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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IS 바로가기건축역사연구 : 한국건축역사학회논문집 =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16 no.5 = no.54, 2007년, pp.21 - 40
정예정 (부산대학교 건축공학과) , 서치상 (부산대학교 건축학부)
Choryang-weagwan which was the largest international trading place between Joseon Dynasty and Tokugawa Shogunate had been maintained from 1678 through 1872 in Busan. Particularly, they had 21 times repairing constructions for 200 years since its establishment. It is noticeable that Joseon Dynasty pe...
핵심어 | 질문 | 논문에서 추출한 답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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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구의 유입은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 이 같은 일본도구의 유입은 당시 同役所에서 일한 조선공장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물론 새로운 도구의 유입이 종래 건축기법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가설에 대한 검증은 차후 연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겠다. | |
조선은 일본의 수리 요청에 즉시 대응하지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 첫째, 일본이 요청한 수리가 大監董이 아닌 탓에 중앙정부를 개입시키지 않고, 東萊府使로 대표되는 지방정부가 수리를 맡도록 하여, 일의 범위가 중앙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하는 의도가 내포된 것이다. 둘째, 공사의 범위가 대감동에 해당할 만큼 커지자 그에 합당한 물력을 마련하기 위해 시간을 지연했다고 볼 수 있겠다. 초량왜관 수리는 많은 인력과 물력이 소요되는 大役事였기 때문이다. | |
초량왜관을 통해 조선이 의도한 바는 무엇인가? | 조선은 초량왜관을 통해 朝ㆍ日 양국의 원만한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倭使의 上京을 차단하는 본래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 한편, 일본은 최대한 조선정부의 지원을 받아 그들의 편의에 맞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했다. ‘誠信交隣’의 명분으로 제대로 수리해야 하겠다는 뜻15)을 조선 監董官에게 전달하는가 하면, 조선 사람은 사욕의 소질이 있어 폐단을 일으킬 수 있으니 監董官을 매번 대면시켜달라고 요청하는16) 당당함까지 보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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