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구원경륜 안에 드러나는 인간의 신화(神化) 이해 :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대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를 중심으로 A study on Human’s deification in God’s economy of salvation원문보기
교회는 가톨릭 교회교리서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목적은 복되신 하느님과의 일치라고 가르친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Exitus a Deo – Reditus ad Deum이라는 도식으로 설명된다. 성부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인간은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다시 하느님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경륜 안에서 인간의 신화(神化)가 일어난다. 그리고 이 신화는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일치하는 길이다.
교부들은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 1,4)라는 구절과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6)라는 구절을 해설하며 신화에 대해 가르쳤다. 특히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들은 신화 개념을 심화시켰다. 대 바실리우스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가 하느님처럼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으며,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하느님께서 육화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신화된다고 이야기하였다. 특히 신화라는 용어 자체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363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하느님은 당신을 우리의 본성에 참여시키셨는데, 이는 우리의 본성이 하느님과의 일치로 신화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가르쳤다.
인간이 신화(神化)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창세 1,26).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과 닮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설명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숨을 불어 넣어 창조하셨는데(창세 2,7), 이는 당신의 영을 우리 안에 불어넣으신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가 당신과 닮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도를 하느님 모상의 본보기며 표상으로 이해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정도가 아니라 같은 모상이라고 확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워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한 생을 바쳐 가르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야말로 하느님을 닮은 모습이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인간이 사랑이시며, 사랑의 샘인 하느님을 닮아 본성상 사랑하게끔 지어졌다고 언급하며(1요한 4,13-16), 사랑의 모범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함을 강조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길이라고 소개하였는데, 대 바실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곧은길이라고 가르쳤다. 완전함은 오직 하느님뿐이기에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걸을 때 완전하신 하느님께 도달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육화를 통해 장차 진리와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될 본향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기 위해 내려왔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성자의 자기비허인 육화야말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없애기 위해 이 세상에 ...
교회는 가톨릭 교회교리서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목적은 복되신 하느님과의 일치라고 가르친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Exitus a Deo – Reditus ad Deum이라는 도식으로 설명된다. 성부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인간은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다시 하느님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경륜 안에서 인간의 신화(神化)가 일어난다. 그리고 이 신화는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일치하는 길이다.
교부들은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 1,4)라는 구절과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6)라는 구절을 해설하며 신화에 대해 가르쳤다. 특히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들은 신화 개념을 심화시켰다. 대 바실리우스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가 하느님처럼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으며,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하느님께서 육화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신화된다고 이야기하였다. 특히 신화라는 용어 자체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363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하느님은 당신을 우리의 본성에 참여시키셨는데, 이는 우리의 본성이 하느님과의 일치로 신화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가르쳤다.
인간이 신화(神化)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창세 1,26).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과 닮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설명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숨을 불어 넣어 창조하셨는데(창세 2,7), 이는 당신의 영을 우리 안에 불어넣으신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가 당신과 닮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도를 하느님 모상의 본보기며 표상으로 이해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정도가 아니라 같은 모상이라고 확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워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한 생을 바쳐 가르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야말로 하느님을 닮은 모습이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인간이 사랑이시며, 사랑의 샘인 하느님을 닮아 본성상 사랑하게끔 지어졌다고 언급하며(1요한 4,13-16), 사랑의 모범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함을 강조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길이라고 소개하였는데, 대 바실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곧은길이라고 가르쳤다. 완전함은 오직 하느님뿐이기에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걸을 때 완전하신 하느님께 도달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육화를 통해 장차 진리와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될 본향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기 위해 내려왔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성자의 자기비허인 육화야말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없애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이라고 가르치며, 대 바실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육화가 죄로 더럽혀진 인간의 인성을 회복하게하고,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그리스도의 육화로 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며, 인성이 회복되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고,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아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신화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지만 세례를 받았다. 대 바실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세례는 그리스도인 세례의 모범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태어나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을 없애고,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한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생명이 되심으로서 인간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고, 신성의 권능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간 역시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인간 본성이 본받아야 할 표본이며 시작이라고 강조한다. 대 바실리우스는 이 시작을 새 인간으로 이해하며 새 인간인 그리스도인 삶의 완성은 영혼과 말과 행동이 모두 그리스도에 참여할 때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육화와 세례,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길이다. 이 길에 끝에서 신화(神化)가 이루어진다. 인간이 신화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거룩하신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변화해야 하는데, 대 바실리우스는 나약한 인간의 영이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거룩한 영인 성령의 이끄심과 비추임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대 바실리우스에 따르면 인간과 성령이 상호협력을 통해 거룩해질 수 있다. 하느님의 엑스타시스이신 성령은 하느님이신 자기 자신에게서 나와 인간에게 다가간다. 또한 케노시스로서 당신 자신을 비우고 인간 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움직임을 보인다. 인간 역시 성령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비우는 케노시스와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엑스타시스를 보인다. 인간과 성령의 상호협력으로 인해 인간은 새롭게 창조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인간이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이기에 육은 물로, 영혼은 성령으로 씻김으로써 새롭게 창조되어 하느님을 닮게 된다고 가르친다. 대 바실리우스는 새롭게 창조된 인간은 스스로 하느님의 모상임을 인식하고 새로워진다고 가르친다. 이 모상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모든 일의 본보기이며 윤곽이고 원칙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모상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대 바실리우스는 하느님을 아는 것은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로 가는 데 있으며, 역으로 선천적인 선, 천부적인 거룩함, 왕다운 위엄은 성부에게서 나와 독생성자를 통해 성령에게 전해진다고 가르친다. 성령께서 인간 안에서 활동하시며 맺는 열매들을 맺으며 살아갈 때 이 모상을 고수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갈 때,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가르친다(갈라 5,22). 이 아홉가지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의 덕행이다. 성령의 열매는 하느님과 관계된 열매로써 사랑·기쁨·평화와 이웃과 관계된 열매로써 인내·호의·선의, 자신과 관계된 열매로써 성실·온유·절제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게 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지금은 하느님께 속한 것을 하나도 지니고 있지 않거나 아주 조금밖에 지니고 있지만 마지막 때에는 완전히 하느님처럼 되어 오직 하느님만을 온전히 마음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며, 이것이 우리가 얼른 도달하고자 하는 완전함이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성령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겨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된다(1요한 4,12). 사랑의 완성은 사랑이신 하느님(1요한 4,16)과 일치하는 것이며, 이것이 신화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창세 1,26). 인간은 사랑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드러났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3,15). 인간은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신 그리스도(요한 14,6)를 따라 성령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께서 열매를 맺도록 스스로를 성령께 내어드리고, 깨어있어야 한다(루카 21,36). 인간의 영이 하느님의 영으로 변할 때, 인간은 하느님 사랑의 완성을 이루어 신화(神化)에 도달하고,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인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를 것이다.
교회는 가톨릭 교회교리서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목적은 복되신 하느님과의 일치라고 가르친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Exitus a Deo – Reditus ad Deum이라는 도식으로 설명된다. 성부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인간은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다시 하느님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경륜 안에서 인간의 신화(神化)가 일어난다. 그리고 이 신화는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일치하는 길이다.
교부들은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 1,4)라는 구절과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6)라는 구절을 해설하며 신화에 대해 가르쳤다. 특히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들은 신화 개념을 심화시켰다. 대 바실리우스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가 하느님처럼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으며,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하느님께서 육화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신화된다고 이야기하였다. 특히 신화라는 용어 자체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363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하느님은 당신을 우리의 본성에 참여시키셨는데, 이는 우리의 본성이 하느님과의 일치로 신화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가르쳤다.
인간이 신화(神化)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창세 1,26).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과 닮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설명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숨을 불어 넣어 창조하셨는데(창세 2,7), 이는 당신의 영을 우리 안에 불어넣으신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가 당신과 닮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도를 하느님 모상의 본보기며 표상으로 이해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정도가 아니라 같은 모상이라고 확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워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한 생을 바쳐 가르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야말로 하느님을 닮은 모습이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인간이 사랑이시며, 사랑의 샘인 하느님을 닮아 본성상 사랑하게끔 지어졌다고 언급하며(1요한 4,13-16), 사랑의 모범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함을 강조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길이라고 소개하였는데, 대 바실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곧은길이라고 가르쳤다. 완전함은 오직 하느님뿐이기에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걸을 때 완전하신 하느님께 도달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육화를 통해 장차 진리와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될 본향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기 위해 내려왔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성자의 자기비허인 육화야말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없애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이라고 가르치며, 대 바실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육화가 죄로 더럽혀진 인간의 인성을 회복하게하고,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그리스도의 육화로 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며, 인성이 회복되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고,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아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신화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지만 세례를 받았다. 대 바실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세례는 그리스도인 세례의 모범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태어나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을 없애고,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한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생명이 되심으로서 인간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고, 신성의 권능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간 역시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인간 본성이 본받아야 할 표본이며 시작이라고 강조한다. 대 바실리우스는 이 시작을 새 인간으로 이해하며 새 인간인 그리스도인 삶의 완성은 영혼과 말과 행동이 모두 그리스도에 참여할 때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육화와 세례,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길이다. 이 길에 끝에서 신화(神化)가 이루어진다. 인간이 신화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거룩하신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변화해야 하는데, 대 바실리우스는 나약한 인간의 영이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거룩한 영인 성령의 이끄심과 비추임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대 바실리우스에 따르면 인간과 성령이 상호협력을 통해 거룩해질 수 있다. 하느님의 엑스타시스이신 성령은 하느님이신 자기 자신에게서 나와 인간에게 다가간다. 또한 케노시스로서 당신 자신을 비우고 인간 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움직임을 보인다. 인간 역시 성령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비우는 케노시스와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엑스타시스를 보인다. 인간과 성령의 상호협력으로 인해 인간은 새롭게 창조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인간이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이기에 육은 물로, 영혼은 성령으로 씻김으로써 새롭게 창조되어 하느님을 닮게 된다고 가르친다. 대 바실리우스는 새롭게 창조된 인간은 스스로 하느님의 모상임을 인식하고 새로워진다고 가르친다. 이 모상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모든 일의 본보기이며 윤곽이고 원칙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모상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대 바실리우스는 하느님을 아는 것은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로 가는 데 있으며, 역으로 선천적인 선, 천부적인 거룩함, 왕다운 위엄은 성부에게서 나와 독생성자를 통해 성령에게 전해진다고 가르친다. 성령께서 인간 안에서 활동하시며 맺는 열매들을 맺으며 살아갈 때 이 모상을 고수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갈 때,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가르친다(갈라 5,22). 이 아홉가지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의 덕행이다. 성령의 열매는 하느님과 관계된 열매로써 사랑·기쁨·평화와 이웃과 관계된 열매로써 인내·호의·선의, 자신과 관계된 열매로써 성실·온유·절제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게 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지금은 하느님께 속한 것을 하나도 지니고 있지 않거나 아주 조금밖에 지니고 있지만 마지막 때에는 완전히 하느님처럼 되어 오직 하느님만을 온전히 마음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며, 이것이 우리가 얼른 도달하고자 하는 완전함이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성령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겨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된다(1요한 4,12). 사랑의 완성은 사랑이신 하느님(1요한 4,16)과 일치하는 것이며, 이것이 신화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창세 1,26). 인간은 사랑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드러났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3,15). 인간은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신 그리스도(요한 14,6)를 따라 성령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께서 열매를 맺도록 스스로를 성령께 내어드리고, 깨어있어야 한다(루카 21,36). 인간의 영이 하느님의 영으로 변할 때, 인간은 하느님 사랑의 완성을 이루어 신화(神化)에 도달하고,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인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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