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디자인그룹 "형이공방(型而工房)"의 활동과 업적에 관한 평가-토요쿠치 카츠헤이의 디자인 활동을 중심으로- A Study and Evaluation of Japanese Design Group "Keiji Kobo" -especially on the designs of Toyokuchi Katshei-원문보기
형이공방(Keiji Kobo)은 독일 바우하우스의 교육활동이 그 정점에 있던 1928년에 결성되어 전쟁의 기운이 짙어져서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제2차 대전 직전까지의 약 10년 간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건축의 새로운 사조를 표방하는 근대디자인을 목표로 하여 여러 가지 활동을 한 희귀한 자생적 디자인 연구단체로써, 일본이 서구 디자인 사조를 흡수하여 현대 디자인의 장을 화려하게 펼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친 상징적 단체이다. 형이공방에서는 산업시대를 전제로 한 새 시대의 생활공예-합리적인 생활가구-를 추구함으로써 근대적 사고를 실천하기 위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공방의 작업은 조사 시작(試作) 실험 연구 전시회 강습회 주문판매 광고 집필이라는 많은 영역에 걸쳐있다. 그 활동은 결코 상업적인 목적으로 변질되지 않은 진지한 것이었으며, 군국주의 일본이라는 당시의 특수한 시대적 배경에 비추어 보더라도 놀랍도록 기능주의 사고를 견지한 순수하고 투명한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공방은 어슬프고 규모가 적은, 10년 남짓 활동했던 연구집단이었다. 그러나 조용했던 그 활동 속에는 불같은 의지가 숨어 있었으며, 오늘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그 파급효과를 과소평가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의 오늘과 같은 발전의 이면에는 무수한 선각자의 기여가 있었을 터인즉, 형이공방의 그것도 디자인분야에 관한 한 빠트릴 수 없는 것 중 하나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당시의 일본 지식인들은 그들의 헌신과 활동이 대중의 삶의 질을 근대화시키는 데 하나의 기여가 되기를 하나같이 열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형이공방은 어떤 의미에서 일본에서의 꽃피다 만 작은 바우하우스라고 평가할 만하다.
형이공방(Keiji Kobo)은 독일 바우하우스의 교육활동이 그 정점에 있던 1928년에 결성되어 전쟁의 기운이 짙어져서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제2차 대전 직전까지의 약 10년 간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건축의 새로운 사조를 표방하는 근대디자인을 목표로 하여 여러 가지 활동을 한 희귀한 자생적 디자인 연구단체로써, 일본이 서구 디자인 사조를 흡수하여 현대 디자인의 장을 화려하게 펼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친 상징적 단체이다. 형이공방에서는 산업시대를 전제로 한 새 시대의 생활공예-합리적인 생활가구-를 추구함으로써 근대적 사고를 실천하기 위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공방의 작업은 조사 시작(試作) 실험 연구 전시회 강습회 주문판매 광고 집필이라는 많은 영역에 걸쳐있다. 그 활동은 결코 상업적인 목적으로 변질되지 않은 진지한 것이었으며, 군국주의 일본이라는 당시의 특수한 시대적 배경에 비추어 보더라도 놀랍도록 기능주의 사고를 견지한 순수하고 투명한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공방은 어슬프고 규모가 적은, 10년 남짓 활동했던 연구집단이었다. 그러나 조용했던 그 활동 속에는 불같은 의지가 숨어 있었으며, 오늘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그 파급효과를 과소평가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의 오늘과 같은 발전의 이면에는 무수한 선각자의 기여가 있었을 터인즉, 형이공방의 그것도 디자인분야에 관한 한 빠트릴 수 없는 것 중 하나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당시의 일본 지식인들은 그들의 헌신과 활동이 대중의 삶의 질을 근대화시키는 데 하나의 기여가 되기를 하나같이 열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형이공방은 어떤 의미에서 일본에서의 꽃피다 만 작은 바우하우스라고 평가할 만하다.
Keiji Kobo is a unique self-generated design research group in Japan, which was founded in 1928 when Bauhaus movement was in its peak, and which lasted ten years until the end of the Second World War, when any activity of the group became virtually impossible due to the war. With insight to see the ...
Keiji Kobo is a unique self-generated design research group in Japan, which was founded in 1928 when Bauhaus movement was in its peak, and which lasted ten years until the end of the Second World War, when any activity of the group became virtually impossible due to the war. With insight to see the future, the group aimed at Modern Design advocating a new spirit in architecture, and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prosperity of Japanese Modern Design assimilating Western design trends. Pursuing of craft works for everyday life--practical furniture works--Keiji Kobo actively executed various projects to realize modern philosophy. The range of the works of this group was very large: survey, mock-up, experiment, research, exhibition, lecture, order-based sale, advertising and writing. The works of the group were oriented to serious academicism, not compromising with commercialism. Considering the peculiar political situation such as Japanese Militarism, the spirit of functionalism that the group pursued was surprisingly academical and pure. This group was relatively small and clumsy, which lasted as short as around ten years. However, strong motivation was in their seemingly quiet movements, and the influence of the group cannot be underestimated even with today's criteria. There were a number of pioneers who contributed to today's prosperity of Japan and Keiji Kobo can be estimated to be one of the pioneers in the field of design. It was found that the contemporary intellectuals hoped that the committment and activity of the group would contribute to modernization of the life quality of ordinary people. In a sense, Keiji Kobo can be estimated to be a little Japanese equivalent for Bauhaus that could not fully bloom.
Keiji Kobo is a unique self-generated design research group in Japan, which was founded in 1928 when Bauhaus movement was in its peak, and which lasted ten years until the end of the Second World War, when any activity of the group became virtually impossible due to the war. With insight to see the future, the group aimed at Modern Design advocating a new spirit in architecture, and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prosperity of Japanese Modern Design assimilating Western design trends. Pursuing of craft works for everyday life--practical furniture works--Keiji Kobo actively executed various projects to realize modern philosophy. The range of the works of this group was very large: survey, mock-up, experiment, research, exhibition, lecture, order-based sale, advertising and writing. The works of the group were oriented to serious academicism, not compromising with commercialism. Considering the peculiar political situation such as Japanese Militarism, the spirit of functionalism that the group pursued was surprisingly academical and pure. This group was relatively small and clumsy, which lasted as short as around ten years. However, strong motivation was in their seemingly quiet movements, and the influence of the group cannot be underestimated even with today's criteria. There were a number of pioneers who contributed to today's prosperity of Japan and Keiji Kobo can be estimated to be one of the pioneers in the field of design. It was found that the contemporary intellectuals hoped that the committment and activity of the group would contribute to modernization of the life quality of ordinary people. In a sense, Keiji Kobo can be estimated to be a little Japanese equivalent for Bauhaus that could not fully bl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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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결론에서는 두 가지 축면에서 형이공방의 활등을 간략히 논하고자 한다. 하나는 과연 이들이 보여준 의지와 노력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이념과태도에 관한 정신적인면에서의 분석이며, 또 하나는 형이공방의 구체적인 디자인 활등에 대한 분석과 평가이다.
마지막으로, 형이공방의 앞선 시대인식, 실험정산, 계몽활등의 의의, 생활가구의 표준화에 관한 신념, 일본 디자인계에 미친 영향등을 논하고, 결론으로써 이들의 활등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배워야 하는가를 논의 하였다.
본 논문은 형이공방이 소개된 중요한 몇몇 문헌과 저널 및 근대 일본 디자인사 서적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특히 형이공방의 중심인물 토요쿠치가츠헤이(쁲口克平)의 자전적 회고 자료집 "형이공방에서부터"가 자료출처의 중심이 되었음을 밝혀 둔다.
그 두 번째는 종종 요추부의 긴장을 풀기 위해서 허리를 펴고 등을 뒤로 젖혀서 휴식을 취하는 자세. 이 두 자세를 취할때에 필요로 하는 각부분의 치수 경도 곡면 등을 조사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이 두 지지면을 어떻게 짜맞추는가에 따라 하나의 사무용 의자의 기능에 대한 형태의 표준으로 만들어졌다.
형이공방의 여러 활등의 중심에는 상공성 산업공예시험소(주1)의연구원(技官)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토요쿠치 카츠헤이가 등장하고 대부분의 업적이 산업공예시험소의 업무와 관련을 맺어 전개되었으므로 그에 대하여 간략하게 알아보기로 한다.
형이공방이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고 관심 밖의 영역으로 취급되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바 없지 않으나, 서구 디자인 사조를 도입하여 발전시켜 근대화를 이룩한 전쟁의 피폐함 속에서 국부를 일구어 낸 공통점이 있는 우리로서는 일본이라는 존재에 대해 보다 소상히 알고 그들의 발전 배경에 어떤 노력이 깃들어 있는지를 이해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본 논문에서는 형이공방의 간략한소개와 더불어 그 성격, 의의, 업적을 논하고, 그 활등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교훈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가설 설정
1. 의자는 자세의 변화에 순옹하도록 되지 않으면 안된다.
1. 학구적 자세와 실험정신: '실험의자' 와 '설형에 따른 의자 지지면의 실험'은 근대 인간공학발전사에 있어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것이다. 헨리 드레이퓨스의 인체계축을 비롯한 인간공학 분야가 주목된 것은 대강 1930년을 기점으로 하고 제2차 대전을 전후하여 크게 발전했던 바, 형이공방의 그것은 상호 정보교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년대가 거의 미국과 일치하거나 비슷하다.
10. 종래의 책상과 의자 사이의 거리는 너무 크다.
2. 남녀 공용의 경우는 여자의 표준 수치 에 따르는 편이 좋다.
3. 좌면 높이는 무홒 뒤의 밑 정도에서 결정하고 앞쪽 끝을 약간 둥글게 내 린다.
7. 좌면의 깊이는 무홒 밑 뒤부터 골반 뒷 끝까지의 길이보다 적게한다.
9. 요추골반 상단부가 지탱 되면 집무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제안 방법
"하여튼 형 이공방에서는 192736년의 10년간 산업시대를 전제로한 새 시대의 생활공예-합리적인 생활용품를 추구함으로써 근대적 사고를 실천하기 위하여 활발한 활등을 전개하였는데 요약하여 설명 하자면, 가구, 의자, 아파트 실내 생활표준 규격을 조사 연구한 세 차례의 실험 연구보고서 , , 을 발간하였고, 4차에 걸쳐 의자라든가 표준가구의 프로토타입을 설계·시험제작·생산하였으며, ""새로운 생활공예""란 제목의 강습회를 개최하였고, 형이공방 표준가구류를 소개·배포·주문·판매하기 위하여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고 여성잡지에 표준가구를 소개하여 주문을 받아 얼마간 생산도 하였다."
간소한 오평개(伍平材)와 평판으로 이루어진 팔걸이 달린 의자를 원형으로 발췌하여 앞서의 측정실험 숫자적 결과와 양산적 기술, 재료와의 결합검토에 의해 제1차 설계시작을 행하였고, 작은 의자, 티 테이블, 책상, 옷장, 유닛식 조립 책장을 완성하였다.
접은 다다미구조의 책상, 뷰로 식 책상, 이것들은 둘 다 불필요한 것을 없앤 콤펙트한 것이 되었다. 또 학생의 신체축정 데이터에 따라 다리 높이를 바꾸는 작은 의자, 소형의 조립형 정리함, 학생 의복에 맞춘 옷장, 제1차 때의 정리장 외 게시판, 혹판 등을 시작품으로 만들었다.
이 표준의자를 기본으로 하여 티 테이블과 그 외의 각종 가구의 치수 구조, 재료를 통일하였다. 공방 동인 중 한 사람 이토우(伊藤幾次郞)가 책임자로 경영을 맡고 있었던 가구제조 회사 <가가옥(加 賀屋)>에서 시작이 행해졌다.
대상 데이터
특히 형이공방의 중심인물 토요쿠치가츠헤이(쁲口克平)의 자전적 회고 자료집 "형이공방에서부터"가 자료출처의 중심이 되었음을 밝혀 둔다. 보다 구체적인 활등자료는 1981년에 정리 발표된 무사시노 미술대학의 연구기요에 있는 형이공방자료를 참조하였다.
연구팀은 3년간 의자의 실험을 계속했던 바, 실험대상이 되는 사람은 당시(1953년경) 일본인의 기준체 위의 남녀가 선택 되었다. 남자 162cm, 여자 152cm에 가까운 사람 다.
<형이공방>이란 연구단체는 1927년 도쿄고등공예학교의 강사이며 30세의 젊은 건축가 쿠라타 치카타타(藏田周忠, 1895~1966)가 학교를 갓 졸업한 5명의 제자들(小川光三, 松本政雄, 池海義敦, 鈴木太郞, 쁲口克平)을 규합하여 결성한건축 및 실내디자인의 스터디 그룹을 모태로 하여 결성되었다. 이 그룹은 서구의 신흥 건축운등 특히 쎄세션과 빈 공방의 활등을 참조하여 일본의 주택과 생활을 개선코자 하는 문제에 중점을 둔 스터디 그룹인데, 이듬해 형이공방이란 명칭의 연구단체로 정식 발족하였다.
제 2회는 신주쿠(新宿 紀伊 國屋서점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그 강습회 주제는 <새로운주택과가구>.
제 3회 전시회는 1344년 타카시마야(高島屋)의 살롱에서 으로 개최 되었다.
표제는 <아파트의 실내도해와 숫자>로 토요쿠치가 집필하고 있다. 조사는 타이칸(代官)산 아파트(철골 콘크리트로 만들어진)의 독신자 아파트와 가족 아파트에서 실시되었다. 이 조사는 도해에 의한 수집작업만이 아니라 실내의 총면적, 총용적에 대한 가구 기타 일상용품류의 평방·입방적인 대비, 활동면적·용적 등의 수치의 수집까지 체계적으로 행하고 있다.
50전), 11호·책장 달린 책상(22엔), 12호.칠판(2엔 80전)에 팔았다.
성능/효과
1.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쳐 해방후 전쟁의 참화를 겪고 피폐해진 국토를 재건해야했던 우리나라의 근대화 역사를 일본의 그것과 견주어 보면 여건상 많은 공통점 이 있어 보인다. 디자인 분야의 경우, 우리의 많은 선구자들이 헌신적 인 노력을 하여 찬란한 오늘이 있게 해준 데 대하여 우리는 그들의 노고에 대한 숙연함과 감사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 생활가구의 표준화: 군국주의 시대의 폐허나 다롱없는 여건에서 일본인의 생활 양식을 향상시키고자하는 열망으로 이들이 기획하고 추구했던 생활가구의 표준화 시도는 마치 전후 영국 정부주도의 대규모 복구운동 Utilitalian Ddsign(1411~1951)을 연상시킨다. 믈자부족으로 고심하던 영국과 여건이 홉사한 일본 시민의 생활을 최소한의 자재를 이용하여 합리화시키고자 여러 가지로 노력한 흔적은 영국의 그것과다를 바 없다.
2. 형 이공방 이념에 대한 평가: 앞서 보았거니와 형이공방은 주로 실무적,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였고 바우하우스와 같이 총체적인 문명비평에 따른 형 이상학적 이념을 앞세우면서 활등하지는 못했다. 젊은 쿠라타 교수와 9명의 멤버들은 미숙한아마추어 디자이너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활등영역 또한매우 국지적이고 한정되어 있었다.
3. 계몽활등: 일본의 전근대적 생활양식을 서구식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형이공방이 펼친 활등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연구, 전시, 강습, 집팔, 주문판매 등 여러 가지이며, 그것은 매우 순수했고 비상업적이었다. 디자인에 대한대중의 이해를 도모하는 디자인 운등으로 발전시키 기 위하여 취한 그들의 활등은 비록 소규모이기는 했으나 적절했다.
후속연구
그 외에 대나무를 짜맞춘 갑판(甲橱의 탁자, 또 활처럼 휘어진 어린이의자(둥근 대나무로 구성한)의 몇 종류도 있었다. 그것들은 브루노 타우트씨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전통적인 공예기술의 새로운개척 방법을 우리 에게 일깨워 준 귀중한 사례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 후 수많은 대나무 재료의 이 용활용의 예가 발표되었으나 이처럼 우리 기억 속에 강하게 남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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