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윤동주 시세계의 일관된 정서인 절망에 집중한다. 윤동주 시세계의 핵심이 실존의식에 있다고 보는 기존의 연구들은 작품 속에서 자아가 실존성을 획득해 나감에 따라 의식의 상승을 이루는 것과 이러한 자기의식의 종합과정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점에 주목한다. 하지만 자아의 내면의식이 계속해서 상승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은 자아가 끊임없이 절망하고 있었다는 의미도 된다. 절망의 극복이라기보다 절망의 지속이라는 측면에서 윤동주의 시세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특히 윤동주의 시세계 전반에 나타나는 절망은 자기의식의 정도에 따...
본 연구는 윤동주 시세계의 일관된 정서인 절망에 집중한다. 윤동주 시세계의 핵심이 실존의식에 있다고 보는 기존의 연구들은 작품 속에서 자아가 실존성을 획득해 나감에 따라 의식의 상승을 이루는 것과 이러한 자기의식의 종합과정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점에 주목한다. 하지만 자아의 내면의식이 계속해서 상승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은 자아가 끊임없이 절망하고 있었다는 의미도 된다. 절망의 극복이라기보다 절망의 지속이라는 측면에서 윤동주의 시세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특히 윤동주의 시세계 전반에 나타나는 절망은 자기의식의 정도에 따라 그 정도가 심화되는 것이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되는 절망이다. 절망을 대하는 자아의 태도와 현실인식양상에 있어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 본고는 윤동주 시세계에 나타나는 절망에 주목하여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자아의 절망과 그 특징을 밝히고, 이러한 절망 속에서 자아의 태도와 현실인식양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필 것이다. 윤동주 시에 나타나는 절망의 특징은 그것이 끊임없는 절망의 연속이라는 데 있다. 이 절망은 극복되지 않는다. 다만 절망에 대한 자아의 인식이 달라지는데, 윤동주 시에 나타나는 절망에 대한 자아의 인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절망하고 있는 상태, 둘째는 절망하지만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따라서 본고는 윤동주 시세계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절망하고 있는 상태와 절망하지만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는 모습,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인식의 변화가 그것이다. 절망하고 있는 상태는 루시앙 골드만의 ‘비극적 세계관’과의 관계에서 그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 1920년대부터 조선인들에게 폭넓게 자리 잡고 있었던 ‘비극적 세계관’은 “세계에 참가하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은 채, 세계 안에서 사는 것”인데, 이때 자아는 화해할 수 없는 현실을 거부하면서도 현실에 자리 잡고 살아야 하는 역설을 감당해야 한다. 또한 ‘비극적 세계관’에는 미래라는 시간차원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상태는 자아에게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재가 된다. 2장에서 윤동주 시에 나타나는 절망이 이러한 1920년대의 ‘비극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밝히고, 1920년대의 ‘비극적 세계관’과 윤동주 작품의 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한편 1920년대의 ‘비극적 세계관’에는 희망으로 상징될 수 있는 미래라는 시간개념이 없었다고 한다면, 윤동주는 작품 속에 시간이 공간화된 장소를 끌어들인다. 이것은 1920년대 ‘비극적 세계관’에 틈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고, 자아는 내면의 공간이미지 확장을 통해 시간을 공간화된 형태로 작품 속에 끌어들여 세상을 새롭게 인식한다. 시간이 전개되기보다는 공간이미지가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3장에서는 절망의 양상, 즉 자아의 절망과 절망에 대한 인식 및 현실인식을 살핀다. 자아는 절망하고 있는 상태에서 절망하지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으로 바뀌는데, 이 과정에서 현실에 대한 인식 역시 보다 적극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키에르케고르적 인식을 바탕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신과 자기의 관계에 있어서 신을 척도로 두는 인간이 무한한 실재성을 획득하려 하지 않고, 현재의 인간적인 자기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죄’가 된다. 윤동주 작품 속의 자아가 ‘비극적 세계관’과 절망의 정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간이미지를 확장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자아는 키에르케고르적 ‘원죄’개념을 받아들이고 신을 척도로 삼는다. 신에게 다가가고자 자기의 ‘원죄’를 받아들인 인간이 ‘절망’하는 것은 신 앞에서의 ‘좌절’, 즉 ‘죄’이기 때문에 자아는 절망을 이끌고 나아가야 하는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작품을 통해 ‘원죄’를 받아들이는 결단을 함으로써 ‘절망’하지만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일종의 장치를 마련해두는 것이다. ‘절망’에 맞서는 자아의 행동은 특히 내면의식의 공간이미지를 확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4장에서는 윤동주 작품에 나타나는 이러한 공간의 의미와 양상을 다룰 것이다. 이때의 공간은 단순히 부피만을 가지는 곳이 아니고, 사람과 사물을 포함한 세계가 유동하는 통로 역할을 하며 미래시간과 통하는 장소로 기능한다. 이러한 공간의 의미는 가스통 바슐라르가 말하는 “행동을 부르고, 행동에 앞서 상상력이 활동”하는 ‘공간’개념과 통하는 지점이 있는 바,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윤동주 문학에 나타나는 공간의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아울러 자아의 적극적인 행보가 세상 속에 이러한 공간을 만드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필연적 이유도 함께 살필 것이다.
본 연구는 윤동주 시세계의 일관된 정서인 절망에 집중한다. 윤동주 시세계의 핵심이 실존의식에 있다고 보는 기존의 연구들은 작품 속에서 자아가 실존성을 획득해 나감에 따라 의식의 상승을 이루는 것과 이러한 자기의식의 종합과정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점에 주목한다. 하지만 자아의 내면의식이 계속해서 상승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은 자아가 끊임없이 절망하고 있었다는 의미도 된다. 절망의 극복이라기보다 절망의 지속이라는 측면에서 윤동주의 시세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특히 윤동주의 시세계 전반에 나타나는 절망은 자기의식의 정도에 따라 그 정도가 심화되는 것이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되는 절망이다. 절망을 대하는 자아의 태도와 현실인식양상에 있어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 본고는 윤동주 시세계에 나타나는 절망에 주목하여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자아의 절망과 그 특징을 밝히고, 이러한 절망 속에서 자아의 태도와 현실인식양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필 것이다. 윤동주 시에 나타나는 절망의 특징은 그것이 끊임없는 절망의 연속이라는 데 있다. 이 절망은 극복되지 않는다. 다만 절망에 대한 자아의 인식이 달라지는데, 윤동주 시에 나타나는 절망에 대한 자아의 인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절망하고 있는 상태, 둘째는 절망하지만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따라서 본고는 윤동주 시세계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절망하고 있는 상태와 절망하지만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는 모습,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인식의 변화가 그것이다. 절망하고 있는 상태는 루시앙 골드만의 ‘비극적 세계관’과의 관계에서 그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 1920년대부터 조선인들에게 폭넓게 자리 잡고 있었던 ‘비극적 세계관’은 “세계에 참가하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은 채, 세계 안에서 사는 것”인데, 이때 자아는 화해할 수 없는 현실을 거부하면서도 현실에 자리 잡고 살아야 하는 역설을 감당해야 한다. 또한 ‘비극적 세계관’에는 미래라는 시간차원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상태는 자아에게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재가 된다. 2장에서 윤동주 시에 나타나는 절망이 이러한 1920년대의 ‘비극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밝히고, 1920년대의 ‘비극적 세계관’과 윤동주 작품의 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한편 1920년대의 ‘비극적 세계관’에는 희망으로 상징될 수 있는 미래라는 시간개념이 없었다고 한다면, 윤동주는 작품 속에 시간이 공간화된 장소를 끌어들인다. 이것은 1920년대 ‘비극적 세계관’에 틈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고, 자아는 내면의 공간이미지 확장을 통해 시간을 공간화된 형태로 작품 속에 끌어들여 세상을 새롭게 인식한다. 시간이 전개되기보다는 공간이미지가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3장에서는 절망의 양상, 즉 자아의 절망과 절망에 대한 인식 및 현실인식을 살핀다. 자아는 절망하고 있는 상태에서 절망하지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으로 바뀌는데, 이 과정에서 현실에 대한 인식 역시 보다 적극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키에르케고르적 인식을 바탕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신과 자기의 관계에 있어서 신을 척도로 두는 인간이 무한한 실재성을 획득하려 하지 않고, 현재의 인간적인 자기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죄’가 된다. 윤동주 작품 속의 자아가 ‘비극적 세계관’과 절망의 정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간이미지를 확장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자아는 키에르케고르적 ‘원죄’개념을 받아들이고 신을 척도로 삼는다. 신에게 다가가고자 자기의 ‘원죄’를 받아들인 인간이 ‘절망’하는 것은 신 앞에서의 ‘좌절’, 즉 ‘죄’이기 때문에 자아는 절망을 이끌고 나아가야 하는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작품을 통해 ‘원죄’를 받아들이는 결단을 함으로써 ‘절망’하지만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일종의 장치를 마련해두는 것이다. ‘절망’에 맞서는 자아의 행동은 특히 내면의식의 공간이미지를 확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4장에서는 윤동주 작품에 나타나는 이러한 공간의 의미와 양상을 다룰 것이다. 이때의 공간은 단순히 부피만을 가지는 곳이 아니고, 사람과 사물을 포함한 세계가 유동하는 통로 역할을 하며 미래시간과 통하는 장소로 기능한다. 이러한 공간의 의미는 가스통 바슐라르가 말하는 “행동을 부르고, 행동에 앞서 상상력이 활동”하는 ‘공간’개념과 통하는 지점이 있는 바,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윤동주 문학에 나타나는 공간의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아울러 자아의 적극적인 행보가 세상 속에 이러한 공간을 만드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필연적 이유도 함께 살필 것이다.
주제어
#지속적인 절망 ‘비극적 세계관’ ‘절망’ 키에르케고르적 ‘원죄’ 개념 시간의 공간화 가능성으로서의 공간 ‘공간’ ‘장소’ ‘상상력’ 시에 나타나는 공간 continuous despair ‘Tragic worldview’ ‘Losing hope’ the concept of ‘Original Sin’ of Kierkegaard spatialization of time space as a possibility ‘Space’ ‘Site’ ’Imagination’ the space shown in the poet
학위논문 정보
저자
김보경
학위수여기관
연세대학교 대학원
학위구분
국내석사
학과
국어국문학과
지도교수
정명교
발행연도
2019
총페이지
iv, 85장
키워드
지속적인 절망 ‘비극적 세계관’ ‘절망’ 키에르케고르적 ‘원죄’ 개념 시간의 공간화 가능성으로서의 공간 ‘공간’ ‘장소’ ‘상상력’ 시에 나타나는 공간 continuous despair ‘Tragic worldview’ ‘Losing hope’ the concept of ‘Original Sin’ of Kierkegaard spatialization of time space as a possibility ‘Space’ ‘Site’ ’Imagination’ the space shown in the po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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