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질학자 다테이와 이와오의 한반도 지질연구 성과고찰 Performance Review of the Geological Research in Korean Peninsula by Japanese Geologist Tateiwa Iwao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원문보기
지질학자 다테이와 이와오의 한반도에서의 공적은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첫째, 한반도 층서 정립에 기여하였고, 1:5만 지질 도폭 21매를 완성하였다. 둘째, 지질 조사 결과를 보문, 요보 및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셋째, 제3대 조선 지질조사소 소장으로서 일본 패망에 따른 인수인계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넷째, 일본 복귀 이후에 그간 수집한 한반도 시료 등을 기초로 "조선-일본열도지대 지질구조논고 - 조선 지질조사연구사"를 저술하였다. 그러나 다테이와는 일본이 지속적으로 강점기를 이어갈 것으로 여기고, 한반도 지질 조사 탐사 전문 인력 양성에 소홀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지질학자 다테이와 이와오의 한반도에서의 공적은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첫째, 한반도 층서 정립에 기여하였고, 1:5만 지질 도폭 21매를 완성하였다. 둘째, 지질 조사 결과를 보문, 요보 및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셋째, 제3대 조선 지질조사소 소장으로서 일본 패망에 따른 인수인계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넷째, 일본 복귀 이후에 그간 수집한 한반도 시료 등을 기초로 "조선-일본열도지대 지질구조논고 - 조선 지질조사연구사"를 저술하였다. 그러나 다테이와는 일본이 지속적으로 강점기를 이어갈 것으로 여기고, 한반도 지질 조사 탐사 전문 인력 양성에 소홀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The achievements of Tateiwa Iwao's work in Korea are assessed as follows. Firstly, he pioneered the practice of stratigraphy in the Korean peninsula and completed geological maps of 21 sheets at 1:50,000 scale. Secondly, he published the results of a geological survey as bulletins, technical reports...
The achievements of Tateiwa Iwao's work in Korea are assessed as follows. Firstly, he pioneered the practice of stratigraphy in the Korean peninsula and completed geological maps of 21 sheets at 1:50,000 scale. Secondly, he published the results of a geological survey as bulletins, technical reports, and papers. Thirdly, he faithfully carried out the handover of assets and research outputs to Korea. Finally, after returning to Japan, Tateiwa wrote a book entitled The Korea-Japanese Tectonic Zone: History of a Geological Survey in Korea. However, he neglected to educate and train the next geologists for conducting geological surveys and exploration in Korea.
The achievements of Tateiwa Iwao's work in Korea are assessed as follows. Firstly, he pioneered the practice of stratigraphy in the Korean peninsula and completed geological maps of 21 sheets at 1:50,000 scale. Secondly, he published the results of a geological survey as bulletins, technical reports, and papers. Thirdly, he faithfully carried out the handover of assets and research outputs to Korea. Finally, after returning to Japan, Tateiwa wrote a book entitled The Korea-Japanese Tectonic Zone: History of a Geological Survey in Korea. However, he neglected to educate and train the next geologists for conducting geological surveys and exploration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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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1945년 5월에 들어서자, 다테이와는 일본 군국주의자 정부의 지령에 따라 비밀리에 조선 지질조사소를 노량진 청사보다 더 안전한 곳으로 이전시킬 계획을세웠다. 모두 한 곳으로 이전시키기에는 마땅한 건물이 없어 몇 개의 장소로 분산하여 옮기고자 하였다. 우선 본부를 서울 동북쪽 변두리 정릉에 있는 경성광산전문학교(해방이후 서울 공과대학)로 옮기고, 기존의 노량진 조선 지질조사소 청사는 하나의 분실로 남겨두고 점차로 원주의 감리교 교회당과 미곡창고 그리고 무극광산의 현장 사무소와 직원 숙소로 옮기기로 하였다.
제안 방법
그의 회고록 「나의 도중하차」(Tateiwa, 1994)에서의 행적으로 추정해보면, 1919년 8월 가을 검덕광산을 조사할 때에 개마고원을 처음 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이후 다테이와는 1920년부터 12년 동안에 걸쳐 함흥 지방의 지질 도폭 조사를 실시하면서, 수차례에 개마고원 지역을 조사하였으며 마그네사이트 광상조사 및 허천강 댐 건설후보지 물색을 위해서도 개마고원 연변부 등을 집중 조사하였다. 고토수, 황초령, 퇴수동, 부전령, 부전강, 허천강 및 장 진강, 남대천 및 북대천 유역, 합수, 백암, 서두수 등의 지역이 머물거나 거쳐 간 개마고원 지역이다.
주요 서술 내용으로는 총론과 조선시대와 그이전의 지질학적 이론, 조선 말기의 조사 연구로서 근대과학으로서의 지질학의 발달, 고토분지로의 지질 탐험 여행 및 그 전후의 조사 연구의 진전 등을 기재하였고, 조선 지질 조사 사업 개요와 활동, 광상 조사 시대의 지질 광상의 조사 연구, 기타 사례 연구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연료선광연구소 개설과 탄전 조사, 기타 과제에 관한 조사 연구, 한반도와 인접 대륙에서의 지각 변동과 현재 지형의 발달, 일본 열도의 지각 변동과 현재 지형의 발달-일본 열도 지질구조론고 등을 집대성하였다.
셋째, 그는 제3대 조선 지질조사소 소장으로서 지질조사소 위상을 높이고 지질 조사 및 자원 탐사 등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게 하였으며, 일본 패망에 따른 인수 인계를 직접 관여하여 한국인 관계자들에게 연구자료 및 자산 등을 충실히 인계하였다. 넷째, 그는 일본 복귀 이후에도 저술 활동을 지속하였고, 그간 수집한 한반도 시료 등을 기초로 하여 각종 논문 발표 등도 지속하였고, 역작인「조선-일본열도지대 지질구조논고 - 조선 지질조사연구사」를 저술하였다.
1924년도와 1929년에 걸쳐 다테이와는 연일, 구룡포, 조양 등 3개 도폭 및 왜관, 대구, 영천, 경주의 4개 도폭 등 1:5만 축척의 7개 도폭을 완성하였다(Table 1). 다테이와는 경상계 광대한 호수 분지의 하부 퇴적물 즉 낙동통과 신라통, 신라통과 호층을 이루는 염기성 안산암의 일군과 경상계 최상위를 점하는 산성 화성암의 일군(불국사층군)으로 파악하였다. 경상계의 하부 퇴적물은 비교적 안정된 시대를 보여주나 낙동통과 신라통의 두꺼운 퇴적층을 허용한 지반의 침강 운동이 있었음을 보인다고 기재하였다.
다테이와는 수 차례에 걸쳐 개마고원 지역에서 조사·탐사를 수행하였다.
훗날 일본 지질학회장 및 후카다지질연구소장 등도 역임한 바 있다. 대학 은퇴 후 후카다지질연구소장으로서 다테이와는 한반도에서의 지질 조사탐사 등의 경험을 기초로 하여, 한반도 지질학의 초기연구사인 「조선-일본열도 지대 지질구조논고 - 조선 지질조사연구사」를 저술하였다(Tateiwa, 1976). 이 책자는 양승영(1996)에 의해 번역 출간되어 국내에도 소개되었다.
그는 청년으로 한반도에 건너와서 조선 지질조사소에서 26년 넘게 몸담으면서, 지질 조사 및 도폭 완성에 정열을 쏟았다. 둘째, 지질 조사를 통해 얻은 다양한 암석 시료와 화석을 기재하고 이를 학술적으로 연구하여 보문 및 요보, 논문으로 발표하여 동시대 동료 및 후학들에게 좋은 참고 문헌을 남겼다. 셋째, 그는 제3대 조선 지질조사소 소장으로서 지질조사소 위상을 높이고 지질 조사 및 자원 탐사 등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게 하였으며, 일본 패망에 따른 인수 인계를 직접 관여하여 한국인 관계자들에게 연구자료 및 자산 등을 충실히 인계하였다.
이처럼 개화기에는 자원수탈 및 지질 정보 획득을 목적으로 열강들이 너도 나도 경쟁적으로 우리나라에서의 조사·탐사를 수행하였다.
이 책자는 양승영(1996)에 의해 번역 출간되어 국내에도 소개되었다. 주요 서술 내용으로는 총론과 조선시대와 그이전의 지질학적 이론, 조선 말기의 조사 연구로서 근대과학으로서의 지질학의 발달, 고토분지로의 지질 탐험 여행 및 그 전후의 조사 연구의 진전 등을 기재하였고, 조선 지질 조사 사업 개요와 활동, 광상 조사 시대의 지질 광상의 조사 연구, 기타 사례 연구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연료선광연구소 개설과 탄전 조사, 기타 과제에 관한 조사 연구, 한반도와 인접 대륙에서의 지각 변동과 현재 지형의 발달, 일본 열도의 지각 변동과 현재 지형의 발달-일본 열도 지질구조론고 등을 집대성하였다.
다테이와는 상부 고생대층을 일괄하여 고다이라(小平亮二)가 제안한 평안계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고, 시대불명의 중생대층으로 생각되던 두만강 연안의 점판암 층을 혼다(本田敬一) 등이 탄전조사 시 발견한 화석에 근거하여 평안계에 속하는 것으로 표기하였다. 평안계의 시대를 상부 석탄계에서 트라이아스기에 걸치는 것으로 하고, 중생대층에 대해서는 하부 대동계 또는 하부 쥐라기와 상부 대동계 또는 상부 쥐라기~백악기로 나누고 후자를 상부와 하부 경상계으로 나누었다. 경상계 시대를 상부 쥐라기~백악기로 한 것은 다테이와가 경상북도 왜관부근에서 발견한 식물 화석 연구에 근거한 것이었다.
대상 데이터
1943년에는 전시 광물 탐사와 개발을 급속하게 추진하기 위해 총독부 내에 긴급개발조사단이 설치되었고, 광무과, 지질조사소, 연료선광연구소 및 광업진흥주식회사의 협력으로 발족되었다. 그 당시 한반도에 거주하던 거의 모든 일본인 지질학자와 다수의 광산기술자 그리고 일본과 만주의 지질학자로 조직된 30여개의 조사반이 이 사업에 참가하였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전쟁 수행목적으로 인해, 조사 대상이 된 광물은 니켈, 코발트, 몰리브덴, 텅스텐, 각종 희유원소광물, 붕소광, 석면 등이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의 여러 지질 조사자원 탐사 과정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외국인 지질 자원 전문가는 제3대 조선 지질조사소장을 역임한 다테이와 이와오(立岩巖)라 할 수 있다. 그는 1894년에 일본 후쿠시마 현(福島縣) 고오리야마(郡山)시에서 태어나 1982년에 도쿄에서 작고하였다. 작고하기 전까지도 후카다 지질연구소(深田地質硏究所)에서 한반도에서의 활동과 일본 귀국 후의 지질 조사 등에 관해 지질학자로서 마지막까지 저술과 강연 등을 지속하였다.
다테이와는 일본 복귀 후에 도쿄에 본부를 둔 일본내 미군정청에서 조선 지질 정보 관련 업무를 얼마동안 지원하다가 고향인 후쿠시마(福島) 고오리야마(郡山)로 낙향하여 전후 고향의 경제 재건에 참여하였다. 얼마 후 구주대학에서 자리를 잡았다가 도쿄대학으로 옮겼다.
다테이와는 조선 지질조사소에 1919년 8월에 입소하였고, 그해 9월부터 함남 단천 검덕광산의 지질과 광상을 조사하게 되었다. 조사 주요 목적은 검덕광산의 경제적 가치와 개발 여건, 교통 등 인프라 상황의 판정 등이었다.
다테이와는 청년으로 조선 지질조사소에 입사하여 중년으로 일본으로 떠났다. 그가 일본을 위해 한반도 지질 조사·자원 탐사를 수행하는 기간이 26년이 넘는다.
이 단보는 다테이와의 회고록인「나의 중도하차」의 내용을 근간으로 한반도에서의 활동과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준비중인 연구원 100년사 초고 등을 참고하였다. 그리고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미래정책연구실 2015년도 주요사업(15-3419)의 일환으로 수행되었다.
그 당시 한반도에 거주하던 거의 모든 일본인 지질학자와 다수의 광산기술자 그리고 일본과 만주의 지질학자로 조직된 30여개의 조사반이 이 사업에 참가하였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전쟁 수행목적으로 인해, 조사 대상이 된 광물은 니켈, 코발트, 몰리브덴, 텅스텐, 각종 희유원소광물, 붕소광, 석면 등이었다.
조선 지질조사소 제1대 소장 무라타(村田)가 물러나고, 1919년말부터 가와사키(川崎繁太郞)가 제2대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그에 앞서 신입직원으로 다테이와가 야마나리와 함께 입소한 것은 1919년 8월이었다.
성능/효과
조사 주요 목적은 검덕광산의 경제적 가치와 개발 여건, 교통 등 인프라 상황의 판정 등이었다. 그러나 검덕광산 개발 타당성 여부에 대해서는 참여자 간의 이견으로 탐광 가치가 적은 것으로 결론을 냈었다. 사실상 검덕광산은 한반도의 동북부 지역인 함경남도 단천군 북두일면의 인적이 드문 산간벽지에 있었다.
자주적인 지질연구는 부득이 건국 준비와 민족 동란 등을 겪으며, 소강상태를 거쳐서, 10여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우리의 능력으로 한반도 지질도 전도 1장을 갱신할 수 있었을 뿐이다. 둘째, 조선 지질조사소의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둔 현장에서의 후학 양성에 매우 소홀하였다. 그는 지식 전수 보다는 허드렛일 정도만이 조선인 직원에게 할애하는 경영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지질 조사를 통해 얻은 다양한 암석 시료와 화석을 기재하고 이를 학술적으로 연구하여 보문 및 요보, 논문으로 발표하여 동시대 동료 및 후학들에게 좋은 참고 문헌을 남겼다. 셋째, 그는 제3대 조선 지질조사소 소장으로서 지질조사소 위상을 높이고 지질 조사 및 자원 탐사 등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게 하였으며, 일본 패망에 따른 인수 인계를 직접 관여하여 한국인 관계자들에게 연구자료 및 자산 등을 충실히 인계하였다. 넷째, 그는 일본 복귀 이후에도 저술 활동을 지속하였고, 그간 수집한 한반도 시료 등을 기초로 하여 각종 논문 발표 등도 지속하였고, 역작인「조선-일본열도지대 지질구조논고 - 조선 지질조사연구사」를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과실은 다음과 같이 언급할 수 있다. 첫째, 일본이 지속적으로 자기들의 강점기를 이어갈 것으로 여기고, 일본인 중심의 폐쇄적 지질조사소 운영 및 지질 조사 수행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땅의 원래 및 미래 주인에게로의 양도 관점보다는 착취의 관점에서 접근하였다고 볼 수 있다.
질의응답
핵심어
질문
논문에서 추출한 답변
광복 이후 과학 기술자에 대한 친일 논쟁은 어떠하였는가?
그러나 미군정 하에서 우리 지질 자원 분야도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 근본적인 친일 척결보다는 일본인들로부터 조사·탐사 자료나 연구소 자산을 인계받기에 급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때에도, 과학 기술자는 일본의 한반도 강점을 위한 행정 관리 분야 고위직에 몸담은 경우를 제외한 순수한 학술적 활동을 수행한 경우에는 친일 논쟁에서 다소 벗어나 있었다. 그러한 선진 문물을 습득한 선각자적 과학 기술자들이 광복 이후의 조국 건설에 숨은 공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제3대 조선 지질조사소장은?
하지만, 일제 강점기의 여러 지질 조사자원 탐사 과정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외국인 지질 자원 전문가는 제3대 조선 지질조사소장을 역임한 다테이와 이와오(立岩巖)라 할 수 있다. 그는 1894년에 일본 후쿠시마 현(福島縣) 고오리야마(郡山)시에서 태어나 1982년에 도쿄에서 작고하였다.
다른 지질학자와 다르게 다테이와 이와오가 갖는 학문적 의의는 무엇인가?
상기 조선 지질조사연구사는 「한반도 지질학의 초기 연구사」로 우리말 번역된 바 있다(Yang, 1996). 다테이와는 다른 외국인 지질학자들과는 달리 체계적이고 거시적 관점에서 우리 한반도의 지질 연구의 기본 및 근간을 설정하려는 노력을 보여준 것이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동경제국대학 지질학과 졸업 직후에 지도 교수의 권유로 1919년도에 입국하였고, 조선 지질조사소 정직원 지질기사로서 개마고원 등의 지질 답사를 중점 수행하였으며, 26년 정도의 한반도 체류 기간 동안에 1:5만 축척의 지질 도폭 21매 작성, 각종 화석 기재 및 일부 층서 정립 등에 관여하였다.
참고문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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