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기 이후 차의 정신적 가치와 그 역할은 하나의 문화를 이루게 되었고, 시대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이면서 발전하였으며, 이를 차 문화라 부른다. 차 문화는 인류역사상 차과 관련된 물질적 ‧ 정신적 면이 총 집합되어있다. 차 그림[茶畵]은 차 문화를 이루고 있는 배경과 요소들이 회화의 제재로서 선택되어 그려진 그림이다.
현전하는 최초의 다화는 중국 唐代에 제작된 다화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다화가 가장 이른 시기의 다화이다. 조선 초 ‧ 중기에는 작품 수가 적지만 그 시기만의 특징을 지니며 면면히 제작되었다. 조선...
8세기 이후 차의 정신적 가치와 그 역할은 하나의 문화를 이루게 되었고, 시대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이면서 발전하였으며, 이를 차 문화라 부른다. 차 문화는 인류역사상 차과 관련된 물질적 ‧ 정신적 면이 총 집합되어있다. 차 그림[茶畵]은 차 문화를 이루고 있는 배경과 요소들이 회화의 제재로서 선택되어 그려진 그림이다.
현전하는 최초의 다화는 중국 唐代에 제작된 다화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다화가 가장 이른 시기의 다화이다. 조선 초 ‧ 중기에는 작품 수가 적지만 그 시기만의 특징을 지니며 면면히 제작되었다.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는 이전시기에 비해 훨씬 다양한 주제와 도상으로 그려지게 되며 작품 수도 많아지는데, 특히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다화가 두드러지게 제작되는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어 남송대 羅大經의『鶴林玉露』「山居篇」을 도해한 그림은 18세기 전반부터 그려졌으나 내용에 따라(혹은 그와 상관없이) 본격적으로 차를 준비하는 장면이 그려진 것은 18세기 후반부터이다. 또한 차 달이는 장면을 단독으로 그린 작품도 제작된다. 이는 차가 지닌 보편적 가치가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회화 작품의 주요 제재로서 선택되어지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동안 다화의 제작이 활발히 일어나는 현상에 주목하였다. 그동안 실제 飮茶生活을 살펴볼 수 있는 증거로서만 이해된 다화를, 작품의 예술성에 집중하여 다화가 두드러지게 등장한 제작배경과 이 시기 다화의 특징을 면밀히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에 작품의 제작배경, 주제, 도상간의 관계를 보다 유기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 다화는 그림을 둘러싼 시대적 상황과 문예사조가 민감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차는 정신을 맑고 시원하게 해주는 성질을 갖고 있어서 脫俗과 隱逸을 위한 매개체로서 즐겨지고 있었지만, 차의 보편적인 가치가 회화 작품에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작품의 제재로서 선택되는 현상은 차와 관련해서 직간접적으로 많이 노출되고 그만큼 그것에 대해 인식이 강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미루어 보면, 차 문화가 사회적으로 성행되지 않았던 시기에 다화 제작이 증가된 것은 차와 관련한 정보에 쉽게 노출 되고, 그것에 대한 강한 인식을 갖고 있던 일부 계층에 의해 주문되고, 감상되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후기, 특히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다화는 거시적인 견지에서 볼 때, 서울·경기 지역에 거주하는 北學 경향을 지닌 지식인들의 학문적 경향과 문예활동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덕무, 유득공, 성해응, 남공철 등의 인물들을 꼽을 수 있다. 이들에게서 확인되는 개방적인 학문 경향, 유연한 사고방식과 다채로운 문예활동은 17세기 서울·경기 지역 西人들의 영향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화 향유층으로 생각되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활동한 북학 경향의 지식인들은 19세기 차 문화 중흥의 주역들인 김정희, 신위, 권돈인, 허련 등의 인물들과 학문적 경향, 문예적 활동, 교유관계 등 여러 측면으로 연결되고 있어 흥미롭다.
그들의 다양한 문예활동 중 다화의 제작과 관련된 것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명말 문인들의 閑居文化를 담은 小品文에서 차와 관련된 내용을 많이 접하게 된 것, 차를 음료의 대상에서 학문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궁구하기 시작한 것과 건륭제를 기점으로 융성한 청나라의 차 문화를 직접 경험한 것들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차에 대한 인식이 강하게 형성된 결과가 다화의 제작을 촉진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후기 다화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주제적 측면에서 詩와 중국 故事를 주제로 한 작품의 비율이 높고, 도상적 측면에서는 차를 준비하는 장면이“풍로와 탕관, 다동”이라는 구성과“풍로 위에 탕관, 그 앞에 다동”이라는 포치법이 정형화 된 모습이 발견된다. 흥미로운 점은 풍로와 탕관, 다동의 행동 묘사에서 각 작가의 특정 양식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다화의 대부분은 차를 준비하는 정황이 상세하게 묘사 된 작품보다 차 마시는 장면과 차를 통해 얻어지는 情趣를 강조한 작품인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차를 준비하는 장면은 3명 이상의 雅會 장면보다 1~2명의 隱逸之士와 함께 등장하는 비율이 높았고, 차 달이는 다동이 단독으로 그려진 작품은 현재 중국 다화에서 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양상이다.
19세기 중반으로 오면서 다화는 급격히 그 수가 줄었다. 그러나 기존 제작흐름의 지속, 실제 아회나 실존 인물을 제재로 한 다화의 증가, 차와 관련된 詩와 그 정취만 담겨진 다화, 새로운 유형의 등장으로 다양한 제작 경향을 보였다.
이와 같은 고찰을 통해서 조선 후기 다화는“차가 지닌 보편적 가치와‘차에 대한 인식의 확대’라는 시대적 특수성이 드러난 회화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 다화와 차 문화와의 관계와 한·중·일 다화의 보편성과 각 나라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은 차후의 연구 과제로 남기도록 하겠다. 다화는 그 시대 문화·예술을 조명할 수 있는 하나의 시각 자료로서 관심을 가져야할 연구 제재이다.
8세기 이후 차의 정신적 가치와 그 역할은 하나의 문화를 이루게 되었고, 시대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이면서 발전하였으며, 이를 차 문화라 부른다. 차 문화는 인류역사상 차과 관련된 물질적 ‧ 정신적 면이 총 집합되어있다. 차 그림[茶畵]은 차 문화를 이루고 있는 배경과 요소들이 회화의 제재로서 선택되어 그려진 그림이다.
현전하는 최초의 다화는 중국 唐代에 제작된 다화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다화가 가장 이른 시기의 다화이다. 조선 초 ‧ 중기에는 작품 수가 적지만 그 시기만의 특징을 지니며 면면히 제작되었다.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는 이전시기에 비해 훨씬 다양한 주제와 도상으로 그려지게 되며 작품 수도 많아지는데, 특히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다화가 두드러지게 제작되는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어 남송대 羅大經의『鶴林玉露』「山居篇」을 도해한 그림은 18세기 전반부터 그려졌으나 내용에 따라(혹은 그와 상관없이) 본격적으로 차를 준비하는 장면이 그려진 것은 18세기 후반부터이다. 또한 차 달이는 장면을 단독으로 그린 작품도 제작된다. 이는 차가 지닌 보편적 가치가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회화 작품의 주요 제재로서 선택되어지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동안 다화의 제작이 활발히 일어나는 현상에 주목하였다. 그동안 실제 飮茶生活을 살펴볼 수 있는 증거로서만 이해된 다화를, 작품의 예술성에 집중하여 다화가 두드러지게 등장한 제작배경과 이 시기 다화의 특징을 면밀히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에 작품의 제작배경, 주제, 도상간의 관계를 보다 유기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 다화는 그림을 둘러싼 시대적 상황과 문예사조가 민감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차는 정신을 맑고 시원하게 해주는 성질을 갖고 있어서 脫俗과 隱逸을 위한 매개체로서 즐겨지고 있었지만, 차의 보편적인 가치가 회화 작품에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작품의 제재로서 선택되는 현상은 차와 관련해서 직간접적으로 많이 노출되고 그만큼 그것에 대해 인식이 강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미루어 보면, 차 문화가 사회적으로 성행되지 않았던 시기에 다화 제작이 증가된 것은 차와 관련한 정보에 쉽게 노출 되고, 그것에 대한 강한 인식을 갖고 있던 일부 계층에 의해 주문되고, 감상되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후기, 특히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다화는 거시적인 견지에서 볼 때, 서울·경기 지역에 거주하는 北學 경향을 지닌 지식인들의 학문적 경향과 문예활동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덕무, 유득공, 성해응, 남공철 등의 인물들을 꼽을 수 있다. 이들에게서 확인되는 개방적인 학문 경향, 유연한 사고방식과 다채로운 문예활동은 17세기 서울·경기 지역 西人들의 영향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화 향유층으로 생각되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활동한 북학 경향의 지식인들은 19세기 차 문화 중흥의 주역들인 김정희, 신위, 권돈인, 허련 등의 인물들과 학문적 경향, 문예적 활동, 교유관계 등 여러 측면으로 연결되고 있어 흥미롭다.
그들의 다양한 문예활동 중 다화의 제작과 관련된 것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명말 문인들의 閑居文化를 담은 小品文에서 차와 관련된 내용을 많이 접하게 된 것, 차를 음료의 대상에서 학문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궁구하기 시작한 것과 건륭제를 기점으로 융성한 청나라의 차 문화를 직접 경험한 것들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차에 대한 인식이 강하게 형성된 결과가 다화의 제작을 촉진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후기 다화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주제적 측면에서 詩와 중국 故事를 주제로 한 작품의 비율이 높고, 도상적 측면에서는 차를 준비하는 장면이“풍로와 탕관, 다동”이라는 구성과“풍로 위에 탕관, 그 앞에 다동”이라는 포치법이 정형화 된 모습이 발견된다. 흥미로운 점은 풍로와 탕관, 다동의 행동 묘사에서 각 작가의 특정 양식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다화의 대부분은 차를 준비하는 정황이 상세하게 묘사 된 작품보다 차 마시는 장면과 차를 통해 얻어지는 情趣를 강조한 작품인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차를 준비하는 장면은 3명 이상의 雅會 장면보다 1~2명의 隱逸之士와 함께 등장하는 비율이 높았고, 차 달이는 다동이 단독으로 그려진 작품은 현재 중국 다화에서 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양상이다.
19세기 중반으로 오면서 다화는 급격히 그 수가 줄었다. 그러나 기존 제작흐름의 지속, 실제 아회나 실존 인물을 제재로 한 다화의 증가, 차와 관련된 詩와 그 정취만 담겨진 다화, 새로운 유형의 등장으로 다양한 제작 경향을 보였다.
이와 같은 고찰을 통해서 조선 후기 다화는“차가 지닌 보편적 가치와‘차에 대한 인식의 확대’라는 시대적 특수성이 드러난 회화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 다화와 차 문화와의 관계와 한·중·일 다화의 보편성과 각 나라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은 차후의 연구 과제로 남기도록 하겠다. 다화는 그 시대 문화·예술을 조명할 수 있는 하나의 시각 자료로서 관심을 가져야할 연구 제재이다.
주제어
#茶畵 茶 茶文化 北學 晩明期 小品文 玩物 博學 燕行 山靜日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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