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군사제도는 크게 삼국통일 이전 중고기의 군사제도와 통일 이후의 군사제도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三國史記』에는 중고기와 통일 이후시기에 모두 보이는 誓幢이라는 군사조직이 확인된다. 삼국통일을 거치면서 해체되거나 새로 창설되는 다른 군사조직과 달리, 서당은 중고기부터 꾸준히 모습을 보이며 통일 이후에는 규모가 확장하고 있다. 이에 주목하여 서당의 설치 배경과 통일 이후 핵심 중앙 군사조직으로서 규모가 확장된 것을 사료를 통해 확인하였다.
서당이 처음 설치된 것은 진평왕 5년으로, 기존 군사조직이 존재했음에도 서당이 ...
신라의 군사제도는 크게 삼국통일 이전 중고기의 군사제도와 통일 이후의 군사제도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三國史記』에는 중고기와 통일 이후시기에 모두 보이는 誓幢이라는 군사조직이 확인된다. 삼국통일을 거치면서 해체되거나 새로 창설되는 다른 군사조직과 달리, 서당은 중고기부터 꾸준히 모습을 보이며 통일 이후에는 규모가 확장하고 있다. 이에 주목하여 서당의 설치 배경과 통일 이후 핵심 중앙 군사조직으로서 규모가 확장된 것을 사료를 통해 확인하였다.
서당이 처음 설치된 것은 진평왕 5년으로, 기존 군사조직이 존재했음에도 서당이 창설 된 것은 당시 정치상황과 관련이 있다. 당시 귀족들은 왕위계승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들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군사권에 대한 국왕의 직접적인 통제를 강화시키기 위하여 귀족의 힘이 미치지 않는 군사조직을 창설한 것이 서당이다. 서당은 부대의 성격을 나타내는 글자인 ‘誓’와 군사력, 군사조직을 나타내는 ‘幢’이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로, ‘국왕에 충성을 맹세한 군대’로 해석할 수 있으며 국왕의 직속 부대를 뜻한다. 서당은 시위부 설치 이전 국왕의 최측근 군사조직으로 국왕의 친위군 성격을 가졌으며, 이들은 田獵 등을 통해 국왕이 직접 召募하였다.
서당의 지휘관으로는, 『삼국사기』 무관조에서는 장군 2명이 하나의 서당을 지휘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 기록은 통일 이후 군제 정비를 통해 정리된 기록이므로 그 이전은 다를 수 있다. 중고기 侍衛府‧罽衿幢 같은 국왕 직할 부대의 지휘관이 大監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중고기 서당의 지휘관도 대감일 것으로 생각한다. 7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에게 거듭된 침공으로 인해 신라의 방어 요충지인 大耶城까지 함락당하는 상황에 이르자 친위부대인 서당도 대외전쟁에 출정하였다. 하지만 대외전쟁에서 임무를 마치고 복귀한 후에는 다시 국왕의 친위 군사조직으로서 활동을 했을 것이다.
7세기 후반 발발한 삼국통일전쟁과 나당전쟁으로 인해 신라의 군제는 크게 확대되었으나, 종전 이후 그 필요성이 감소되어 개편 및 축소되었다. 그러나 개편 과정에서 서당은 다른 군사조직들과 달리, 신라의 핵심 중앙 군사조직으로 확대되었다. 통일 이후 신라 핵심 중앙군사조직으로 서당이 선택된 것은 국왕의 직속 군사력으로 창설되었고, 병력의 충원도 국왕이 직접 소모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귀족세력의 영향력이 유지되는 군사조직을 축소 또는 해체시키고, 서당을 확대하여 九誓幢으로 편제하였다. 피복속민 출신을 서당의 구성원으로 편성한 것도 신라 귀족과 연고가 없는 이들을 핵심 중앙군으로 포함시켜 국왕이 군사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9서당 구성 군사조직의 구성원이 피복속출신이라는 이유로 지금까지는 이들이 포로로 구성된 군사조직이고 천민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았는데, 신라인으로 구성된 서당처럼 신분이 일반민인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이는 국왕의 의지가 반영된 소모를 통해 충원했을 것이다.
결국, 서당 군사조직의 창설과 확대는 왕의 군사권 장악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또한 신라 중고기인 진평왕 때 설치되어 삼국통일전쟁 및 나당전쟁을 거쳐 이후 신라의 핵심 군사조직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서당을 신라 중고기에서 삼국통일전쟁 이후까지 시대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군사조직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따라서 서당 군사조직을 파악하는 것은 신라 국왕이 귀족들의 힘을 억누르면서 군사권을 장악해 나가는 과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신라의 군사제도는 크게 삼국통일 이전 중고기의 군사제도와 통일 이후의 군사제도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三國史記』에는 중고기와 통일 이후시기에 모두 보이는 誓幢이라는 군사조직이 확인된다. 삼국통일을 거치면서 해체되거나 새로 창설되는 다른 군사조직과 달리, 서당은 중고기부터 꾸준히 모습을 보이며 통일 이후에는 규모가 확장하고 있다. 이에 주목하여 서당의 설치 배경과 통일 이후 핵심 중앙 군사조직으로서 규모가 확장된 것을 사료를 통해 확인하였다.
서당이 처음 설치된 것은 진평왕 5년으로, 기존 군사조직이 존재했음에도 서당이 창설 된 것은 당시 정치상황과 관련이 있다. 당시 귀족들은 왕위계승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들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군사권에 대한 국왕의 직접적인 통제를 강화시키기 위하여 귀족의 힘이 미치지 않는 군사조직을 창설한 것이 서당이다. 서당은 부대의 성격을 나타내는 글자인 ‘誓’와 군사력, 군사조직을 나타내는 ‘幢’이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로, ‘국왕에 충성을 맹세한 군대’로 해석할 수 있으며 국왕의 직속 부대를 뜻한다. 서당은 시위부 설치 이전 국왕의 최측근 군사조직으로 국왕의 친위군 성격을 가졌으며, 이들은 田獵 등을 통해 국왕이 직접 召募하였다.
서당의 지휘관으로는, 『삼국사기』 무관조에서는 장군 2명이 하나의 서당을 지휘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 기록은 통일 이후 군제 정비를 통해 정리된 기록이므로 그 이전은 다를 수 있다. 중고기 侍衛府‧罽衿幢 같은 국왕 직할 부대의 지휘관이 大監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중고기 서당의 지휘관도 대감일 것으로 생각한다. 7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에게 거듭된 침공으로 인해 신라의 방어 요충지인 大耶城까지 함락당하는 상황에 이르자 친위부대인 서당도 대외전쟁에 출정하였다. 하지만 대외전쟁에서 임무를 마치고 복귀한 후에는 다시 국왕의 친위 군사조직으로서 활동을 했을 것이다.
7세기 후반 발발한 삼국통일전쟁과 나당전쟁으로 인해 신라의 군제는 크게 확대되었으나, 종전 이후 그 필요성이 감소되어 개편 및 축소되었다. 그러나 개편 과정에서 서당은 다른 군사조직들과 달리, 신라의 핵심 중앙 군사조직으로 확대되었다. 통일 이후 신라 핵심 중앙군사조직으로 서당이 선택된 것은 국왕의 직속 군사력으로 창설되었고, 병력의 충원도 국왕이 직접 소모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귀족세력의 영향력이 유지되는 군사조직을 축소 또는 해체시키고, 서당을 확대하여 九誓幢으로 편제하였다. 피복속민 출신을 서당의 구성원으로 편성한 것도 신라 귀족과 연고가 없는 이들을 핵심 중앙군으로 포함시켜 국왕이 군사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9서당 구성 군사조직의 구성원이 피복속출신이라는 이유로 지금까지는 이들이 포로로 구성된 군사조직이고 천민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았는데, 신라인으로 구성된 서당처럼 신분이 일반민인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이는 국왕의 의지가 반영된 소모를 통해 충원했을 것이다.
결국, 서당 군사조직의 창설과 확대는 왕의 군사권 장악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또한 신라 중고기인 진평왕 때 설치되어 삼국통일전쟁 및 나당전쟁을 거쳐 이후 신라의 핵심 군사조직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서당을 신라 중고기에서 삼국통일전쟁 이후까지 시대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군사조직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따라서 서당 군사조직을 파악하는 것은 신라 국왕이 귀족들의 힘을 억누르면서 군사권을 장악해 나가는 과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The military system of Shilla can be divided into the system before the unification of Three Kingdoms and the system after the unification. However, in the Samguksagi, there was a military organization called “Seo-dang”(誓幢) which existed both before and after the unification. In contrast to other mi...
The military system of Shilla can be divided into the system before the unification of Three Kingdoms and the system after the unification. However, in the Samguksagi, there was a military organization called “Seo-dang”(誓幢) which existed both before and after the unification. In contrast to other military organizations that were disbanded or newly founded after the unification, the Seo-dang, which was established during Junggogi(中古期), rather expanded even after the unification. In the present study, I attempted to demonstrate the background of the establishment of the Seo-dang and its expansion as a core military organizatin after unification of Three Kingdoms.
The Seo-dang was first established in the 5th year of King Jinpyeong(眞平王). Despite other preexisting military organizations, King Jinpyeong established another one, Seo-dang, because of the political situations of the time. At that time, the nobility had a relatively greater power over the regal authority so that they even played a role in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In this circustance, King Jinpyeong tried to strenthen the regal power, by establishing a new military organization, which allowed him to directly control the military and reduce the noble's influence on it. The word, Seo-dang consits of two words : "誓(Seo)", which represents the characteristic of the unit, and "幢(Dang)", which represents military organization. It is interpreted as "the army which pledges allegiance to the king." Since the Seo-dang was under direct control of the King, the King, himself, recurited the soldiers of the Seo-dang.
Althogh it is known that the Seo-dang was commanded together by two appointed generals according to Samguksagi, this might be different in the pre-unification era, since the record documented only the military system that were organized after the unification. It is assumed that the commader of the Seo-dang was “Dae-gam(大監)” as commanders of other King's Corps such as siwibu(侍衛府) or ‧gyegeumdang(罽衿幢) were a “Dae-gam(大監).” In the 7th century, the Seo-dang also took part in the battle against Baekje(百濟) and Koguryeo(高句麗), even though the King's corps were generally not involved in the war against foreign countries, when Silla even lost Dae-ya Castle(大耶城), the important defensive center of Shilla, by Baekje and Koguryeo. However, after returning from the war, it must have served as the king's military again.
The military system of Silla had greatly expanded due to the war among the Three Kingdoms and the Nadang War in the end of the 7th century, but after the wars, as the military was relatively less necessary, it became reorganized and restructured. However, after the unification, the Seo-dang, in contrast to other military organizations, rather turned into the core military organization of Silla. It is chosen as the core organization because the king had a direct control over it, recruiting his troops by himself. The Seo-dang expanded to the larger organization, Gu-seo-dang(九誓幢), which led to decreasing the noble’s influence on the military organization and disbanding them. The kings mainly constituted its members with those who were conquered and had no relationship with Silla noblity, and this can be also understood as an effort to strengthen the control over the military rights. Meanwhile, although the Seo-dang has been considered as an army of the war-prisoners or slaves since the Gu-Seo-Dang’s members were the conquered, it seemed that even after the unification, the Seo-dang was composed of common people of Silla as before the unification, and the soldiers were reinforced only depending on the Kings’ will.
To conclude, the establishment and expansion of the Seo-dang was closely related to the king's military dominance. It was established during the reign of King Jinpyeong, and it became the core military organization of Silla after the Three Kingdoms Unification War and the Nadang War(羅唐戰爭). The Seo-dang can be defined as a key military organization through the entire Silla dynasty. Therefore, the investigation of the Seo-dang is an important step to comprehend the process of the kings’ dominance over the nobles by controlling the military organizations and suppressing the influence of the nobility.
The military system of Shilla can be divided into the system before the unification of Three Kingdoms and the system after the unification. However, in the Samguksagi, there was a military organization called “Seo-dang”(誓幢) which existed both before and after the unification. In contrast to other military organizations that were disbanded or newly founded after the unification, the Seo-dang, which was established during Junggogi(中古期), rather expanded even after the unification. In the present study, I attempted to demonstrate the background of the establishment of the Seo-dang and its expansion as a core military organizatin after unification of Three Kingdoms.
The Seo-dang was first established in the 5th year of King Jinpyeong(眞平王). Despite other preexisting military organizations, King Jinpyeong established another one, Seo-dang, because of the political situations of the time. At that time, the nobility had a relatively greater power over the regal authority so that they even played a role in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In this circustance, King Jinpyeong tried to strenthen the regal power, by establishing a new military organization, which allowed him to directly control the military and reduce the noble's influence on it. The word, Seo-dang consits of two words : "誓(Seo)", which represents the characteristic of the unit, and "幢(Dang)", which represents military organization. It is interpreted as "the army which pledges allegiance to the king." Since the Seo-dang was under direct control of the King, the King, himself, recurited the soldiers of the Seo-dang.
Althogh it is known that the Seo-dang was commanded together by two appointed generals according to Samguksagi, this might be different in the pre-unification era, since the record documented only the military system that were organized after the unification. It is assumed that the commader of the Seo-dang was “Dae-gam(大監)” as commanders of other King's Corps such as siwibu(侍衛府) or ‧gyegeumdang(罽衿幢) were a “Dae-gam(大監).” In the 7th century, the Seo-dang also took part in the battle against Baekje(百濟) and Koguryeo(高句麗), even though the King's corps were generally not involved in the war against foreign countries, when Silla even lost Dae-ya Castle(大耶城), the important defensive center of Shilla, by Baekje and Koguryeo. However, after returning from the war, it must have served as the king's military again.
The military system of Silla had greatly expanded due to the war among the Three Kingdoms and the Nadang War in the end of the 7th century, but after the wars, as the military was relatively less necessary, it became reorganized and restructured. However, after the unification, the Seo-dang, in contrast to other military organizations, rather turned into the core military organization of Silla. It is chosen as the core organization because the king had a direct control over it, recruiting his troops by himself. The Seo-dang expanded to the larger organization, Gu-seo-dang(九誓幢), which led to decreasing the noble’s influence on the military organization and disbanding them. The kings mainly constituted its members with those who were conquered and had no relationship with Silla noblity, and this can be also understood as an effort to strengthen the control over the military rights. Meanwhile, although the Seo-dang has been considered as an army of the war-prisoners or slaves since the Gu-Seo-Dang’s members were the conquered, it seemed that even after the unification, the Seo-dang was composed of common people of Silla as before the unification, and the soldiers were reinforced only depending on the Kings’ will.
To conclude, the establishment and expansion of the Seo-dang was closely related to the king's military dominance. It was established during the reign of King Jinpyeong, and it became the core military organization of Silla after the Three Kingdoms Unification War and the Nadang War(羅唐戰爭). The Seo-dang can be defined as a key military organization through the entire Silla dynasty. Therefore, the investigation of the Seo-dang is an important step to comprehend the process of the kings’ dominance over the nobles by controlling the military organizations and suppressing the influence of the no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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