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湖南’이라는 別稱과 관련된 연구이다. ‘湖南’이라는 名稱이 形成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탐구가 첫 과제이고, 두 번째 과제는 ‘湖南’이 呼名될 때 話者들이 가지고 있는 호남에 대한 인식을 살피는 것이다. Ⅱ장에서 ‘호남’ 명칭의 시원과 변화 과정에 대해 검토하였다. 먼저 ‘호남’이 등장하기 이전, 지금의 호남 지역에 해당하는 ‘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지역과 연관이 있는 역사적 존재로는 馬韓과 百濟‧後百濟가 있는데, 마한의 경우 일찍이 신라 최치원이 ‘마한=고구려’설을 주장한 이래 대부분의 사서에서 그의 견해가 계승되었다. 마한을 백제가 아닌 고구려와 연결시키는 견해는 고려는 물론 조선 초기까지도 지속되었다. 백제와 후백제의 경우는 고려 시대 지식층에게 대체로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특히 왕건에게 끝까지 버텼던 후백제에 대한 불만이 상존하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하여 후백제에 대한 감정을 전라도-호남 지역에 그대로 투영하는 경우는 찾기 어려웠다. 반면 조선 시대에는 백제 古土였던 호남 지역 인심이 좋지 않다는 정보를 확대, 재생산해 나갔다. 한편 고려 성종 14년에 광역 행정 구역 단위로 ‘道’가 처음 등장하는데, 지금의 호남 지역은 江南道와 海陽道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고려 ...
본 논문은 ‘湖南’이라는 別稱과 관련된 연구이다. ‘湖南’이라는 名稱이 形成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탐구가 첫 과제이고, 두 번째 과제는 ‘湖南’이 呼名될 때 話者들이 가지고 있는 호남에 대한 인식을 살피는 것이다. Ⅱ장에서 ‘호남’ 명칭의 시원과 변화 과정에 대해 검토하였다. 먼저 ‘호남’이 등장하기 이전, 지금의 호남 지역에 해당하는 ‘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지역과 연관이 있는 역사적 존재로는 馬韓과 百濟‧後百濟가 있는데, 마한의 경우 일찍이 신라 최치원이 ‘마한=고구려’설을 주장한 이래 대부분의 사서에서 그의 견해가 계승되었다. 마한을 백제가 아닌 고구려와 연결시키는 견해는 고려는 물론 조선 초기까지도 지속되었다. 백제와 후백제의 경우는 고려 시대 지식층에게 대체로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특히 왕건에게 끝까지 버텼던 후백제에 대한 불만이 상존하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하여 후백제에 대한 감정을 전라도-호남 지역에 그대로 투영하는 경우는 찾기 어려웠다. 반면 조선 시대에는 백제 古土였던 호남 지역 인심이 좋지 않다는 정보를 확대, 재생산해 나갔다. 한편 고려 성종 14년에 광역 행정 구역 단위로 ‘道’가 처음 등장하는데, 지금의 호남 지역은 江南道와 海陽道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고려 현종 9년에는 지방 제도를 5도 양계로 개편하는데, 이때 드디어 전라도가 국가 공식 행정 지명으로 처음 사용됐다. 한반도 서남부 지역이 드디어 전라도로 이름으로 區劃되면서 이 지역을 부르는 별칭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호남이다. 高麗史 지리지와 世宗實錄 지리지를 살펴보면 고려 시대 다양한 지명의 별칭이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고려 초부터 이름을 부르는 대신 지명을 이용해 사람을 호명하기 시작하는데, 바로 本貫制의 유행이다. 또 성종 10년의 지방 제도 정비 때 여러 지역에 별칭이 생겼는데, 그렇다면 고려 초에 이미 국호에 대한 별칭, 지방 읍호에 대한 별칭, 인명에 대한 별칭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별칭이 활용될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당시 별칭이 등장하게 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조건이 맞아 떨어진 때문이었다. 한편 기존 연구자들은 고려 말 탁광무와 조준 등의 문집에서 처음으로 ‘호남’이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고려 고종 대 천태종 승려였던 靜明國師 天因이 1240년 천관산 탐방을 갈 즈음에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시에 ‘호남’이 등장하고 있다. 또한 1309년으로 추정되는 고려 문신 이성의 작품 속에서도 호남이 등장하였다. 천인이나 이성의 작품은 탁광무의 시보다 1세기~1세기 半 가량 앞선 것으로, 13세기 중엽 고려의 민간에서 호남 별칭의 사용이 꽤 활발했을 것으로 보았다. Ⅲ장에서는 ‘호남’의 기준과 범위를 알아보았다. 먼저 ‘湖南’에서 ‘湖’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字義를 분석하였다. 조선 시대 학자들을 비롯하여 현재까지도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벽골제를 호남의 기준점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벽골제의 운영 상태를 조사해 본 결과, 호남 명칭이 만들어지던 고려부터 조선까지도 벽골제는 저수지로서 정상적인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전국을 몇 개의 광역 단위로 구분하는데 저수지가 산이나 강, 고개 같은 지형을 누르고 벽골제가 끼어들 여지는 크지 않았다. ‘湖’를 꼭 호수로만 볼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江’이 호남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그런데 근래 호남의 기준을 금강으로 삼는 연구가 등장하였는데, 그 주요 근거는 錦江의 다른 이름이 湖江이라 호남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강=호강’설은 고려나 조선 시대 사료 그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한편 우리나라 고대 자료에서는 ‘湖’라는 용어 자체가 거의 나오지 않을 정도로 ‘호’가 친숙한 존재는 아니었다. 고려 이후 조금씩 사용되기 시작한 ‘호’는 몇몇 자료에서 ‘강’으로 혼용되는 사례가 발견됐다. 高麗史에서는 안동 지역 낙동강을 映湖라고 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漢江을 南湖‧東湖‧西湖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호수를 강으로 바꿔 적는 것은 특히 물놀이를 즐기며 시를 읊을 수 있을 정도의 선비들에게서 유행하였다. ‘湖’와 ‘江’의 혼용은 나름대로 언어의 시적 유희였으며, 언어 본연의 의미보다 감성적인 면이 크게 작용하였다. 고려 성종 때 강남도와 해양도가 현종 때 전라도가 되었는데, 이때 전라북도를 지칭하던 강남도는 그 이름이 소멸되지 않고 살아남아 이후 ‘호남’으로 탈바꿈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고려 성종 때 영남도‧영동도‧산남도가 후에 경상도로 합쳐지는데 이때 영남이라는 이름이 살아남아 별칭으로 사용된 경우가 그 사례이다. 또한 고지도를 통한 호남 분석을 시도해 보았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인 「疆理圖」의 조선 부분을 확대해 보면 당시 한반도에 대한 자연 지형 인식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국가라는 큰 단위를 놓고 구분할 때 생각할 수 있는 자연 지형물이라는 것은 山脈과 江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이후 대부분의 지도에서 국가를 광역 단위로 구분하는 기준으로 자연 地形을 활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Ⅳ장에서는 ‘호남’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특히 호남이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호명되는 것과 관련하여 몇 가지 검토하였다. 朝鮮王朝實錄의 경우 세종 때에 비로소 호남이 처음 등장했으며, 호남 별칭의 사용 빈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선조 대부터였다. 특히 선조 대에서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하여 그 이후 호남의 사용빈도가 급격히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공적인 분야에서 ‘호남’이 사용되는 경우도 조사해 보았는데,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전라도’라는 이름으로 임명되던 관직명에 ‘호남’을 붙이는 경우를 종종 찾아볼 수 있었다. 비공식 명칭인 호남이 공식적인 곳에 사용되는 경우는 관직명 이외에도 관청이름, 서적이름 등 다양한 분야로 확대됐다. 선조 이후 호남과 같은 별칭의 사용이 증가세를 보이게 된 것은 우선 임진왜란의 영향이 컸다. 또 16세기 在地士林들이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고 지역 정체성을 강화해 나가는 움직임을 보이는 데, 이 역시 선조 이후 별칭 사용이 증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고려나 조선 시대 ‘호남’을 호명하고 활용하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 분야로 나누어 보았다. 하나는 관념적 맥락에서의 ‘호남’ 인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장소적 맥락에서의 ‘호남’ 인식이었다. 전자의 경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풍수지리설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氣質論 및 人性論이다. 후자의 경우 ‘호남’에 대한 구체적인 공간 인식과 호남의 경제적인 가치나 특질 등이 전부 포함 된다.
본 논문은 ‘湖南’이라는 別稱과 관련된 연구이다. ‘湖南’이라는 名稱이 形成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탐구가 첫 과제이고, 두 번째 과제는 ‘湖南’이 呼名될 때 話者들이 가지고 있는 호남에 대한 인식을 살피는 것이다. Ⅱ장에서 ‘호남’ 명칭의 시원과 변화 과정에 대해 검토하였다. 먼저 ‘호남’이 등장하기 이전, 지금의 호남 지역에 해당하는 ‘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지역과 연관이 있는 역사적 존재로는 馬韓과 百濟‧後百濟가 있는데, 마한의 경우 일찍이 신라 최치원이 ‘마한=고구려’설을 주장한 이래 대부분의 사서에서 그의 견해가 계승되었다. 마한을 백제가 아닌 고구려와 연결시키는 견해는 고려는 물론 조선 초기까지도 지속되었다. 백제와 후백제의 경우는 고려 시대 지식층에게 대체로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특히 왕건에게 끝까지 버텼던 후백제에 대한 불만이 상존하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하여 후백제에 대한 감정을 전라도-호남 지역에 그대로 투영하는 경우는 찾기 어려웠다. 반면 조선 시대에는 백제 古土였던 호남 지역 인심이 좋지 않다는 정보를 확대, 재생산해 나갔다. 한편 고려 성종 14년에 광역 행정 구역 단위로 ‘道’가 처음 등장하는데, 지금의 호남 지역은 江南道와 海陽道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고려 현종 9년에는 지방 제도를 5도 양계로 개편하는데, 이때 드디어 전라도가 국가 공식 행정 지명으로 처음 사용됐다. 한반도 서남부 지역이 드디어 전라도로 이름으로 區劃되면서 이 지역을 부르는 별칭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호남이다. 高麗史 지리지와 世宗實錄 지리지를 살펴보면 고려 시대 다양한 지명의 별칭이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고려 초부터 이름을 부르는 대신 지명을 이용해 사람을 호명하기 시작하는데, 바로 本貫制의 유행이다. 또 성종 10년의 지방 제도 정비 때 여러 지역에 별칭이 생겼는데, 그렇다면 고려 초에 이미 국호에 대한 별칭, 지방 읍호에 대한 별칭, 인명에 대한 별칭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별칭이 활용될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당시 별칭이 등장하게 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조건이 맞아 떨어진 때문이었다. 한편 기존 연구자들은 고려 말 탁광무와 조준 등의 문집에서 처음으로 ‘호남’이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고려 고종 대 천태종 승려였던 靜明國師 天因이 1240년 천관산 탐방을 갈 즈음에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시에 ‘호남’이 등장하고 있다. 또한 1309년으로 추정되는 고려 문신 이성의 작품 속에서도 호남이 등장하였다. 천인이나 이성의 작품은 탁광무의 시보다 1세기~1세기 半 가량 앞선 것으로, 13세기 중엽 고려의 민간에서 호남 별칭의 사용이 꽤 활발했을 것으로 보았다. Ⅲ장에서는 ‘호남’의 기준과 범위를 알아보았다. 먼저 ‘湖南’에서 ‘湖’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字義를 분석하였다. 조선 시대 학자들을 비롯하여 현재까지도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벽골제를 호남의 기준점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벽골제의 운영 상태를 조사해 본 결과, 호남 명칭이 만들어지던 고려부터 조선까지도 벽골제는 저수지로서 정상적인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전국을 몇 개의 광역 단위로 구분하는데 저수지가 산이나 강, 고개 같은 지형을 누르고 벽골제가 끼어들 여지는 크지 않았다. ‘湖’를 꼭 호수로만 볼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江’이 호남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그런데 근래 호남의 기준을 금강으로 삼는 연구가 등장하였는데, 그 주요 근거는 錦江의 다른 이름이 湖江이라 호남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강=호강’설은 고려나 조선 시대 사료 그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한편 우리나라 고대 자료에서는 ‘湖’라는 용어 자체가 거의 나오지 않을 정도로 ‘호’가 친숙한 존재는 아니었다. 고려 이후 조금씩 사용되기 시작한 ‘호’는 몇몇 자료에서 ‘강’으로 혼용되는 사례가 발견됐다. 高麗史에서는 안동 지역 낙동강을 映湖라고 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漢江을 南湖‧東湖‧西湖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호수를 강으로 바꿔 적는 것은 특히 물놀이를 즐기며 시를 읊을 수 있을 정도의 선비들에게서 유행하였다. ‘湖’와 ‘江’의 혼용은 나름대로 언어의 시적 유희였으며, 언어 본연의 의미보다 감성적인 면이 크게 작용하였다. 고려 성종 때 강남도와 해양도가 현종 때 전라도가 되었는데, 이때 전라북도를 지칭하던 강남도는 그 이름이 소멸되지 않고 살아남아 이후 ‘호남’으로 탈바꿈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고려 성종 때 영남도‧영동도‧산남도가 후에 경상도로 합쳐지는데 이때 영남이라는 이름이 살아남아 별칭으로 사용된 경우가 그 사례이다. 또한 고지도를 통한 호남 분석을 시도해 보았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인 「疆理圖」의 조선 부분을 확대해 보면 당시 한반도에 대한 자연 지형 인식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국가라는 큰 단위를 놓고 구분할 때 생각할 수 있는 자연 지형물이라는 것은 山脈과 江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이후 대부분의 지도에서 국가를 광역 단위로 구분하는 기준으로 자연 地形을 활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Ⅳ장에서는 ‘호남’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특히 호남이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호명되는 것과 관련하여 몇 가지 검토하였다. 朝鮮王朝實錄의 경우 세종 때에 비로소 호남이 처음 등장했으며, 호남 별칭의 사용 빈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선조 대부터였다. 특히 선조 대에서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하여 그 이후 호남의 사용빈도가 급격히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공적인 분야에서 ‘호남’이 사용되는 경우도 조사해 보았는데,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전라도’라는 이름으로 임명되던 관직명에 ‘호남’을 붙이는 경우를 종종 찾아볼 수 있었다. 비공식 명칭인 호남이 공식적인 곳에 사용되는 경우는 관직명 이외에도 관청이름, 서적이름 등 다양한 분야로 확대됐다. 선조 이후 호남과 같은 별칭의 사용이 증가세를 보이게 된 것은 우선 임진왜란의 영향이 컸다. 또 16세기 在地士林들이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고 지역 정체성을 강화해 나가는 움직임을 보이는 데, 이 역시 선조 이후 별칭 사용이 증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고려나 조선 시대 ‘호남’을 호명하고 활용하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 분야로 나누어 보았다. 하나는 관념적 맥락에서의 ‘호남’ 인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장소적 맥락에서의 ‘호남’ 인식이었다. 전자의 경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풍수지리설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氣質論 및 人性論이다. 후자의 경우 ‘호남’에 대한 구체적인 공간 인식과 호남의 경제적인 가치나 특질 등이 전부 포함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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