인해 판정기준이 불명확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국민들의 화장에 대한 관심증가와 유적 내에서 확인된 화장묘 수의 증가로 인해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자료와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통일신라시대 화장묘의 입지와 구조유형, 그리고 문헌자료를 통한 화장 추이 등을 분석하여 그 세부적인 특징과 지역성을 파악하였다. 이를 토대로 화장묘의 조성배경과 변천과정 및 피장자의 성격에 대해 종합적으로 추정해 보고자 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통일신라시대 화장묘 유적은 총 54개소로 신라 王都인 경주지역에 19개소, 地方인 강원도에서 1개소, 충청도에서 3개소, 전라도에서 1개소, 경상도에서 30개소 정도이다. 통일신라시대 화장묘의 입지는 크게 평지와 산지로 구분되며 구릉정상부, 구릉능선부, 구릉사면부, 구릉말단부로 세분된다. 왕도의 화장묘는 평지와 산지에서 확인되나 대부분 산지에 위치하며 구릉사면부의 비중이 높다. 지방의 화장묘는 산지에서 확인되며 구릉정상부와 구릉사면부의 비중이 높다. 그리고 군집양상은 두 지역 모두 1 ∼ 2기 정도 단독으로 조성된 경우와 5기 이상 집단을 형성하여 조성한 경우가 확인된다. 통일신라시대 화장묘의 구조유형은 각 지역에서 확인된 예를 분석하여 6가지로 분류하였다. 크게 단일형(...
본 논문은 통일신라시대 여러 매장방식 중 특수성이 많은 화장묘에 관한 연구이다. 통일신라시대 화장묘는 다른 시대에 비해 유적에서 확인된 예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인 연구가 미흡하였다. 이는 화장묘의 단순한 형태적 구조와 기년자료 및 인식의 부족으로 인해 판정기준이 불명확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국민들의 화장에 대한 관심증가와 유적 내에서 확인된 화장묘 수의 증가로 인해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자료와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통일신라시대 화장묘의 입지와 구조유형, 그리고 문헌자료를 통한 화장 추이 등을 분석하여 그 세부적인 특징과 지역성을 파악하였다. 이를 토대로 화장묘의 조성배경과 변천과정 및 피장자의 성격에 대해 종합적으로 추정해 보고자 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통일신라시대 화장묘 유적은 총 54개소로 신라 王都인 경주지역에 19개소, 地方인 강원도에서 1개소, 충청도에서 3개소, 전라도에서 1개소, 경상도에서 30개소 정도이다. 통일신라시대 화장묘의 입지는 크게 평지와 산지로 구분되며 구릉정상부, 구릉능선부, 구릉사면부, 구릉말단부로 세분된다. 왕도의 화장묘는 평지와 산지에서 확인되나 대부분 산지에 위치하며 구릉사면부의 비중이 높다. 지방의 화장묘는 산지에서 확인되며 구릉정상부와 구릉사면부의 비중이 높다. 그리고 군집양상은 두 지역 모두 1 ∼ 2기 정도 단독으로 조성된 경우와 5기 이상 집단을 형성하여 조성한 경우가 확인된다. 통일신라시대 화장묘의 구조유형은 각 지역에서 확인된 예를 분석하여 6가지로 분류하였다. 크게 단일형(Ⅰ형)과 이중형(Ⅱ형)으로 구분되며 단일형인 토광형(ⅠA), 토기형(ⅠB), 석곽형(ⅠC), 이중형인 석관형(ⅡA), 토기형(ⅡB), 석함형(ⅡC)으로 세분된다. 통일신라시대 화장묘에 안치된 장골기는 왕도와 지방에서 유개완, 유개합, 유개대부완 등 공통적으로 사용된 기종이 사용되었으나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왕도지역에서는 專用장골기인 연결고리유개호와 고급용기인 연유도기를 사용한 예가 있다. 이와 달리 지방지역에서는 대체로 생활용기를 장골기로 轉用하여 사용한 예가 많다. 그리고 장골기의 보호 덮개로 토기류, 기와류, 석재류, 전류 등이 사용되었는데, 그 중 건축부재인 무문전과 기와를 사용한 점은 당시 무덤을 ‘死者의 집’이라 보아온 관념과 연관성이 있다고 보여 진다. 문헌자료인 『三國史記』, 『三國遺事』와 여러 金石文을 통해 신라시대의 화장 추이를 분석한 결과, 국왕 8명, 승려 5명, 육두품 2명으로 총 15명이 葬法으로 화장을 선택하여 실시한 점이 확인된다. 이러한 분석결과 통일신라시대 화장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화장묘의 조성배경은 불교적인 요인을 비롯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사회 전반적인 요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문헌기록을 보면 後孫이 없는 王族의 경우, 火葬을 할 것을 遺言으로 남긴 경우, 疾病으로 인해 薨去한 경우, 개인의 종교관 및 後孫이 佛敎를 신봉하여 火葬을 실시한 경우로 구분된다. 이처럼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장이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개인이 장법을 선택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시행되었다기보다는 특수한 상황일 경우 필요에 의해 선택적으로 행해진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화장묘의 조성 또한 이와 함께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화장묘의 변천과정은 6세기 후엽 또는 7세기대에 들어와 왕도에서 화장묘가 등장하며, 8세기대에 다양한 구조유형과 專用장골기가 확인되어 이 시기에 화장이 성행하였음을 추정된다. 또한 8 ∼ 9세기대에 들어와 지방까지 화장묘의 조성이 확대되었다. 화장묘의 구조 및 장골기의 재질 등에 있어 8세기 후엽부터는 왕도와 지방 간 차이가 나타나며, 9세기대에 들어오면서 그 차이가 더욱 깊어졌다고 볼 수 있다. 화장묘가 일정한 간격으로 유지하면서 군집한 예가 지방에 분포하는 점을 통해 지방에서 화장묘를 군집하여 조성하는 모습은 9세기 특징으로 보인다. 피장자의 성격은 문헌기록을 보면 왕, 승려, 육두품 계층으로 요약된다. 본 연구에서 장법과 화장묘의 구조 및 장골기의 구성, 인골 출토여부를 분석한 결과 일반민이 아닌 당시 일정 이상의 경제력과 신분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유력층으로 추정되며, 문헌기록과 인골 분석자료를 통해 당시 남녀구분 없이 화장을 실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본 논문은 통일신라시대 여러 매장방식 중 특수성이 많은 화장묘에 관한 연구이다. 통일신라시대 화장묘는 다른 시대에 비해 유적에서 확인된 예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인 연구가 미흡하였다. 이는 화장묘의 단순한 형태적 구조와 기년자료 및 인식의 부족으로 인해 판정기준이 불명확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국민들의 화장에 대한 관심증가와 유적 내에서 확인된 화장묘 수의 증가로 인해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자료와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통일신라시대 화장묘의 입지와 구조유형, 그리고 문헌자료를 통한 화장 추이 등을 분석하여 그 세부적인 특징과 지역성을 파악하였다. 이를 토대로 화장묘의 조성배경과 변천과정 및 피장자의 성격에 대해 종합적으로 추정해 보고자 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통일신라시대 화장묘 유적은 총 54개소로 신라 王都인 경주지역에 19개소, 地方인 강원도에서 1개소, 충청도에서 3개소, 전라도에서 1개소, 경상도에서 30개소 정도이다. 통일신라시대 화장묘의 입지는 크게 평지와 산지로 구분되며 구릉정상부, 구릉능선부, 구릉사면부, 구릉말단부로 세분된다. 왕도의 화장묘는 평지와 산지에서 확인되나 대부분 산지에 위치하며 구릉사면부의 비중이 높다. 지방의 화장묘는 산지에서 확인되며 구릉정상부와 구릉사면부의 비중이 높다. 그리고 군집양상은 두 지역 모두 1 ∼ 2기 정도 단독으로 조성된 경우와 5기 이상 집단을 형성하여 조성한 경우가 확인된다. 통일신라시대 화장묘의 구조유형은 각 지역에서 확인된 예를 분석하여 6가지로 분류하였다. 크게 단일형(Ⅰ형)과 이중형(Ⅱ형)으로 구분되며 단일형인 토광형(ⅠA), 토기형(ⅠB), 석곽형(ⅠC), 이중형인 석관형(ⅡA), 토기형(ⅡB), 석함형(ⅡC)으로 세분된다. 통일신라시대 화장묘에 안치된 장골기는 왕도와 지방에서 유개완, 유개합, 유개대부완 등 공통적으로 사용된 기종이 사용되었으나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왕도지역에서는 專用장골기인 연결고리유개호와 고급용기인 연유도기를 사용한 예가 있다. 이와 달리 지방지역에서는 대체로 생활용기를 장골기로 轉用하여 사용한 예가 많다. 그리고 장골기의 보호 덮개로 토기류, 기와류, 석재류, 전류 등이 사용되었는데, 그 중 건축부재인 무문전과 기와를 사용한 점은 당시 무덤을 ‘死者의 집’이라 보아온 관념과 연관성이 있다고 보여 진다. 문헌자료인 『三國史記』, 『三國遺事』와 여러 金石文을 통해 신라시대의 화장 추이를 분석한 결과, 국왕 8명, 승려 5명, 육두품 2명으로 총 15명이 葬法으로 화장을 선택하여 실시한 점이 확인된다. 이러한 분석결과 통일신라시대 화장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화장묘의 조성배경은 불교적인 요인을 비롯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사회 전반적인 요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문헌기록을 보면 後孫이 없는 王族의 경우, 火葬을 할 것을 遺言으로 남긴 경우, 疾病으로 인해 薨去한 경우, 개인의 종교관 및 後孫이 佛敎를 신봉하여 火葬을 실시한 경우로 구분된다. 이처럼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장이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개인이 장법을 선택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시행되었다기보다는 특수한 상황일 경우 필요에 의해 선택적으로 행해진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화장묘의 조성 또한 이와 함께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화장묘의 변천과정은 6세기 후엽 또는 7세기대에 들어와 왕도에서 화장묘가 등장하며, 8세기대에 다양한 구조유형과 專用장골기가 확인되어 이 시기에 화장이 성행하였음을 추정된다. 또한 8 ∼ 9세기대에 들어와 지방까지 화장묘의 조성이 확대되었다. 화장묘의 구조 및 장골기의 재질 등에 있어 8세기 후엽부터는 왕도와 지방 간 차이가 나타나며, 9세기대에 들어오면서 그 차이가 더욱 깊어졌다고 볼 수 있다. 화장묘가 일정한 간격으로 유지하면서 군집한 예가 지방에 분포하는 점을 통해 지방에서 화장묘를 군집하여 조성하는 모습은 9세기 특징으로 보인다. 피장자의 성격은 문헌기록을 보면 왕, 승려, 육두품 계층으로 요약된다. 본 연구에서 장법과 화장묘의 구조 및 장골기의 구성, 인골 출토여부를 분석한 결과 일반민이 아닌 당시 일정 이상의 경제력과 신분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유력층으로 추정되며, 문헌기록과 인골 분석자료를 통해 당시 남녀구분 없이 화장을 실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AI-Helper는 부적절한 답변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