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16세기 동아시아 해상에서 활동했던 왜구 중 가장 대표적인 王直 집단에 대한 재평가에 목적을 두고 있다. 기존 연구들은 왕직 집단을 평가할 때, 행위주체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관찰자적 입장에서 평가하는데 그쳤다는 한계가 있지만, 필자는 16세기 중일 간의 교역을 주도하였던 왕직 집단을 그들의 입장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16세기에는 명나라가 구축하였던 조공과 해금을 축으로 하는 국제질서가 무너져 버렸고, 이에 따라 동아시아·동남아시아 해역에서는 스스로 경제적 실력과 군사력을 가진 신흥 교역 국가들이 등장하여 경합하기 시작하였다. 왕직 집단이야말로 명나라의 조공질서가 무너진 상황에서 스스로 경제적 실력과 군사력을 가진 동아시아 해상에서의 신흥 세력이라 할 수 있다. 安徽省 徽州 歙縣 출신인 왕직은 1540년 동향인들과 함께 해상에 진출하여 ‘廣東-雙嶼-烈港-五島 및 平戶’로 거점을 이동하면서 해상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왕직은 해상활동을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동향인 정도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성공적인 해상활동을 수행함에 따라 중일교역을 통한 상당한 이익을 매개로 하여 대규모의 다민족 집단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551년, 열항에서 왕직은 동아시아 해상 패권을 장악하였고, 이때부터 동아시아 해상은 왕직에 의한 일원적 지휘계통으로 변모하였다. 왕직이 해상 패자에 등극한 모습은 그가 일본을 거점으로 한 단계에서 더 잘 나타난다. 왕직은 히라도를 수도로 하여 주변 지역을 지배하였고, 왕직의 지배를 받는 다양한 국적 출신의 집단 구성원들은 그를 ‘徽王’이라 칭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왕직 자신이 명나라의 백성이라는 ...
이 연구는 16세기 동아시아 해상에서 활동했던 왜구 중 가장 대표적인 王直 집단에 대한 재평가에 목적을 두고 있다. 기존 연구들은 왕직 집단을 평가할 때, 행위주체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관찰자적 입장에서 평가하는데 그쳤다는 한계가 있지만, 필자는 16세기 중일 간의 교역을 주도하였던 왕직 집단을 그들의 입장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16세기에는 명나라가 구축하였던 조공과 해금을 축으로 하는 국제질서가 무너져 버렸고, 이에 따라 동아시아·동남아시아 해역에서는 스스로 경제적 실력과 군사력을 가진 신흥 교역 국가들이 등장하여 경합하기 시작하였다. 왕직 집단이야말로 명나라의 조공질서가 무너진 상황에서 스스로 경제적 실력과 군사력을 가진 동아시아 해상에서의 신흥 세력이라 할 수 있다. 安徽省 徽州 歙縣 출신인 왕직은 1540년 동향인들과 함께 해상에 진출하여 ‘廣東-雙嶼-烈港-五島 및 平戶’로 거점을 이동하면서 해상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왕직은 해상활동을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동향인 정도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성공적인 해상활동을 수행함에 따라 중일교역을 통한 상당한 이익을 매개로 하여 대규모의 다민족 집단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551년, 열항에서 왕직은 동아시아 해상 패권을 장악하였고, 이때부터 동아시아 해상은 왕직에 의한 일원적 지휘계통으로 변모하였다. 왕직이 해상 패자에 등극한 모습은 그가 일본을 거점으로 한 단계에서 더 잘 나타난다. 왕직은 히라도를 수도로 하여 주변 지역을 지배하였고, 왕직의 지배를 받는 다양한 국적 출신의 집단 구성원들은 그를 ‘徽王’이라 칭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왕직 자신이 명나라의 백성이라는 아이덴티티를 뛰어넘었고, 나아가 국가 체제를 구상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한 왕직이 구상한 국가는 고토와 히라도라는 港市를 거점으로 중일 교역의 네트워크를 장악하여, 이를 매개로 그 주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港市國家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왕직의 국가 구상의 가능성은 그가 지속적으로 명나라에 조공과 호시를 요구한 것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왕직은 명나라를 침략하는 왜구들을 붙잡아 관에 바치는 대가로 명조정에 조공과 호시를 요구하였는데, 이는 다른 왜구의 행적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특기할 만하다. 또한 일반적으로 후기왜구가 수행했던 무역이 불법적인 형태였다고 할 때, 왕직은 보다 합법적인 교역 형태인 호시를 명조정에 요구한 것인데, 이는 그가 명나라의 조공제도를 이용하여 명조로부터 정치적 비호를 받음과 동시에 안정적인 중일교역을 구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국초 이래 ‘조공=해금 시스템’을 고수하였던 명조정의 대외정책은 연해사회의 해외무역에 대한 수요의 증대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집권체제 노선을 유지하려는 조정의 입장에서 자국의 백성이었던 왕직의 호시 참여는 도저히 수락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왕직은 1559년 항주에서 참수되어 결국 그의 구상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 연구는 16세기 동아시아 해상에서 활동했던 왜구 중 가장 대표적인 王直 집단에 대한 재평가에 목적을 두고 있다. 기존 연구들은 왕직 집단을 평가할 때, 행위주체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관찰자적 입장에서 평가하는데 그쳤다는 한계가 있지만, 필자는 16세기 중일 간의 교역을 주도하였던 왕직 집단을 그들의 입장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16세기에는 명나라가 구축하였던 조공과 해금을 축으로 하는 국제질서가 무너져 버렸고, 이에 따라 동아시아·동남아시아 해역에서는 스스로 경제적 실력과 군사력을 가진 신흥 교역 국가들이 등장하여 경합하기 시작하였다. 왕직 집단이야말로 명나라의 조공질서가 무너진 상황에서 스스로 경제적 실력과 군사력을 가진 동아시아 해상에서의 신흥 세력이라 할 수 있다. 安徽省 徽州 歙縣 출신인 왕직은 1540년 동향인들과 함께 해상에 진출하여 ‘廣東-雙嶼-烈港-五島 및 平戶’로 거점을 이동하면서 해상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왕직은 해상활동을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동향인 정도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성공적인 해상활동을 수행함에 따라 중일교역을 통한 상당한 이익을 매개로 하여 대규모의 다민족 집단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551년, 열항에서 왕직은 동아시아 해상 패권을 장악하였고, 이때부터 동아시아 해상은 왕직에 의한 일원적 지휘계통으로 변모하였다. 왕직이 해상 패자에 등극한 모습은 그가 일본을 거점으로 한 단계에서 더 잘 나타난다. 왕직은 히라도를 수도로 하여 주변 지역을 지배하였고, 왕직의 지배를 받는 다양한 국적 출신의 집단 구성원들은 그를 ‘徽王’이라 칭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왕직 자신이 명나라의 백성이라는 아이덴티티를 뛰어넘었고, 나아가 국가 체제를 구상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한 왕직이 구상한 국가는 고토와 히라도라는 港市를 거점으로 중일 교역의 네트워크를 장악하여, 이를 매개로 그 주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港市國家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왕직의 국가 구상의 가능성은 그가 지속적으로 명나라에 조공과 호시를 요구한 것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왕직은 명나라를 침략하는 왜구들을 붙잡아 관에 바치는 대가로 명조정에 조공과 호시를 요구하였는데, 이는 다른 왜구의 행적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특기할 만하다. 또한 일반적으로 후기왜구가 수행했던 무역이 불법적인 형태였다고 할 때, 왕직은 보다 합법적인 교역 형태인 호시를 명조정에 요구한 것인데, 이는 그가 명나라의 조공제도를 이용하여 명조로부터 정치적 비호를 받음과 동시에 안정적인 중일교역을 구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국초 이래 ‘조공=해금 시스템’을 고수하였던 명조정의 대외정책은 연해사회의 해외무역에 대한 수요의 증대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집권체제 노선을 유지하려는 조정의 입장에서 자국의 백성이었던 왕직의 호시 참여는 도저히 수락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왕직은 1559년 항주에서 참수되어 결국 그의 구상은 좌절되고 말았다.
This study re-evaluated the most representative Wangzhi(王直) group out of Wokou(倭寇, Japanese pirates) of the 16th century that performed smuggling(密貿易) with China and Japan on the seas of East Asia after violating the ban on maritime trade(海禁) by the Ming Dynasty. The marine activities of Wangzh...
This study re-evaluated the most representative Wangzhi(王直) group out of Wokou(倭寇, Japanese pirates) of the 16th century that performed smuggling(密貿易) with China and Japan on the seas of East Asia after violating the ban on maritime trade(海禁) by the Ming Dynasty. The marine activities of Wangzhi started by entering Canton(廣東) sea together with people from the same province in 1540. After that, Wangzhi moved his activity base to Shuangyu Port(雙嶼) and Sungailiat(烈港), and finally, he actively moved on the basis of Goto(五島) and Hirado(平戶) of Japan in 1553. Wangzhi who grew his group into a large multiracial group by successfully performing the marine activities, ruled the seas of East Asia on the basis of Sungailiat. The look of Wangzhi ruling the seas is much better shown in the stage on the basis of Japan. Wangzhi dominated the surrounding areas of Hirado as a capital while people who were governed by Wangzhi called him ‘king of Huizhou(徽王)’. Considering this fact, Wangzhi did not regard himself as a person with the nationality of the Ming Dynasty any more. Wangzhi was designing the national system on the basis of trade base, and the concrete form would be the Port-Polity(港市國家) focusing on trades with China and Japan. In addition, It was possible to design the Port-Polity by the historical background. Because boundary of state was ambiguous in the 16th century. This system design of Wangzhi was illustrated by his continuously demand for the Ming Dynasty for tribute(朝貢) and mutual trade(互市). Generally, Wokou of the 16th century performed an illegal trade, while Wangzhi wished performing legal trade. Eventually, Wangzhi aimed for legal tributary trade(朝貢貿易) after its national system was recognized by the Ming Dynasty. The people in coastal society reacted positively to the Wangzhi’s demand for mutual trade. Because they were involved in the planning of smuggling, they were being kind to Wokou like Wangzhi. However, Wangzhi’s design was frustrated when the Ming court claiming to advocate the high-level of centralism consistently refused his demands. And the Ming Dynasty executed Wangzhi by beheading in Hangzhou(杭州) in 1559.
This study re-evaluated the most representative Wangzhi(王直) group out of Wokou(倭寇, Japanese pirates) of the 16th century that performed smuggling(密貿易) with China and Japan on the seas of East Asia after violating the ban on maritime trade(海禁) by the Ming Dynasty. The marine activities of Wangzhi started by entering Canton(廣東) sea together with people from the same province in 1540. After that, Wangzhi moved his activity base to Shuangyu Port(雙嶼) and Sungailiat(烈港), and finally, he actively moved on the basis of Goto(五島) and Hirado(平戶) of Japan in 1553. Wangzhi who grew his group into a large multiracial group by successfully performing the marine activities, ruled the seas of East Asia on the basis of Sungailiat. The look of Wangzhi ruling the seas is much better shown in the stage on the basis of Japan. Wangzhi dominated the surrounding areas of Hirado as a capital while people who were governed by Wangzhi called him ‘king of Huizhou(徽王)’. Considering this fact, Wangzhi did not regard himself as a person with the nationality of the Ming Dynasty any more. Wangzhi was designing the national system on the basis of trade base, and the concrete form would be the Port-Polity(港市國家) focusing on trades with China and Japan. In addition, It was possible to design the Port-Polity by the historical background. Because boundary of state was ambiguous in the 16th century. This system design of Wangzhi was illustrated by his continuously demand for the Ming Dynasty for tribute(朝貢) and mutual trade(互市). Generally, Wokou of the 16th century performed an illegal trade, while Wangzhi wished performing legal trade. Eventually, Wangzhi aimed for legal tributary trade(朝貢貿易) after its national system was recognized by the Ming Dynasty. The people in coastal society reacted positively to the Wangzhi’s demand for mutual trade. Because they were involved in the planning of smuggling, they were being kind to Wokou like Wangzhi. However, Wangzhi’s design was frustrated when the Ming court claiming to advocate the high-level of centralism consistently refused his demands. And the Ming Dynasty executed Wangzhi by beheading in Hangzhou(杭州) in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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