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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IS 바로가기건축역사연구 : 한국건축역사학회논문집 =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16 no.6 = no.55, 2007년, pp.47 - 66
이대암 (세경대 건축디자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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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어 | 질문 | 논문에서 추출한 답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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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불교의 맥은 어느 시기까지 전승 되었는가? | 임란(1592-1598) 이후 중국에서는 얼마 되지 않아 곧 후금의 청(淸, 1644-1912)나라가 들어 섰지만 원(元, 1279-1368)대에 대중에게 뿌리내린 라마불교는 명(明, 1368-1644) 말에 급격히 확장되어 청대에 이르러서는 무려 1000여개의 라마사찰이 존재할 정도로 번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몽고족의 원나라, 한족의 명나라, 만주족의 청나라로 이어지는 서로 다른 민족의 왕조에서 조차 라마교는 황실불교로서의 명맥을 잃지 않고 이어져 내려갔다. | |
사천왕은 무엇인가? | 사천왕은 원래 불단(수미단)의 본전불을 호위하는 호법신으로서 조상(彫像)으로 만들어진 초기 형태는 돈황의 막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돈황의 경우, 사천왕이 외벽에 부조 형식으로 조각될 경우에는 4천왕의 형식보다는 2천왕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불전을 감실에 모신 경우에는 수미단 위에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
초기에 불전 안에 배치되었던 사천왕이 사찰 밖으로 나와 전진 배치 된 시기는 언제인가? | 다만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기에 조상된 사천왕의 모습은 탑신이나 부도탑, 사리기 등에 새겨진 유물들로부터 초기 사천왕의 형태를 짐작할 뿐이다. 이처럼 초기에는 불전 안에 배치되었던 사천왕이 사찰 밖으로 나와 전진 배치 된 것은 중국에서는 송말원초(宋末元初) 이후부터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명대에 와서는 사천왕상이 사문(寺門)과 함께 천왕전(天王殿)이라는 독립된 전각 속에 안치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후기 사천왕문의 원형이라 할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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