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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인쇄인: 이봉창(李奉昌)의사와 보성사 원문보기

프린팅코리아 = Printing Korea, v.10 no.4 = no.106, 2011년, pp.118 - 119  

임남숙 (대한인쇄문화협회)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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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4월 13일은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이다. 이에 상하이의 인쇄사에서 잠시 근무했던 이봉창 의사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보성사에 대해 알아본다. 이봉창 선생은 1932년 1월 8일 일본제국주의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궁성으로 돌아가던 일왕에게 수류탄을 투척,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전 세계 피압박 민족에게 큰 충격을 준 인물이다. 이 선생이 터뜨린 한발의 수류탄은 당시 침체일로에 있던 상해임시정부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정부는 지난 62년 선생의 장거를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보성사터 기념비는 지금의 조계사 좌측 수송소공원에 있는데,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인쇄사로 보성학교 뒷마당에 자리 잡고 있었다. 1919년 당신 최남선이 경영하던 신문관과 함께 최대 인쇄사로 꼽혔다. 보성사는 1919년 6월 28일 일본의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전소됐다.

AI 본문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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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데이터

  • 1931년 1월 중순 상하이에 도착한 이봉창은 임시정부로 찾아간다. 임시정부 사람 중 일부는 그를 일본의 밀정으로 여겼으나 김구는 그의 말하는 태도의 비범함을 간파했다.
  • 보성사는 수송동(옛이름 전동) 44번지 보성학교 구내에 있었으며,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인쇄사로 30평에 2층 기와 벽돌집이었다. 보성학교 뒷마당에 자리 잡았던 보성사는 천도교 3세 교조인 손병희 선생이 1910년 말 보성학원을 인수하면서 운영권이 천도교로 넘어갔으며, 천도교가 운영하던 창신 사와 합병돼 당시 최남선이 경영하던 신문관과 함께 당시 최대 인쇄사로 꼽혔다.
  • 이진규의 아들로 한성부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자랐다. 이봉창의 선대는 경기도 수원에서 거주하였으며 아버지 이진규는 농업을 계승하여 중류층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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