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위논문]포털의 뉴스 '생산성'과 공론장의 미래 : 네이버와 다음의 뉴스서비스를 중심으로 News 'productivity' of the portal & the future of public sphere : focused on Naver & Daum news service원문보기
본 연구는 포털에서 뉴스는 어떻게 다루어지고 또한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다룬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뉴스는 전통적인 ‘생산-유통-소비’의 구조를 벗어나 ‘연결’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고 뉴스의 연결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포털’이다. ‘포털이 언론인지 여부’가 부각되는 이유는 이처럼 뉴스를 둘러싼 패러다임이 빠르게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여부는 법적인 규제를 둘러싼 논란일 뿐이다. 패러다임이 변했다면, 뉴스 생산의 구조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져야 한다. 이를 위해 ‘생산’의 개념부터 새롭게 설정한다. 뉴스는 소비되며 동시에 생산된다. 뉴스의 ‘생산성’은 단순한 피드백은 아니다. 뉴스는 다른 소셜 미디어에서처럼 포털에서 극적으로 재매개되고 맥락은 재설정된다. 뉴스가 선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면서(online) 그 체증(traffic)이 중요해졌고, 포털과 언론사 두 집단 간의 연대도 달라졌다. 연구의 또 다른 축은 공론장이다. 부르주아공론장에서 ...
본 연구는 포털에서 뉴스는 어떻게 다루어지고 또한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다룬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뉴스는 전통적인 ‘생산-유통-소비’의 구조를 벗어나 ‘연결’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고 뉴스의 연결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포털’이다. ‘포털이 언론인지 여부’가 부각되는 이유는 이처럼 뉴스를 둘러싼 패러다임이 빠르게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여부는 법적인 규제를 둘러싼 논란일 뿐이다. 패러다임이 변했다면, 뉴스 생산의 구조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져야 한다. 이를 위해 ‘생산’의 개념부터 새롭게 설정한다. 뉴스는 소비되며 동시에 생산된다. 뉴스의 ‘생산성’은 단순한 피드백은 아니다. 뉴스는 다른 소셜 미디어에서처럼 포털에서 극적으로 재매개되고 맥락은 재설정된다. 뉴스가 선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면서(online) 그 체증(traffic)이 중요해졌고, 포털과 언론사 두 집단 간의 연대도 달라졌다. 연구의 또 다른 축은 공론장이다. 부르주아공론장에서 하버마스가 가장 기대한 신문의 절대적인 기능이 뉴스의 제공이라고 한다면, 뉴스의 얼개가 달라지면 그것이 거론되는 공론장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뉴스가 자꾸 ‘전통적인 틀’에서 탈출하려고 하면 공론장은 ‘잠재적이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모바일 생태계에서 그 이분성에도 불구하고 아렌트는 다시 주목되어야 한다.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연결’을 통해 새로운 ‘존재성’을 부여하는 뉴미디어들의 향연에서는 더욱 그렇다. 한국에서 공론장은 역사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끊임없이 억압하는 상부구조의 문제(손석춘), 혹은 국가의 우산 아래 국민들을 지배와 계몽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지배블록과 과다대표된 파워엘리트의 훈민적(訓民的) 모습(강명구)을 띠고 있다고 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섣부른 감은 있지만 상부구조의 저항이나 엘리트의 훈민성은 2016년 10월을 기점으로 고색창연해졌다. 정치적 의제의 결정은 시민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다. 기자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뉴스의 극히 일부이며, 그마저도 고정적이지 않다. 사회 전체의 뉴스를 만드는 것은 ‘1인’들이었다. “실재는 헐벗은 반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난다.”
본 연구는 포털에서 뉴스는 어떻게 다루어지고 또한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다룬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뉴스는 전통적인 ‘생산-유통-소비’의 구조를 벗어나 ‘연결’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고 뉴스의 연결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포털’이다. ‘포털이 언론인지 여부’가 부각되는 이유는 이처럼 뉴스를 둘러싼 패러다임이 빠르게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여부는 법적인 규제를 둘러싼 논란일 뿐이다. 패러다임이 변했다면, 뉴스 생산의 구조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져야 한다. 이를 위해 ‘생산’의 개념부터 새롭게 설정한다. 뉴스는 소비되며 동시에 생산된다. 뉴스의 ‘생산성’은 단순한 피드백은 아니다. 뉴스는 다른 소셜 미디어에서처럼 포털에서 극적으로 재매개되고 맥락은 재설정된다. 뉴스가 선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면서(online) 그 체증(traffic)이 중요해졌고, 포털과 언론사 두 집단 간의 연대도 달라졌다. 연구의 또 다른 축은 공론장이다. 부르주아공론장에서 하버마스가 가장 기대한 신문의 절대적인 기능이 뉴스의 제공이라고 한다면, 뉴스의 얼개가 달라지면 그것이 거론되는 공론장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뉴스가 자꾸 ‘전통적인 틀’에서 탈출하려고 하면 공론장은 ‘잠재적이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모바일 생태계에서 그 이분성에도 불구하고 아렌트는 다시 주목되어야 한다.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연결’을 통해 새로운 ‘존재성’을 부여하는 뉴미디어들의 향연에서는 더욱 그렇다. 한국에서 공론장은 역사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끊임없이 억압하는 상부구조의 문제(손석춘), 혹은 국가의 우산 아래 국민들을 지배와 계몽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지배블록과 과다대표된 파워엘리트의 훈민적(訓民的) 모습(강명구)을 띠고 있다고 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섣부른 감은 있지만 상부구조의 저항이나 엘리트의 훈민성은 2016년 10월을 기점으로 고색창연해졌다. 정치적 의제의 결정은 시민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다. 기자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뉴스의 극히 일부이며, 그마저도 고정적이지 않다. 사회 전체의 뉴스를 만드는 것은 ‘1인’들이었다. “실재는 헐벗은 반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난다.”
The research is on how portals deal with news and how this should be seen. With the advent of the Internet and smartphone, news has been ‘connection’ itself, beyond the traditional structure of ‘production-distribution-consumption.’ Also, ‘portals’ show connection of news clearly; the reason ‘whethe...
The research is on how portals deal with news and how this should be seen. With the advent of the Internet and smartphone, news has been ‘connection’ itself, beyond the traditional structure of ‘production-distribution-consumption.’ Also, ‘portals’ show connection of news clearly; the reason ‘whether portals are the press or not’ is highlighted is because the paradigm of news has rapidly changed. If the paradigm has changed, the perspective toward the structure of news production should be different. For this, a new concept of ‘production’ has been set; ‘productivity’ of news is not just feedback. As in other social media, news is re-mediated at portals and the context is reset. As news started to flow online, the traffic has become important, and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groups – portals and the press – has changed. Another axis of the research is public sphere. With different structure of news, the public sphere should be changed as well. The more news tries to go beyond ‘traditional framework,’ the more the public sphere should be ‘latent.’ This is why Arendt should be re-highlighted despite the dichotomy. This is more so especially for feast of new media that give new ‘existence’ existing beings through ‘connection.’ In South Korea, some consider that public sphere is the historically long-lasting problem of superstructure that continuously suppresses requirements from the bottom (Son Seok-chun), or it is appeared as a ruling bloc that considers the people as targets for control and enlightenment under the umbrella of the government or overrepresented power elite trying to teach the people (訓民的) (Kang Myeong-gu). Although it is too hasty to say, but resistance of the superstructure or the tendency of teaching the people of the elite has become old-fashioned as of October, 2016. The decision of political agenda has fallen into the hands of citizens. Reporters create only tiny part of news, and even this is not steady. Those who make news of the entire society were ‘individuals.’ “Existence appears in new clothes every time, rather than repeating naked appearance.”
The research is on how portals deal with news and how this should be seen. With the advent of the Internet and smartphone, news has been ‘connection’ itself, beyond the traditional structure of ‘production-distribution-consumption.’ Also, ‘portals’ show connection of news clearly; the reason ‘whether portals are the press or not’ is highlighted is because the paradigm of news has rapidly changed. If the paradigm has changed, the perspective toward the structure of news production should be different. For this, a new concept of ‘production’ has been set; ‘productivity’ of news is not just feedback. As in other social media, news is re-mediated at portals and the context is reset. As news started to flow online, the traffic has become important, and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groups – portals and the press – has changed. Another axis of the research is public sphere. With different structure of news, the public sphere should be changed as well. The more news tries to go beyond ‘traditional framework,’ the more the public sphere should be ‘latent.’ This is why Arendt should be re-highlighted despite the dichotomy. This is more so especially for feast of new media that give new ‘existence’ existing beings through ‘connection.’ In South Korea, some consider that public sphere is the historically long-lasting problem of superstructure that continuously suppresses requirements from the bottom (Son Seok-chun), or it is appeared as a ruling bloc that considers the people as targets for control and enlightenment under the umbrella of the government or overrepresented power elite trying to teach the people (訓民的) (Kang Myeong-gu). Although it is too hasty to say, but resistance of the superstructure or the tendency of teaching the people of the elite has become old-fashioned as of October, 2016. The decision of political agenda has fallen into the hands of citizens. Reporters create only tiny part of news, and even this is not steady. Those who make news of the entire society were ‘individuals.’ “Existence appears in new clothes every time, rather than repeating naked appea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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